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할 자격 - 게으르고 불안정하며 늙고 의지 없는… ‘나쁜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동의 자격
희정 지음 / 갈라파고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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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럼 생각할 것들이 많은 책을 읽었다. 메모한 부분이 수십 군데였고, 맞는 말이라고 수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힘이 없고', '건강하지도 않고', 청년들의 기본인 '자기 관리'와 '열정'과 '노력'의 트랙에서 빗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쉽게 저렴한 노동 값으로 대체 가능한 '여성'이면서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이 너무 아프고 무겁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현실을 냉정하게 꼬집어 봐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력을 한다고 하는데 노력에 잣대가 매겨지는 기분. 그래서 내 노력은 아무것도 아닌 노력이라 노력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기분. 이렇게 사회적으로 정해진 노력과 성실의 기준점이 있다는 게 책을 읽으면서, 청년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가장 아픈 부분이었던 것 같다. (마치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수능처럼, 모두가 100점을 받아서 98점을 받은 나는 낙오자가 되고 직장과 그 후의 회사 생활까지 모두 망가지게 된 것 같은 제법 쓸쓸한 기분...) 



요즘 청년들.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을 가지고도 취업이 되지 않아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는 그 청년들 말이다. 이력서 300통을 넣고도 좌절은 금지니까 301번째 이력서를 쓰는 취업 준비자들. 그 이력서는 각종 공모전 입상 경력, 자격증, 워킹홀리데이와 어학연수, 봉사활동, 인턴 경험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런 청년들이 바글바글한 세상에서 지방의 작은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 후 ‘정식‘ 취업을 하지 않은 채 몇 년째 아르바이트를 한 이는 감히 성실을 자신의 덕목으로 가질 수 없었다.

일하다가 다치고 병들거나 부당하게 해고되어 싸우는 사람들을 주로 만났다. 이들은 억울해했다.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이런 대우라니. ...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하지만 사람들은 이들의 ‘열심‘을 인정하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 하고 좋은 대우를 바라면 안 된다는 댓글이 달렸다. 소위 스펙에 포함되지 않는 노력은 인정되지 않았다. 이들이 행한 열심은 오히려 무능력에 따른 장시간 노동으로 폄하되었다.

‘현대사회의 저널 인사들은 ‘그건 노력이 아니야. ‘노오력’일 뿐이라고‘라며 이 우울한 과로의 무용함을 말했다. 그 노력이 현 체제의 불평등을 유지하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라 일갈했다. 정작 무용한 것은 그들의 훈계였다. 청년들은 코웃음 쳤다. 우리가 그걸 몰라서 노력하는 줄 아나, 이들은 "노력의 가치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하지만 가장 노력하는" 세대였다. 노력이 뭐 대단한 보상을 준다고 믿진 않았다. 다만 정체되는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모두가 달리는 사회에서 걷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멈춰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들은 달리면서도 자신이 멈춰 있지 않은지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낙오되지 않으려면 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했다. 이들의 절박함을 납득케 하는 것은 청년 두 명 중 한 명만 직장을 가질 수 있는 지경이 된 취업률이었다.

경쟁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를 반복하는 이들을 사회과학 서적에선 신자유주의 시대의 피해자나 불안정 노동의 당사자로 바라보지만, 타인과 부대끼는 현실에서 이들은 ‘루저‘, ‘낙오자‘, ‘철없는사람‘이었다. 그런 평가를 꼬리표처럼 달았다.

미리는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철없고 근성 없는 사람으로 통했다. 그가 말하는 퇴사 사유는 힘없는 소리였다. 이 사회에서 발화 자격은 (사회가 규정한) ‘자기 몫을 다 한‘ 사람에게 주어졌고, 그런 측면에서 미리는 말할 자격을 취득하지 못했다. 열심히 일하다 부당한 일을 겪었다는 이들에게도 그 ‘열심‘은 진정한 열심이 아니라고 말하는 세상이었다.

"알바할 때 보면 사장들도 웃겨요. 젊은 알바생을 원하잖아요. 그 청년이 알바를 열심히 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이것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알바는 미래에 뭔가 더 괜찮은 일을 하기 위해 임시로 하는 일로 취급하니까요."

스펙으로 수치화되는 열정의 점수를 세다 보면, 노력을 믿지 않지만 노력해야 한다. 젊은 진취성은 이력서에 적히고, 이미지화된 노력은 포트폴리오에 알차게 담긴다. 도전, 진취, 열정, 성실이라는 청년의 이미지마저 스펙을 이룬다. 꿈꾸는 자아를 잃지 않으면서도 생산적 성취를 이끌어내는 젊음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욕망을 건든다. 미라클모닝, 갓생, 독기라는 이름을 달고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만 추앙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성실한 젊음의 이미지가 놓이는 장소가 사회이고, 이 사회에서 성실은 시민권의 발급 조건이다.

"그거 뭔지 알아요. 노력하지 않는 거. 열심히 사는데 노력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거. 엄마나 아빠, 어른들 눈에는 제가 열심히 살지 않는 거예요. 못마땅한 거죠. 제가 아침에 출근하고 이런 게 아니니까. 부모님은 저만 보면 가만있지 말고 뭐라도 하라고 하세요."
방과후교사 일을 하며 카페 아르바이트를 겸하게 된 이유가 바로 ‘아무것도 안 한다‘는 눈총 때문이라고 했다. 성실은 효빈이 획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취업은 언제 하니?" 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규범에 적합한, 심미적인, 신체 건강한) 몸은 우월한 능력으로 취급된다. ‘용모 단정‘은 그러한 말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몸은 능력으로 여겨지고, 예비 노동자들은 자신의 몸에 투자를 해야 한다. 사회적 기준에 적합한 몸을 가졌다는 것은 ‘자기관리‘의 성공을 의미한다. 그런 측면에서 요즘 유행하는 바디프로필 촬영은 상징적이다. 운동하고 식단을 관리하고, 최대한 몸을 ‘완벽‘의 상태에 가깝게 만들어 그 찰나의 순간을 이미지로 남기는 바디프로필.

스스로에게 ‘성실한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성실은 눈금 없는 자이다. 그것으론 무엇도 잴 수 없음을 알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그 자를 가져다 댄다.

이직이라. 권하는 말은 쉽지만, 그 길이라고 평평할 리 없다. 이 회사를 나온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다른 회사를 간다고 해도 다를 것은 없다. 이직을 생각할 때조차 절망감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갈 수 있는 회사는 한정되어 있고, 이직을 준비하는 시간 동안 나이를 착실히 먹는다. 그 말인즉, 노동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더 떨어진다는 소리.
"더 좋은 기회로 그 사다리를 올라가고 싶어 하는데, 노력을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없고, 점점 인생이 하향곡선을 그리는 게 아닌가."
퇴사, 재취업, 하향된 조건의 입사.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변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살을 빼는 일이 독한 것(의지가 강한 것)이라면 살을 빼지 ‘못하는 일‘은 의지박약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절제력이 없어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고 평가받는 사람을 일터가 인정해줄 리 없다.

"운동 같은 거 해볼 생각은 없었습니까?" 체중이 많이 나가는 면접자에게 면접관이 던진 말이다. 이런 말은 면접장 밖에서는 갑질로 명명되지만, 사람을 점수 매기는 면접장 안에서는 ‘자기관리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된다. 현대사회에서 운동은 선택이 아니다. ‘피트니스는 도덕적 의무‘이다.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몸은 신입사원도 될 수 없지만, 관리자가 될 가능성도 적다. "자기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데도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의혹’을 받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일은 어찌면 세상이 정해둔 답을 쫓는 일이다. 그러나 ‘사건‘을 겪은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의 정답으로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들은 ‘왜?‘를 묻게 된다. 그 물음의 답이 무엇이건, 그것이 변명이건 성찰이건, 세상의 답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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