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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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술문제집 제시문 중 하나로 이 책의 일부가 인용된 걸 보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은 학생들이 있을까 싶다. 아니, 이 책을 제대로 읽은 논술 선생들이 있을까 싶다. 설사 누군가 필독서 목록에 올려놓은 걸 보고 읽기를 시도했더라도 중도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학생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난해하고, 선생들이 읽기엔 어처구니 없이 생뚱맞다.  이유?  오로지 오역 또는 무성의한 번역에 있다고 본다.

 

  일개 평범한 독자에 지나지 않아서 불어원본이나 영역본을 들이밀며 논리정연하게 질의할 수 없는 게 안타깝지만 적어도 고등학생용 논술 제시문으로 활용할 정도의 번역서는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내 힘없는 분노는 번역자를 겨냥한 것 못지않게, 제시문으로 활용한 문제 제출자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전공자나 인문학자를 위한 번역이라면 그들은 적어도 원본 또는 영역본 정도는 끼고 텍스트를 대할 것이기에 오역이나 비문이 나와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우리의 번역 풍토를 잘 아는 고급 독자들이 번역자들에게 거는 기대가 때로는 포기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문화의 다양성과 거기서 야기되는 제 문제점에 관한  논술문 쓰기인데  <문명의 충돌>, <문화의 패턴>등의 책을 인용한 다른 제시문은 고등학생이 독해하는데 그리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한데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세심하게 보살피지 않고 제시문으로 활용한 것은 넌센스다. 꼭 따와야 했다면 그래도 덜 오역되거나 비문이 덜한 부분을 택해(그런 부분이 있을까?)  학생들이 명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이 말이다.

 

  개인의 문화적 취향과 사회적 위치(계급)와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 부분을 인용한 것 같은데, 문자 자체에 대한 번역에 내몰린 탓에 깔끔하지 않다. 이런 부주의한 제시문을 고등학생들이 단 몇 분만에 읽고 이해하고, 자신의 견해까지 선명하게(!) 쓰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번역자여, 이해하시라. 정말이지 이 글은 제시문으로 활용한 문제 제출자에 대한 분노가 더 크다!) 이어령이 말했던가? 각 대학에서 뿌린 모의 논술 문제를 보고 글쓰기 전문가인 자신도 손대지  못할 정도였다고.

 

  실제로 현실이나 허구와 관계를 맺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허구와 이들 허구가 빚어내는 현실을 믿게 되는 다양한 방식은 각 방식의 전제조건을 이루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매개로 사회 공간에서 각 요소들이 차지하는 여러 위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각 계급과 계급분파마다 특이하게 나타나는 성향의 체계(아비투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취향은 구분하고,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 (중략, 페이지 생략)

  양과 질, 화려하게 꾸민 식사와 격의없는 식사, 실내용물과 형식간의 대립은 필수품에 대한 기호, 즉 가장 '영양가가 많으며' 가장 경제적인(즉 값이 싼) 식품을 선호하기 마련인 기호와 자유소비재 또는 사치품에 대한 기호 즉 매너(요리를 내놓는 방식, 서비스 방식, 식사법 등)를 강조하고 기능을 부정하고 양식화된 형식을 선화하는 취향 간의 대립과 상응하며, 생활필수품으로부터의 다양한 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페이지 생략)

 

  두 어 단락만 옮겨보았다.  '취향은 구분하고,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니? 원문없인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 ... 기능을 부정하고 양식화된 형식을 선호하는 취향간의 대립과 상응하며, 생필품으로부터의 다양한 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니!  이런 불분명한 어휘 구조를 어떻게 순수한 학생들더러 이해하라는 것인지?  물론, 조금 깊이 생각하면 단락 간의 의미 연결을 통해 주제문을 유추해낼 수는 있다.  하지만 고문 수준의 제시문을 통해 학생들의 인내심을 단련하는 것이 논술 시험이 아니라면 이런 것은 마땅히 피해야 하지 않을까.

 

  번역의 질에 상관없이 저자의 유명세만 보고 제시문으로 따오는 일,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민다. 이것이 일개 연습 문제니까 덜 하지만, 실제 시험 현장에서도 없다고는 단정짓지 못할 것이다.  불분명한 제시문(오역 또는 무성의한 번역으로 인한)을 접하고서도 자신의 독해력을 탓하지, 출제자의 무성의를 탓하지는 않을 순진한 학생들 보면 괜히 내가 미안해진다.

 

  제발 논술 출제자 여러분,  번역서에서 제시문 활용할 때 선명하고 오해없는 텍스트를 활용해주소서. 그리고 자신들 교양에 잣대를 맞추지 말고 평균적 고등학생 교양을 갖춘 학생들이 해독할 수 있는 텍스트를 선정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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