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아직은 봄밤 - 교유서가 소설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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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서점에 들려 책을 눈으로만 휙휙 구경하다가 발견책. 놀라운 우연으로 엮인 책이었다. 확실하게 내 스타일, 그러니까 다소의 우울감이 느껴졌던 책이어서 그랬을까. 하지만 마냥 우울하기엔 제목이 너무 아름다웠는데, 작가노트를 보고 깨달았다. '그렇지... 아직은 봄밤인 거지....' 책을 다 읽고 덮었는데 갑자기 숙연해지고 마음이 너무 감동스러웠다.
 책의 어느 부분은 우울했고, 어느 부분은 읽기가 힘들기도 했다. 여러권의 책을 한꺼번에 대여해서 읽다보니 한번 빌릴 때 반 정도 읽고, 나중에 다시 빌릴 때 나머지 반을 읽었다. 시간 텀이 생기다보니, 책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메모했던 구절들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려서 그게 제일 아쉽다. 아마 지난 폰에 저장되있을 듯 한데, 아무래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야 할 것 같다.
 100% 인정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봄밤』이 맞을 것이다. 난 그 어두운 분위기나 쓸쓸함, 외로움도 좋아하고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시간이 차차 지나면서 작가님에게 조금 더 밝은 봄이 오기를 희망해본다. 몸과 마음에 안정감과 여유가 생기고 그로 인한 즐거움, 인생에 대한 너그러움이 커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글도 점점 밝아질 수 있기를... 작가님과 작가님의 작품이 다시 눈부신 봄, 을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더해서 나의 인생도... 조금쯤은 그럴 수 있길...
 이런 바람들이 묶여서인지 왠지 책을 읽고난 후에 조금 더 마음이 간절해지는 책이었다.

 

 

빛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사람이 있는 곳에 그림자마저 묻어버릴 만큼 완벽한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빛은 끊임없이 사물을 굴절시키고 왜곡한다. 속고 있으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굴절된 삶 속에서 진짜를 가려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몸으로 익힌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사소하기만 한 몸의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오래전의 내게 그러한 사실은 분명히 상처가 됐지만, 이미 흉터로 남은 일은 더이상 상처가 될 수 없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엄마가 끝내 진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해도 그건 엄마 몫의 삶일 뿐이다. 누구나 그렇다.

"그러는 너는 요즘 어때?"
... 그런데 글쎄.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요즈음의 나는 어떤가. 잘 모르겠다. 요즈음의 나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나, 그리고 앞으로의 나 역시. 나는 내가 어떤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살림살이도 막상 죄다 끄집어내놓고 보면 그 양이 만만치 않기 마련이었다. 죽고 나면 폐기되고 말 짐덩어리를 하나둘 늘려가며 살아가는 삶이라니. 내가 죽고 나면 내가 쓰던 물건도 이런 식으로 폐기되겠지.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알고 살면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벽지를 뜯어내면서 상만이 말했다.
"별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한다. 언제 죽을지 뻔히 알면 맨정신으로 살아지겠냐? 언젠간 죽는다는 거 다 알아도 그게 언제지는 모르니까 살아지는 거지."

"이렇게 혼자 죽는 것도 무섭지만 내가 죽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너무 끔찍해요."
상만이 얘기 끝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놈이 한숨은. 그러니까 외롭지 않게 살아. 주변에 잘하면서. 그러면 되는 거야."
김과장이 토닥이듯 말했다.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요.. 세상에 외롭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다고. 다 그렇게 살다 죽는 거죠."

나의 죽음을 수거하는 이들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문득 올려다본 하늘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터무니없이 새파란 하늘에 시선을 고정했다. 눈앞이 핑그르르돌더니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돌연히 찾아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고독하기 짝이 없다. 아내와의 만남이 그랬고 이별 역시 그러했다. 그것들 앞에서 나는 매번 속수무책이었다.

내 입에서 나간 말은 결국 내게로 돌아오기 마련이고, 불화는 언제나 말에서부터 싹튼다.

무기력은 가장 마지막 것까지 포기하게 만든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 앞에 쉽게 무릎 꿇는다.

아버지는, 혼자 힘으로는 찢고 나올 수조차 없을 만큼 질긴 번데기 속에 나를 처박아놓은 일 말고는 딱히 해준 것도 없는 주제에, 심심치 않게 내 안의 연민을 건드리고는 했다. 위태로이 오르고 있던 낭떠러지에서 허방이라도 짚은 것처럼 아득해졌다.

그러나 아버지 역시 내게는 엄마나 오빠와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그의 무능이 모든 걸 망쳐놓았다는 생각을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능한 가장은 절대로 무죄일 수 없다.

‘끝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내내 품고 지낸 시간이었다. 그 시절, 끝도 없이 이어지던 추락에서 나를 건져올린 건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가 살고 싶다는건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 작가의 말

‘어느 한 시절의 내가 그랬듯 생을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좌절한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쓰고 또 쓸 준비가 되어 있다. 다른 이들보다 느릴지언정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는 일어설 수조차 없고 매 순간 끔찍한 통증에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살아 있어서, 소설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돌이킬 수 없이 낡아버렸다 해도, 아직은 봄밤이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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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문구 - 나는 작은 문구들의 힘을 믿는다 아무튼 시리즈 22
김규림 지음 / 위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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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랐는데 얼마전 읽었던 '아무튼, 피트니스'와 같은 출판사에서 '아무튼' 시리즈로 발간된 책이었다. 피트니스와 문구 말고도 떡볶이, 요가, 하루키, 피아노, 비건, 술, 말하기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이 많이 나와있었다. 나도 나름대로 문구에 애착이 있는 사람이지만, 일부러 찾아읽은 건 아니었다. 가져간 책을 다 읽어서 비치용 도서를 기웃거리다 만났는데, 다음엔 내 취미나 취향에 더 가깝거나 궁금한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내겐 조금 가벼운 책이었다. 내용도 그렇지만, 타인의 개인적이고 단순한 취미생활에 대한 글은 책으로 읽기에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문(방)구'에 대한 애착과 열정은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고, 그런 특별함이 그녀를 성장시키고 지금까지 나아오게 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취미나 취향은 그리 어렵지 않은 건데 남보다 더 많이, 오래, 또 열정적으로 어느 한 가지를 '탐'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 내겐 그런 특별한 즐거움이 뭐가 있을까, 다시 생각해보고 돌아보게 된 시간이었다.


내가 나와 나누는 대화를 기록하는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마주한다. 가장 솔직한 나의 감정을 일기를 쓰면서 알게 된다.

심각하게 고민을 써 내려간 페이지들은 다시 열어보면 열이면 아홉은 가벼워져 있다. 지치고 힘든 어떤 날 예전에 쓴 일기들을 읽으면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위로를 해온다. 나름대로의 걱정과 고민을 짊어지고 있었던 그때의 내가 말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다 지나갈 거라고, 결국엔 다 가벼워질 것들이라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곧장 책상 앞에 앉는 나는 그 이상의 시간을 책상 앞에서 보내는 셈이다. 그러니 책상 위에 부지런히 사물들을 들여놓고 사용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결국 나의 삶을 가꾸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살뜰히 가꿔야겠다. 책상도, 나의 삶도.

크기도 색깔도 같은 노트를 사는 건데 뭐가 특별할까 싶어도, 왠지 모르게 매번 경건한 마음이 든다. 수백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내 인생의 책장에서 이제 막 한 권을 끝내고 또 다른 권으로 넘어가는 기분이랄까.

옛날 일기장을 펼쳐보며 과거의 내가 어딜 갔는지 누굴 만났는지 찾아보는것도, 당시에 했던 생각을 훔쳐보는 것도, 기록 스타일이 변한 것을 느끼고 신기해하는 것도, 옛 연애의기록을 보며 이불킥을 하는 것도 쌓인 일기장만이 안겨줄 수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이제는 어떻게 표현할까 고심하며 설레거나 무엇을 쓸지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보다 다짜고짜 표현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그게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대부분 비효율적 시간들에 있다. 빨리 할 수 있는데도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한 것들.

이런 비효율성을 감내하는 건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걸 뜻한다(바쁠 땐 일력도 밀리고 시계도 멈춘다). 그래서 나는 내 일상 속에 항상 쓸데없는 일들이 조금씩 자리하고 있기를 바란다. 빠르게 움직이는 일상 속에 수고로운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다는 건 잘 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기에.

오랜 시간 써서 나에게 꼭 맞는 형태로 만드는 것.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만들어나가는 것, 일방적으로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교감하고 맞춰나가는 상대로서의 필기구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내가 도구를 길들이기도 하지만, 실은 내가 도구에 길들여지기도 한다.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

아는 것이 늘어갈수록 일상은 한층 더 풍성해진다. 매일 이렇게 무언가를 새로 알아갈 수 있어서 즐겁다.

나는 쓸데없는 것들의 힘을 믿는다. 생필품들은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지만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쓸모없는 물건들이다.

문구의 진짜 가치는 실용성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그러니 나도 더 이상 핑계 대지 않으려 한다. 예뻐서, 귀여워서, 써보고 싶어서, 그냥 사고 싶어서, 저걸 사면 오늘 하루가 더 나아질 것 같아서, 문구를 사고 싶은 이유는 실용적이라는 이유 말고도 너무나 많으니, 우리는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체크리스트와 플래너, 나는 결코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할 일을 종종 놓치곤 하는데, 덤벙대는 내 성격을 어느 정도 보완해주는 것이 체크리스트다. 출근하자마자 할 일들을 써놓고 하나하나 지우는 쾌감이 상당하다. 체크리스트 덕에 원래보다 1퍼센트 정도는 더 체계적인 인간이 되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대척점이 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서로가 서로를 대체할 수 없으니 꽤 좋은 공존이 아닐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도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했던 것, 다이어리 네다섯 권을 동시에 쓸 정도로 열정적으로 몰입했던 것이 스스로도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무언가에 푹 빠지는 건 성인이 되어서도 어려운 일인데 그 나이에 쉽게 쌓을 수 없는 취향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만들었으니 말이다.

손으로 쓴 데에서 나오는 독특한 손맛은 쉽게 따라 할 수 없다. 백 번을 써도 백 번 모두 다르고, 모든 글씨들에서 쓰는 사람의 성격과 감정이 느껴진다.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또 사랑스럽다.

조만간 사라질 물건에 대한 애틋함같은 게 갈수록 커진다. ‘그땐 이런 것도 있었는데‘ 하면서 이런 물건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았다고 추억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곧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에 불현듯 쓸쓸해진다.

기계로 만든 것들이 많아질수록 손으로 만든 핸드메이드의 가치는 오히려 더 커질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물건들 사이에서는 삐뚤빼뚤 고르기 않게 손으로 만든 것이 더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아마도 더 인간적이기 때문이겠지.

역시 좋아하는 것은 좋아한다고 시끄럽게 떠들고 볼 일이다.

그래, 취향이라고 해서 꼭 멋들어질 필요가 있나!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소한 것들로 행복과 만족을 찾아나가는 것도 충분히 즐거운 인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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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
김원희 지음 / 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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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책인데, '자유'에 대해 말하는 책을 '자유'를 빼앗긴 채 읽어서 공교로웠다.
  각설하고 이 분 진짜 멋진 분이시다. 젊은 사람 못지않은 열정을 유지하며 삶을 에너지있게 살아내는 모습 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어른으로써의 모습까지 합쳐져 더 시너지가 나는 것 같다. 아무리 성공했다 하더라도 새롭고 넓은 세상을 자주 접하는 사람만이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소위 말하는 '꼰대' 기질도 갖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분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읽을 땐 아주 쉽고 편안하게 읽혔는데, 다시 읽으며 정리를 하다보니 더 감회가 새로웠다. 젊은 나도 한번 시도하기 버거운 해외여행을 이렇게 자주 다니시는 것도 부러웠고, 나이듦에 따라 몸이 아파지는 정도와 인생의 무게감을 아주 조금쯤은 짐작하는데 그런 온갖 아픔과 무거움까지 이겨낼 만큼의 열정은 어느 정도일까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벌써 70살인 분이신데, 앞으로의 모습이 더욱 궁금해진다. :) 


‘해외 자유 여행‘이란 멋스러운 단어가 주는 풍족함 이상으로, 내가 그 어려운 행위를 스스로 하고 있는 것, 그렇게 그리스란 나라에 와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그 행위 자체가 더 만족스러운 것이다.
내가 나이듦에 있어서 무기력하지 않고 젊은이들처럼 해낼 수 있는 것, 그 긍정적인 마인드와 용기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 노년이기에 획득할 수 있는 특별함,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나이 들어 여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몰랐던 세상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내가 살아온 세상과 내가 지나온 시간을 보러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이 들어 여행한다는 것은 아직은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날 때는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내 시간을 확인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힘들다면 떠나보라. 그리고 돌아와 보라. 자신의 자리, 가장 편안한 자리가 어디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돌아와서도 그 자리가 편안하다 생각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그 자리는 당신의 자리가 아닐 수도 있다.

산다는 것은, 돈을 번다는 것은 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참 힘든 일이구나.

"그럴 수도 있지!"
자신의 무지를 당당함으로 무장하기도 하고 뻔뻔하게 받아들일 줄도 안다. 설령 상대의 실수라 하더라도 이렇게 웃으며 넘어가는 지혜로움도 있다.

나이를 먹으면 혼자가 두렵다. 젊었을 때는 혼자, 고독, 사색, 그런 멋진 낱말들이 그립지만 노년이 되면 그런 것이 얼마나 두려운 낱말들인지 알게 된다.

예쁜 총각이 뜸도 들이지 않고 "We are all friends."라며 밝게 웃어 준다. 막내아들보다 더 어린 스물하나의 젊은이가 환갑이 넘은 우리에게 스스럼없이 "We are all friends."라고 해주었다.
그 말엔 어떤 황홀감이 있었다. 청년의 한마디가 60년 굴곡진 인생에 보상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정 우리는 정말 Good friends가 되었다. ... 청년의 목소리로 들은 "We are all friends."는 귓가를 오래 맴돌다, 뒤늦게 나의 목소리로 "인생은 아름다워"가 되었다.

누구나 좋다고 하는 곳을 누구나 다 좋아할 수는 없는 것. 그래서 여행의 색깔은 다채롭다.

황홀과 행복, 잊히지 않는 추억거리는 자유로이 여행하는 여행자들의 몫이다.

순간순간 무력감에 퍼질러 누워 마냥 눈 감고 자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켜 다음 여행을 구상하고, 망설임 끝에 티켓을 산다.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는 이 삶을 나는 어떤 형태로든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든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나이가 들면 사랑을 무색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나이든 누군가에게 잘 대해준다는 것은 사랑이라 말하기보다, 애긍*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설령 누군가가 나이든 그대를 모른 척하거나 적대시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그것은 그가 그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늙음, 그 육신의 추레함이 싫을 뿐이니까.
(* 애긍: 애처롭고 가엾게 여기다.)

우리는 가보지 않은 길을 그리워하고 때로는 부러워한다. 내가 걷는 길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저 길로 갈걸, 저길이 훨씬 수월했을 텐데, 하고, 그러나 막상 그 길로 갔을 때, 그 길이 지금의 길보다 더 힘들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지난 어떤 선택도 그 시점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믿고 후회하지 말자. 시간은 앞으로 가지 뒤로 가지 않는다.

글쎄, 70쯤 되면 그냥 조금은 아파도 좋은 나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뿐이다. 불편한 육신을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새로 태어나고, 새로 만들어지고, 사용되어지고, 이용되어지고 그리고 노화된다. 그리고 노화된 것은 새로움으로 교체된다. 자연의 이치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내 맘속에 우주가 있다는 말이다. 어떤 사물과 환경을,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나의 하루는 지루할 사이 없이 충만하게 흘러가고, 나는 이 프리랜서 일을 할 수 있는 날까지 할 것이다. 다리에 힘이 있을 때까지, 아니 조금 힘이 없으면 어떤가, 나에게 맞는 길을 찾아 여행도 떠날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100살이 되어도 캐리어를 끌 수 있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며, 자기의 일을 한다는 것이. 설령 허황된 꿈이어도 좋다. 꿈꾸는 그 순간도 삶의 연속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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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가 피로가 되지 않게 - 군더더기 없는 인생을 위한 취사선택의 기술
인나미 아쓰시 지음, 전경아 옮김 / 필름(Feelm)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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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책 제목을 보고 '필요'라는 부분을 오해해서 '소비' 쪽으로만 연상했었다. 근데 소비와 소유뿐 아니라 인생을 보다 잘 살아내기 위한 전반적인 조언들이었다. (더)하면 좋을 것들, 빼는(하지 않는) 게 좋은 것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 책도 읽을 때 왠지 가볍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인용한 두 번째 글귀처럼) 작가가 글을 간결하게 썼기 때문이다. 조언들을 실천만 잘 해도 삶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만, 글을 심플하게 표현하다보니 중요성이 잘 전달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글에 군더더기가 없으니 읽기는 쉬웠지만, 단순히 맞는 말, 모두 아는 얘기, 이렇게 읽히기도 했다. 자기계발서 류의 책들이 그렇듯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긴 하지만 말이다.
 솔직히 인상깊은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말과 글 간결히 전하기'를 포함해 못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런 건 도대체 왜 잘할 수 없는걸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기도 했다. 이 책의 심화편으로 해서 각 조언에 대한 예시나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구체적 연습 방법도 나오면 좋겠다. 


실패는 해보는 게 좋으며, 실패를 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애쓸 필요는 없다.

필요 이상의 자극을 구하지 않고 지금 해야 할 일을 착실히 하는 사람의 인생은 의미가 있다. 힘든 일이 있어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음에 무엇을 할지만을 생각하자. 그러면 다소의 고통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살아 있는 것에는 다 의미가 있단다. 네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는 앞으로 뭔가를 하기 위해서일 거야."
마음속으로 내 삶을 부정하고 있던 나에게 선생님의 이 말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살아 있어도 괜찮다. 사는 건 다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장문의 메일은 바쁜 상대방에게 잘 전해지지 않는다. 원래 바쁘게 일하는 사람은 장문의 메일을 읽을 시간이 없다.
게다가 상대방에게 ‘길게 메일을 쓰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위험하다. 괜히 이미지만 나빠지고, 전해야 하는 정보도 올바로 전달하지 못해 메일을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보기에 화려하지 않아도, 성과가 좀처럼 보이지 않아도 한발 한발 착실하게 노력을 계속해나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저렴한 물건이라도 막 쓰는 게 아니라 잘 쓰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니 즐겁게 쓸 수 있을지, 잘 쓸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물건을 사는 습관을 들이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만 해도 낭비를 꽤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일을 하면 힘들어지는 이유는 ‘완벽하게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무릇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완벽할 수 없고 잘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못 하는 걸 인정하고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을까?‘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신기하게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혼자 일을 떠맡기 일쑤인 사람이라면 부디 직접 하는 게 빠르겠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그렇게만 해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이것이 또 다른 출발이 된다는 점도 알게될 것이다.

회사에서 친해지기 힘든 사람을 대할 때는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이쪽에서 먼저 마음을 여는 일이 중요하다. ‘친해지기 힘들다‘고 느껴도 굳이 그걸 의식하지 말고, 대신에 ‘이 사람은 어디에 관심이 있을까?‘, ‘이 사람은 뭘 좋아할까?‘ 하고 상대방을 알려고 노력해본다.

그 사람의 관심사를 알게 되었다면 그것을 계기로 "~에 대해 잘 아는군요.", "~를 좋아하세요?" 라고 가볍게 물어본다. 그때 상대방이 그 질문에 더욱 관심을 보이면 십중팔구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이다. 자신과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다소나마 마음을 열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 사람이 나를 상대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그렇군요. ~라서 ***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라는 식으로 질문한 이유를 알려주는 것이 좋다. 그에게 내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라도 전해질 수 있게 말이다.

‘뭔가를 전하려고 할 때는 심플함, 간결함,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 기본이다.‘

‘내가 하는 편이 빠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일수록 세세하게 공을 들여 자료를 작성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진지하니까, 성실하니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해!‘, ‘빈틈없이 만들어야 해!‘라는 생각이 앞서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고방식의 바탕에는 ‘자세하게 기재해야 이해하기 쉽겠지?‘라는 생각이 깔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역효과만 낳을 뿐이다.

중요한 건 핵심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료에 들어갈 내용을 되도록 심플하게 정리해야 한다. 여기에서 ‘심플‘이란 쓸데없는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는 뜻이다. 필요한 것만 남은 상태라는 말이다.

자료를 작성하는 동안에는 몇 번의 ‘틈새 시간‘을 두어야 한다. 활짝 기지개를 켠다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안을 천천히 걸어보거나 어떤 행동을 해서 기분전환을 한 뒤 책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다음 작성하고 있던 자료를 다시 살펴보면 거슬리거나 필요 없는 부분이 보일 것이다. 그 부분을 수정하고 삭제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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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도 있다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북포레스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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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다 미리는 한국에서도 유명하다고 알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직접 접하진 않았지만 (대충 스쳐 봤던 것 같다) 유명하다고 느낄 정도니까. 굿즈에 홀려 어쩌다 구매해 읽었는데,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일러스트 작품도 그랬던 것 같다.
 우선 작가와 사는 국가가 다르면 사회문화적 감성 코드가 다른 게 꽤 크게 느껴진다. 서유럽쪽 작품이 많이 와닿지 않았을 때도 그랬지만, 비교적 가까운 나라인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글 자체가 (신문에 연재했던 짧은 에세이라서 그런지) 너무 당연하면서도 허무하고 가벼운 일기나 중얼거림 같았다. 한국에서도 이 작가가 인기 있다면 왜 그런건지 궁금해진 순간이 많았달까.
 원래 제목은 '내일 일은 모릅니다'로 매일의 느낌, 깨달음을 간단하고 자유롭게 적은 작가 자신다운 글이라고 한다. 의도는 알겠지만, 내겐 너무 가볍고 공감이 안되서 아쉬웠던 게 사실이다. 


나이에 맞게, 남자답게, 여자 주제에, 이 얼마나 답답한 말인가. 굳이 답답함 속에 자신을 밀어 넣고 살 필요가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런 말을 안 하면서 살고 싶다. 그러는 편이 즐겁게 살 수 있고 또 훨씬 멋있으니까.

느리더라도 자기 속도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묵묵히 갈 수 있다는 데 피트니스의 매력이 있다.
"어리석은 자가 그 어리석음을 고잡허더 보면 현명해진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처럼 말이다.

삶이 지루하다 해서 늘 익사이팅한 경험을 만들고 매일 여행을 떠날 순 없지 않은가. 살아가려면 늘 고만고만한 일상과 맞물려 돌아가는 소소한 성취에서 기쁨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다. 피트니스의 지루함은 삶의 그런 모습과 닮아 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다정하게 배려해주거나 부드럽게 맞장구를 쳐주면 마음이 모락모락 따스해진다. 밤에 집에 돌아와서도 문득 그때의 따스함이 떠올라서, 그 사람과 또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언젠가,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만 하다가 시간이 흐르는 것을 나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서른일곱 살은 아직 젊지, 이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드리고 웃는 사람도 있지만, 서른일곱 살인 나 나름대로 늙어가는 불안이 있다.

쓸쓸함은 혼자서 어떻게든 해야지.

둘이 정한 것이 있다. 상대방이 해준 것에 반드시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다. "빨래해줘서 고마워", "쓰레기를 버려줘서 고마워", "차를 타줘서 고마워" 등등.
일부러 말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서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지만 내가 굳이 싫은 사람을 위해서 계속 상처받을 이유도 없다. 내게는 그런 강인함이 필요하다고,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웬만하면 다른 사람 앞에서 나를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 같은 건 어차피 안 돼요"라고 말하기 싫다. 그러면 내가 너무 불쌍하다. 굳이 작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딱 적당한 정도가 좋은데~ 싶긴 하지만 그게 참 어렵습니다.

사람은 상처를 주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런 하루하루를 힘차게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 가끔은 ‘수고가 많아‘라고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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