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케이크의 맛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혜진 지음, 박혜진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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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케이크의 맛이었다. 

  책에 대해 붙이고 싶은 설명들과 해석할 수 있는 많은 말들을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었지만, 책을 덮으며 '완벽한 케이크의 맛'이었다고 느낀 후 작가의 말을 다시 한 번 읽어보니 어떤 사족도 붙일 필요 없이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어졌다. 그저 이 책을 추천만 할 수 있을 뿐.

  김혜진 작가 님은 내가 좋아하는 분이다. 그녀가 쓰는 글의 온도는 내가 필요로 하는 온도와 맞아 있고, 그 분의 글을 통해 항상 위로와 공감을 느껴왔다. 이번 책에 함께 해주신 박혜진 그림 작가 님도 책에 완벽함을 더해주셔서 너무 좋았다. 

  이 책에서 그려진 '말'은 곧 '선(벽)'의 문제이다. 어떤 생각과 말은 말해져서 관계의 선이 되고 벽이 된다. 완벽한 케이크에도 선이 있다. 위 아래 층이 섞일 수 없도록 하는 한 겹 한 겹의 층(layer). 우리가 사는 사회도 이런 선들과 벽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내가 뱉은 말, 내가 보인 태도, 그 층과 벽에 어떤 순간엔 가슴이 턱 막히고 나의 뒤를 돌아보게 되기도 하지만, 하려다 '삼킨' 말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서로의 가슴에 켜켜이 쌓인 '하지 않은' 말들과 보이지 않은 태도들. 층층이 쌓인 선(layer)들을 끌어안아 감싸주는 우리의 말들이 케이크의 맛을 완벽하게 어우러지게 만들며, 그 케이크를 입 안에 넣는 순간의 분위기까지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나도 모르지. 진짜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럼 그냥 너도 모르겠다고 해. 다들 모르겠다고 한다며?
너의 그 말이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들을 불러온다. 이를테면 인턴이 하겠지, 하고 내가 내버려두었던 일들. 괜찮겠지, 하고 내가 넘겨버렸던 일들.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매일 반복됐던 일들. 대단한 일이 아닌 사소한 일들. 그래서 모른 척 했던 일들. 나중엔 아주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 도대체 이렇게까지 소란을 떨 필요가 있을까 싶던 일들.

그런데 모른다고 하면 모르는 게 되나?

십 년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시간인 동시에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뭔가는 고스란히 남고, 또 뭔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시간. 두 사람 사이엔 이제 그런 여백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 조만간 또 봐.
수지는 손을 흔들며 미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조만간이 일 년이 될 지, 이 년이 될지, 다시 십 년이 될지 장담할 순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만날 땐 서로의 기억에서 또 얼마간 비켜난 모습이 되어 있을 거였다.
그럼에도 수지는 미란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오늘 자신이 만난 건 미란뿐만이 아니라 지난 시절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과거의 나를 만나는 건 그 시절을 함께 지나온 누군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미란을 통해 실감한 덕분인지도 몰랐다.

그가 포크로 잘라낸 케이크를 입에 넣는다.
하지 않아서 좋았던 것,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지킬 수 있었던 것,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잃지 않았던 모든 것. 케이크의 맛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응축시켜놓은 것처럼 아주 진하고 깊다.

너에 대해 우리가 습관처럼 했던 말들, 자연스럽게 주고받던 대화들, 우리는 쉽게 잊었고, 어쩌면 너에게는 오래 남았을 어떤 말들이 구체적으로 되살아난다.

인경 씨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전 금요일에 집에 혼자 있는 게 싫더라고요. 누구든 만나봐야 똑같겠지, 별로겠지 생각하면서 혼자 있는 거.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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