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악덕의 번영 동서문화사 월드북 170
사드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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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3 사드 미운 새끼.


싸드 이 새끼는 누가 나중에 읽거나 말거나 어쩌라구 니기미 씨비다 이러고 막 싸 갈기듯 글을 쓴 것 같다. 여기에 어떤 어려운 철학이 듬뿍 담긴 것도 아니고, 그저 날것의 난행들이 가득할 뿐이었지만, 올여름 독서 중 이 책 읽기야 말로 고난이고 고행이었다.

검색해보면 번역자 김문운이 1977년에 이미 죽었다, 일본 유학 다녀온 사람이 프랑스어 했겠냐 일본어판 해적 불법 중역본이다, 아니 유령번역가다, 역자가 맘대로 잘라내고 건너뛰고 지어내고 엉망이다, 말이 많았다. 그렇지만 내가 소돔120일 처음 읽던 2013년에는 이 번역가를 거친 버전 밖에 없었고, 2018년에 성귀수 번역가가 전집 시리즈 중 하나로 새 번역판을 내어 놓긴 했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전 다시 안 봅니다...
현존하는 악덕의 번영은 동서출판사의 책 단 한 권이고, 누가 돈 주고 산다고 하면, 말린다. 종이책 너무 비싸서 전자책은 좀 할인이 되길래 샀는데, 팔지도 못해… 그때 알라딘이 귀여운 체셔 고양이 키링 시계 준대서 샀는데, 그 시계는 약이 떨어져 멈춘지 오래다. 그러니까, 굳이, 굳이? 읽고 싶으시면 사드의 다른 작품 먼저 보시구...이 책은 다른 번역본이 나오면 그때나...그때도 읽지 마!!!

악에 대한 책은 많다. 쾌락에 대한 책도, 음란한 책도 많고 많지만, 이 책은 온갖 음행을 담아도, 책 속 등장인물이 신나서 도락을 즐겨도, 읽는 이에게는 그것이 야하지도 쾌감을 주지도 즐겁지도 않다. 그냥 역겨움...사드 너 창의력 대마왕에 신과 법과 세상에 아주 반역반역 반대자인 거 알겠는데 그거 알자고 사드 책 네 권 이상 볼 필요는 없지 싶다. 그래도 궁금하다면...아 그냥 상상력은 이상한데다 쥐어짜내서 갖은 패륜적이고 잔혹한 방법으로 희생양들 고문하다 죽이고, 가끔 먹고, 내 마음이 달라져 그런가 나이들어 그런가 몰라도, 소돔120일은 대량학살에 악행이라도 약간 판타지 같고 희극적인 게 있는데, 이 책은 그냥 악덕악덕 악악악악 강약중강약 없이 강강강 하고 악 버무리만 하다 보니, 오히려 무감동 무미하다. 끔찍한데 진짜 그게 쉬지도 않고 그래서 지루할 정도… msg도 한 숟갈 톡 털어 넣어야 감칠맛이지, 미원 한 봉다리 껴안고 퍽퍽 퍼먹으면 혀는 마비되는 것이다… 감각 없이 역겹다 그냥… 심장 딜도 들어봤냐...좁아서 안 들어가니까 심장 잘라서 넣으래...하아...진짜… 그쯤되면 어이가 없는데 이새끼는 진짜 거기서 끝을 모르고 점점 더함…

아, 사드를 읽고 영화 아가씨를 보면, 박찬욱도 사드 열심히 읽었구만, 살로 소돔도 열심히 봤구만, 오오 쥘리에뜨, 이야기 상연회 할 때랑 지하 고문실 장면 보면 그냥 그런 생각이 팍 든다… 그것도 성과라고 해야 할까… 그런 거 알아차리는 눈...없어도 삶은 더 잘 돌아간다아...
그리고 이런 독서에서 어떤 즐거움도 못 느끼는 나를 보며 나 생각보다 정상이야...쥘리에뜨에 비하면 착해...천사야… 아니 괴로워하면서도 꾸역꾸역 끝을 본다고 읽으니 비정상인가… 약간의 혼돈마저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보부아르를 피해다녔다(?) 싶을 정도였는데, 이 책 펴면 읽으려던 소설은 안 나오고 서문 격으로 보부아르가 쓴 ‘사드를 화형시켜야 하는가?’ 이런 글이 실려있다. 이 작품에 대한 해제는 아니고 사드 작품과 사드라는 인물 일반과 삶에 대한 비평 쯤으로 읽혔는데, 그래서 나름 이 언니는 뭐라 하나, 나에게 사드 독서에 대한 이해 약간이나마 줄까 싶었는데 그렇지는 못했다. 그저 사드도 뭐 존재 가치가 아예 없는 건 아녜요? 정도...그 소리 듣자고 어려운 말을 꾸역꾸역 보았구나… 그치만 이 소설은 진짜… 이렇게 까지 할 일인가요… 이런 걸 이렇게 두껍게 쓸 일이냐고...너야 감옥에서 심심하니까 너 좋자고 썼겠지만...진짜 이거 고르고 산 내가 밉다. 끝까지 읽겠다고 오기로 버틴 나도 밉다. 이새끼 감옥에 가둬 이런 거 쓰게 만든 프랑스도 밉다. 애새끼 이따위로 기른 사드 엄마도 밉다.

그런 미운 사드의 눈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스웨덴 구석구석 유럽 여행을 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나쁜 짓 하는 로드무비는 또 처음이네…


+밑줄 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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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의 비정상성은 그것을 타고난 성질로서 견뎌내지 않고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므로 그가 거대한 체계를 이룩해내는 바로 그 순간에 가치를 드러낸다. 뒤집어 말하면, 그의 글이 풍기는 장황함과 틀에 박힌 하찮은 이야기를 통해 그 특수성이 전달되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하나의 체험을 사드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것임을 아는 순간, 그의 글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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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놀라움은 꽃병이 깨질 때까지 꽃병을 후려치는 놀라운 어린아이와 닮았다. 그는 늘 위험을 즐기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지상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의심했다. 사회는 개인이 모든 몫을 지니기를 거부하고, 뱃속에 감춘 것 없는 개인을 요구한다. 사회는 사드의 비밀을 재빨리 벗겨내 범죄라는 틀 속에 송두리째 던져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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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적이고 환상적인 미덕은 우리를 겉만 번드르르한 세상에 가둔다. 그러나 육체와의 은밀한 결합이 악덕이라 불리는 것의 본성을 보증한다. 사드를 가까이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스티르나의 말을 빌리면, 미덕은 ‘인간’이라는 이 허무한 실재에서 개인을 소외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자기의 권리회복을 요구하고, 구체적인 나로서의 자기를 완성하는 것은 죄악으로만 가능하다. 가난한 사람이 체념한다면, 또는 동포를 위해 싸우려 애써도 그 노력이 헛되다면 가난한 사람은 멋지게 조종당하고 속아 넘어가며, 자연이 가지고 노는 무기력한 대상이 되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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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내내 묵살당했던 이 인물은 20세기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마르키 드 사드, 과거에 존재했던 가장 자유로운 이 정신은 여성에 관한 독특한 사상을 지님으로써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자유로운 존재가 되도록 하려고 했다.
?우리도 언젠가 받아들이게 될 이 사상은 먼저 두 소설로서 탄생을 보았다. 《쥐스틴》과 《쥘리에트》가 그것이다. 후작이 남주인공이 아니라 여주인공을 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쥐스틴은 고리타분한 여자, 비참하고 노예가 된 인간 이하의 존재이다. 이에 반해 쥘리에트는 작자가 예견한 신여성, 아직 아무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인간성으로부터 해방된 존재, 날개를 지니고 세상을 새롭게 할 여성이다. ……어쩌면 독자는 이 소설들 속에서 불쾌한 문장밖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아폴리네르 《마르키 드 사드 작품집》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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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지옥의 교리를 없애고 천국의 교리를 믿는 것은 어떨까 싶어요. 어느 쪽이나 인간의 생각을 막아 이를 절대군주의 전제적인 속박 아래 두려는 종교적 폭군들의 잔인한 발명품이니까. 우리 인간은 물질에 지나지 않고 우리가 죽은 뒤에는 절대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우리가 영혼에서 원인을 찾고 있는 것도 모두 실은 단순한 물질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요. 이것은 인간의 자존심을 해치는 것 같아 혼이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것으로 다들 여기는데 그러나 만일 우리가 동물처럼 우리를 움직이는 요소를 모두 물질로 되돌린다면 우리는 이제 자연으로부터 받은 다양한 체질에 따라서 빠져드는 극악무도에 의해 벌을 받는 일도 없는가 하면 반대로 체질에 따라서 실행해야 할 선행에 의해 보상을 받는 일도 없을 거예요. 선행을 하건, 악행을 하건 이 세상 뒤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과는 아무 연관도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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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있어서 무지몽매와 동포의 악 말고는 지옥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아요. 그렇지만 죽어버리면 모든 일이 끝장이에요. 영원히 무로 돌아가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그런데도 자신의 정욕을 마음껏 구사하지 못한다니 한심해요. 인간은 정욕을 위해서만 만들어졌고 어떤 극단적인 방법도 정욕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믿어야 해요. 그러면 영원한 형벌이라는 학설을 깨뜨리기 위해 내가 편리하게 이용한 신의 관념을 이쯤에서 속물들에게 돌려보내기로 할까요? 요컨대 신도 악마도 있지 않아요. 천국도 지옥도 없어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유일한 의무는 사회적인 이해관계를 제외하면 단지 쾌락의 의무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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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할 것도 없는데 악 또는 악이라고 불리는 것이야말로 이 비참한 우주의 부패한 조직에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것이지. 그리고 이 우주를 만들어낸 신은 매우 복수심이 강하고, 매우 야만, 매우 악랄, 매우 부정, 매우 잔혹한 존재인 거야. 왜냐하면 복수, 야만, 악의, 부정, 포학이야말로 이 광대무변한 천지창조의 원동력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것에 의해서 상처를 입게 될 때 말고는 굳이 불평을 하지 않으니까. 수형자에게 죄는 부당하지만 가해자에게 있어서 죄는 정당한 것이지. 그런데 만일 악 또는 악으로 불리는 것이 만물을 창조한 신의 본질이고 또 이 신을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다면 악의 운동이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 신은 악 가운데서 세계를 창조하고, 악에 의해서 세계를 유지하며 악을 위해 세계를 존속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 인간은 악에 침해되어 생활하고 죽은 뒤에도 악 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혼이라는 것도 묶인 것이 풀린 물질 위에 미치게 된 악의 작용에 지나지 않고 악에 의해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창조물의 혼인 동시에 창조자의 혼이기도 한, 이 악이란 양상은 따라서 창조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만물이 죽어 없어진 뒤에도 존재할 거야. 만물은 신처럼 악랄, 야만, 무도해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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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재능을 가질 필요가 어디에 있지? 그들에게 재능을 줄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오히려 그들의 수를 줄이는 게 나아. 프랑스의 인구는 줄일 필요가 있어. 치부에 철퇴를 가하는 것이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먼저 거지를 쫓아내자. 선동가는 이와 같은 계급에서 나오기 마련이니까. 요양원이나 병원도 부숴버리자. 국민을 오만하게 하는 시설은 하나도 남기지 말자. 아시아의 민초가 묶여 있는 사슬보다도 천배나 무거운 사슬로 그들을 묶어 노예처럼 땅에 기어다니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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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이 요구하는 파괴에 협력하기 위해 자연의 입에서 토해낸 하나의 괴물인 것이다. 인류라는 종족 가운데서 오직 하나의 존재인 것이다. 오오, 그렇다, 나는 세간의 인간들이 나에게 퍼붓는 욕설과 잡소리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누구 한 사람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힘차고, 고독 가운데서 진정으로 즐기며, 모든 인간을 혐오하고, 나에 대한 인간들의 비난공격을 업신여길 정도로 지혜에 뛰어나며, 온갖 제례를 부서뜨리고, 온갖 종교를 비웃으며, 온갖 신을 위안으로 삼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나고, 모든 정부에 침을 뱉으며, 모든 속박, 온갖 예속, 온갖 도덕원리를 뛰어넘을 만큼 오만불손한 인간이므로 넓지 않은 나의 영지 가운데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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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을 속이자고요. 그거야말로 그들에 대한 가장 큰 봉사니까요…… 그렇죠, 브라스키 씨? 우리 이제 성당으로 가서 인간 몇을 죽일까요?”
“물론이지.” 교황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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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는 이미 오래전에 병들어 죽고 없지만, 우리도 몇 개월 뒤, 몇 년 뒤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의 여신이 손에 든 커다란 낫은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부자든 가난뱅이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조리 싹둑 베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주 잠깐 머무를 뿐인 인생길은 되도록 꽃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죽음의 여신이 우리의 목숨줄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동안엔 행복하고 편안한 나날을 보내도록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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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미친 사람을 데려왔는데 그 남자는 자기가 하느님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번엔 하느님과 즐겨볼까요?” 베스폴리는 우리에게 말했다. “잘 보시오. 섹스하기 전에 하느님을 실컷 때려줄 테니까. 자, 이리 와. 이리 오라고. 바보 같은 하느님 놈아…… 엉덩이를 내밀란 말야, 엉덩이를.”
이윽고 하느님도 간수의 손으로 십자가에 묶였고, 순식간에 한낱 인간에 의해 엉망진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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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4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14 08:44   좋아요 2 | URL
사드가 신성모독(좋다 하신 밑줄 대부분)은 찰지게 잘해요... 멜서스는 신부라 사드가 싫어할 듯 근데 인구 많다고 싹 죽여버리자 이런 건 좀 멜서스걱정에 대한 사드의 해결책 ㅋㅋㅋ 이 책은 아마 감옥 나오고 말년에 가장 독해진 채로 쓴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은오 2023-07-14 06: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유열님의 셀프고문현장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7-14 08:42   좋아요 1 | URL
이전 책까지만 해도 읽을 순 있다 였는데 말입니다... 이 책은 읽다 보면 어휴 사드를 읽느니- 하는 은오님의 쯧쯧 얼굴이 부쩍 자주 떠올랐습니다... 불닭볶음면은 음식이지만 이건 그냥 핵폐기물입니다...

미미 2023-07-14 1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열반인님 사서 고생하시는 모습! 저는 또 왜 따라하고 싶죠? 우리 무슨 사드 순례자도 아니고ㅋㅋㅋㅋ
돈 주고 사지말라 하셨으니 도서관에 있나 미리 봐둬야겠어요. 일부러 pc들어와 읽었는데 너무 재밌습니다.
마지막 문장 ...어쩌나요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7-14 11:42   좋아요 2 | URL
굳이 난도 따지자면 미덕의 불운<밀실에서나 하는 철학(규방철학)<소돔120일<악덕의 번영 순이구요. 뒤로 갈수록 스케일도 커지고 번역도 후져집니다. 그런데 악당 주인공 입빌려서 설파하는 개똥철학(반사회성, 악이 의무이다, 무신론)은 복붙 돌림노래라 굳이 찍어먹을 필요는... 아니 다들 사드 지독하다 하면서도 제대로 읽고 어느 정도인지 아는 놈 알려주는 놈은 없어서 직접 봤는데 이제 집에 갈게요... 집에 보내주세요... 살려주세요...

Yeagene 2023-07-14 13: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힘든 독서셨군요..고생하셨습니다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7-14 14:23   좋아요 2 | URL
제가 잘못했습니다 ㅎㅎㅎ 고생은요... 감사합니다.

난티나무 2023-07-14 13: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치만 사드는 감옥 갇힐만 했고요, (그냥 사형이 낫지 않았을까…@@ 그럼 더이상은 없었을 텐데) 사드가 그리 클 줄 사드엄마는 모르지 않았을까… ㅎㅎㅎ (유일하게 걸리는 문장이라서 딴지 걸어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함.ㅎ)
아 저는 사드를 읽지는 않았지만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그래피> 거기 무지하게 많이 나와서 쪼매 맛을 봤구요, 비판해줘서 좋았고요, 보부아르는 음 왜 그랬을까 ㅋㅋㅋㅋㅋ 싶었답니다.
암튼 저걸 다 읽으셨…@@ 와!!!!!!!

반유행열반인 2023-07-14 14:30   좋아요 2 | URL
저도 엄마 찾으면서 이건 좀 문제적이지 싶지만 진짜 저 정도로 자라려면 친모 친부든 대리양육자든 유년기에 애착 하나도 안 준 거 아닌가 싶어서 (작품 내에도 친모 살해 자녀 살해 자녀 약취 이런게 너무너무 많이 나와요... 보부아르 글에도 클로소프스키가 추론한 쟤 엄마랑 관계가 영향 있지 않겠냐 근데 추론일 뿐 근거 부재 뭐 그런 언급도 있고) 그런 안타까움을 제가 너무 후려쳐 써 버린 것 같긴 합니다... 그냥 너무 잔혹하게 자라나 인간 사랑할 줄 모르게 크는 인간 보면 슬프고 끔찍해서 아무나 미워해 버렸네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난티나무님....

난티나무 2023-07-14 16:00   좋아요 3 | URL
아니 실례라니 무슨 말씀을.^^;;; 영향 당근 있었겠죠. 다만 아시다시피 범죄자를 놓고 이야기할 때 어린 시절 소환되면 그게 원인이라 치부될 때가 많아서 유독 제가 크게 읽었나 봅니다. 내 우울은 어린 시절에서 왔다, 엄마나 아빠 때문이다, 이거 맞기도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수 있으니까요… (부정하고 시포요..ㅋㅋ)
제가 댓글 또 늠 막 썼나 봐요. ㅠㅠ 열반인님 마지막 문장은 농담으로 알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14 16:03   좋아요 1 | URL
아이참 제가 여태 갑자기 엄마 아빠 미워...이러고 갑자기 사드 빙의해 있었거든요 ㅋㅋㅋㅋ 못된 새끼들이 꼭 부모탓하지 ㅋㅋㅋ(막상 내 어린이들이 그러면 막 혼낼 거면서 ㅋㅋㅋ) 감사합니다 난티나무님ㅎㅎㅎ

유수 2023-07-14 21:33   좋아요 2 | URL
오… 좋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이렇게 댓글을 써봐야지. 저는 맨날 삼키는 통에 ㅋㅋ 두분이 그냥 막 쓰라고 하시는데 ㅋㅋ
 

https://blog.aladin.co.kr/lunanuna/11033301

4년 전에 밀란 쿤데라 할아버지한테 편지를 썼다.
할배는 못 읽고 내가 다시 보고 앉았다.
어제 쉬폰 커튼 사서 걸었으니 여태 안 보고 애껴둔 커튼이나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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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사이트에 파스칼 메르시어 타계... 코맥 매카시 타계...이런 배너 보면 왠지 슬픈 눈 하고 입은 웃는 거 참느라 쿡, 하는 느낌 떠올라서(아 뭐 사람이 그런다는 거 아니고 누군가의 죽음은 자본에겐 몸 커질 기회니까 의인화)
절레절레 하다가도 아 읽어보면 좋을 작가들이니까 아주 나중나중나중 탈상하면 봐야지 했었는데

막시무스님이 올려주신 밀란 쿤데라 할아버지 영면 소식은 좀 무심할 수가 없었다.

책 별로 안 보던 시절에 전작한 작가이기도 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제일 많이 읽고 제일 많이 사서 뿌리고 다니던 책이기도 하니까... 내가 빻은 구석이 있다면 그 많은 지분은 변태 할배 탓...

어쨌거나 푹 쉬시고 그만큼 썼음 됐어요ㅋㅋㅋ 이제 뭐 더 써도 딱히 환영 못 받을 세상이 됐어요... 나머진 어린 놈들한테 맞기시구...굿바이 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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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gene 2023-07-12 2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까 소식 듣고 진짜 놀랐네요....흑 쿤데라옹이 그렇게 나이가 드셨나요ㅠㅠㅠ

반유행열반인 2023-07-12 21:20   좋아요 1 | URL
우리 할머니보다 한 살 아래였는데 할머니가 작년에 돌아가셔가지고 얼추 비슷한 연세에들 가시네요...

은오 2023-07-13 0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들었습니다.. 음 기념으로 무의미의 축제까지 껴서 리커버 전집 내주면 좋겠네.. 읽고싶은거 담다보니 결국 그냥 전집을 사는게 나을거란 생각이 드는데

반유행열반인 2023-07-13 07:44   좋아요 1 | URL
전작을 했지만 사실 전집에 있는 책 다 사 보는 게 좋은 선택 같진 않아요. 좀 후지고 이걸 왜 봐? 이런 거도 있거든요. 또 산문집들도 껴 있는데 오히려 산문집이 읽을 만 한 거 같기는 하다…근데 산문집도 우선 순위 상 중 하 많이 갈림 ㅋㅋㅋㅋㅋ
무의미의 축제는 약간 할배 마지막 농담 같았어요. 막 전집 만들고 이제 어여 죽어…하는 책팔이들한테 조까 나 아직 안 죽었어 이것들이 산 채로 묻을라 하네 이러고 전집 외로 한 권 더 내고 가신 느낌 ㅋㅋㅋ이건 제 뇌피셜이요 ㅎㅎ

Falstaff 2023-07-13 05: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흠. 열반인 님도 <불멸>을 청년사 책으로 선택하셨군요! 정말 오래, 오래, 아주 오랜만에 저 책을 선택하신 분을 본 겁니다.
저도 청년사 <불멸>에 한 표!

반유행열반인 2023-07-13 07:49   좋아요 2 | URL
골백작님!! 저 책을 처음 읽은 게 2003년인데 그땐 민음사판이 나오기 이 전이었습니다
ㅋㅋㅋ제가 저 책 서점서 실컷 주무르다 돈이 없어 그냥 나왔는데 그걸 기억한 남자사람친구가 나중에 생일에 저걸 사줘가지고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 읽고 십 년 후에 또 읽었는데 그게 벌써 십 년 전이니…즉슨 청년사 불멸 소장자 내지 일독자는 구구세대(?) ㅋㅋㅋ 저 위의 판들 그대로 가지고 나중에 전집 나온 애들로 채웠는데 나중에 나온 애들은 그냥 뭐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인걸 표지만 마그리트 발라 이쁘라고 냈네 싶었어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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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 윌친스 지음, 시우 옮김 / 오월의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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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2 리키 윌친스.

지금도 꾸준히 읽고 정진하시는 독자들이 많은 명저 ‘제2의 성’ 페이퍼가 알라딘서재 타임라인을 매일 수놓던 시기가 있었다. 나만 고양이 없어… 나만 보부아르 안 봤어… 지금에야 어차피 남들 좋다는 거 읽어도 난 좋은 소리 못하고 제대로 읽지도 못한다는 걸 너무 잘 알지만 그때만 해도 나만 뒤쳐지는 느낌에 약간 초조하던 내가 한 이웃에게 ‘여기 있는 사람 다- 다- 읽고 한참 후에나 읽어볼까…’하는 마음을 비밀리(?)에 전했다. 그랬더니 자기도 머리 빠지게 읽고 있던 그 이웃이 권하지 않는다고, 이 시점에 별로 의미 있는 책 같지도 않고 좋은 책 많은데 굳이 천쪽 넘는 사전을? 이러고 후려쳐 버려서 오히려 편안-해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왠지 안 읽어도 돼 넌, 하는 면죄부 얻은 것도 같고, 돌아보면 나를 가스라이팅 한 것인가… 페미니즘 도서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개빻은 나를 만들기 위한 수작인가… 그렇다고 뭐 내가 보고 싶은 책 참고 안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딱히 안 읽고 싶어 보이는데 고민하는 것 같으니까 어차피 이새끼는 저러면서 읽어 봤자 얻어 가는 것도 없어, 하는 각이 나와 교통 정리를 한 것인가… 딱히 별 생각 없었을 것 같긴하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난 건 또 다른 이웃과 요즘엔 그런 책 잘 안 읽어요…하다가 흠 왜 안 읽지, 딱히 삶에 대해 고민하지도 치열하게 싸울 대상을 향해 분노하지도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뭐 굳이 피해서 안 읽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근데 그런 책은 뭘까….하다가 도서관에서 봐야지, 하던 책을 빌렸다.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 페미니즘, 이 모든 걸 그런 책, 으로 묶어 부르는 건 여러 뱡향에서 이자식 하고 몰려와 때려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짓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알아. 그런데 각 분야마다, 혹은 이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원하는 것은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구조적 억압, 고통, 폭력을 겪는 사람들이 해방을 이루는 일, 지워진 자기 이름을 되찾거나 애초부터 이름 없던 것에 이름 짓는 일, 목소리를 내고 오롯이 나로 존재하는 일, 아닐까 싶다. 이 책도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빌릴만한 도구들을 여기저기 탐색한 결과물을 비교적 친절하게(친절한 책이란 얇고 어렵지 않은 것) 건네주려는 시도였다.

트랜스젠더 유튜버가 자신의 영상 밑에 악플단 것 읽다가 화가 나면 인형을 주먹으로 팡팡 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너 게이야? 하는 댓글러에게는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은 좀 구분하자고 열을 내고 있었다. 성적 지향이든, 정체성이든, 그걸로 고민하고 또 그것 때문에 괴롭힘 당하거나 폭력을 겪거나 배제되거나 주변에서 도와주겠다고 교정시도(?)하는 짓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개념에 관심을 갖거나 알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건 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성차별과 성폭력을 겪어 보지 못한 남성들이 요즘 세상 얼마나 평등해졌는데, 아직도 차별이 있다는 소리를 해?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그래 나도 궁금하긴 했다. 내가 지정 성별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는다면? 그런데 내가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고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이 스스로를 남성으로 정체화하는 사람이라면…난 게이인가??? 이런 거 다들 궁금하지 않나? 나만 그럼?

이 책을 읽으면서 정체성을 갖는 것이 소속감을 가지고 연대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무엇으로 불리거나 불리지 않길 원하는지 주장할 수도 있고, 그런 힘의 원동력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거기에 얽매여 남과 나를 구분짓고, 또다른 배제를 낳고, 또한 나를 규정하기 위해 나를 억압하는 세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모순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조금 웃기라고 일부러 반복되는 표현을 쓴 것 같기도 한데, 저자가 인터섹스 아동에 대해 의료진들이 성별을 남성 또는 여성으로 지정해버리고 거기에 맞춰 외과 수술을 하는 상황에 대한 문제점을 호소하고 다녔을 때 다양한 단체들의 반응들이 이 점을 잘 보여주지 싶었다.

-우리가 전국적인 규모의 여성단체 이사회에 연락을 취했을 때, 단체 대표단은 IGM이 끔찍한 일이며 누군가가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IGM이 왜 여성 이슈인지 알고 싶어 했다.
-성취감에 들뜬 우리는 전국적인 규모의 동성애자단체에도 IGM 문제 해결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내가 생각해도 간절함이 묻어났던 발표를 듣고 난 후 이들은 IGM이 끔찍한 일이며 누군가가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IGM이 왜 동성애자 이슈인지 알고 싶어 했다.
-우리는 트랜스젠더단체에서의 연설을 통해서 완벽한 성공을 거두기로 했다. 젠더퀴어함은 이들의 맥박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이 아주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대로 트랜스젠더활동가들은 IGM을 바로 이해했다. 이들은 모두 IGM이 끔찍한 일이며 누군가가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IGM이 왜 트랜스젠더 이슈인지 알고 싶어 했다.
-수많은 어린이에게 해를 끼치는 엄청나게 치명적이고 야만적인 일을 접했을 때, 어떤 단체도 IGM을 자신의 이슈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체성을 구분하는 규칙은 체계 안의 소음과도 같은 인터섹스 어린이의 사례가 어떤 이슈에도 해당하지 않게 만들었다.

저자는 정체성과 자아, 섹스, 젠더의 구성에 관해, 데리다, 푸코, 주디스 버틀러,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이론들을 통해 자신이 겪은 어려움들,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부분들, 또 이론들의 한계와 의문점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였다. 역자 후기나 역주를 보면 저자가 이론들을 이해하거나 현상을 파악하는데 오류가 있던 점들을 조금씩 짚어주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내가 저 이름만 들어도 묵직한 사람들 책을 직접 읽을 일은 드물 거나 없을 것 같고 ㅋㅋㅋ그래도 최대한 친절하게 그들이 주장하는 바로 언어, 구조, 권력, 뭐 이런 것들이 어떤 식으로 개인들을 억압하는 데 작동하게 되는지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고 뭐 내가 다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ㅋㅋㅋ아 뭔말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는 아니고 아..알듯 말듯 하네..하는 정도는 되었다.

읽는 동안 밑줄을 디지게 많이 쳤는데, 이제는 안다. 밑줄을 많이 칠 수록 나는 그 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고…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좀 알지 않을까? 지금은 모르지만 하여간에 이해하고 싶구만… 뭐 그런 마음이지만 나중에 다시 읽는 일은 또 희박하다는 것… 역자 후기 보다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책 옮기고 역주 친절히 달아주신 분은 양심적 병역거부, 그런데 우리가 자주 들은 그 종교 이유 아닌 사례로 병역법 위반으로 재판 갔다가 최종 재판에서 무죄 받으시고 대체 복무하셨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씩씩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많구나… 나는 이제 나랑 싸우는 것도 그만두고 숨어 살며 책이나 보고 있지만… 뭐 그렇습니다…

+밑줄 긋기
-만약 당신이 남성성이나 여성성에 관한 규범 때문에 힘겨웠던 적이 있다면, 왜 무언가에 들어맞아야 하는지 고민해본 적이 있다면, 모든 순간에 진짜 남자 또는 진짜 여자라고 느끼는 것은 아니라면,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사이의 전쟁에서 어느 편에도 서고 싶지 않다면, 여자아이같이 공을 던진다거나 너무 남자아이 같다는 이유로 놀림을 당한 적이 있다면, 바이섹슈얼, 유대인, 트랜스젠더, 아시아계 미국인, 남성과 같은 단어가 당신의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없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만약 인간이 되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고민해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앞서 이야기한 어떠한 것도 고민해본 적이 없는 매우 드문 독자라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당신도 고민할 것이기 때문이다.

-젠더를 권리의 문제로 만드는 일은 젠더 역할이나 고정관념에 순응하지 않았을 때 어떠한 결과를 마주할지 정하는 권한을 개인에게 준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젠더인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이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 그러니까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트랜스든 페미니스트든, 나이가 많든 적든 사람들 머릿속에 벽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느끼게 되거든요. 이 사람들 모두를 포함하는 더 넓은 젠더 패러다임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벽 말이에요.

-연설에서 데리다는 모더니즘의 종말을 선언했다. 계몽주의 이래로 500년 동안 지배적이었던 세계관이 끝나는 것 치고는 소박한 순간이었다. (최근 로스앤젤레스에서 했던 연설에서 데리다가 쓴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모더니즘은 이제, 그러니까…… 끝났어, 얘들아”.)
데리다는 우리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전통적인 서구 사상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데리다는 언어에 몇몇 문제가 내재해 있다고 주장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언어는 발화 공동체 구성원이 공통으로 지닌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언어는 동일성을 선호하며 특별한 것, 반복되지 않는 것, 개인적인 것에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서구 사상은 모든 차이를 서로 반대되는 두 편에 할당하고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의미도 남겨두지 않는다. 이분법은 세계를 마치 한 번의 칼질로 두 조각이 난 피자와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이편도 저편도 아닌 나머지 것들은 전부 사라지거나 쫓겨나고 만다. [그러나] 남성성과 여성성, 남자와 여자, 탑과 바텀, 부치와 펨, 진짜와 가짜 같은 익숙한 이분법 사이의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탐색하고 되찾고 지켜내려는 젠더 영역이다.
이분법은 언뜻 전체를 반으로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단 한 번의 칼질로 피자를 자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자가 정확하게 반으로 나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분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면에 대부분 ‘선과 악’의 구분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언제나 한편이 정의를 내리고 다른 편은 그에 따른 파생물이 된다.

-그러나 젠더 스펙트럼은 불가피하게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가지 진짜 젠더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외의 모든 ‘기타 등등의 젠더’는 빨랫줄에 걸린 옷처럼 남자와 여자 사이에 늘어져 있거나 정해진 궤도를 따르다가 벗어난 우주선처럼 남자와 여자 주변을 맴돈다.

-20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현재는 개인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지식에 기대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 푸코는 이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문하기를 원했다. 또한 이 같은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우리에게 어떠한 효과를 미치는지,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묻기를 원했다.

푸코는 자기 자신[이라는 개념]을 초월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순진한 믿음을 흔들고자 한다. 푸코는 자기 자신이라는 주관적인 감각에 역사와 계보가 있다는 것을, 특정한 문화적 필요와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이 주관적인 감각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서] 푸코는 주체성이 일종의 정치학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문화와 담론이 형성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우리의 존재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우리의 사유와 느낌이 담론을 통해서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설명해야 하지만, 담론이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에 개입하려는 별다른 마음이 없다.

-특권은 인식할 수 있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만약 당신이 주택자금대출을 받을 수 있는 것에서부터 가게 주인이 택시를 잡아줄 만큼 친절하게 대우하는 것까지 지금까지 한결같이 특권을 누렸다면, 당신이 세계를 경험한 방식이 세계가 움직이는 평범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여러 사회운동에 끌리는 이유는 운동이 지향하는 원칙 때문이다. 그린피스와 함께하기 위해서 고래가 될 필요는 없고, 국제앰네스티를 후원하기 위해서 외국에 있는 감옥에 갇힌 수감자가 될 필요는 없다.

-버틀러가 구사한 주요 전략은 정체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버틀러는 정체성이 어떻게 구성됐는지, 어떠한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는지, [정체성의] 구성 과정에서 무엇이 삭제되어야 했는지, 정체성이 어떻게 실재하는 것, 자연스러운 것,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될 수 있는지 [기존의 이해를] ‘거스르는’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정체성을 전복하는 방식을 택했다.

-여성이라는 정치적 범주는 이론상으로는 근사한 생각 같지만, 그 범주에는 어마어마한 인종, 계급, 젠더, 문화의 차이가 내재해 있다. 이 때문에 같은 범주 안에 있는 개별 집단이 서로 매우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갖기도 한다.

-어떤 여성들은 여성 정체성을 거부하기도 한다. 특히 여성 정체성이 중산층, 유럽 중심성, 여성성에 관한 규범에 일부러든 무심코든 의존해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에 이를 거부한다. 페미니즘은 이들 ‘여성’을 해방하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이들은 [규범에 어긋난 이들을 배제하는,] 페미니즘의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효과에 대항한다.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페미니즘은 이와 정반대의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기도 했다. 페미니즘은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여성 정체성으로 대변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거부했다. 스톤부치, 트랜스섹슈얼 남자와 여자, 크로스드레서, 인터섹스, 퀴어 청소년, 드랙퍼포머는 자매애의 깃발 아래 얼마간의 보호와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결국은 얼마간의 반발을 마주했을 뿐이다.

이 같은 거부는 그 자체로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 누가 포함되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판단하는 확실한 문제뿐만 아니라 누구에게 판단의 자격이 있는지 결정하는 미묘한 문제도 있다. 누가 판단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판단하는 행위는 위계를 만들어낸다. 이 위계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여성으로 판단할 자격이 있는 여성이라는 정당성을 먼저 갖게 된다. 해방운동은 새로운 위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계를 없애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이분법이 그러하듯이 여자와 남자라는 용어는 완벽하게 상호 의존적인 데다가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것, 이분법을 퀴어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짓눌러버린다.

이처럼 페미니즘은 마치 세계가 원래부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로 명확하게 나뉘는 곳이라는 듯 [이분법적인] 정치학을 전개함으로써 젠더 위반이라는 개념을 흐릿하게 만들고 젠더 규범을 넘어서는 이들의 정치적 열망을 어둡게 만드는 데 실제로 일조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동성애자가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속성을 지닌다는 믿음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개인의 섹슈얼리티가 기본적인 사회적 정체성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화했다.

-다시 한번 차이는 밀려나고 말았다. 이는 버틀러가 지적하듯이 권력이 지닌 “기이한 능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심층적인 수준에서 살펴본다면 “권력은 실패가 예정된 반란만을 선동한다”. 반란이 실패하는 이유는 자신이 대항하는 것을 자신의 구성 조건으로 무의식적으로 채택하고 재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 여성을 구성하는 복잡다단하고 주변화된 하위 집단에 대해 논의하는 일을 정치적 진보의 이름으로 나중으로 미루면서 차이를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이 진보를 위해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주변화된 여성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경험을 마침내 경청하고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본질주의의 단순명료한 진술은 정체성을 형성하는 실천이 아니라 배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보인다. 이 같은 본질주의적 주장은 ‘생물학은 운명이 아니다’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부정한다.

-강압적인 페미니즘에서 멀어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갈등과 분열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온갖 종류의 모순을 고스란히 지닌 채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동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통일성은 답답한 이야기이며, 어설픈 통일성은 어김없이 특별함, 유동성, 차이를 억압하고 만다.

-완벽하고 최종적인 여성의 정의를 실제로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면에서 여성을 대변하는 일 외에도 역설적으로 [여성] 범주 자체를 질문하고 해체하는 일 역시 페미니즘의 의제여야 한다. 새로고침이 이루어진 페미니즘에서 여성은 더 이상 전제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따라 사라지고 다시 형성되는 과정을 거치며 항상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것이 된다. 또한 정체성의 유동성은 더 이상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의 중요한 전술이자 핵심적인 목표가 되며, 정체성의 파열은 가부장제(그리고 젠더 고정관념)를 가능하게 하는 남성과 여성,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을 전복하는 수단이 된다. 통일성의 상실과 범주의 불완전함은 여성이 새로운 의미, 새로운 존재 양식,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누리도록 도울 것이다.

-내가 궁금한 지점은 [자신이] “여자라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다. 모든 여자가 똑같은 느낌을 경험할까? 여자라는 것에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인 느낌이 있는 걸까? 그 느낌이 여성성에 따른 결과일까? 만약 그렇다면 크로스드레서나 드랙퀸도 ‘여자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스스로를 여자로 생각하는 것이 여성의 몸을 이루는 각 부분의 총합 이상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일관성에 대한 버틀러의 논의로 돌아가보자. 자신을 여자라고 이해하고 밝히는 일은 어떤 면에서 권위를 부여하는 일이다. 개인에게 섹스, 젠더, [성적] 욕망 사이의 적절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메리엇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를 닦을 때, 차를 운전할 때, 컴퓨터를 할 때처럼 [일상을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젠더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젠더화된 행동이나 상황과 연루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특정한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언제나 두 개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다.

남자와 여자가 유일하게 인식 가능한 젠더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만이 의미 있는 젠더라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젠더가 구성된다면, 여성이 여자가 될 필요는 없다. 여성은 여자가 될 수 있는 만큼 남자가 될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남성성 또한 남성의 속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속성이 될 수도 있으며, 마찬가지로 여성성이 남성의 속성이 될 수도 있다. 만약 문화가 섹스를 이해하는 방식이 젠더라면, 섹스가 고정되어 있고 이분법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젠더가 다양하고 가변적인 것이 아닐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문화가 섹스라는 날것의 재료로 만드는 것이 젠더라면, 우리는 이처럼 마법 같은 변화가 정확히 어떻게 일어나는지 질문해야 한다. 어쩌면 섹스와 젠더의 구분은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유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자문했다. ‘왜 모든 사람이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한눈에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 왜 사람들이 단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비좁은 상자에 끼워 맞춰야 하는 거지? 그건 젠더 체계의 핵심을 이루는 폭력적인 억압을 재연하는 게 아닐까?’

젠더 구분을 지그재그로 넘나들면서 한 쇼핑은 물론이고 내가 일으킨 모든 사회적 불편함과 혼란은 아마도 어떤 자유를 얻기 위한 대가였을 것이다.

-내게 버틀러의 논의가 지닌 주요한 가치는 이러한 상황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며 체계 안에 균열이 존재한다는 점을 깨닫도록 도와줬다는 데 있다. 이 깨달음은 변화를 일으키는 마중물이 됐다. 어디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아닌 이들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로 존재한다는 의미도, 내가 반드시 남자와 여자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님을 믿게 됐다. 다르게 생각할 여지를 마련해준 것이다.

-정체성 정치학은 우리에게 골치 아픈 유산을 남겼다. 바로 소수자 집단 또는 고통의 위계에서 더 많은 억압을 겪는 집단은 누군가를 배제해도 괜찮다는 인식이다. 이에 백인만 있는 단체는 용납할 수 없지만 흑인만 있는 단체는 상관없다고 여기고, 트랜스가 없는 동성애자단체는 문제가 있지만 트랜스만 있는 단체는 완벽하게 타당하다고 믿게 된다.

-자신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일,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 더 작고 동질적인 집단으로 나뉘는 일에는 나름의 힘이 있다. 그러나 나는 정체성을 정치의 주요 기반으로 삼는 일이 여전히 우려스럽다.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점점 더 잘게 쪼개진 우리가 정체성 정치의 원심력 때문에 서로 멀리 떨어진 채 각자의 궤도만 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우리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공통의 문제를 찾아야 하는 시점이고, 젠더는 바로 이 공통의 문제에 해당한다. 젠더권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집단이 소유할 수 없으며,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배제할 수 없다. 젠더권은 인권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젠더권은 모두를 위한 것이며, 각자가 어떠한 정체성을 지녔는지는 핵심이 아니다. 트랜스젠더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원하지 않는 일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지원하지 않는 일만큼이나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포용성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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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3-07-12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독하러 일어나리…
(얼핏만 읽었는데 저도 그럼)

반유행열반인 2023-07-12 21:05   좋아요 1 | URL
아니 뭔 댓글이 알쏭달쏭 무지개여 유수님 ㅋㅋㅋㅋㅋ

유수 2023-07-12 21:13   좋아요 1 | URL
이런 거 다들 궁금하지 않나? 나만 그럼?에 대답했어요 ㅋㅋㅋ 저 부르는 느낌 들어서 제대로 읽지도 않고 대답함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7-12 21:18   좋아요 1 | URL
아, 그럴 땐 나도 그래, 해야죠 ㅋㅋㅋㅋ

유수 2023-07-12 21:1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복장 터지시죠… 앞으로도 실례하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12 21:21   좋아요 3 | URL
아냐 안 터져 신비주의 같애요 ㅋㅋㅋㅋㅋ

유수 2023-07-12 23: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리뷰가 너무 좋습니다.
아는 것, 어디까지만 아는 것,에 대해 얼마나 솔직하게 혹은 얼마나 적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지는 능력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함은 과소평가되어있다 ㅜㅜ 진짜 이 리뷰에 밑줄을 디지게 쳤고.. 나는 반님과 다르게 나중에 다시 읽어봐야지.. 이책도 담고.. 봐야지 하던 책 또 봐주세요~~

반유행열반인 2023-07-13 07:54   좋아요 2 | URL
아이참 난 몰라, 눈 뜬 채 감고 봤지렁 이걸 좋게도 올려쳐주신다.
저는 솔직함을 과대평가 하는 분들에게는 사랑 받고, 이걸 노출증이라고 혐오하는 분들은 에비지지 꺼져 하는 것 같습니다 ㅋㅋㅋ
사랑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이 책은 제가 꼽은 세 분야 관심자든 누구든 어려운 책들 뛰어들기 전에 한 번은 보면 생각 넓히기든 정리든 비판이든 도움되는 부분 있을 거 같구요, 제 리뷰는 한 번 보셨으면 됐죠 ㅋㅋㅋㅋ에비지지야 지지 손 닦자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580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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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9 김광규.

나랑 또래이거나 두어 살에서 여덟 살까지 어린 시인들 시를 읽다가, 나보다 사십 살도 넘게 훌쩍 어르신인 노인 시인의 시집을 샀다.
사회화 단원을 가르칠 때마다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하는 시인의 ‘나’라는 시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내가 직접 안 읽고 예전의 어색했던 TTS프로그램 돌려서 읽어주면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하는 부분에서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숨도 안 쉬고 기계 목소리가 그렇게 읽어주면 웃기긴 하다. 그러다가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하면서 진지 빨고 나면 숙연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웃던 아이들과 시험장에서 마주칠 지도 모르는데, 그런 걱정 하면서도 수능 국어 공부하다보니 김광규 시인 시를 가끔 만났다. 시인이 옮긴 브레히트 시집도 갖춰 놨는데 몇 년 째 묵고 있다.

시집을 한참 보다가, 너무 재미가 없어서, 못되처먹은 마음으로 역시, 사랑 받는 시인은 일찍 죽은(혹은 일찍 절필한) 시인이다, 이러고 몇 안 되는 아는 젊어 죽은 시인들의 연보를 훑었다.

윤동주(1917-1945) 27세 사망
이상(1910-1937) 26세 사망
김소월(1902-1934) 33세 사망
백석(1912-1996) <사슴> (1936) 23세 발표

그런데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생각보다 나이 들어서 출간한 시집이라 더 찾기를 그만두었다. 못되처먹은 나새끼…

80세 넘은 연세에도, 가슴 속에 기계장치 넣고도 떨리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적은 시일 건데, 시는 온통 달궈진 숯덩이 같은 줄만 알던 어린 놈의 새끼는 타고 남은 재에 손을 넣고 이게 남은 온기인가 아닌가 긴가민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시집의 후반부 4부에 실린 시들은 조금 좋았다. 아프거나 죽는 이야기인데 그게 뭔가 날것처럼 와닿아서 이런 건 역시 으르신 아니면 못할 말들…하고…

자신은 없지만 80세가 되면 이 시집 다시 읽으면 어떨까 궁금했다. 40년 전 젊은 나새끼를 욕하면서 그무렵이면 절절하게 와닿는 시어들을 다시 읽어내려갈지, 아님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불덩이 내놔, 하고 젊을 적에 쓴 시들만 찾아 읽고 다닐지 궁금하다.

+밑줄 긋기

정유재란 때도 살아남은
조선 닭입니다
“늙은 수탉 같으니라구!”
왜 자꾸만 꾸벅꾸벅 조느냐고 구박하지 마세요
아시겠지만 요즘은 병아리들이
채 자라기도 전에
달걀을 낳기도 전에 모두
프라이드 치킨이 되잖아요
플러스 아니면 마이너스
1 아니면 0 사이에서
성숙할 틈도 없이 깜빡거리다
꺼져버리는 디지털 시대에 느닷없이
조류독감으로 가금 3천만 마리 매몰되었지요
역겨운 악취 참기 힘든 2017년
붉은 닭의 해에도
산 채로 땅속에 묻히지 않고
통닭구이로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끈질기게 살아남은
장닭을 본 적 있나요?
-꼬끼오 꼬오 꼬!
들리지 않아요?
새벽 뒤뜰에서 수탉 우는 소리
(‘조선 닭’ 전문)
수능 국어 기출 풀다보면 ‘털보네 대장간’에 낫인지 호미인지로 걸리고 싶다는 시가 나오는데, 이 시에서는 희미하게나마 그 시 비슷한 느낌이 남아 있어서 옮겨 적었다. 한 편으로는 불길하게도 읽히는 시이다. 우리 꼰대 푸르게 푸르게-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노병은 죽지 않는다- 뭐 그렇게도 읽히는 시여서…수탉이라 그럴지도…ㅋㅋㅋㅋㅋ 프라이드치킨 맛있잖아요.

-코펜하겐 해변 호텔 식당에서
여권을 잃어버린 날
도심의 성 페트리 교회에서
예술원 회원들의 박수 받던 날
그러니까 15년 전 5월 중순
초저녁에 시상식을 독점 촬영한
사진사는 약속한 필름을 보내주지 않았다
몇 년 뒤 라이프치히 도서관에서
작품 낭독회 끝난 뒤 우연히
저녁 뷔페 자리에서 마주쳤을 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
와인 잔 뒤집어엎고 얼굴 붉히며
다시 한번 사진 보내주겠다
약속하고 십수 년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시상식 사진 대신 나에게
자기 이름을 남겨준
문학 전담 여류 사진사
언젠가 또 만나면 어떻게 하나
(‘그녀 생각’ 전문)
ㅋㅋㅋ제목만 보면 은은할 거 같은데 사진사님 필름 어쨌어… 남류 시인 화나서 여류 사진사 찾잖아… 옛날 사람의 옛날 생각하는 옛날 시이다…(이제 여류- 소리하면 삼류랍니다) 아니 근데 뒤끝 쩔만 하다. 코펜하겐에서 라이프치히까지 갔는데 여태 사진 안 주고…소용 없을 자기 이름만 남겨주고…시 한 편도 남겨주고…

-수술을 며칠 앞두고 환자를
격려하며 찾아온 중학교 때 친구들과
점심을 함께 먹고 헤어졌다
안국역에서 3호선 전철을 타고 떠나가는
늙은 친구들 배웅하고 돌아서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슬퍼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혹시 앞서가게 되더라도 제각기
살아남아 각종 세금과 건강보험료에 시달리며
지저분한 잔반을 치워야 할 그들이
문득 불쌍해져서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 전문)
ㅋㅋㅋㅋㅋ끝까지 읽어야 웃든 울든 하는 시. 문득 몇 살부터 먼저 죽는 게 승자인 나이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건강보험료를 낸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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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3-07-09 22: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Tts로 읽어주는 거 너무 혹합니다. 사회화란 대체 어떤 단원인 것인지도 귱금.. 사십년 후 저도 궁금해요. 적어주시는 거 제가 오래 볼 수 있길ㅋㅋ 사심 가득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7-10 11:39   좋아요 3 | URL
일단 내 전공도 아닌 지리를 한 학기 주절주절…가르치다가요…인간이 어떻게 사회적 존재로 자라나는지에 관해 사회화, 자아정체성, 뭐 이런걸로 주절주절하다가 지위와 역할, 역할갈등, 집단, 사회구조 이런 거 겉핥기 하고서 자 다음엔 문화가 뭔지 알아보자 이러고 다음 단원 넘어가요 ㅋㅋㅋ 중학교에 오래 있으면 내 머리도 중학생에 머무른다… 감사한 사심인데 내 거기에 보답할 수 있을지는 장담을 못하여 송구합니다…가는 데 순서 없다잖아요…ㅋㅋㅋㅋㅋ

유수 2023-07-10 11:49   좋아요 2 | URL
그뤃죠. 제가 먼저 갈 수 있으니 ㅋㅋㅋㅋㅋㅋㅋㅋ뭐 소망은 가질 수 있자나요! 집에 오래 머무르는 자로 뜨악스럽네요.
중학교 사회 때문에 문과 못간 저는… 시 읽어주는(들려주는!) 사회 선생님 크으.. 반님에.. 또 취함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7-10 11:53   좋아요 2 | URL
아 그런데 나 몇 년 전에 선거 끊어(?)가지고 진로 고민 심합니다… 탈정치 하기로 했는데 정치 가르쳐야 되고… 사드 읽는 인간이 애들한테 규칙 준수 품행방정 이런 거 강요해야 되서 힘듦…

유수 2023-07-10 11:56   좋아요 2 | URL
통재로다. 반님한테 저 쥬시한거.. 멋보다 솔직함을 못 배우는 애들이여.. 덕분에 제가 신나서 배우고 있는듯.. 무엇을 배웠노?는 묻지 마시고..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7-10 12:01   좋아요 2 | URL
그거 제가 가르친 거 아니고 (나 누구 가르치는 게 제일 시르다 ㅋㅋㅋㅋ) 원래 유수님 맴 속 있던 거 내 핑계대고 끄집어 내는 거라고 외쳐봅니다 ㅋㅋㅋㅋㅋ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네 맘 속에 다 있어 (오글오글오글)

반유행열반인 2023-07-10 12:06   좋아요 2 | URL
아니 이건 상관 없는 이야긴데 유수님 이름 착 누르면 프로필 메인에 마니아 챡-뜨는데 그거 진짜 개간지인 거 아십니까? 언니들 사진만 촥- 깔리는데 뭔가 일관되니 멋있음…나는 막 꾸질꾸질 이거저거 내가 저 시리즈 왜 매니안데 ㅋㅋ하는 거 막 뜨는데…ㅋㅋㅋㅋ

유수 2023-07-10 12:21   좋아요 2 | URL
빈수레 아니에요? 저처럼 시른책 싫다 쓰지도 못하고.. 오프로 이빨은 많이 깝니다만ㅋㅋ 편독..뿐 아니라 편향이 넘 심해서 사회적응 어렵고(필요성도 모름) 그래요. 반님 리스트가 훨 좋음

반유행열반인 2023-07-10 12:55   좋아요 2 | URL
아니 근데 저는 거의 제대로 읽지도 못한 분들인데 (막 너무 오래 전에 한 권 혹은 0권? ㅋㅋ) 저렇게 주르륵 모아놓으니까 예쁘네요…ㅋㅋㅋㅋㅋ

Yeagene 2023-07-10 23: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김광규 시인 예전에 많이 좋아했었네요 ㅎㅎ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도 좋고 상행도 좋고 또 무슨 시가 있더라 가물가물...

반유행열반인 2023-07-11 14:09   좋아요 1 | URL
역시 시집 많이 보신 예진님 ㅎㅎ김광규 시인 오래 전 시들은 좋은 게 많나 보네요. 열 몇 권 내신 거 보면 그건 그거대로 대단한 듯싶고…

얄라알라 2023-07-10 23: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ㅋㅋ못되*먹*은 나*끼...ㅋㅋㅋ열반인님이 이리 말씀하시면 왜일케 귀여우신(그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ㅎ)건지...ㅋ

‘털보네 대장간’에 낫인지 호미인지로 걸리고 싶다
우리꼰대 푸르게 푸르게...저 그런 언어유희 한참 있어야 이해합니다. 저는 ㄲㄷ인가봐요. ^^
도서관을 그렇게 드나들어도 일 년에 시집 하나 안 빼들어본 저는 이렇게 소개해주시니 읽고 공부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11 14:10   좋아요 1 | URL
병든 사자가 풀을 뜯지 건강한 사자는 고기를 먹는대요 ㅋㅋㅋ(이것은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이었나…) 얄님께 필요한 피 되고 살 되는 책 잘 찾아보고 계시지 싶습니다 ㅎㅎㅎ 철없고 버릇없는 못된 새끼를 귀엽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희선 2023-07-12 0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광규 시인 여든이 넘었군요 젊어서 죽은 시인에 기형도 시인도 있군요 오래 시를 쓰는 거 쉽지 않을 듯합니다 비슷한 나이가 됐을 때 읽으면 어떨지... 나이를 먹어도 생각은 예전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예전에 쓴 게 훨씬 나은 것 같기도 해요


희선

반유행열반인 2023-07-12 10:58   좋아요 0 | URL
기형도 시인도 좋아하시나 보네요!!! 저는 아주아주 어릴 때 입 속의 검은 잎 읽었던 것 같은데 좋았다 말고 기억은 잘 안 나요 빈 집에 갇혔네? ㅎㅎㅎ 다른 이웃분도 나이 먹어도 아마 취향은 안 변할 거라 하시던데 희선님께도 같은 말씀 들으니 그렇구만 ㅋㅋㅋ (그럼 시집 팔까..) 싶어요. 젊어서 쓴 게 낫다니 시인이 젊으실 때 옮긴 브레히트 시집도 있으니까 읽어보려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