천년의 그림여행 - 양장본
스테파노 추피 지음, 이화진.서현주.주은정 옮김 / 예경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집안이 이래저래 어설프다.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책을 정리하던 딸아이가 화집 한 권을 들춰보인다. 시대별로 짜깁기한 서양 그림책이다.

  "<시녀들>에서 화가가 그리는 초상화는 공주가 아니라 왕 아니에요?"

  뜬금없는 질문에 무슨 소린가 싶다. 말인즉슨,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작품 <시녀들>에 관한 화집의 설명이 그 그림을 직접 보고 온 엄마의 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워낙 중의적인 감각이 내포된 그림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딸이 보던 화집을 같이 들여다본다. 과연 화집 설명만으로 유추하자면 그림 속에 직접 등장하는 벨라스케스가 캔버스에 붓질하는 대상이 공주 마르가리타의 뒷모습일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해설자가 잠시 착각했을 수도 있겠다고 딸아이에게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전면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당연 마르가리타 공주이다.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4세의 첫 아이인 금발머리 소녀는 흰 드레스로 한껏 치장한 채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다소 과장된 듯한 시녀들의호위 속에 오른쪽의 난쟁이 부녀가 관람자의 시선을 강렬하게 붙잡는다. 왕궁 안 어릿광대인 난쟁이는 오늘 만큼은 졸음에 겨운 개 등짝을 후려차도 좋다. 마음껏 귀족 흉내를 내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개를 살짝 돌린 공주의 기품있는 미소는 온전히 국왕부부를 위한 것이다. 그 환한 공주의 재롱을 보며 국왕부부는 궁정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리는 초상화의 모델이 되고 있는 중이다, 궁정 오후의 망중한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결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펠리페4세 국왕부처의 존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 그림 속에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유추는 불가능하다. 아니, 화가 벨라스케스만 등장했다 해서 섣불리 그러한 결론에 디다를 수는 없다. 이 그림의 관전 키포인트는 왼쪽 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캔버스와 붓을 든 벨라스케스의 모습이다. 화면을 압도하는 세로의 긴 캔버스는 뒷면만 보여준다. 따라서 그 캔버스 속에 작업하고 있는 화가의 모델은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 때 관전자의 눈이 놓치지 않아야 할 소도구가 있으니 바로 뒷면에 등장하는 벽면의 거울이다. 원경의 거울 속에는 합스부르크 왕가 특유의 긴 얼굴과 주걱턱을 가진 국왕이 왕비와 함께 희미하게 비치는 것이다. 이 상황까지를 이해한다면 감춰진 캔버스 속 화가가 그리는 대상은 결코 공주나 시녀가 아닌 국왕 부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중 삼중의 액자소설이 이보다 더한 흥미를 가져다줄 것인가. 스페인 여행 당시 프라도 미술관의 보물이라는 이 그림을 보면서 느낀 감흥은 화가 벨라스케스의 예기치 못한 위트와 사물을 보는 세련된 전복의 유희에 박수를 치는 정도였다. 하지만 집에서 들여다보는 그림 속에서 또 다른 벨라스케스의 스승을 발견하는 기쁨까지 누린다. 17세기의 <시녀들>이 풍기는 이 소설적 기지는 이미 한 두세기를 앞선 르네상스 미술에서  시도되었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아르놀피니 초상화'에서 이미 화가 자신을 회화 속에 등장시키는 매력적인 작업을 했던 것이다. 의뢰인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배경인 볼록 거울 속에 자신과 조수인 듯한 두 사람을 그려넣었던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 약혼식일지도 모를 아르놀피니의 숨길 수 없는 증거자가 되기로 작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은유적 유머에 만족하지 않고 반 에이크는 볼록 거울 위에다 '얀 반 에이크, 여기에 있다!' 라는 과감한 흔적까지 넣었다. 이보다 더한 엔도르핀 솟구치는 소설이 있을까!

  일찍이 이 그림을 풍문으로라도 접한 벨라스케스는 자신만의 진화를 더해 시녀들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궁정화가의 자리는 그러한 자신의 작업에 날개를 달 수 있는 필요충분이 되었던 것이다.

  '공주의 등을 그리려한다는 화집 해설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내 말에 딸아이의 수긍을 받아내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 편의 명화 속에 정신과 육체가 살아 숨쉬는 화가들을 발견하는  자체야말로  흥미롭고 경이로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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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9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06-11-29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30분 귓속말님) 이런 실수! 고쳤어요. 'ㅈ'이 은근히 외로웠겠어요.^^* 네. 중3 딸내미가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