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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보낸 메일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80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2월
평점 :
-20230709 김광규.
나랑 또래이거나 두어 살에서 여덟 살까지 어린 시인들 시를 읽다가, 나보다 사십 살도 넘게 훌쩍 어르신인 노인 시인의 시집을 샀다.
사회화 단원을 가르칠 때마다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하는 시인의 ‘나’라는 시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내가 직접 안 읽고 예전의 어색했던 TTS프로그램 돌려서 읽어주면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하는 부분에서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숨도 안 쉬고 기계 목소리가 그렇게 읽어주면 웃기긴 하다. 그러다가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하면서 진지 빨고 나면 숙연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웃던 아이들과 시험장에서 마주칠 지도 모르는데, 그런 걱정 하면서도 수능 국어 공부하다보니 김광규 시인 시를 가끔 만났다. 시인이 옮긴 브레히트 시집도 갖춰 놨는데 몇 년 째 묵고 있다.
시집을 한참 보다가, 너무 재미가 없어서, 못되처먹은 마음으로 역시, 사랑 받는 시인은 일찍 죽은(혹은 일찍 절필한) 시인이다, 이러고 몇 안 되는 아는 젊어 죽은 시인들의 연보를 훑었다.
윤동주(1917-1945) 27세 사망
이상(1910-1937) 26세 사망
김소월(1902-1934) 33세 사망
백석(1912-1996) <사슴> (1936) 23세 발표
그런데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생각보다 나이 들어서 출간한 시집이라 더 찾기를 그만두었다. 못되처먹은 나새끼…
80세 넘은 연세에도, 가슴 속에 기계장치 넣고도 떨리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적은 시일 건데, 시는 온통 달궈진 숯덩이 같은 줄만 알던 어린 놈의 새끼는 타고 남은 재에 손을 넣고 이게 남은 온기인가 아닌가 긴가민가 하고 있었다. 그래도 시집의 후반부 4부에 실린 시들은 조금 좋았다. 아프거나 죽는 이야기인데 그게 뭔가 날것처럼 와닿아서 이런 건 역시 으르신 아니면 못할 말들…하고…
자신은 없지만 80세가 되면 이 시집 다시 읽으면 어떨까 궁금했다. 40년 전 젊은 나새끼를 욕하면서 그무렵이면 절절하게 와닿는 시어들을 다시 읽어내려갈지, 아님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불덩이 내놔, 하고 젊을 적에 쓴 시들만 찾아 읽고 다닐지 궁금하다.
+밑줄 긋기
정유재란 때도 살아남은
조선 닭입니다
“늙은 수탉 같으니라구!”
왜 자꾸만 꾸벅꾸벅 조느냐고 구박하지 마세요
아시겠지만 요즘은 병아리들이
채 자라기도 전에
달걀을 낳기도 전에 모두
프라이드 치킨이 되잖아요
플러스 아니면 마이너스
1 아니면 0 사이에서
성숙할 틈도 없이 깜빡거리다
꺼져버리는 디지털 시대에 느닷없이
조류독감으로 가금 3천만 마리 매몰되었지요
역겨운 악취 참기 힘든 2017년
붉은 닭의 해에도
산 채로 땅속에 묻히지 않고
통닭구이로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끈질기게 살아남은
장닭을 본 적 있나요?
-꼬끼오 꼬오 꼬!
들리지 않아요?
새벽 뒤뜰에서 수탉 우는 소리
(‘조선 닭’ 전문)
수능 국어 기출 풀다보면 ‘털보네 대장간’에 낫인지 호미인지로 걸리고 싶다는 시가 나오는데, 이 시에서는 희미하게나마 그 시 비슷한 느낌이 남아 있어서 옮겨 적었다. 한 편으로는 불길하게도 읽히는 시이다. 우리 꼰대 푸르게 푸르게-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노병은 죽지 않는다- 뭐 그렇게도 읽히는 시여서…수탉이라 그럴지도…ㅋㅋㅋㅋㅋ 프라이드치킨 맛있잖아요.
-코펜하겐 해변 호텔 식당에서
여권을 잃어버린 날
도심의 성 페트리 교회에서
예술원 회원들의 박수 받던 날
그러니까 15년 전 5월 중순
초저녁에 시상식을 독점 촬영한
사진사는 약속한 필름을 보내주지 않았다
몇 년 뒤 라이프치히 도서관에서
작품 낭독회 끝난 뒤 우연히
저녁 뷔페 자리에서 마주쳤을 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
와인 잔 뒤집어엎고 얼굴 붉히며
다시 한번 사진 보내주겠다
약속하고 십수 년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시상식 사진 대신 나에게
자기 이름을 남겨준
문학 전담 여류 사진사
언젠가 또 만나면 어떻게 하나
(‘그녀 생각’ 전문)
ㅋㅋㅋ제목만 보면 은은할 거 같은데 사진사님 필름 어쨌어… 남류 시인 화나서 여류 사진사 찾잖아… 옛날 사람의 옛날 생각하는 옛날 시이다…(이제 여류- 소리하면 삼류랍니다) 아니 근데 뒤끝 쩔만 하다. 코펜하겐에서 라이프치히까지 갔는데 여태 사진 안 주고…소용 없을 자기 이름만 남겨주고…시 한 편도 남겨주고…
-수술을 며칠 앞두고 환자를
격려하며 찾아온 중학교 때 친구들과
점심을 함께 먹고 헤어졌다
안국역에서 3호선 전철을 타고 떠나가는
늙은 친구들 배웅하고 돌아서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슬퍼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혹시 앞서가게 되더라도 제각기
살아남아 각종 세금과 건강보험료에 시달리며
지저분한 잔반을 치워야 할 그들이
문득 불쌍해져서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 전문)
ㅋㅋㅋㅋㅋ끝까지 읽어야 웃든 울든 하는 시. 문득 몇 살부터 먼저 죽는 게 승자인 나이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건강보험료를 낸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