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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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책이 소개되는 것을 보았다. 당장 구입했다. 이런 책 발견하면 마치 살얼음 낀 동치미 맛이 혀끝을 지나 빠른 시간에 뇌로 전달되는 기분이다. 패널이자 저자인 김상봉 교수는 한국 사회의 일보전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로 도덕교육을 꼽는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국정 교과서인 도덕 과목은 낡은 노예적 가치관을 주입시키는 선봉에 서 있다. 이 테크놀러지의 첨단을 향유하는 현대인에게 개인의 자발적 선택을 무시한 채 전통과 질서의 옷자락만 부여잡으라고 설교하는 측면에서는 일리있는 주장이다.

  딸 아이 때문에 자연스레 접한 중학교 도덕 교과서(중 1 기준)는 거의 반이 '예절'에 할애되어 있다. 저자의 비판처럼 우리의 예절교육은 약자가 강자에게 바치는 일방적인 헌사를 의미한다. 진정한 예절은 상호 호환성에 있지 않았던가. 예절에 대한 강자의 그 어떤 역할도 약자만큼 구체성과 강제성이 따르지는 않는다. 제도권의 이러한 지속적이고고 뭉근한 교육의 힘(?)은 약자에게 근거 없는 주눅과 스트레스라는 원하지 않는 선물을 안기고야 만다.

  일례로 우리의 도덕 교육에 따르자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른에게 먼저 인사하지 않는다는 같잖은 이유만으로도 어린아이는 졸지에 버릇없는 자, 가정 교육이 엉망인 자가 되기 십상이다. 공자가 강조하는 예의 본질이 인간 심성의 참된 교류에 있지 결코 위계질서의 선후를 따지는 치졸함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도덕 교육은 나아가 여성을 보는 시각조차 편벽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도덕 교과서에는 여자가 결혼을 하면 시댁의 어린 여자에게는 '아가씨', 자신보다 어린 미혼 남자에게는 '도련님', 기혼인 남자에게는 '아주버님'과 '서방님'으로 부르라고 친절하게도 가르쳐주고 있다. 사회 통념적으로 학습되어 익히 알고 있는(하지만 분명 개선할 여지가 있는) 이런 호칭 교육이 도덕 교과서에까지 오르는 것은 아무리 봐도 시대착오적이고 비생산적이다.  호칭대로라면 아무리 귀하게 자란 여성도 결혼만 하면 시가의 하녀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호칭의 뉘앙스로만 봐도 아가씨, 도련님과 새언니, 형수님을 맞바꾸기에는 어딘가 격이 맞지 않다. 굴욕감과 노예근성을 주입시키는 이러한 교과서을 단지 시험이라는 통과의례 때문에 투덜대며(혹은 개념없이) 외워야 하는 디지털 세대의 선봉에 선 딸들이 가엾다.

  유교문화와 일제 강점기도 모자라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우리의 노예도덕은 더 깊은 뿌리를 내렸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도덕 교과서의이러한 파시즘적 이데올로기는 분명 문제제기 되어야 마땅하다. 한데도 가부장적인 질서와 사고에 익숙해진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노에 교육의 전면에 서 있는지조차도 자각하지 못한다.(않는다!)  여성들에게 극히 제한된 무대가 되고 있는 저 높은 영역에 다다른 여성들이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히려 그 소수의 클레오파트라들마저도 '명예남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다.

  왜? 축적된 체험을 통해 그들은 더 이상 여성들은 역사의 주인공도, 사회의 진정한 주체도 될 수 없음을 항복하듯이 순순히 인정해버리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당연 남근주의 리무진에 합승하는 일이다. (얼마 전 김규항을 읽으면서도 이런 클레오파트라적 페미니즘(내 식 언어조합)을 비판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 때문에 욕 많이 얻어 먹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그 생각 때문이 아니라 몇몇 문구 때문에 반발심을 사지 않았을까 싶다.) 

  명예남자를 자처하는 극히 제한된 여성들은 자신이 여성임을 그야말로 무의식적으로 부정한다. 여성성을 버리고 싶은 자아는 뭇 남성들이 그러하듯 함바집 여주인은 작부와 동일시해도 무방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는 진한 농지거리를 자초한다고 단정지어버린다.  차라리 하층민 여성들이 남성들을 위한 인간 정수기 역할 쯤을 해주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폭로하는 김기덕류의 영화처럼 솔직해지던지.

  자신도 한 때 억압받은 여자였음을 아니, 현재도 그러하다는 것을 잊은 채 남성적 코드로 세상을 읽는 '그미들'이 이 책을 우선적으로 읽었으면 좋겠다. (실은 여성성의 자각에 대해서 이 책이 직접적이고도 노골적으로 선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다.  아마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도덕 전반에 관한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파헤치는 장면 장면을 볼 때마다 내 여성적 자각이 꿈틀댔음을 고백해야겠다.)

  잘못된 도덕 교육으로 여성의 욕망은 어디까지나 내밀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욕망의 주체는 언제나 남성의 것이라고 면죄부까지 쥐어주었다. 여성의 온당한 주체성보다는 모성의 희생이야말로 진정한 여성성이라고 교묘하게 왜곡하는 현실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우리의 오래된 관습적, 교과서적 여성 교육에 그 혐의가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여성이 더 이상 기득권 사회의 억압이나, 남성의 육체적 환타지 대상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여성 스스로가 바랄 때 여성의 위상은 그나마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명예남자들이 더 인식할 때!  - 그들이 진정 남성적, 보수적 프리즘을 벗어던지고 아직은 약자인 여자의 입장에서 자매애와 동지애를 발휘할 때에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 쓰고 보니  '도덕 교육의 파시즘' 의 폐해 중 너무 여성 문제에 집착한 것 같다.  아무래도  피해의식이 남아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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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01-20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글 참 잘 쓰지 않아요? 전 이 사람이 쓴 "학벌사회" 를 읽었는데 그 논리 전개에 감탄했답니다 이 책도 보관함에 넣어야겠네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다크아이즈 2007-01-20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덕에 저도 '학벌사회' 찜합니다. 기억이 가물하긴 한데 화면에 비친 모습도 신뢰감이 가더군요.

2007-02-10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07-02-11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님과 같은 생각을 하신 분들이 현장을 접수하는 날을 기대해봅니다. 멀고 먼 얘기겠지요? 맞아요. 1학년은 예절교육, 2학년은 국가주의. 허헛! 딸내미 교과서보고 기절하고 싶더군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김상봉식 생각을 전혀 고려할 마음조차 없는 '교육계의 기득권'이 문제지요.
즐찾에 님 서재 달랑 훔쳐다놓기만 했는데 이렇게 용기를 주시니 '생각 키우기' 내공에 더욱 힘쓸게요. 감사^^*
 
글쓰기의 공중부양
이외수 지음 / 동방미디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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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고를 때 그런 경우가 있다. 돈 주고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고 보기는 아깝지만 호기심 때문에 읽지 않을 수는 없는 책.  이외수 선생에게는 무례한 짓거리가 되겠지만 이 책이 내겐 그런 종류였다.  참고로 나는 이외수 선생의 소설을 무척 좋아하고 그의 모든 책을 신뢰한다.  마니아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젊은 시절 소설 읽기를 시작할 때 감성적인 부분의 대가 두 사람을 꼽으라면 한수산과 이외수를 치곤 했다. 한수산의 감성은 한없이 여리고 아름다웠고, 이외수의 감성은 연민이 묻어나면서도 풍자를 잊지 않았다. 물론, 한수산을 잊을 때쯤에도 이외수는 내게 살아 남았다. 온전히 그의 감성적 문체 때문이었다.

  그의 감성은 문장마다 살아 있되, 싸구려가 아니었고, 그의 문체는 물방울처럼 튀어오르되, 흙탕물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군대 간(6개월 군인도 군인이다!) 오라버니가 말년에 무료함을 달래며 사서 읽다가 남겨온 책이 '꿈꾸는 식물'이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고급한 감성적 문체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구나, 싶어 화들짝 놀란 기억이 난다.  (정말이지 싸구려 감성도 역겨운데 거기다가 비문으로 점철된 문장을 쓰는 작가들이 하 얼마던고.)

  서론이 길었다. 어쨌든 그가 개설한 공중부양 강좌의 청강생이 될 기회가 주어졌다. 누군가 가지고 있던 책을 빌릴 수 있었는데 내 판단이 맞다 싶었다.  독자로서 모든 챕터가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내게는 3부 창작의 장이 현실감 있게 와 닿았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살아있는 인물을 소설로 만드는 과정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훈장, 개미귀신, 고수 등 오래된 그의 작품을 단편적으로나마 다시 접하니 숨죽어가던  감성이 새벽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작가가 가르쳐준대로 실천만 한다면  끝내 미유기를 소금구이하는 여자(책을 읽어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된다. 책도 사지 않은 주제에 스포일러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가 등장하는 소설 한 편은 쓰게 되지 않을까.  굳이 싱거운 스포일러가 되자면, 글쓰기의  공중부양은 부단한 노력 끝에 나온다고 작가는 거듭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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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1-1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유기를 안 갈쳐주시니 궁금증만 *.*
결국 사서 읽어봐야 한다는 거죠? 그래도 살짝 갈쳐 주세용요용용용

다크아이즈 2007-01-1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부지런한 여우님. 오랜만이에요. 미유기 별 거 없어요. 이렇게라도 책 안 산 미안함을 덜어보려고...
 
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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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많이 불온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일개 독자로서 충분히 불편하고 부끄럽기를 바랐다. 소나기 속으로 뛰어든  미친년처럼 그의 '불온한' 장대비를 흠뻑 맞았다.  다 읽고 난 지금 독자로서 충분히 불편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그가 전혀 불온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좀 더 불온해도 좋았을 것을.  불온하다고  고백하는 그의 위악은 되려 온건이 지나쳐 따뜻하기까지 하다. 그는 예리한 칼날을 제 주먹껏 움켜쥐고 세상을 향해 디민다.  예상대로라면 그의 손과 세상 사람들 - 많이 가진 자, 조금 덜 가진 자를 말한다. 물론 아주 적게 가진 자나 못 가진자는 제외 - 의 어깨뼈 어디쯤에 핏물이 스쳐야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스한 칼날로 벼린 그의 글은 필연적으로 그가 전혀 불온할 조짐조차 없음을 반증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가진 자들에게 성찰과 반성을 친구 삼게 만들거나 요구하는 것이 어찌 불온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좀 더 불온해지더라도 나는 그를 따뜻한 온건주의자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강준만을 읽으면서도, 진중권을 스치면서도, 혹은 고종석을 거치면서도 잘 이해되지 않던 계급적, 혹은 정치적 용어들을 어렴풋이나마 정리할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수고 덕이다.  예를 들면 '개혁'과 '진보'가 엄청나게 다른 개념이라는 것과, '자본주의'보다  '신자유주의' 가 더 무지막지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은 것. 어디 가서 내 무식이 탄로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이다.

  쉽게 쓰려는 방식은 고종석과 닮았다, (아마 둘 다 이오덕 선생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그 유연한 대처 방식에서는 고종석이 한 발 더 나아간 듯하다.)  강준만의 대책없는 아집을 넘어서고, 시니컬과 독설이 진중권에 못미치는 것에서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된다.  체험의 물살에서 길어내는 그의 언어가 근본적으로 휴머니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 수정해야겠다. 여기서 '체험의 물살' 운운하는 건 그의 가정사가 등장하는 장면, 특히 딸과의 관계를 훔쳐볼 때에 더 해당하는 말이다.

  어느 존경받는 진보적 인사가 정작 제 식구들, 특히 제 딸에게서 전혀 존경받지 못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저렇게 훌륭한 아버지를 왜 존경하지 않는 걸까?' 얼마가 지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흔히 짐작하듯(그리고 그런 인사들의 가장 편리한 면죄부인) '세상에 헌신하느라 가족에게 소홀해서'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실은 매우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딸은 단지 딸아들 하는 자식 중의 하나가 아니다. 딸은 한 남자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장 정교하게 알아낼 수 있는(폭로하는) '삶의 시험지'다. 한 남자가 '딸에게서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더 근사해질 것이다.  (175쪽)

  흔히들 '운동'을 했다(한다)하면 가정과 신념을 분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혹은 용서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가 미더운 것은  아동인권, 여성문제(기득권 남성과 똑 같은 권력을 얻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그의 칼날은 단호하다. 이미 기득권 남성이 되어버린 여성 권력들을 나 또한 혐오한다. 그들은 그들의 여성성을 자각하지 않으며  소수자 여성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혹 주게 되더라도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의 기득권만은 포기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의 몇몇 문구에 무척 거부감이 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소수인 약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그의 애정이 상대적으로 넘친다는 걸 알기에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인간으로서의 예수, 생태 문제를 일관성 있게 자분거려주기 때문이다. 그것도 알아먹기 쉽도록.

  스스로 나는 E급 좌파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 한갖 보수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다.  보수에는 개혁과 수구가 있을지 모르지만 제 아무리 개혁을 외치는 자라도  김규항 같은 좌파에게는 '씨팔'  '좆같이'  - 이 두 욕은 그의 귀여운 딸 김단이도 쓴다! -  똑 같은 보수에 지나지 않으므로.

  각설하고, 그가 발행한다는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구미가 확 당긴다. 내 아들 딸이 아니라 내가!  또, 어디선가 인터뷰한 것을 봤는데 '예수전'을 기획하고 있다는데  그 책이 나오면 빠른 독자가 되고 말리라. 미사 시간에 강론은 듣지 않고 성서 읽기에 골몰하는 나로서는 당근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궁굼치 않겠는가. 

  참, '좋은 글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251쪽)는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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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1-18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불.편 하신건 맞군요^^
땡스투는 당연히 못 해드립니다. 저도 이미 사서 읽어버렸으니^^
대신에 추천만 살포시.

2007-01-18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07-01-1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파란여우님, 정말이지 불편하고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E급 좌파도 못 되는 제게 달라질 건 없다는 거죠.
* 속삭인 님, 꼭 리뷰 써줘요. 김규항이 말했잖아요. '칼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제 멋대로 해석!) 글이야말로 좋은 글인 걸요. 그에게도 반성(?)할 기회를 줘야 하는데 죄다 뻑 가는 리뷰만 올린다면 그는 계속해서 골방에서 이런 글만 올릴걸요. 그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니랍니다. '칼맞지' 않으니까 신선한 님의 생각 던져 주세요.

마법천자문 2007-01-2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A+급 좌파인 저의 어깨가 무거워지는군요.(에구에구~ 돌 날라온다~~~)

다크아이즈 2007-01-2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애리님 센스 만점! 근데 불멸의 나애리랑 A+급 좌파랑 어울리는 조합인가? 헤헤~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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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오스터를 만나러 가는 길은 망설임의 연속이었다.   팬 혹은 매니아층을  다수 확보한 작가일수록 그간 나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입소문이 무성하던 무라카미 하루키에 입문할 때처럼 폴 오스터도 뭔가 찜찜함을 가져다주는 작가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어쨌거나 <빵 굽는 타자기>를 비롯해 <신탁의 밤>을 거쳐 <달의 궁전>까지 세 권을 주문했다.  엄격하게 말하면 달의 궁전과 신탁의 밤은 공공을 위한 책이고, 빵 굽는 타자기는 나만을 위한 책이다.  한 모임에서 전자 두 권을 원했기 때문에 공금으로 샀는데 산 김에 먼저 읽어 버렸다. 후자는 내가 원하던 나만의 책이기에 느긋하게 읽어도 좋다.  두 권을 읽은 결론? 찜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나 당신 팬이 되었소' 할 정도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오스터는  내게 강렬한 파장을 남긴다.  천상 이야기꾼에다 타고난 글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으므로.

  우연의 남발과 꿰맞춘듯한 구성은 황당무계함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를 갖춘 헐리웃 액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몰입하게 되는 이유는 기본기를 갖춘 문장력과 묘사력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타고난 글쟁이로서의 길을 선택했지, 고매한 예술가를 원한 것 같지는 않다.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소설가로서 그가 이해된다는 뜻이다.

  오호통재라!  세상에 이 소설을 삼부작으로 봤을 때, 차라리 나머지 두 뒷 부분은 없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주인공 포그와 빅터 삼촌과 짐머 그리고 더러 등장하는 키티까지만 있는 이야기가 더 소설답다. 나머지는 내 식으로 봤을 때 사족이다.  작위로 범벅이 된 토마스 에핑과 솔로몬 바버를 위한 액자는 영화 시나리오를 의식한 것 같은 억지처럼 눈길이 덜 간다.

  폭우 속에 내동댕이 친 빅터 삼촌의 클라리넷,  그 삼촌이 남긴 유품인 천 권의 책더미로 만든 침대 받침, 그것을 빼내어 생계 수단을 삼는 포그,  살아 있는 헌 책방 영감에 관한 묘사... 포그편(내 임의로 포그, 에핑, 바버  삼부로 나누었을 때) 만으로도 이토록 날 것이 가득한데 더 이상 무엇을 욕심낸단 말인가.  에핑과 바버에 관한 부분에선 과도한 허세가 우연의 장광설이란 다리를 넘은 것 같아 아쉽다. 

  그럼에도 그가 훌륭한 작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음과 같은 통찰이 빛나는 감식안 때문이다. 섬뜩할 정도로!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여, '묘사의 섬세함'과 '문장의 조화'를 공부하고 싶은가? 폴 오스터를 읽어라.

  그런데 이제는 내가 곤경에 빠진 만큼, 짐머는 어쩌면 그것을 자기가 우위를 점하기 위한 기회, 즉 우리의 우정에서 내면적 균형을 이루기 위한 기회를 보았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어느 정도 우월감이 배어 있었다. 또 그가 나를 조롱하는 데서 즐거움을 끌어낸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129쪽 ~ 130쪽)    -   포그에 대한 짐머의 호의 장면.  순수한 우정 속에 숨어 있을 인간 내면의 심통을 이처럼 통찰할 수 있는 작가를 만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외에도 밑줄 그을 명장면은 수도 없이 많다.  애석하게도 지금 내 손엔 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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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01-2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력, 참 좋죠? 타고난 이야기꾼이예요 전 이 사람 보면서 자꾸 이문열이 생각났답니다 건 그렇고... 전 에핑이 사막의 동굴에서 책 읽고 그림 그리면서 사는 삶이 그렇게 인상적일 수가 없었어요 바버도 그렇고 포그도 그렇지만 이 삼대의 인물들은 모두 책을 도피처로 삼고 나중에는 그 안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완성하잖아요 "환상의 책" 보셨어요? 거기서도 헐리우드 배우였다가 부둣가 노동자로 전락한 헥터만이 뉴욕 공공 도서관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점을 생생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제가 폴 오스터를 좋아해요^^
 
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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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술문제집 제시문 중 하나로 이 책의 일부가 인용된 걸 보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은 학생들이 있을까 싶다. 아니, 이 책을 제대로 읽은 논술 선생들이 있을까 싶다. 설사 누군가 필독서 목록에 올려놓은 걸 보고 읽기를 시도했더라도 중도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학생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난해하고, 선생들이 읽기엔 어처구니 없이 생뚱맞다.  이유?  오로지 오역 또는 무성의한 번역에 있다고 본다.

 

  일개 평범한 독자에 지나지 않아서 불어원본이나 영역본을 들이밀며 논리정연하게 질의할 수 없는 게 안타깝지만 적어도 고등학생용 논술 제시문으로 활용할 정도의 번역서는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내 힘없는 분노는 번역자를 겨냥한 것 못지않게, 제시문으로 활용한 문제 제출자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전공자나 인문학자를 위한 번역이라면 그들은 적어도 원본 또는 영역본 정도는 끼고 텍스트를 대할 것이기에 오역이나 비문이 나와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우리의 번역 풍토를 잘 아는 고급 독자들이 번역자들에게 거는 기대가 때로는 포기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문화의 다양성과 거기서 야기되는 제 문제점에 관한  논술문 쓰기인데  <문명의 충돌>, <문화의 패턴>등의 책을 인용한 다른 제시문은 고등학생이 독해하는데 그리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한데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세심하게 보살피지 않고 제시문으로 활용한 것은 넌센스다. 꼭 따와야 했다면 그래도 덜 오역되거나 비문이 덜한 부분을 택해(그런 부분이 있을까?)  학생들이 명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이 말이다.

 

  개인의 문화적 취향과 사회적 위치(계급)와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 부분을 인용한 것 같은데, 문자 자체에 대한 번역에 내몰린 탓에 깔끔하지 않다. 이런 부주의한 제시문을 고등학생들이 단 몇 분만에 읽고 이해하고, 자신의 견해까지 선명하게(!) 쓰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번역자여, 이해하시라. 정말이지 이 글은 제시문으로 활용한 문제 제출자에 대한 분노가 더 크다!) 이어령이 말했던가? 각 대학에서 뿌린 모의 논술 문제를 보고 글쓰기 전문가인 자신도 손대지  못할 정도였다고.

 

  실제로 현실이나 허구와 관계를 맺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허구와 이들 허구가 빚어내는 현실을 믿게 되는 다양한 방식은 각 방식의 전제조건을 이루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매개로 사회 공간에서 각 요소들이 차지하는 여러 위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각 계급과 계급분파마다 특이하게 나타나는 성향의 체계(아비투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취향은 구분하고,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 (중략, 페이지 생략)

  양과 질, 화려하게 꾸민 식사와 격의없는 식사, 실내용물과 형식간의 대립은 필수품에 대한 기호, 즉 가장 '영양가가 많으며' 가장 경제적인(즉 값이 싼) 식품을 선호하기 마련인 기호와 자유소비재 또는 사치품에 대한 기호 즉 매너(요리를 내놓는 방식, 서비스 방식, 식사법 등)를 강조하고 기능을 부정하고 양식화된 형식을 선화하는 취향 간의 대립과 상응하며, 생활필수품으로부터의 다양한 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페이지 생략)

 

  두 어 단락만 옮겨보았다.  '취향은 구분하고,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니? 원문없인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 ... 기능을 부정하고 양식화된 형식을 선호하는 취향간의 대립과 상응하며, 생필품으로부터의 다양한 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니!  이런 불분명한 어휘 구조를 어떻게 순수한 학생들더러 이해하라는 것인지?  물론, 조금 깊이 생각하면 단락 간의 의미 연결을 통해 주제문을 유추해낼 수는 있다.  하지만 고문 수준의 제시문을 통해 학생들의 인내심을 단련하는 것이 논술 시험이 아니라면 이런 것은 마땅히 피해야 하지 않을까.

 

  번역의 질에 상관없이 저자의 유명세만 보고 제시문으로 따오는 일,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민다. 이것이 일개 연습 문제니까 덜 하지만, 실제 시험 현장에서도 없다고는 단정짓지 못할 것이다.  불분명한 제시문(오역 또는 무성의한 번역으로 인한)을 접하고서도 자신의 독해력을 탓하지, 출제자의 무성의를 탓하지는 않을 순진한 학생들 보면 괜히 내가 미안해진다.

 

  제발 논술 출제자 여러분,  번역서에서 제시문 활용할 때 선명하고 오해없는 텍스트를 활용해주소서. 그리고 자신들 교양에 잣대를 맞추지 말고 평균적 고등학생 교양을 갖춘 학생들이 해독할 수 있는 텍스트를 선정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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