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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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었던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은 말을 옮겨본다. 『멋있게 나이가 드는 게 아니라 원래 멋있던 사람이 나이가 든 것이다.』 이 짧은 문구가 한동안 내 가슴을 헤집어놓았다. 어쩌면 나는 여기에 해당되지 못할까 싶어서.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나는 멋진 어른이 되는 게 꿈이다. 곱게 늙는 것이 나의 최종 목표다. 이 멋지다는 기준은 물론 주관적일 테지만 내가 고수하는 것들이라면 기본적인 예의범절과 청결, 그리고 유머러스 한 스푼 정도랄까. 무슨 귀족이나 양반을 흉내 낼 것도 아닐뿐더러 오늘날에 그렇게까지 했다간 유난 떤다는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그러니 꾸안꾸 패션처럼 은은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로 호감을 준다면 그만이겠다. 아무튼 내가 본받고자 하는 멋진 어른들은 대개 차분하고 온화하며 감정 기복이 잘 없다는 게 특징이다. 그러면서 일이든 사생활이든 제시간들에 충실하고 또 자족할 줄도 알았다. 내게는 이런 타입이야말로 진국이라 생각되지만 아마도 당신을 포함한 대다수가 시대에 뒤처진 구식으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젊은 세대가 이렇게 살아간다는 건 무척이나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스마트 시대가 되고부터 세상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각종 트렌드와 신 문화를 쫓아가기 바쁜 대중들은 여유를 잃어버렸고, 어느새 각자도생을 외치는 1인사회가 되고 말았다. 이 각박해진 세상 가운데서 나 혼자 템포를 늦추려니 자연히 사람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되고자 하는 멋진 어른은 뭐랄까, 매우 고독한 하나의 ‘직업‘이라 하겠다. 이제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옛 직업 중 하나라서 무시당하기 일쑤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특별해질 수가 있다. 이 직업은 신기하게도 젊어서 보다 세월을 넘기면서 빛을 보게 되는데, 나이 들고도 무너지지 않는 분들의 비결이 바로 평생을 고집해왔던 반듯함 덕분이란 말씀. 삼십 대의 내가 이걸 느낄 정도면 말 다 한 게 아닐까.


감상에 젖어 얘기가 샜는데, <남아 있는 나날>은 내 취향을 100% 저격한 작품으로써, 이제껏 읽었던 저자의 작품 중 가히 최고였다. 이름 좀 날렸다 싶은 거장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따라붙는 수식어 같은 게 있다. 예를 들어 카뮈에게는 부조리가, 헤세에게는 방황이, 하루키에게는 섹스가 곧 그것이다. 내가 생각한 이시구로의 수식어는 ‘소외‘이다. 저자는 영국에서 자란 일본인으로서 소외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감정을 작품 곳곳에다 진하게 우려내왔다. <남아 있는 나날>은 다른 작품처럼 대놓고 소외된 느낌은 없었지만 스스로를 삶에서 소외시켰음을 깨닫는 한 남자의 회상으로 끝맺는다. 어쩌면 삶 전체에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을 법도 하지만 주인공은 끝까지 ‘멋진 어른‘으로 남기를 소망했다.


영국의 1세대 집사였던 아버지를 따라서 집사가 된 스티븐스. 업계의 명예 단체 ‘헤이스 소사이어티‘의 회원인 그는 자신이 왜 위대한 집사인지를 지난날의 일들과 함께 설명한다. 스티븐스는 현재 모시는 주인 어르신께 일주일 휴가를 받고 여행을 나선다. 그리고 하루의 일정을 소화하며 어느덧 노신사가 된 자신의 과거를 곱씹어 본다. 그는 전 주인을 섬기는 데에 대부분의 세월을 바쳤다. 저택과 하인들을 관리하며 방문객마다 최상의 서비스를 선사했던 집사 스티븐스는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 스티븐스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았더랬다. 언제나 직무의 원칙을 앞세웠던 그는 직원들의 해고나 부친의 운명까지도 어쩔 수 없는 일인 양 넘겼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만한 예를 표했으나 지나고 보니 못다 했던 선심에 미련이 남는 것이다. 정신없이 바빴던 일과 속에서 그 정도면 괜찮은 처신이었지 싶다가도 마음이 불편한 건, 왜 항상 시미치 떼면서 사느냐는 옛 동료 K의 발언 때문이었다. 스티븐스는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1급 집사로서의 가장 먼저되는 덕목이라면 곧 품위이다. 말과 행동 가짐의 교양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도 ‘확고한 소신‘을 지닐 줄 알아야 한다. 설령 나를 곱지 못한 시선 속에 가두는 상황일지라도 내 신념을 따라야 한다. 과연 그 말대로 스티븐스는 품위가 자질에서 나오는 게 아님을 증명해 보였다. 그렇게 평생을 지켜온 그 품위가 훗날 비난의 화살로 돌아오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극진히 모셔왔던 전 주인의 만행이 드러나자 스티븐스의 명예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안타까우나 그는 자신의 도리를 다 한 것뿐이라며 애써 자위했다. 스스로가 위대한 집사임을 내내 강조했던 것은 어떤 자부심과 긍지 때문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걸었던 자기최면인 셈이다. 차마 고개도 들 수 없을 만큼 비참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점수 미달은 그렇다 쳐도 집사로써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있어선 안되었다. 하여 프로정신으로 끝까지 자신의 확고한 소신을 밀어붙인 스티븐스는 진정 위대한 집사이다. 이렇듯 사람이 무너지지 않는 비결은 앞서 얘기했듯 평생 지켜왔던 본인의 반듯함에 달려있다. 나를 향한 타인의 비난과 질타를 나까지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나만큼은 끝까지 자신을 믿고 응원해 주어야 한다.


드디어 K와 재회한 주인공. 사실 이 여행은 K의 편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어쩌면 그녀가 다시 복귀하고 싶은 게 아닐까 하는 그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결혼생활의 불만족이라는 염려 또한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은 있었지만 마음이 가는 곳으로,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았기에 후회는 하지 않았다. K에게는 있고 스티븐스에게는 없는 것. 바로 감정에 솔직해지는 태도이다. 그가 자신의 남은 날들을 잘 보낼 수 있도록 K는 다시 한번 솔직해지기로 한다. 잠깐 눈물 좀 닦고...


삶이 보내오는 신호를 나는 몇 번이나 놓쳤을까.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을, 오늘을,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가만있어도 흘러가는 시간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진 않는다. 그러니 외면치 말 것. 숨지도 않을 것.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떤 실망과 좌절에도 무너지지 않을 위대함에 도달할 것이다. 어떻게든 버티다 보면 찾아오는 주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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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04 0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품위를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물감 2023-12-04 09:16   좋아요 1 | URL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힘찬 월요일 되세요^^

새파랑 2023-12-04 1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물감님은 이시구로의 이 책이 가장 좋으시군요~!! 전 이 책을 이시구로의 첫 책으로 읽었는데 100퍼센트 취향이라고 하시니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다른 아는 분도 이 책이 최고라고 하더라구요~!!

멋진 어른이 되는게 쉽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좋네요~!!!!

물감 2023-12-04 11:22   좋아요 2 | URL
지금 이 여운이 연말까지 갈 것 같습니다. 마치 제 삶의 길잡이처럼 느껴졌어요. 저의 첫 인생책이 되었습니다🙂

잠자냥 2023-12-04 13:24   좋아요 2 | URL
진짜 다시 읽을 거여 술파랑???
100권 채운다며 ㅋㅋㅋ

새파랑 2023-12-04 13:36   좋아요 1 | URL
내년에...

coolcat329 2023-12-31 10:27   좋아요 3 | URL
근데 새파랑님이 왜 술파랑이 된건가요? ㅋㅋ
올해 술을 많이 드셨나요?

새파랑 2023-12-31 11:17   좋아요 3 | URL
바로 윗분의 모함입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3-12-31 11:29   좋아요 3 | URL
모함은 아니고…. 술파랑이 술을 하도 마시면서 간헐적 음주 운운하던 날 은바오가 지어준 별명입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3-12-04 1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말 아직 멀었어요...ㅠㅠ
같은 책을 읽어도 이렇게 감상이 다른 게 참 재미나요.
전 이거 집사 생활 너무 답답하던데... ㅎㅎㅎ

물감 2023-12-04 13:39   좋아요 2 | URL
배경 말고 개인에 초점을 맞춰서 보신다면 제가 말하는 근사함을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여튼 저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참 많았어요. 다 자신을 닮은 이야기에 빠지는 법 아니겠습니까ㅎㅎㅎ 물론 제게도 집사의 삶은 숨막혀 보이긴 해요...

서니데이 2023-12-05 2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물감 2023-12-05 21:51   좋아요 2 | URL
북플만 들어가느라 당선되었는지도 몰랐네요ㅎㅎ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님도 연말 잘보내시기 바랍니다😀

페크pek0501 2023-12-17 1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칼럼에 집중하는 동안 물감 님은 리뷰에 집중하고 계셨던 거군요. 흠흠~~~
이렇게 술술~~ 리뷰가 잘 읽히다니... 원래 이렇게 잘 쓰셨나요?(이 말이 생각나는군요. 원래 태어날 때부터 예뻤나? 하는...)
글의 상반부를 읽으면서 품격 있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품위, 라는 낱말이 나오네요.
원래 멋있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도 멋있다, 가 맞을 것 같네요. 없던 멋이 나이가 들어 갑자기 생길 순 없을 터. 으하하~~~ 나는 여기서 깨지네요. 그럼 바꾸겠습니다. 나는 추하지 않게 늙기로.
남아 있는 나날은 팟캐스트, 인가로 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잘 읽고 갑니다.^^

물감 2023-12-17 18:55   좋아요 2 | URL
좋은 작품을 만나면 좋은 글이 나오는가 봅니다. 잘 썼다 해주는 분도 페크 님 밖에 없지만요 ㅎㅎㅎ 아무래도 집사가 주인공이라 그런지 문장이나 분위기가 고품격이에요. 제가 딱 가까이 지내고 싶은 그런 스타일이랄까. 차마 제가 그런 캐릭터는 될 자신이 없고요 ^^; 추하지 않게 늙자는 생각도 멋진 어른이라서 가능한 생각과 다짐이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비록 태생이 멋지진 못해도 나를 품위있게 가꾸어가려는 노력 자체가 멋있잖아요 ㅎㅎㅎ 페크님은 멋진 어른이십니다 하하핳

coolcat329 2023-12-31 1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물감님 저도 이시구로 이 책을 가장 좋아합니다. 보통 <나를 보내지 마>를 더 좋아하더라구요.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너무 맘에 들어서 구입까지 했어요.
저도 새파랑님처럼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물감님 인생책 만나신 거 축하드려요!
저는 인생책이 도대체 뭔지 아직 감이 안와서...😅

물감 2023-12-31 13:00   좋아요 2 | URL
하하하 저도 인생책이란 게 뭘까 싶었는데 겨우 알게 됐지 뭡니까요. 삶의 지침서? 나침반? 길잡이? 뭐 그런 역할이지 않나 싶어요. 전 제 반듯함(?)이 마이너스 요소가 아닐까 하며 살아왔는데 이 작품을 통해 완변한 나만의 무기임을 인정받은 기분이었어요.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 쿨캣님도 읽다보면 발견하실 거에요!
 
비늘
임재희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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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집어 든 한국소설이었는데 아쉽게도 실패했다. 정말이지 한국소설은 괜찮은 작품을 만나는 게 소설가로 등단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듯하다. 이번에 읽은 <비늘>은 소설가들의 고충과 비애를 다루고 있다. 벌써부터 뻔한 내용에 하품이 나오려 하지 않는가. 이러한 소재들은 수백 년 전의 작가들이 여러 차례 써먹었기 때문에 기대조차 안되는 게 당연하겠고, 그 사실을 현대 작가들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또다시 우려먹으려면 며느리도 손주들도 모른다는 장인의 특제 쏘스를 듬뿍 넣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런 일개 독자의 생각과 견해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내추럴한 서사와 플롯으로 정면 승부하는 작품을 만나버렸으니 이것 참 오랜만에 손가락이 근질근질합니다요.


재경과 영조는 소설 습작생 커플이었다. 방금 전에 헤어져서 과거형이 되었다. 재경은 등단에 성공했으나 여전히 무명이었고, 영조는 번번이 낙방하여 결국 꿈을 접었다. 두 사람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책들을 전부 알라딘 서점에 갖다 팔고, 돈을 반씩 나눈 뒤에 남남이 되었다. 재경은 그 돈으로 존경하는 선배 소설가를 만나기 위해 하와이로 날아간다. 그러나 선배는 소설가를 관둔지 오래였고, 오래전에 실종된 친형을 기다리는 모친과 함께 살아가는 중이었다. 이 집에 약 일주일간 신세 지면서, 또 하와이에 머무르면서 작가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등등의 진부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과 해답을 얻어 간다. 그게 다다. 놀랍게도.


유독 소설가들은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이미지가 있다. <비늘>의 주인공 재경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는데, 솔직히 이건 프레임이라고 본다. 소설가들이 집필에 앞서 얼마나 많은 연구와 현장조사를 하는데 허구한 날 골방에 틀어박혀서 머리 벅벅 긁고 줄담배 피워가며 키보드만 두드리는 올드 한 캐릭터를 강조하는지 모르겠다. 여튼 재경이 찾아간 선배는 습작생의 재경에게 마구 수치심을 안겨주던 사람이었다. 결국 등단에 성공한 재경과 선배는 인사이트를 주고받는 절친이 되었다. 그랬던 선배가 지금은 왜 글을 쓰지 않는가 했더니,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기 때문이라나. 소설은 현실에서 느끼고 체험할 수 없는 내용들을 글로 옮겨 독자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역할인데, 자신이 살아보니 현실 세계가 소설의 영역을 이미 뛰어넘고 있더란다. 그래서 선배는 글쓰기를 포기했다는데, 이유가 뭐 그것뿐이겠냐마는 왜 이렇게 진부하고 구질구질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하와이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이 가본 곳이 도서관이었다. 무더운 여름이라 시원한 도서관으로 인파가 몰려드는데 그 대부분이 노숙자들이다. 노숙자들이 계속 나와서 읽는 내내 악취가 느껴진달까. 아무튼 생각했었던 하와이의 모습과 딴판인 현실에서 이런저런 인사이트를 깨닫는 중인 재경과 곁에서 훈수 두는 선배. 그리고 이들에게 다가온 노숙자 피터를 통해 큰 깨달음을 얻는다. 언제나 마지막이 되었을 때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재경은 등단 이후로 자신의 열정을 쏟아보지 못한 일과, 떠나가는 사랑에 끝까지 매달려보지 못한 일을 떠올린다. 그렇게 애정 했던 책들까지 내다 팔아야 했는데도 어딘가 안일하게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이외에도 소설가로서의 생각, 감정, 경험, 통찰, 정신에 대해 참 좋은 글귀들이 있었지만 뭐랄까, 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내용이라 미동은커녕 그냥 빨리 끝났으면 싶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끝나버렸다. 아무런 뒷이야기도 없이 그렇게 뚝. 그래서 나도 이만 쓸란다.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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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1-29 2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가들이 사업을 하면 꼭 실패한다는 말도 있죠. 세상물정 몰라서요. 아무래도 밖에 있는 시간보다 책상 앞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물감 2023-11-29 23:15   좋아요 2 | URL
뭐 한 2천년대 초까지만 해도 맞다고 해주겠는데, 그 후로는 좀 억지 프레임이다 생각됩니다. 심지어 이 책은 2017년 출간이에요ㅋㅋㅋ 그래서 더 아이러니 했습니다ㅋㅋㅋ

새파랑 2023-11-30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떤 느낌으로 이 책을 읽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ㅋ 오랜만에 집어 든 책이 마음에 안드셔서 안타깝네요 ㅜㅜ

물감 2023-11-30 16:56   좋아요 3 | URL
늘 있는 일이라 별 타격은 없었지만 인식은 좋지 못하네요. 그래서 재밌는 책으로 기분전환 해주는 중입니다ㅋㅋㅋ
 
스톤 다이어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캐롤 쉴즈 지음, 한기찬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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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의 여자 버전이라고 들어서 냉큼 읽어보았다. 소문대로 색채나 여운은 비슷했으나 엄연히 <스토너>와 닮았다고는 할 수 없을 작품이었다. <스토너>는 주인공 한 사람을 조명해 주던 반면에 <스톤 다이어리>는 주인공을 비롯해 일가족과 주변인들까지도 소개하는 나름의 대형 무대를 갖추고 있더랬다. 그럼에도 분량은 길지 않아 생략된 구간이 많은 편이다. 그 빈틈을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어야 하는 겉바속촉의 감성이 필요하니 참고하시길요.


어머니는 딸을 낳다가 죽고, 아버지는 이웃집 부인에게 딸을 맡긴다. 부인은 말도 없이 가출해 큰아들 집으로 와서 데이지를 키운다. 갑작스러운 이별을 겪은 부인의 남편과, 계획에 없던 가장이 된 큰아들. <스톤 다이어리>는 이런 식으로 예상치 못한 멘붕이 연거푸 날아든다. 이후 부인은 사고로 죽고, 아버지는 일 밖에 모르고, 어머니는 기억조차 없는 데이지. 심지어 신혼여행 중에 남편이 죽어, 결혼하자마자 과부가 되었고 시댁과 주변에게 애꿎은 비난을 받는다. 겨우 이십 년 남짓 인생에 별별 굴곡이 다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데이지는 낙담할지언정 어떤 감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산다는 게 다 그렇단 듯이.


요양하러 고향 땅에 왔다가 어릴 때 같이 살던 부인의 큰아들을 만나는 데이지. 이어서 식물학자가 된 그와 결혼하고 세 자녀를 낳은 엄마가 된다. 겨우 얻게 된 안정감 앞에서 자신의 두 배나 되는 남편의 나이는 문제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마디씩 하던 지인들의 나쁜 소식만 들려와, 어떤 선택이든지 간에 잘 되리라는 법은 없음을 직간접적으로 알게 된 그녀였다. 안 그래도 고달픈 삶이 밑바닥을 친다면 패배자든 악바리든 뭐라도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데이지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단지 주어진 현실과 상황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고 아픔은 조용히 삼켜내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내게는 이것이야말로 지혜 중의 지혜라 생각된다. 원래 삶이라는 게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성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삶의 공식을 깨우친 지혜자들은 그 공평성 앞에 겸손을 갖추고 살아간다. 이제껏 내가 보아온 이들은 다 그랬다. 이 책의 주인공도 그러했고.


데이지의 친부는 꽤나 재능 있는 석공이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석탑 만들기로 떨쳐낸 그는 영입해간 기업의 대표 자리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먼 훗날 재혼하고서 갑자기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기 시작한다. 한편 이 시기에 데이지는 남편을 떠나보낸 후 정원을 가꾸는 일로 슬픔을 달래었다. 그러다 남편의 식물학회 및 각종 단체에 초대되어 연을 맺고, 원예 칼럼을 기고하며 제2의 인생을 맞는다. 여기서 두 사람의 대조되는 지점이 흥미롭다. 돌로 세운 아버지의 조형물들은 변치 않을 영원함이었고, 각종 식물로 만든 딸의 정원은 언젠가 없어질 죽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석탑은 관광객들의 손을 타면서 형태를 잃었고, 피라미드는 갑작스러운 그의 변심으로 싹 다 밀어버렸다. 오히려 유한한 생을 지닌 딸의 식물들은 제 역할이 끝나면 스스로 마감하였고 또다시 생명화로 피어났다. 이렇듯 움켜쥘수록 손안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는 삶이었고, 그 도발에 말려든 인간의 실수는 반복돼 왔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욕망과 욕심을 잘 구분하여 앞으로의 흑역사를 줄여가보자.


그 밖에도 예상치 못한 짐을 떠안은 일이나, 자식들의 이런저런 실패와, 다 흩어져 혼자가 된 외로움을 표할 데가 없는 나날 등등, 쓸쓸하지만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되는 장면이 가득하다.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참 보잘것없구나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들. 이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사가 아닐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해지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여 그런 미래를 꿈꾼다거나 그 같은 인맥을 자랑하곤 하지만, 정작 필요시에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되는 것은 평범한 이들의 삶에서다. 화려하지 않아도 상관없고, 유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믿음은 오늘날 병든 현대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에 호언장담이 웬 말이랴. 각자 어떤 생을 살았든지 그 공평성을 마주할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부디 그날이 오면 ‘잘 놀다 갑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당신과 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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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1-2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땡기는군요. 리뷰 잘 읽고 담아갑니다!

물감 2023-11-26 17:50   좋아요 1 | URL
은오 님이 경악할 만한 교정 누락/오류가 몇 군데 있을 겁니다...
그거 때문에 별 하나 뺐습니다. 감안한다면 만족스러울 거에용

물감 2023-11-26 17:51   좋아요 1 | URL
아 근데 진짜 팬더 사진 참 적응 안되네

레삭매냐 2023-11-26 1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년 전에 읽은 책인데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스토너>와 비슷한 결이었나 어쨌나 -

일상의 사소한 일들이 결국 나를 이루는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감 2023-11-26 19:15   좋아요 0 | URL
평범하게 살다 평범하게 죽는 내용이라 뭐 없긴 합니다. 아름다운 퇴장이라 <스토너>같은 여운은 없었고요ㅋ

stella.K 2023-11-26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빈틈을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어야 하는 겉바속촉이라...흠.
이렇게 쓰시니까 왠지 관심이 가네요. 무려 퓰리처상까지 받았다니.
스토너 괜찮았는데. 근데 무려 400 페이지가 넘다니...

공유가 지쳐보이네요. 뭔가 고민있어 보이는 건가?
설마 물감님이 그런 건 아니겠죠? ㅋ

물감 2023-11-26 20:50   좋아요 1 | URL
잘 읽긴 했지만 수상을 한 이유는 모르겠어요ㅋㅋ그리고 스토너보다 가독성 좋아서 분량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리뷰에는 안 썼지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독특한 형식에 있어요. 그래서 무슨 이런 소설이 다 있나 싶어져요.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고민이야 늘 있지만 어쩌겠어요. 그것이 평범한 인생인 것을ㅎㅎㅎ

새파랑 2023-11-2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스토너의 느낌이 나네요 ㅋ 이 작품도 한사람의 일대기에 대한 거군요. 평범하게 보여도 들여다보면 다 다른게 인생인거 같습니다~!!

물감 2023-11-27 10:08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제목도 비슷한ㅋㅋ 저는 스토너에 한표입니다. 이 책은 좀 정신없게 흘러가긴 해요. 속도감이 대단합니다ㅋㅋ

coolcat329 2023-12-31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물감님 요즘 좋은 책 많이 읽으시네요.
제가 북플을 자주 못해서 이제야 봤습니다.
이 책 아주아주 옛날에 사서 읽다가 어려워서 포기하고 누구 줬던 거 같아요. 지금이라면 저도 읽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제가 겉바속촉이 아니었나봐요.
제가 감성이 부족해서 이 책이 힘들었나 봅니다.

물감 2023-12-31 13:03   좋아요 1 | URL
아니 언제 이렇게 댓글을 많이 달아주셨대요?ㅋㅋㅋ
저도 알라딘 잘 못들어오고 있네요.
연말이 다가오니 감성촉촉 가슴먹먹한 작품들을 찾게 되더라고요. 어쩐지 그래줘야 할 것만 같은 ㅋㅋㅋㅋ 이작품 확실히 기승전결 깔끔한 플롯은 아닌데, 그냥 눈 가는대로 읽다보면 어느순간부터 앗...하는 느낌이 와요. 정말 <스토너>랑 느낌 비슷한? 나중에라도 읽어보시면 좋을듯요^^

coolcat329 2023-12-31 13:41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이 책 언젠가 다시 도전해보고 싶었었는데 이젠 자신감까지 생겼습니다.
 
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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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같은 에세이를 생각하고 집어 들었으나 그보다는 훨씬 딥하여 마치 논문처럼 느껴진 책이다. 아예 못 알아들을 내용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수준이 매우 높고 어렵기도 해서 그냥 느낀 점 몇 가지만 적고자 한다. 내가 이해한 게 맞는다면 욕구는 곧 만족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은 개념이다. 예를 들어 음식을 섭취해 배부름의 만족이 있다면 반대로 음식을 거부해서 통제에 성공한 만족도 있는 것이다. <욕구들>은 저자의 거식증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권리, 문화, 자아 등등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불안과 억압과 강박에 대한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그러므로 단지 음식 문제에 관한 내용으로 끝나선 아니 될 일이다.


초반에는 거식증이 온갖 병리 현상으로 이어진다는 저자의 주장과 견해들이 공감되면서도 너무 비약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래도 미국 사회가 바탕인데다 2003년 출간작이라 요즘과는 맞지 않는 내용도 있어서 그렇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과감한 여성들이 늘어가는 중이다. 하여 그런 사회의 오류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문제들과 시스템이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저자의 목소리는 그것들이 필연 여성이나 소수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다. 혹여 그의 주장들이 지금과 다르다고 생각된다면 그건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


그것보다도 ‘먹어서‘ 생기는 사회적 문제와 현상들을, (극도로) ‘안 먹어서‘ 생기는 문제들과 접목시키고 있어 혼란스러웠다. 보통은 ㅡ이미 과체중이거나 그렇게 될 낌새가 보이는 사람의ㅡ 몸이 비대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과하게 먹는 것을 말리곤 하는데, 여기서 자유든 권리든 주장하는 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ㅡ그가 거식증 환자든 아니든ㅡ 한참 체중 미달인 사람이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식욕을 통제하고 압박하면서 자아를 되찾고 권리를 지켜냈다고 하니 나의 무지로써는 참 어렵기만 하다.


이 욕구가 음식에서 패션이나 직장문제, 모녀관계 등으로 넘어가자 제법 알아들을만한 내용이 되었다. 이런 사회 이슈들이 남성들에게도 해당되거나 경각심을 갖게 해주는데, 난 무엇보다 저자의 거식증이 어머니의 인정을 바라는 욕구가 포함된 사실에 크게 공감하였다. 그렇게 말라버린 몸을 각인시켜서 모친에게 상처를 입히고, 지금 이것이 자식을 온전히 돌보지 못한 무책임의 결과라며 말없이 쏘아대는 그 상황을. 자신이 좀 남다르다고 느끼며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같은 공격성을 지니고 있다. 단지 표출할 때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의 차이일 뿐. 결국 욕구는 자기만족이 기본이지만 타인과의 인정과도 연결돼있어, 여기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해방되기란 불가하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를 키울 때, 타인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에 오는 기쁨과 존재감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 교육을 아이가 예민하게 흡수하면 점차 관계 의존증이 되어 나 자체로서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는 내면과 외부가 계속 부딪히면서 무언가 잘못됨을 감지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를 몰라 하다가 소위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저자의 거식증도 회피 수단 중의 하나였다. 식욕을 통제하며 성공의 만족을 강조했으나 술 중독은 그러지 못했다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차라리 그게 인간답고 좋더군. 중독은커녕 욕구랄 것도 없는 나 같은 인간이야말로 처방이 불가한 경우라서 말이지.


폭식이든 거식이든 제 몸을 학대하는 욕구의 행위에는 분노와 슬픔이 서려있다고 한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채워지지 않는 필요에 대한 분노.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 여겨지는 것에 대한 슬픔. 내 안에 뭔가가 빠져있어 공허하다거나 또는 가득 차 있어 속이 갑갑하다거나. 그게 무슨 얘긴지 잘 알겠어서 참 괴롭고 또 괴롭다. 저자는 허함이라는 허기의 존재에서 달아나기 위해, 그 상실과 비통의 감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거식증이란 갑옷을 둘렀지만, 그 철저한 강박과 루틴이 저자를 수렁에서 건져내지는 못했다. 모든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들듯이 감정과 고통의 조각들은 존재의 욕망으로 귀결됨을 깨달았기에. 몸에서 본능적으로 느낀 ‘부재‘를 이만큼 주목해 본 적이 있었나 싶다. 놀라운 관점과 생각거리를 던져준 저자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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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2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잉 프사 가을 물감

물감 2023-11-22 11:12   좋아요 0 | URL
겨울 아니고요?ㅋㅋㅋ

잠자냥 2023-11-22 11:15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두 계절 노린 큰 그림...

물감 2023-11-22 11:30   좋아요 1 | URL
영원불변의 잠자냥 님 프사가 바뀜을 보고 월동준비의 충동이 일어났걸랑요 ㅋㅋㅋ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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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의 작품을 몇 권 읽어본 바, 나는 이 작가를 막 좋아하지는 않을 듯하다. 작품성은 우수하지만 스타일이 영 별로랄까. 나는 인간의 심리를 깊게 다루는 작품을 매우 좋아한다. 서머싯 몸의 작품들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으나 계속 읽어봐도 저자의 통찰이나 깨달음에 공명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그는 몇 발자국 떨어져서 얘기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헤르만 헤세의 경우, 자신을 작중 인물에 대입하여 삶과 고뇌를 몸소 풀어가곤 하는데, 서머싯 몸은 늘 동떨어진 화자의 입장에서 관찰만 하고 있어 수박 겉 핥기의 심리 묘사로 그칠 때가 꽤 있다. 무심하게 툭 던지는 그의 고찰들은 어쩐지 ‘아님 말고‘처럼 들린단 말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것을 의도적인 장치라고도 하던데, 독자의 생각과 상상이 마음껏 개입되기를 바랐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걸 떠넘기려 한다는 생각도 든다. 여하간 이 분도 썩 친절한 작가는 아니올시다.


<달과 6펜스>는 명성에 비해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갑자기 화가가 되겠다고 직장과 가족을 버리고 달아난 남자의 설정이야 세상에 온갖 별종이 다 사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런데 멀쩡하던 사회인이 하루아침만에 인간성을 개나 줘버린 괴짜가 돼버렸다는 건 납득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이 작품도 화자가 주인공의 주변을 맴돌면서 기록했기 때문에 매끄럽지 못한 구간이 많은 편이다. 그냥 체념하자. 런던에서 파리로 건너간 스트릭랜드는 거렁뱅이처럼 살면서도 불평이나 탄식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걸고넘어지는 요소들이 없어서 좋아했다. 그래야 미술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원하던 그림을 마음껏 그려보지만 정작 그는 타인에게 작품을 보여주거나 전시하거나 판매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럴만한 실력도 못되었거니와 그가 미술을 대하는 태도나 철학은 일반 예술가의 것과 영 딴판이라 더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 독보적인 괴짜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스트릭랜드야 대놓고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라지만 그 밖에 인물들도 참 아이러니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으로 엉터리 삼류 화가인 D와 그의 아내인 B에 대해 말해보자. 넉살 좋은 동네 바보인 D는 스트릭랜드의 허접한 그림에서 신들린 재능을 훔쳐본 뒤로 그를 숭배한다. 어느 날 몸져누운 스트릭랜드를 집에 데려와 요양해 주자는 남편을 극구 반대하는 B는, 그의 설득에 못 이겨 이 돼먹지 못한 괴짜 환자를 돌보게 된다. 그 결과, 아내는 환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남편은 아내에게 버림받아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가난한데다 볼품없는 외양에, 이성을 돌같이 여기는 스트릭랜드의 어디가 좋아서 바람이 났을까. 아무튼 고상했던 내조의 여왕은 갑자기 악녀로 돌변하더니 관능의 세계로 훌쩍 떠나버렸다. 반면에 순수를 잃어버린 D는, 스트릭랜드를 손봐주려다가 그의 그림을 보고 대뜸 용서해 주기로 한다. 고통과 감정을 전부 뒤로할 만큼 경외스러운 예술가의 재능이라니. 보다시피 이 사람들의 변덕과 충동은 누구나 이해하고 받아들일만한 사이즈가 아니다. 내 식대로 말해보자면, 열렬히 추구하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으니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드는 게 당연하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괴팍하고 불경하게 보일 테지만, 당사자들은 신의 땅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하여 아무나 이해할 수 없고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예술가의 정신세계라는 말이렸다. 그러니까 예술 분야에 영안을 가졌느냐 아니냐에 따라 판가름이 나는 것이므로,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화자는 도덕과 윤리에서 한참 벗어난 비인간적인 스트릭랜드를 경멸하면서도 그에 대한 관심을 끊지 못한다. 이 괴짜의 흥미로운 점은, 어떤 고난과 고통에도 내색 한 번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래서 끝내 문둥병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화가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이미 혼과 영이 신의 세계에 입성해있으니, 육신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일 테다. 그렇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았고,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힘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 테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위대한 정신은 인정하겠다만, 그 하나 때문에 자신의 결여된 부분을 못 깨닫는 건 안타깝기만 하다. 아무리 결핍에서 싹트는 예술이라 해도 전 과정이 괴로워야 할 이유는 없는데 말이다. 사실 이건 인물보다도 작가의 철학과 사상이 더 중요하겠지. 서머싯 몸도 전쟁을 겪었던 사람이라서 그런가, 문장 곳곳에서 증오심이 배어 나온다. 그 때문에 저자의 풍자소설들은 대중성이 약한 편이다. 호소력이 딸리니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여하튼 내용은 잊어버려도 제목만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작품이다. 이상 세계를 의미하는 달과, 물질세계를 의미하는 6펜스라니. 진짜 끝내주게 잘 지었다. 그런데 작중에서는 이 제목에 관해 언급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가 없다. 지난번에 읽었던 <케이크와 맥주>도 그렇고, <면도날>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도 서머싯 몸의 스타일이랄까. 늘 항상 몇 발자국 떨어져 있으려는 인상을 받는다. 누군가는 시크하다고 하겠으나 내게는 그저 성의 없는 태도로만 보인다. 한 번씩 묵직한 생각거리를 던져놓고도 금방 돌아서 다른 화제로 넘어가버리는 게 아주 습관이다. 서머싯 몸이 생각하는 작가란, 판단하기보다 알고자 하는 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198p). 과연 그 말처럼 호기심도 넘치고 관찰도 많이 한다지만 딱 거기까지 일뿐이다. 판단할 생각이 없다 보니 사유들은 한층 더 깊어지지 못한 채 붕 떠버리는 글이 되고 만다. 본인의 호기심만 충족하면 된다는 듯한 저자의 이기심을 나는 줄곧 지적하고 싶었다. 뭐 누가 알아주겠냐마는. 그리 좋아하진 않아도 이이의 작품들은 계속 읽어볼 생각이다.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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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1-16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제가 서머싯 몸이 안땡기는 이유가 이거였군요~! 저도 왠지 괜찮기는 한데 뭔가 손이 안가더라구요 ㅋ 물감님은 도스토예프스키 스타일이신거 같아요~!!

물감 2023-11-16 11:33   좋아요 1 | URL
늘 어긋났던 우리 NF끼리 드디어 통하는 게 생겼군요 ㅋㅋㅋ
서머싯 몸은 애매한 가시같은 불편함이 있어요. 워낙 풍자하길 좋아하는 작가라, 독자들도 바보 만드는 걸 좋아하는 듯 하고요. 하지만 저는 바보가 아닌지라, 작가의 놀음에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핳. 도끼옹 작품은 최대한 출간순서대로 읽고 싶은데 책이 없어서 잘 안되네요. 제가 된발음을 싫어해서 열린책들 도끼옹 작품을 안 읽습니다. 물론 창비도 된발음이지만........

stella.K 2023-11-16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싯적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시크한게 나름 좋았고 저도 전작은 아니어도 몇 작품은 읽어 봐야지
해 놓고 여태 못 읽고 있네요.
다시 읽으면 저도 물감님과 같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귀가 좀 얇은 편이라서 말이죠.ㅋㅋ

물감 2023-11-16 19:27   좋아요 1 | URL
어떻게 감상이 다 똑같겠어요. 저같은 미꾸라지도 좀 있어줘야 건강한 서평문화가 생기는 법 아니겠습니까ㅋㅋㅋ 실망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인간의 굴레에서>는 기대 좀 하고있습니다🙂🙂🙂

stella.K 2023-11-16 19:40   좋아요 1 | URL
미꾸라지! ㅎㅎㅎㅎ
겸손하시긴. 그러고 보니 추어탕이 생각나는군요.
지금까지 탁 한 번 밖에 안 먹었는데. ㅋㅋ

물감 2023-11-16 20:31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추어탕이 급 먹고싶어지네요. 몸 보신할 때인가 봅니다. 이번 주말에는 건강식으로 챙겨드시길요^^

페크pek0501 2023-11-16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 고갱을 모델로 썼다고 해서 더 유명해진 소설 같아요. 저도 리뷰를 쓴 적이 있지요.
어느 집에서 기거하다 그 집 부인과 눈이 맞고 함께 떠나기로 하잖아요. 그 반전이 충격적이었어요. 그 화가를 싫어한다고 했던 부인이 갑자기 자기 남편을 버리고 그 화가를 사랑하다며 따라가겠다고 나서잖아요. 멋진 반전이었어요. 여기서 작가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다고 봤어요. 인간은 그럴 수 있음을 작가는 안 거죠.
사랑 따위에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하는 한 예술가의 생애도 신선했어요.
저는 이 소설보다 인간의 굴레에서, 를 더 좋아합니다. 명문장이 많거든요.

물감 2023-11-16 23:16   좋아요 1 | URL
즐겁게 읽으신 분들한테 어쩐지 찬물을 끼얹는 기분이지만.. 이해해주셔요ㅋㅋ

음. 저는 화가를 따라가버린 부인이 그다지 충격이진 않았어요. 작가가 인간의 변덕스러움을 말하고자 이 책을 쓴 것은 아닐 테니, 요 이해안가는 충동을 독자들한테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가가 관건이지 싶습니다. 과연 작가는 온갖 말들로 열심히 설명하고는 있는데요, 고것이 썩 와닿지가 않더란 말이죠. 물론 예술이란 게 알아듣기 쉬운 영역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저는 리뷰에 적은대로, 추구하던 꿈과 이상의 세계를 만난 사람들이라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는 말로 정의내렸습니다. 지금으로선 그것이 더 저와 독자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말 같거든요. 작가가 예술가들의 열정은 잘 설명했지만 예술가들이 남다른 것에 대한 이유는 들지 못했습니다. 전 이런 게 서머싯 몸의 무책임한 태도로 보여져요.

<인간의 굴레에서>는 화자(관찰자)가 아닌 작가 본인의 이야기라길래 기대하고 있어요. 명문장도 많다고 하시니 더 기대됩니다. 분량의 압박이 좀 크긴 하지만........

페크pek0501 2023-11-18 10:48   좋아요 1 | URL
오! 그런 자기만의 취향과 소설에 대한 안목, 훌륭해 보입니다.
한 수 배워 갑니다.^0^

물감 2023-11-18 14:06   좋아요 2 | URL
쑥스럽네요ㅎㅎ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coolcat329 2023-12-31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간의 굴레에서> 기대가 됩니다.
<달과 6펜스>는 아무래도 엄청난 예술가 이야기이다 보니 더 붕 뜬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이해하기 힘들더라구요. 꼭 이해하지 않아도 되지만요.ㅎㅎ

물감 2023-12-31 13:09   좋아요 1 | URL
문학이 다 그렇지만 유독 이 작품은 이해냐, 공감이냐를 두고 싸우는 기분이랄까요. 저는 보통 공감파인데 이 작품은 왜인지 이해파로 접근하게 되더군요. 주인공의 정신세계가 워낙 남달라서 말이죠. 결국은 이해 못했어요. 차원이 다른 갑다 하고요 ㅋㅋㅋ
본문에도 썼지만 전 서머싯 몸의 스타일이 썩 달갑진 않아요. 그래도 아주 간혹 이것봐라? 하는 통찰이 은근 맛있어서 계속 읽어는 보려고요. <인간의 굴레에서>는 분량의 압박이 있지만... 새해에는 읽어보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