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아는 사람 - 유진목의 작은 여행
유진목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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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세이의 홍수 속에서 누가 진짜 작가의 무게를 간직한 사람인지 구별해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나 여행 에세이는 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지는 여행지 자체로도 특별하고, 가지 않은 사람이 여행을 떠난 사람의 낭만과 감성을 동경하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여행에 대해 말할지는 몰랐다. 나는 그저 작가와 그녀의 전작들에 주목했고, 그녀의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골랐는데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비슷비슷한 여행지의 사진과 여행 이야기를 보고도 별로 라고 느끼지 않을 수 있단 걸 알게 됐다. 이런 책이 진짜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죽음' 혹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를 갈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까진 아직 잘 모른다. 나는 그녀를 책 몇 권을 통해서만 듬성듬성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적힌 그녀의 이야기에 아주 충분히 공감이 되었고, 나 또한 그런 심정을 알기 때문에 나도 그녀처럼 어디론가 가고 싶단 생각까지 들었다. 어차피 곧 죽을 거라면. 

  살면서 죽음을 외면하며 사는 것보다 언젠간 받아들여야 할 관문으로 마주할 필요는 있겠지만, 늘 죽음을 원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의 힘듦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녀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 힘듦을 엿봤기에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고, 나 또한 늘 그런 마음이었기에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하노이에 있으면서 조금은 가벼워졌을 그녀의 슬픔과 삶을 응원한다. 나도 언젠가 나만의 하노이를 찾아 떠날 수 있길.  



어째서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지? 나는 여지껏 대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살아왔다. 아무 이유 없이 살아야한다니.

사람이 너무 죽고 싶은데 그것을 참으면 계속 자게 된다. 평소에 아무리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아 꼬박꼬박 수면제를 먹는 사람이 하루에 스무 시간 정도는 거뜬히 잘 수 있게 된다.

그저 살아 있으면 좋겠다. 살아 있는 것을 흉내 내느라 스스로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그만하면 좋겠다. 빨래를 개서 가지런히 제자리에 놓고 방문을 닫으면 좋겠다. 화분에 물을 주면 좋겠다.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면 좋겠다. 저녁약은 안 먹어도 되면 좋겠다. 아침약을 먹고 하루를 잘 보내면 좋겠다.

매일 시를 쓰면 좋겠다는 욕심은 갖지 말도록 하자. 어느 날은 쓸 수 있고 어느 날은 쓸 수 없음을 받아들이자. 쓸 수 없는 날에는 남의 좋은 것을 보도록 하자. 무엇이 좋은지 또 무엇이 나쁜지 분별하도록 하자. 그리고 나도 좋은 것을 만들자. 부디 그렇게 하자. 다시는 그렇게나 오래 잠들지 말자.

나는 마음이 아닌 소명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동경한다. 루틴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을 동경한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세상을 통찰하는 사람을 동경한다. 타인의 슬픔을 제 것으로 가지는 사람을 동경한다.

나는 슬픔이 없는 사람을 경멸한다. 아니, 슬픔을 모르는 사람을 경멸한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무례하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자신이 옳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은 중요하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무례하지 않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틀림을 가늠해본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모든 말을 내뱉지 않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적절히 타인과 거리를 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해하지 않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매사에 조심한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공감할 줄 안다. 그래서 슬픔이 있는 사람은 조용히 타인을 위로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품고 살아간다. 슬픔은 없애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상처는 낫고 슬픔은 머문다. 우리는 우리에게 머물기로 한 슬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슬픔은 삶을 신중하게 한다. 그것이 슬픔의 미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노이의 ‘무엇- 없음‘에 나는 매료되었다. 파리가 날아다니는 노점에 혼자 앉아 하염없이 커피를 마시는 것. 그냥 아무데로나 걷는 것. 감탄할 풍경보다는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분별하는 것. 먼지가 쌓이고 곰팡내가 나는 기념품을 구경하는 것. 사고 싶은 것이 없어 그냥 나오는 것. 빈 손으로 걷는 것. 길바닥에 맨발로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가까이 다가가 단숨에 셔터를 누르는 것. 눈을 마주치고 함께 웃는 것.

불행한 사람에게 희망은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불행이 그저 있는 것처럼 희망도 그저 있다.

필름을 인화하면 내가 속했던 순간의 한 조각을 가질 수 있다. 이 순간들은, 사진은, 나보다 이 땅에 오래 남을 것이다. 사진의 위안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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