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의 눈으로 보면 녹색지구가 펼쳐진다 - 지구환경의 미래를 묻는 우리를 위한 화학 수업 내 멋대로 읽고 십대 7
원정현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소년을 위한 화학 수업. 청소년 책이지만, 어른이 읽기에도 충분히 좋은 책이다. 마치 글쓴이가 청소년들에게 직접 수업을 하는 것처럼 상냥하고 따스한 어투의 존댓말로 설명해주시고 그만큼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셔서 좋았다. 나중 되면 다 까먹을 화학식과 설명이긴 하지만,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천천히 씹어서 소화시키느라 꽤 오랫동안 곱씹으며 읽었다. 알고 있던 내용도 있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내용들도 많아서 놀랍기도 했고, 이 지구환경이 새삼 더 많이 걱정스러워지기도 했다. 원래도 낭비가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엔 유독 더 내 생활과 주변에서 편함과 바꿔쓰는 플라스틱 소모품들에 마음을 쓰게 되었던 것 같다. 환경을 생각하는 현명한 소비자가 되도록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야겠다. 



‘우리가 저녁 반찬으로 먹을 고등어구이 속에 세슘이 잔뜩 들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 몸은 세슘을 칼륨으로 착각해서 열심히 받아들이겠죠. 인체로 들어온 세슘은 근육이나 피하 지방에 쌓입니다.
문제는 세슘 중에서도 원자량 137인 세슘, 즉 세슘-137이 우리 몸 안에서 핵분열을 한다는 사실이에요. 몸 안으로 들어온 세슘-137은 핵분열하는 과정에서 방사선과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몸 안에서 마치 원자폭탄이 터지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셈이죠. 세슘-137이 방출하는 방사선은 우리 세포 속 DNA 구조에 변형을 일으키고 DNA의 화학적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그 결과 우리 몸에서는 각종 암이 유발될 수 있어요.‘

‘세계보건기구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버려진 쓰레기 품목 2위가 담배 용품이었다고 해요. (* 1위는 일회용 음식 포장재이다.) 누군가가 버린 담배꽁초(즉, 미세 플라스틱)를 조개류나 어류가 삼키고, 조개류나 어류가 삼긴 미세 플라스틱이 다시 우리 몸 안에 들어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유쾌하지만은 않은 상상일 것입니다.
자연에는 쓰레기가 없지만, 인간이 만들어 쓰고 버린 쓰레기는 사라지지 않고 지구의 어딘가에 가닿습니다.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와 미세 플라스틱은, 쓰레기가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끝난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을 아는 사람 - 유진목의 작은 여행
유진목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세이의 홍수 속에서 누가 진짜 작가의 무게를 간직한 사람인지 구별해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나 여행 에세이는 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지는 여행지 자체로도 특별하고, 가지 않은 사람이 여행을 떠난 사람의 낭만과 감성을 동경하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여행에 대해 말할지는 몰랐다. 나는 그저 작가와 그녀의 전작들에 주목했고, 그녀의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골랐는데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비슷비슷한 여행지의 사진과 여행 이야기를 보고도 별로 라고 느끼지 않을 수 있단 걸 알게 됐다. 이런 책이 진짜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죽음' 혹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를 갈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까진 아직 잘 모른다. 나는 그녀를 책 몇 권을 통해서만 듬성듬성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적힌 그녀의 이야기에 아주 충분히 공감이 되었고, 나 또한 그런 심정을 알기 때문에 나도 그녀처럼 어디론가 가고 싶단 생각까지 들었다. 어차피 곧 죽을 거라면. 

  살면서 죽음을 외면하며 사는 것보다 언젠간 받아들여야 할 관문으로 마주할 필요는 있겠지만, 늘 죽음을 원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의 힘듦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녀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 힘듦을 엿봤기에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고, 나 또한 늘 그런 마음이었기에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하노이에 있으면서 조금은 가벼워졌을 그녀의 슬픔과 삶을 응원한다. 나도 언젠가 나만의 하노이를 찾아 떠날 수 있길.  



어째서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지? 나는 여지껏 대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살아왔다. 아무 이유 없이 살아야한다니.

사람이 너무 죽고 싶은데 그것을 참으면 계속 자게 된다. 평소에 아무리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아 꼬박꼬박 수면제를 먹는 사람이 하루에 스무 시간 정도는 거뜬히 잘 수 있게 된다.

그저 살아 있으면 좋겠다. 살아 있는 것을 흉내 내느라 스스로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그만하면 좋겠다. 빨래를 개서 가지런히 제자리에 놓고 방문을 닫으면 좋겠다. 화분에 물을 주면 좋겠다.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면 좋겠다. 저녁약은 안 먹어도 되면 좋겠다. 아침약을 먹고 하루를 잘 보내면 좋겠다.

매일 시를 쓰면 좋겠다는 욕심은 갖지 말도록 하자. 어느 날은 쓸 수 있고 어느 날은 쓸 수 없음을 받아들이자. 쓸 수 없는 날에는 남의 좋은 것을 보도록 하자. 무엇이 좋은지 또 무엇이 나쁜지 분별하도록 하자. 그리고 나도 좋은 것을 만들자. 부디 그렇게 하자. 다시는 그렇게나 오래 잠들지 말자.

나는 마음이 아닌 소명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동경한다. 루틴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을 동경한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세상을 통찰하는 사람을 동경한다. 타인의 슬픔을 제 것으로 가지는 사람을 동경한다.

나는 슬픔이 없는 사람을 경멸한다. 아니, 슬픔을 모르는 사람을 경멸한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무례하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자신이 옳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은 중요하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무례하지 않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틀림을 가늠해본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모든 말을 내뱉지 않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적절히 타인과 거리를 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해하지 않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매사에 조심한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공감할 줄 안다. 그래서 슬픔이 있는 사람은 조용히 타인을 위로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품고 살아간다. 슬픔은 없애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상처는 낫고 슬픔은 머문다. 우리는 우리에게 머물기로 한 슬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슬픔은 삶을 신중하게 한다. 그것이 슬픔의 미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노이의 ‘무엇- 없음‘에 나는 매료되었다. 파리가 날아다니는 노점에 혼자 앉아 하염없이 커피를 마시는 것. 그냥 아무데로나 걷는 것. 감탄할 풍경보다는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분별하는 것. 먼지가 쌓이고 곰팡내가 나는 기념품을 구경하는 것. 사고 싶은 것이 없어 그냥 나오는 것. 빈 손으로 걷는 것. 길바닥에 맨발로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가까이 다가가 단숨에 셔터를 누르는 것. 눈을 마주치고 함께 웃는 것.

불행한 사람에게 희망은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불행이 그저 있는 것처럼 희망도 그저 있다.

필름을 인화하면 내가 속했던 순간의 한 조각을 가질 수 있다. 이 순간들은, 사진은, 나보다 이 땅에 오래 남을 것이다. 사진의 위안은 이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벽한 케이크의 맛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혜진 지음, 박혜진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완벽한 케이크의 맛이었다. 

  책에 대해 붙이고 싶은 설명들과 해석할 수 있는 많은 말들을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었지만, 책을 덮으며 '완벽한 케이크의 맛'이었다고 느낀 후 작가의 말을 다시 한 번 읽어보니 어떤 사족도 붙일 필요 없이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어졌다. 그저 이 책을 추천만 할 수 있을 뿐.

  김혜진 작가 님은 내가 좋아하는 분이다. 그녀가 쓰는 글의 온도는 내가 필요로 하는 온도와 맞아 있고, 그 분의 글을 통해 항상 위로와 공감을 느껴왔다. 이번 책에 함께 해주신 박혜진 그림 작가 님도 책에 완벽함을 더해주셔서 너무 좋았다. 

  이 책에서 그려진 '말'은 곧 '선(벽)'의 문제이다. 어떤 생각과 말은 말해져서 관계의 선이 되고 벽이 된다. 완벽한 케이크에도 선이 있다. 위 아래 층이 섞일 수 없도록 하는 한 겹 한 겹의 층(layer). 우리가 사는 사회도 이런 선들과 벽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내가 뱉은 말, 내가 보인 태도, 그 층과 벽에 어떤 순간엔 가슴이 턱 막히고 나의 뒤를 돌아보게 되기도 하지만, 하려다 '삼킨' 말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서로의 가슴에 켜켜이 쌓인 '하지 않은' 말들과 보이지 않은 태도들. 층층이 쌓인 선(layer)들을 끌어안아 감싸주는 우리의 말들이 케이크의 맛을 완벽하게 어우러지게 만들며, 그 케이크를 입 안에 넣는 순간의 분위기까지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나도 모르지. 진짜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럼 그냥 너도 모르겠다고 해. 다들 모르겠다고 한다며?
너의 그 말이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들을 불러온다. 이를테면 인턴이 하겠지, 하고 내가 내버려두었던 일들. 괜찮겠지, 하고 내가 넘겨버렸던 일들.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매일 반복됐던 일들. 대단한 일이 아닌 사소한 일들. 그래서 모른 척 했던 일들. 나중엔 아주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 도대체 이렇게까지 소란을 떨 필요가 있을까 싶던 일들.

그런데 모른다고 하면 모르는 게 되나?

십 년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시간인 동시에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뭔가는 고스란히 남고, 또 뭔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시간. 두 사람 사이엔 이제 그런 여백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 조만간 또 봐.
수지는 손을 흔들며 미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조만간이 일 년이 될 지, 이 년이 될지, 다시 십 년이 될지 장담할 순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만날 땐 서로의 기억에서 또 얼마간 비켜난 모습이 되어 있을 거였다.
그럼에도 수지는 미란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오늘 자신이 만난 건 미란뿐만이 아니라 지난 시절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과거의 나를 만나는 건 그 시절을 함께 지나온 누군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미란을 통해 실감한 덕분인지도 몰랐다.

그가 포크로 잘라낸 케이크를 입에 넣는다.
하지 않아서 좋았던 것,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지킬 수 있었던 것,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잃지 않았던 모든 것. 케이크의 맛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응축시켜놓은 것처럼 아주 진하고 깊다.

너에 대해 우리가 습관처럼 했던 말들, 자연스럽게 주고받던 대화들, 우리는 쉽게 잊었고, 어쩌면 너에게는 오래 남았을 어떤 말들이 구체적으로 되살아난다.

인경 씨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전 금요일에 집에 혼자 있는 게 싫더라고요. 누구든 만나봐야 똑같겠지, 별로겠지 생각하면서 혼자 있는 거.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할 자격 - 게으르고 불안정하며 늙고 의지 없는… ‘나쁜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동의 자격
희정 지음 / 갈라파고스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처럼 생각할 것들이 많은 책을 읽었다. 메모한 부분이 수십 군데였고, 맞는 말이라고 수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힘이 없고', '건강하지도 않고', 청년들의 기본인 '자기 관리'와 '열정'과 '노력'의 트랙에서 빗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쉽게 저렴한 노동 값으로 대체 가능한 '여성'이면서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이 너무 아프고 무겁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현실을 냉정하게 꼬집어 봐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력을 한다고 하는데 노력에 잣대가 매겨지는 기분. 그래서 내 노력은 아무것도 아닌 노력이라 노력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기분. 이렇게 사회적으로 정해진 노력과 성실의 기준점이 있다는 게 책을 읽으면서, 청년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가장 아픈 부분이었던 것 같다. (마치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수능처럼, 모두가 100점을 받아서 98점을 받은 나는 낙오자가 되고 직장과 그 후의 회사 생활까지 모두 망가지게 된 것 같은 제법 쓸쓸한 기분...) 



요즘 청년들.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을 가지고도 취업이 되지 않아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는 그 청년들 말이다. 이력서 300통을 넣고도 좌절은 금지니까 301번째 이력서를 쓰는 취업 준비자들. 그 이력서는 각종 공모전 입상 경력, 자격증, 워킹홀리데이와 어학연수, 봉사활동, 인턴 경험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런 청년들이 바글바글한 세상에서 지방의 작은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 후 ‘정식‘ 취업을 하지 않은 채 몇 년째 아르바이트를 한 이는 감히 성실을 자신의 덕목으로 가질 수 없었다.

일하다가 다치고 병들거나 부당하게 해고되어 싸우는 사람들을 주로 만났다. 이들은 억울해했다.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이런 대우라니. ...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하지만 사람들은 이들의 ‘열심‘을 인정하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 하고 좋은 대우를 바라면 안 된다는 댓글이 달렸다. 소위 스펙에 포함되지 않는 노력은 인정되지 않았다. 이들이 행한 열심은 오히려 무능력에 따른 장시간 노동으로 폄하되었다.

‘현대사회의 저널 인사들은 ‘그건 노력이 아니야. ‘노오력’일 뿐이라고‘라며 이 우울한 과로의 무용함을 말했다. 그 노력이 현 체제의 불평등을 유지하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라 일갈했다. 정작 무용한 것은 그들의 훈계였다. 청년들은 코웃음 쳤다. 우리가 그걸 몰라서 노력하는 줄 아나, 이들은 "노력의 가치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하지만 가장 노력하는" 세대였다. 노력이 뭐 대단한 보상을 준다고 믿진 않았다. 다만 정체되는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모두가 달리는 사회에서 걷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멈춰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들은 달리면서도 자신이 멈춰 있지 않은지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낙오되지 않으려면 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했다. 이들의 절박함을 납득케 하는 것은 청년 두 명 중 한 명만 직장을 가질 수 있는 지경이 된 취업률이었다.

경쟁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를 반복하는 이들을 사회과학 서적에선 신자유주의 시대의 피해자나 불안정 노동의 당사자로 바라보지만, 타인과 부대끼는 현실에서 이들은 ‘루저‘, ‘낙오자‘, ‘철없는사람‘이었다. 그런 평가를 꼬리표처럼 달았다.

미리는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철없고 근성 없는 사람으로 통했다. 그가 말하는 퇴사 사유는 힘없는 소리였다. 이 사회에서 발화 자격은 (사회가 규정한) ‘자기 몫을 다 한‘ 사람에게 주어졌고, 그런 측면에서 미리는 말할 자격을 취득하지 못했다. 열심히 일하다 부당한 일을 겪었다는 이들에게도 그 ‘열심‘은 진정한 열심이 아니라고 말하는 세상이었다.

"알바할 때 보면 사장들도 웃겨요. 젊은 알바생을 원하잖아요. 그 청년이 알바를 열심히 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이것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알바는 미래에 뭔가 더 괜찮은 일을 하기 위해 임시로 하는 일로 취급하니까요."

스펙으로 수치화되는 열정의 점수를 세다 보면, 노력을 믿지 않지만 노력해야 한다. 젊은 진취성은 이력서에 적히고, 이미지화된 노력은 포트폴리오에 알차게 담긴다. 도전, 진취, 열정, 성실이라는 청년의 이미지마저 스펙을 이룬다. 꿈꾸는 자아를 잃지 않으면서도 생산적 성취를 이끌어내는 젊음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욕망을 건든다. 미라클모닝, 갓생, 독기라는 이름을 달고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만 추앙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성실한 젊음의 이미지가 놓이는 장소가 사회이고, 이 사회에서 성실은 시민권의 발급 조건이다.

"그거 뭔지 알아요. 노력하지 않는 거. 열심히 사는데 노력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거. 엄마나 아빠, 어른들 눈에는 제가 열심히 살지 않는 거예요. 못마땅한 거죠. 제가 아침에 출근하고 이런 게 아니니까. 부모님은 저만 보면 가만있지 말고 뭐라도 하라고 하세요."
방과후교사 일을 하며 카페 아르바이트를 겸하게 된 이유가 바로 ‘아무것도 안 한다‘는 눈총 때문이라고 했다. 성실은 효빈이 획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취업은 언제 하니?" 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규범에 적합한, 심미적인, 신체 건강한) 몸은 우월한 능력으로 취급된다. ‘용모 단정‘은 그러한 말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몸은 능력으로 여겨지고, 예비 노동자들은 자신의 몸에 투자를 해야 한다. 사회적 기준에 적합한 몸을 가졌다는 것은 ‘자기관리‘의 성공을 의미한다. 그런 측면에서 요즘 유행하는 바디프로필 촬영은 상징적이다. 운동하고 식단을 관리하고, 최대한 몸을 ‘완벽‘의 상태에 가깝게 만들어 그 찰나의 순간을 이미지로 남기는 바디프로필.

스스로에게 ‘성실한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성실은 눈금 없는 자이다. 그것으론 무엇도 잴 수 없음을 알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그 자를 가져다 댄다.

이직이라. 권하는 말은 쉽지만, 그 길이라고 평평할 리 없다. 이 회사를 나온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다른 회사를 간다고 해도 다를 것은 없다. 이직을 생각할 때조차 절망감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갈 수 있는 회사는 한정되어 있고, 이직을 준비하는 시간 동안 나이를 착실히 먹는다. 그 말인즉, 노동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더 떨어진다는 소리.
"더 좋은 기회로 그 사다리를 올라가고 싶어 하는데, 노력을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없고, 점점 인생이 하향곡선을 그리는 게 아닌가."
퇴사, 재취업, 하향된 조건의 입사.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변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살을 빼는 일이 독한 것(의지가 강한 것)이라면 살을 빼지 ‘못하는 일‘은 의지박약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절제력이 없어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고 평가받는 사람을 일터가 인정해줄 리 없다.

"운동 같은 거 해볼 생각은 없었습니까?" 체중이 많이 나가는 면접자에게 면접관이 던진 말이다. 이런 말은 면접장 밖에서는 갑질로 명명되지만, 사람을 점수 매기는 면접장 안에서는 ‘자기관리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된다. 현대사회에서 운동은 선택이 아니다. ‘피트니스는 도덕적 의무‘이다.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몸은 신입사원도 될 수 없지만, 관리자가 될 가능성도 적다. "자기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데도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의혹’을 받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일은 어찌면 세상이 정해둔 답을 쫓는 일이다. 그러나 ‘사건‘을 겪은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의 정답으로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들은 ‘왜?‘를 묻게 된다. 그 물음의 답이 무엇이건, 그것이 변명이건 성찰이건, 세상의 답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방암이지만 비키니는 입고 싶어 일상의 스펙트럼 3
미스킴라일락 지음 / 산지니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책. 

  난 '유방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항암 치료'에 대해서도, 언제가 생의 마지막 날이 될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과 병으로 인한 고통과 치료에 대한 막막함, 이후의 생에 대한 두려움 등의 심경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생에서 이런 큰 병을 직접 겪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과는 사뭇 다르게 모든 것을 수용하고 체감하고 이겨낸 자의 덤덤한 문체로 쓰여 있다. 하지만 이 무게감이 가지는 의미는 내면의 아픔을 직접 겪은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살면서 그리 즐겁지도 않았고, 힘들어서 자살 생각을 할 만큼 우울했던 사람에게도 '생명'이라는 것은 '소중하다'는 교과서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심지어 갑작스레 큰 병을 앓게 된다면 말이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어쨌든 작가가 병을 이겨내려고 애쓰는 만큼 앞으로도 견뎌내야 할 그 앞날을 응원하고 싶다. 


머리카락이 몽땅 없어지고 나서야 알았다. 바람이 불면 곱슬곱슬거릴지언정 자연스럽게 휘날리는 머리카락의 동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가발은 한 올 한 올 휘날리는 섬세함은 절대 연출하지 못한다. 그리고 또 알았다. 야구 모자를 썼을 때 귀밑으로 송송 자리 잡은 솜털 같은 머리털들이 얼마나 귀한지를.

치료 중에 내 마음을 가장 허하게 했던 것이 ‘먹지 못하는‘ 고통이었다. 대단히 맛있는 음식을 못 먹은 것이 아니다.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출출함을 달래줄 크래커 하나를 먹고 싶었고, 봉지에 담긴 빵 하나를 먹고 싶었다. 매콤한 골뱅이 국수를 호로록 말아 먹고 싶었고, 나물을 넣고 쓱싹쓱싹 비빈 비빔밥을 우걱우걱 퍼먹고 싶었다. 우울할 때마다 찾던 딸기우유도 마음껏 마시고 싶었다. 돈이 없어서도, 시간이 없어서도 아닌데 그것들을 눈앞에 두고도 먹지 못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이 밀려들 때면 지난날을 후회했다.

가만히 살퍼보면 지금 내가 먹는 빵 한 조각, 달달한 초콜릿 한 입, 따뜻하고 향기로운 차 한 모금에도 그 속에는 잠깐의 휴식, 피로를 달래는 작은 만족감, 원하는 것을 얻은 소박한 성취감, 그리고 마음을 보듬는 위로가 소중하게 담겨 있다.

인생은 때론 버티기다. 무엇인가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들어가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런 ‘버티기의 시간‘ 동안 나를 버티게 하는 건 어쩌면 꿈이 아니다. 지금 세상으로부터 ‘아무나‘로 불려도 요동하지 않는 묵직한 멘탈이 아닐까.

사람은 애정을 쏟아부을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그것을 위해 때론 희생과 수고가 들더라도 그 희생과 수고를 감당하는 부담보다 내가 사랑을 주면서 느끼는 보람과 기쁨의 크기가 더 크니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줄 때 행복을 느낀다. 장담하건대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단 한 번도 무엇인가에게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보고 살면 알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분명 도저히 얼마 참지 못하고 ‘사랑해’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 것이다.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애정을 쏟는다는 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본능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