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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왜 이리 잘 쓰는 작가들이 많을까. 하고 싶은 얘기들은 잘나가는 작가들이 선점해 버렸다는 부러움만이 나의 몫. 그럼에도 쓸 수밖에 없는 날들이 부끄러워지는. 저릿한 풍경 속에 아릿한 상처의 회고전이 펼쳐지누나.
균열된 진실 앞에서 자책하는 자아 -구멍
코요테의 울음소리에 견주는, 파국을 맞고 말 존재에 대한 연민과 삶에 대한 성찰 - 코요테,
중년 부부의 간극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아술 - 아술,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파고, 함부로의 잣대로 측정할 수 없는, 변명 이전의 존재 증명에 관한 이야기, 타인은 이해할 수 없고 모르는(몰라야 하는) 삶의 한 부분, 이 자체가 삶이 되어야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이야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망나니짓을 한 형 주변에 함께 하던 나, 직접적 가담이 아니라고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강가의 개들 무리에서 나는 무죄한가. 과연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내면을 건드리는 자책의 울림 - 강가의 개
이질적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무모함이 주던 아찔하고 아련한 청춘의 외출 회고 -외출
누구보다 소통을 원하지만 소통할 수 없는(그렇지만 소통하고 해야하는) 존재들의 향연, 먹먹하고 따스한 이야기 - 머킨
가족의 기원과 현재, 아버지(엄마) 부재에서 오는 불협화음이자 가꾸기 힘든 씨앗 같은 버겁고 슬픈 가족상 - 폭풍우
무거운 아픔이 아주 가까이 예견 된지도 모른 채 꿈결처럼 터치해보는 신혼의 꿈 - 피부
레즈비언 엄마를 목도한 열세 살 소년의 저릿한 관찰기,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가슴으로 와 닿던 그 시절의 비밀 한두 개는 누구에게나 있다. -코네티컷
<간단 줄거리>
<구멍> 버지니아에 살던 어린 시절, 이웃 친구 탈이 맨홀에 빠져 죽은 일을 회상. 깍은 잔디 봉지를 맨홀에 빠뜨려 (호기심도 발동) 그 속에 들어가기 위해 나의 만류에도 탈은 사다리를 내려간다. 펜실베니아로 이사 후, 십 년 뒤 탈의 형에게서 그날의 진실을 알고 싶다고 편지가 온다. 답장을 썼지만 나는 보내지 못한다. 탈을 구하려다 소방관 두 명도 죽었다. 탈의 부모님은 장례식장에서도 내게 별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때 말을 걸어왔다면 진실을 말할 수 있었을까. 내 꿈속에서 잔디 봉지를 빠뜨린 건 탈이 아니라 나다. 어떤 때는 내가 녀석을 밀어 넣는다. 또 다른 꿈에서는 녀석더러 맨홀로 내려가 보라고 부추긴다. 이 모든 진실을 말하더라도 내 꿈의 나머지 부분 -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코요테> 실패한 다큐 감독 아버지를 둔, 수영을 좋아하는 딸인 나. 변호사인 엄마는 아버지와 별거 중이나 마찬가지지만 아버지의 재능을 믿으며 사랑하고 있다. 작품을 찾아 떠돌이 신세인 아버지가 예고 없이 돌아오던 날 엄마는 전직 공군 조종사였던 로펌 대표인 데이브와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일탈에 별 신경 쓰지 않고 지하실에서 작업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아버지는 데이비드의 결점에 대해 얘기하며 단순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단순하게 보인다고 경고한다. 엄마의 관심을 갈구하는 것 같은 아버지는 텍사스로 다시 떠난다. 그 시절, 엄마랑 데이브가 남긴 와인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유일한 친구인 베트남 남자애 차우랑 코요테 소리를 듣는다.
외출한 엄마를 기다리려 부엌에 내려갔는데 뜻밖에 아버지가 계신다. 아직 텍사스로 떠나지 않았고, 엄마에게 편지를 전해주라고 내민다. 나더러 같이 가자고 하지만 나는 거절한다. 아버지의 부재를 나는 엄마 탓으로 돌린다. 경제력만 좀 더 나을 뿐인 데이브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베트남전 때 데이브가 동남아에 주둔했던 얘기를 할 때, 차우 삼촌이 정글에서 살해된 걸 떠올리며 사람 죽여 본 일 있느냐는 말로 데이브를 자극해, 나와 데이브 사이는 더 멀어진다.
아버지는 떠나지 않았고 시내 모텔에 있었다. 엄마와도 연락을 하는 사이였다. 어느 날 길에서 만난 아버지를 엄마 사무실로 안내한다. 그곳에서 엄마와 데이브의 친밀한 모습을 목도한다. 나더러 이 상황을 설명하기를 보채고 충분히 봤는지를 확인하는 아버지. 당신 계획에 나를 끌어들이는 아버지와 한편이 되고 싶지 않다. 코요테 소리를 듣는 밤, 엄마가 울며 돌아온다. 그날 엄마 회사로 돌아간 아버지는 데이브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 버전 정도는 엄마의 회상마다 다르다. 그 이후 몇 년 간 아버지를 본 적 없고, 아버지는 우울증 등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 나로섡 아버지 자의도 아님을 이해하고, 죄책감을 갖는 엄마도 탓할 마음이 없다. 다만 완성된 아버지 유일의 영화를 못 본 게 맘에 걸린다. 안전금고에 보관된 그 필름은 영혼과 육체의 밀접성에 관한 거란다. 엄마가 본 시각적으로 가장 놀라운 영화란다.
<아술> 아술은 우리집에 묵는 교환환생인데 동성인 라몬을 만나고 있다. 아내는 대학에서 강의 중이고 아술과 친하다. 하지만 라몬에게 데려다 주는 일을 내 담당이다. 동성 남자애 만나는데 태워다주는 걸 알면 아술 부모는 어찌 생각할까. 나는 아내를 임신시킬 수 없는 몸이고 아내는 아이를 원한다. 자식처럼 교환학생을 들이자는 것도 아내의 뜻이었다. 아내와는 재혼이다. 아내는 면직당할까 봐 불안한 나날이다. 아술은 대마초도 하는 것 같다. 어느날 차안에서 아술은 라몬과는 말도 섞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술을 위로해주기 위해 아내는 그 아이와 영화를 보러 간다. 라몬을 제외한 파티도 계획한다. 우리를 위해 받아들인 아이인데 그 아이를 위해 우리가 있는 꼴이 되었다. 나는 아술의 대마초를 꺼내 피운다.
아내의 자리를 위협하는 동료 그레이든 리어의 특강은 독보적이다. 불안한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지만 나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집에 돌아오니 아술이 친구들과 술 파티를 하고 있다. 난장이 된 집안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아내가 놀랍다. 초대받지 못한 라몬의 전화를 받고 아술이 보고 싶어 한다며 오지랖을 떤다. 아술의 방에서 남은 대마를 떼어 뼛속까지 들이켠다. 마흔 여섯 나이의 희극적이며 비극적인 주책이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뒤 아내를 의심한 적이 있다. 노교수와 친한 아내를 질투했다. 라몬이 찾아오고, ‘둘 사이에 뭐 있죠?’라고 말한 아술의 친구 말에 옛날 생각이 떠올라 나는 아내를 찾으러 마당으로 나간다.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아술과 울부짖는 아내와 사라진 라몬. 아술은 자신이 실수로 넘어졌다며 라몬을 변호한다. 구급차가 오고 대마초로 약간 혼미한 상태에서 아내를 찾는다. 아내는 누가 라몬을 초대한 거냐고 말하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아술에 대해 그의 부모와 통화할 아내를 생각하며 나는 아내를 꼭 껴안는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몇 분을 보낸 후 우리는 우리의 지나간 행동을 직면한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기말 시험지를 유일하게 제출한 계기로 나는 로버트 교수와 친하게 되었다. 캠퍼스 근처 한국 식당 위층 아파트에 있는 로버트 아파트로 나는 초대 받는다. 내게는 나중에 남편이 된 의대생 남자친구 콜린이 있다. 로버트와 친해지자 남자 친구가 있다고 말하지만 별로 게의치 않는다. 우리의 대화가 즐거우면 그만이라고. 로버트는 아파트 열쇠까지 준다. 로버트의 아파트에서 돌아온 저녁 콜린을 안심시키고 나를 단속하듯, 나는 기숙사에서 콜린과 첫사랑을 나눈다.
로버트와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의 아파트에서 만난다. 더 이상 물리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밀한 사정들을 나눈다. 콜린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도 로버트에게는 가능했다. 로버트를 미워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운 시간들. 교칙에 위배되는 이런 시간을 은밀한 기쁨으로 환원시킬 줄 아는 대화들. 바깥으로 술을 마시러 가게 되었을 때, 나는 로버트와 나란히 앉게 되고 술기운을 빌려 로버트의 손을 잡는다. 그 무난하지 않은 모습을 콜린에게 들킨다. 이후 지금껏 콜린과는 그 얘기를 한 적은 없다. 로버트와 만나 열쇠를 돌려주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키스를 한다.
콜린과는 결혼 후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가족 부양자로 비서실에서 일하기도 했다. 한달에 한두 번쯤 로버트와 편지 교환도 했다. 수련의 콜린은 바쁘고 잠자리는 점점 줄고 나는 피임 사실을 숨겼다. 로버트가 수련의 생활을 끝나가던 해 로버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콜린은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밤, 나는 뜰로 나가 통곡한다. 콜린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콜린과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산다. 가급적이면 로버트로부터 먼 곳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온전히 채워줄 수는 없다. 콜린이나 로버트 똑같이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웠다고 믿는다. 로버트가 채워준 일부는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동안 콜린과는 유산, 파산 등을 겪었다. 로버트와의 비밀을 콜린에게 말하면 그는 내면화하고 나를 미워할 순 있겠지만 결코 내색하진 않을 것이다. 죄의식을 덜기 위해 진실을 밝힌다면 모든이에게 상처가 될 뿐이다. 로버트와의 그 시간이 떠오른다. 그와의 사랑을 위해 옷을 벗고 그의 침대에서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아내의 집으로 갔을 것이다. 바깥의 또래 학생들을 보며 나는 그들이 어려 보였다. 결국에는 떠나야 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강가의 개> 더그형은 망나니다. 꼴에 미셸이라는 여자친구도 있다. 우리는 동네 쓰레기 폐기장을 배회하곤 했는데, 그곳에서 강가에서 자란 길 잃은 개들을 보곤 했다. 강에서 놀던 여자애들의 꼬임에 그쪽 남자애들에게 죽도록 물속에 처박힌 적도 있다.
형과 트레이는 독립기념일 파티에서 수면 각성제를 먹여 캐리 휴버의 음모를 민 적도 있다고 소문난 형. 대학시절, 나는 그때 일을 떠올려 에세이를 썼다. 다음날 아침 캐리는 뒤뜰에서 벌거벗겨진 채 깨어난다. 파티가 열리던 저녁 우리 넷(나, 더그형, 미셸, 트레이 형)은 강가에서 술을 마셨다. 축제를 즐기고 싶었다. 미셸을 다른 남자 무리에게 빼앗긴 더그형. 형은 두 번이나 청혼 거절당했고, 좀 전 그 강가에서 세 번째 청혼을 했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우리는 벤슨 씨네 파티장으로 쳐들어간다.
어른들이 떠난 파티장, 캐리 일행과 합류한다. 형은 기분이 좀 풀린 것 같다. 뒤뜰에서 트레이형이 캐리 선배가 완전히 뻗어 있다고 말한다. 소문이 점점 왜곡되는 것 말고는 일상은 별 변화가 없다. 가끔 캐리 선배가 생각나긴 한다. 고향에 오지나 않는지 이곳을 전부 잊었는지. 그녀에게 그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편지라도 쓰고 싶다.
형은 버지니아로 떠나게 되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오토바이를 형은 내게 선물로 준다.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 뒤 나는 그걸 타지 않게 된다. 지금 나는 스물 여섯 살이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법 죽었지만 형은 거기 안 속한다. 그 시절을 나는 여자친구에게 말하곤 한다, 형 일당이 술에 취해 남의 차를 박살내고, 이웃이 항의하면 엄마는 배상을 한다. 이 모든 걸 지켜보던 나는, 흠집난 차 주변에서 내가 유리 파편을 털어내고 쓸기 시작한다. 차 주인이 나와서 말한다.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이 말은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른다.
<외출> 아미시의 집단생활촌 여자아이들과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쯤 고속도로 쉼터에서 데이트한다. 별 볼일 없는 출신의 나와 테너는 우리 구역에서는 인기가 있을리 없다. 아미시 여자애들도 우리가 자신들과 다른 환경의 아이들이라는 것에 호기심을 느껴 만난다. 여자애들은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다. 레이철은 아미시 아이답지 않게 매력 있다. 스무 명이 넘는 대가족에 아버지는 일흔살이란다. 두 구역 사이에 패싸움이 자주 일었는데, 아미시의 아이작 킹은 밀리지 않는 포스를 자랑한다. 아미시도 도시화 바람으로 새로운 주거지를 찾아 사람들이 떠나간다. 레이철도 그 생활을 지겨워한다.
어느 밤 우리집에서 파티가 열린 날, 맥주 열두 캔을 마시고 해롱해롱해진 우리 사이에 뭔가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어쩐지 다시 못 만날 것 같은 예감. 두 주만에 테너와 레이철을 만나러 가지만 현장감독을 하는 아이작을 만난다. 그들 구역을 침범한 우리에게 악의가 없음을 알고 아이작은 들판으로 되돌아간다. 간만에 레이철을 만나 데이트를 한 뒤 데려다 줄 때, 패싸움에서 끝까지 버티는 아이작을 대면한다. 숫자에서 밀린 아이작은 피투성이가 되어 마차에 실려 간다. 아이작은 육 주 후 뇌혈전으로 죽었고 우리는 대학생이 되었다. 지금 아미시들은 거의 떠났다. 레이철이 살던 곳에는 쇼핑몰과 상점이 들어찼다. 아미시 복장을 한 사람들은 한낱 어릿광대가 되어 관광객과 사진이나 찍는 신세로 전락했다. 스물아홉이 된 지금, 레이철을 생각한다. 높은 철로 다리를 건너며 데이트하던 그때, 발아래를 보지 않았던, 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그 대책 없음과 눈먼 행동에 몸이 떨려온다.
<머킨> 센터에서 후천성 난청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는 린의 아버지 앞에서 남자친구 역할(머킨)을 하곤 한다. 중산층 이웃인 린다는 딸 조지아와 산다. 린은 양성애자이고 네 살 많은 동성애인 델핀이 있다. 델핀은 좀 까다로운 성격이다.
주말마다 나는 아이들이 커피숍에서 자작시를 낭송하도록 도와준다. 무대에서 버벅거리는 호세의 상황 같은 것을 린은 불편해한다. 어떻게 매일 마음을 다독이며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린은 우울해지지 않느냐고 내게 묻곤한다. 나로선 행복한 일인데. 내 여자친구 로런은 작가인데, 오 년을 함께 살다 바람나서 떠났다. 그 즈음 이사온 이웃이 린이다. 린은 내가 떠날까봐 염려한다. 낭송시를 연습하는 호세, 나는 부재하는 사람/목소리 없는 입, 이런 시를 연습하는 호세를 보면 슬픔이 인다. 로런에게서 나를 원망하는 편지가 온다. 연락하지 말라는 그녀에게 나는 마리화나에 취해 메일을 보낸다. 유치한 자기방어가 스민 그것을 보낸 걸 후회하며 삭제한다. 그녀의 답신은 없다. 린이 부럽다. 린에게 남편이 바람 피워 이혼했을 때 화나지 않았느냐고 묻자, 결혼을 깨는 건 두 사람이고 자신은 그 둘 중 하나라고 답한다.
린의 아버지와 호텔에서 식사하기로 되어 있었고 나는 린의 머킨으로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취소되었단다. 대신 델핀과 헤어졌는데, 이유가 나 때문이란다. 차안에서 린이 나이차만 아니라면 우린 결혼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열 살 어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손을 뻗어 잡을 수도, 길가에 차를 세울 수도 있으리라. 그러면 그녀는 내게 키스하겠지.
자바하우스 앞, 린이 보모에게 전화하는 동안 나는 낭송회가 끝날까 조바심을 낸다. 통화를 끝낸 그녀가 팔짱을 낀다. 호세가 연단을 향해 걷는다. 환호성이 울린다. 안쪽을 들여다보며 나는 그녀를 꼭 껴안는다. 호세의 낭송을 청중이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허락하는 한 그녀와 함께 이 순간을 느낀다는 사실. 우리 둘은 다만 멀리서 지켜본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한 소년을.
<폭풍> 나는 언제나 누나 편이다. 약혼자인 리처드 없이 파리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누나를 마중한다. 스페인에서 둘은 싸웠다. 기차역에서 리처드는 소지품이 든 배낭을 둔 채 사라져버렸단다. 그해 여름 엄마의 새 남편인 톰과 나, 예비 누나 부부가 모여 결혼 축하를 하기로 했는데 허사가 되어버렸다. 리처드는 스페인 어디에 발이 묶여 있고, 톰은 발 부상으로 병원에 있고, 설상가상으로 심각한 폭풍까지 몰려오고 있다. 고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의사 리처드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외국에 버려진 채로 있다는 건 맘에 걸린다. 누나도 사귀기에 편한 사람이 아니기에 누나를 만나는 남자들을 부러워해본 적도 없다.
엄마는 톰과 병원에 있을 것 같단다. 누나의 현 사태에 대해서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다. 테니스광인 톰은 혼합복식 경기를 하다 다쳤는데 엄마 탓이라고 비난했단다. 밖을 보니 폭풍우가 친다. 하지만 익숙한 공간에서 느끼는 향수 같은 것이 올라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어릴 적 여러 풍경들. 잠시 후 누나 방 앞에서 우는 소리.
다음날 아침 리처드와의 상황을 알게 됐는지 아래층에서 엄마의 고성이 들리고 엄마의 차가 빗속으로 나선다. 휠체어를 탄 톰은 수영장 근처를 왔다갔다 한다. 누나와 나는 톰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기 퇴직한 채 소명처럼 테니스에만 몰입하는 톰은 엄마의 돈을 보고 붙었다고 누나가 말했다. 엄마에게 기생하는 처지면서 혼전합의서까지 챙기던 사람이다. 엄마는 옆쪽 포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엄마는 내게 근본적으로 슬픈 여인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채우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 여인. 기쁨보다는 실망이 많았다고 말하는 엄마의 눈.
오후 늦게 낯선 남자의 전화를 받지만 잡음 때문에 리처드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 누구도 기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나는 그 일은 얘기하지 않는다. 폭풍의 눈이 지나가고 전기가 나가버린다. 리처드 걱정에 그 집 부모님께 연락해볼까 싶지만 누나는 거절한다. 교장 선생 출신답게 톰이 훈수를 두려하자 누나가 말한다. 발가락 하나 부러졌다고 망할 휠체어를 타고 있다고. 발가락이 아니고 복사뼈라고 톰이 응수한다. 누나의 방에서 당신이 미워, 라는 울부짖음이 들린다. 톰에게 하는 말인지 리처드에게 하는 말인지. 누나의 분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음속에 서서히 자라난 것이다.
저녁 시간, 누나는 전화로 친구들에게 리처드 흉을 보고, 톰은 일기예보를 듣고, 엄마는 촛불 밑에서 책을 읽는다. 술 취한 톰과는 별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데 줄곧 테니스 얘기만을 하기에 관심이 없다고 솔직히 말한다. 톰은 나를 자기 친아들로 생각한다며 테니스를 쳐보라며 다정하게 군다. 다음날 아침 전기가 들어오고, 다시 리처드에게서 전화가 오고 누나가 테라스로 나가 통화를 한다. 톰은 아직도 자기의 부상을 엄마탓으로 돌린다. 리처드 걱정을 하는 엄마더러 누나가 말한다. ‘엄마가 진짜 걱정해야 될 사람은 저’라고. 그 자리에서 엄마는 톰이 투자에 실패해서 결혼식 비용을 댈 수 없으니 차라리 잘 됐다고 한다. 톰더러 얼마나 날렸느냐고 물어보지만 엄마와의 일이라며 딴전을 피운다. 그날 저녁에 약혼 축하 자리가 될 터였는데 엄마는 톰을 부축해 차를 타고 나가버린다. 음식이 차려져도 먹을 사람이 없다. 누나와 나는 술에 취하기로 한다. 누나는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준 사람이라며 나를 추켜세운다.
누나는 내게 진실을 알려준다. 리처드에게 차였으며, 그날 리처드는 돈과 여권을 챙겨 좀 떨어져 지내보자고 말했단다. 더구나 용서를 빌며 내일 돌아온다고 말했단다. 엄마에게는 비밀로 하란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보면 익숙해지는 남녀 관계, 더구나 리처드는 둘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것이 누나의 발목을 잡고 있단다. 누나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누나를 감싸 안는다. 오래전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리며 언덕 아래, 아버지 차의 전조등 불빛을 보며 누나가 미소 짓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 그 불빛,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 (헉, 너무 좋은 소설이닷!)
<피부> 클로이와 나는 스물 셋 신혼. 꿈결인 듯 카펫에 누워 이름처럼 서늘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를 생각한다. 일 년 뒤, 우리가 서명함으로써 포기한 아이에게 지어줄 수 있었던 이름들을 떠올리며,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 있게 될 것을 모른 채.
<코네티컷> 그 여름 퇴원한 아버지는 코네티컷 연안 섬, 가족 별장에서 지냈다. 우리는 코네티컷에서 엄마가 물려받은 집에서 지냈다. 몇 주에 한 번씩 페리를 타고 아버지를 만나곤 했지만 아버지의 부재에 익숙해져갔다. 수술 집도 중 정신이상이 생긴 아버지. 내가 열 세 살 때 일이다. 엄마는 잠시의 침체기라 말하지만 어쩌면 아버지의 회복에 가장 먼저 희망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집근처 사립학교에 다녔고(기숙사 생활하지 않은 건 행운이었다!) 누나는 일등을 놓친 법이 없었지만 나는 평범했다. 일찍 귀가하는 재능은 있었다. 아버지가 편찮으신 후 이웃 벤틀리네는 발길이 뜸했는데, 그날따라 벤틀리 부인이 엄마 손을 잡고 있었는데, 우정 이상의 친밀감이 느껴져 나는 놀란다. 짐작건대, 뒤쪽 테라스에서 남몰래 포옹하면서 안전하다고 여겼을 것 같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인 70년대가 오고 있었으니 세간의 이목에 들키기를 바랐을지도. 그때까지 가장 가식이 없었던 여자였던 벤틀리 부인이, 훈계하고 야비했던 여자로 느껴진다.
그간 둘은 친했지만 내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랬는데 이번 열정적인 포옹을 목도하고 보니 (비록 내가 열세 살이긴 해도) 단순한 위로의 포옹이 아님을 알겠다. 엄마는 벤틀리 부인이 집에 들렀다는 얘기를 내게 하지 않았다. 외로이 섬에 계신 아버지. 누나에게 엄마의 일탈을 말해도 웃어넘길 게 뻔하고 도리어 일러바칠지도 모른다. 엄마에 대한 내 환상은 그 둘 사이에 있었던 것보다 훨씬 비도덕적이었을 것이다.
학습 능력이 못 미치는 나 때문에 엄마가 학교에 호출되었다. 면담 후 기대하는 위로와 달리 엄마는 차를 벤틀리네 쪽으로 몰았다. 부인을 껴안고 흐느끼던 엄마는 차안으로 돌아와 말한다. “우리 모두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십오 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둘이 확실히 연인이라는 걸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연서, 사진, 한밤의 통화들. 엄마가 벤틀리 부인에게 매력을 느꼈다면 외모에서 오는 자신감 같은 것이었을 게다. 우리집에서 파티가 있던 날, 이웃이 다 모였는데 벤틀리 부인은 오지 않았다. 벤틀리 씨도 거의 아내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아저씨 위상이 아버지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벤틀리 부인은 곧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살기 위해 뉴욕으로 간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 때문에 파티에 오지 못한 것. 낙담하는 엄마는 밖으로 나가 눈이 붓도록 울었다. 대접이고 뭐고 빨리 이웃이 돌아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 벤틀리씨는 레즈비언 아내를 둔 걸 하소연하며 엄마 앞에서 흐느낀다.
벤틀리 씨가 떠난 뒤에 벤틀리 부인이 찾아와 그녀의 사랑인 엄마를 만난다. 벤틀리 부인으로서는 허구의 연인, 엄마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대상을 만드는 것이 모든 이들(저 자신을 포함해서)을 위해서 나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떠난다. 아버지처럼 떠난 사람이 되었다. 다시 부인을 본 적 없지만 가끔 맨해튼 주소로 익명의 편지가 오던 것은 기억한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섬으로 갈 때, 엄마는 뉴욕에서 주말을 보내고 왔는데 넋 나간 표정으로 보아 그들 관계가 끝난 걸 확신했다.
벤틀리 부인이 찾아왔던 그밤 엄마의 대화를 기억한다. 안 가도 돼요. 가지 말고 문제를 해결해요. 부인이 나간 뒤 엄마는 울었고 나는 엄마를 향해 걸어갔다. 위로하고 싶었지만 엄마는 그저 내가 자리를 피해주기만을 바랐다. 몇 년 뒤 섬에서 아버지는 돌아왔다. 아버지는 벤틀리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아버지는, 차도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믿고 그럭저럭 사시는 것 같다. 엄마는 책도 읽고 산책을 하며 아버지 상태를 살피며 일상에 빠르게 적응해간다. 나로선 벤틀리 부인이 떠난 그 저녁이 자꾸 떠오른다. 저 먼 그림자가 뜰 가장자리에서 걸어 나와 자기를 되찾아 갈 것이라고 믿는 듯, 간절히 서 있던 엄마의 모습.
45나는 때로 내가 꾸는 꿈 속에서으 진실을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꾸는 꿈 속에서 구멍에 잔디 봉지를 빠뜨리는 것은 탈이 아니라 나라고. 어떤 때는 내가 녀석을 밀어 넣는다고., 한번은, 내가 녀석에게 내려가보라고 부추겼다고. 그것이 진실이에요, 라고 나는 그분들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구멍 - P45
87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렇게 몇 분여를 보낸 후에야, 우리는 마침내 뒤로 돌아 우리의 지나간 행동을 직면한다. -아술 - P87
92자만심은 물리학자에게 있어 가장 큰 방해 요인이지요. 뭔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발견의 기회를 없애버리게 되니까요. -빛과 물질에 - P92
106우리를 매신한 스러진 배신한 사랑들, 우리가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추억하기조차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유년의 순간들, 우리가 나누는 이런 대화에는 자유가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하는 얘기는 절대 그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빛과 물질에 - P106
125로버트 역시 똑같이 나의 중요한 또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 생각에,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시킬 수 있는 나의 일부이다.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로버트는 내가 거의 십 년 동안 콜린에게 숨긴 비밀이다. -빛과 물질에 - P125
154그것은 이후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말이다. 그는 말했다.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란다." -강가의 개 - P154
174나머지 우리들처럼 -내 부모님이 그러는 것처럼, 테너가 그러는 것처럼, 내가 그러는 것처럼 - 자신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그가 미웠다. -외출 - P174
180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우리의 대책없음에, 우리의 눈먼 행동에 아직도 몸이 떨려온다. -외출 - P180
215그들이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순간 내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내게 허락하는 동난 그녀를 곁에 안고, 그곳에 린과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한 소년을. -머킨 - P215
234세월이 지나면서 누나의 기분을, 그 변덕스러운 기질을, 누나의 갑작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분노를 이해하게는 됐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세월을 지나면서 천천히 누나의 마음속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가꾸기 힘든 씨앗, 우리 가족의 상담 치료사는 그걸 그렇게 불렀다. -폭풍 - P234
240심리학자들이 어린 시절 누나와 내게 건넨 책들에는, 부모 중 하나가 죽게 되면 그 자식들은 절대 아시 행복해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이것이 누나의 경우라고 이해했고 가끔은 어머니의 경우라고 이해했다. --더 물러졌고, 어 지루해졌다. 즐거움은 덜해졌고 고통은 그 구렁텅이의 깊이가 한없어진 듯하다. -폭풍 - P240
245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면 누군가를 알게 돼. 익숙해져버리게 된다고. 그이가 완벽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망할 새끼처럼 구는 경우가 안 그런 경우만큼 있을 거야. -폭풍 - P245
249나는 우리가 막 서명함으로써 포기한 아이에게 지어줄 수 있었던 이름들을 떠올리며,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 있을 것이다. --나는 다만 클로이의 피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처럼 서늘하고 부드러운, 내 젊은 아내의 창백한 피부. --창문 밖 종려나무들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잔인한 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안개 속의 꿈을 믿으면서. -피부 - P249
274안 가도 돼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지 말고 문제를 해결해봐요. 벤틀리 부인은 울고 있었다. 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코네티컷 - P274
277그 저녁, 벤틀리 부인이 떠난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후, 개수대가에서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의 가장자리에서 걸어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코네티컷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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