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어느 날, 헤이리의 예쁜 카페에서 전경린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풀밭 위의 식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오시던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글과 어울리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루하지 않은 질문을 드리려 노력했습니다. 촬영 및 인터뷰는 문학동네 담당자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풀밭 바깥에서 풀밭을 보며 
 
   오랜만에 만난 사랑 얘기가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예전 글의 독함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입니다.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한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다치지 않아”라는 변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결말부의 ‘풀밭’에서의 평화로운 포용도 기억에 남구요. 이렇듯 작품의 분위기가 달라진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무엇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점 때문인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니까 오히려 그런 거에(열정의 모순) 더 편안해져요. 다 되는 세상이고,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세상은 어차피 불가피하고 불가해한 곳이고, 불가사의로 가득한 곳이니 그런 것마저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어요. 오히려 그 불가해함에 기대서 더 편안해지기도 하고, 사랑의 불가능함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네요. 
 



   여주인공 누경의 비중이 절대적입니다. 누경이라는 캐릭터에서부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렇게 됐어요. 누경이라는 여성스럽고 순수한 여자가 있어요. 상처를 받은 사람에 대한 캐릭터를 먼저 만들고, 그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라디오 피디인 친구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어요. 누경과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을 ‘생존자’라고 하는 걸 보고 나로서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생존을 말할 정도로 절박한 일이니까요.



   (쉽게 써보고자 문장의 날카로움을 자제하셨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가슴을 치는 문장이 페이지마다 가득합니다. ‘전경린’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옮겨 쓰고 있다는 블로거가 있을 정도로 선생님의 문장은 독특한데요, 선생님 고유의 문장을 만드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면 창작을 꿈꾸는 알라디너 여러분께 소개 부탁 드립니다.

   특별한 요령이나 방법은 없어요. 나 자신의 삶을 그대로 감당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정면 샅샅이, 고스란히 자신의 진실을 감당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되겠어요. 아픔이든 사랑이든 완전히, 순수하게 예민한 상태로 바라보는 것을 생각해요.   


   비유도 비유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고유한 사물을 자기만의 해석으로 소설 흐름에 필요하게 사용해야겠지요. 꼭 필요한 비유를, 의미가 서로 맞게, 적재적소에 연결하는 게 중요해요. 누경과 ‘팔 없는 비너스’의 이미지가 그래요. 풀밭 위에서 ‘그 일’을 겪을 때 누경은 팔이 없는 것처럼 무기력했었지요. 그런 때 비로소 비유가 성공하지요. 또 누경을 상처 입힌 상대가 지니고 있던 게 ‘유리 조각’ 이었는데 이 유리는 깨진 것을 새로 녹여 다시 온전한 것을 만들 수 있어요. 누경을 상처 입힌 유리에서 다시 새롭고 온전한 것이 시작되는 거지요.

  단지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물을 <간파>하고, 바라보고, <사유>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문체에 있어 제겐 기질적인 부분이 있어요. 상처 받는 면이 있고, 사물을 보는 시각이 있구요. 문체가 작가마다 다르고 인간마다 다른 이유는 결국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풀밭 위에서 식사를


50대 미남 교수 ‘서강주’는 그야말로 팬터지의 총집합이었습니다. 98년작 <롤리타>에서 험버트 역을 맡은 배우가 제레미 아이언스였다는 점이 문득 떠올라 그가 ‘제레미 아이언스’를 닮았다는 구절이 인상 깊었습니다. (르 클레지오는 안 닮았어요? 작가님 웃음.) 이토록 매력적인 남자주인공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생각해요. 누경은 본능적으로 운명의 상대로서 서강주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서강주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죠. 그렇다 보니 서강주와의 나이차도 많이 나게 되었어요. 서강주는 사랑보다는 삶을 지키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에요. 그 누구보다 자기 삶을 좋아하는 사람이구요. 세속의 가치를 경멸하지만, 그 경멸을 다 참아내고 살 것이니까요. 그런 남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서강주가 삶을 가치 있게 여겨서 소설이 더 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기존 주인공들과 달리 서강주는 삶을 인정하고 있네요.

   
  서강주의 한 마디 :
“나는 삶에 지면서 살아가는 가여운 사내일 뿐이지만, 너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너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알아주기 바란다. 무슨 일로 나 자신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너를 함께 생각했다. 꼭 잘 지내야 한다.(69p)”
 
   



누경은 아버지와 서강주를 여러 번 겹쳐서 봅니다. 아버지와 서강주가 닮았다는 표현도 나오구요. 누경의 꿈에 아버지가 나와 아버지가 누경과 결합을 시도했던 날, 서강주와 누경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강주와 아버지, 이 절대적인 두 남자는 누경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입니다. 풀밭에서 벌어진 ‘그 일’에 대해서도 아버지는 누경을 받아주지 않아요. 오히려 입을 다물라고 하지요. 누경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억누르고 살아요. 그러다 퇴근길 방송에서 접한 성폭행 기사를 듣고 그만 감정이 넘치게 된 거죠.

누경의 꿈에서 아버지가 누경과 결합을 시도했던 것은 아버지 자체가 아닌, 누경 자신의 원형이라고 생각했어요. 융 심리학에서도 나오지요. 풀밭에서 벌어진 일 이후 잃어버린 누경의 원형이 누경과의 결합을 시도한 거라고 보았어요. 피해자인 누경이 너무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자기 자신이 그 지점에서 찾아오게 된 거고, 그렇게 누경은 서강주와 대면하지요.

소설MD는 이 지점에서 윤동주의 시구를 떠올렸습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누경이 안쓰러워졌습니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에서 사랑의 순간은 낯선 남자가 건넨 한 마디 “괜찮아요?”에서 시작됩니다. <풀밭 위의 식사>에선 사랑의 순간이 구두 굽이 부러지는 순간 급작스럽게 찾아오는데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이토록 급작스럽고 우연적인 사고 같은 것인지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내 생에..>와 <풀밭 위의 식사>에서의 운명은 느낌이 많이 다른데, 그래도 (웃음) 그 날도 구두굽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을 거예요. 사랑은 비논리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풀밭을 만든 작가 전경린은


이성복 선생님은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예술가의 고통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독한 글을 쓰시는 선생님은 피로를 느끼시진 않는지요. 독자의 입장에선 가끔 죄송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피로해요. 피로한데, <어울리는 피로>라고 생각해요. 글을 쓰기 위해 할 수 있는 데까지 내려가야 해요. 그러지 않고는 글이 안 나오니까…


그래도 이번 글은 전작보다는 덜 피로하셨지요? 이미 과거의 일이기 때문일까요? 금지된 사랑인데도 안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기라는 형식은 꼭 한번 써보고 싶었어요. 일기는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일기 속에 기록된 그 순간들은 현재니까요. 사람들은 지나간 일에 관대한 것 같어. 서강주와 누경은 시작되지 말았어야 할 상황이니까, 읽는 독자들도 처음부터 이들의 끝을 알고 있으니까요.

이 글을 쓰는 상황도 덜 피로했어요. 토지문학관에서 다른 작가들하고 같이 쓰면서 굉장히 뜻 깊기도 했구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초록 유리(누경이 서강주에게서 선물받은)를 실제로 가지고 있었어요. 늘 보는 곳에 놓으려고 생각하다 결국 책장 위에 놓게 되었는데 어느 날 일어나서 어떻게 하다 이게 깨진 거야. 그런데 깨지는 순간 디테일이 팍, 떠올랐어요. 글을 쓸 때까지는 후반부의 디테일이 없었거든요. 그런 순간 희열을 느껴요. 어떤 글을 쓸 만큼의 욕망이 그리 쉽지가 않아요. 

 


“가끔은 내가 속물 같아” 라는 누경의 말이나 천박한 것과 비열한 것에 대한 서강주의 혐오를 보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아름다움의 세계가 확실히 존재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게 있다면, 속물적이고, 천박하고, 비열한…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답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 질문은 어려워요. 그런 거에 대해서 예전에는 전투적으로 대치하고 확실하게 미워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게 쉽지 않아요. 서강주는 삶을 사는 사람이에요. 속물을 알고, 혐오하지만 그걸 견디는 거예요. 누경에게 치마를 못 사다 준 것도 그 모든 상황을 견디는 거죠. 긍정하기에 견뎌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극도로 혐오하는 것을 말하기가 힘들어서, 답하기 난처한 질문이에요. 
 


마네, 밀로 섬의 비너스, 에릭사티, 그라파, 조지아 오키프, 이졸데와 트리스탄 등 소설에 등장하는 문화적인 코드가 많습니다.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P시(파주시)도 문화적인 장소이지요. 문화적인 것에 대한 애호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영화, 음악, 공연, 그림 등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여쭤봐도 될까요.

19세기 인상파를 좋아해요. 우리 세대는 바그너 같은 음악도 좋아하구요. 현대의 시작이란 느낌이라. 모던 인상파도 좋아하구요. 그래서 작품엔 에릭사티도 나오고… 그림은 좀 더 모던해진 인상파의 그림을 좋아해요. 에드워드 호퍼나.... 예전에는 영화도 그림도 찾아다니면서 봤는데 요즘은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느낌이에요.

지방에서 자랐는데도 화집을 접할 기회가 있었어요. 세잔이었나 르누아르였나. 인물화를 보면서 마음이 가라앉고 평온해지는 걸 느꼈어요. 모네 그림 ‘생 라자르 역’ 이라든지 소녀들의 그림을 좋아해요. 

 


소설 제목 <풀밭 위의 식사>역시 마네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어떠셨나요.

여자의 누드라는 게, 전체적으론 너무도 커다란 사건인데도 일상적이고 태연한 것에 마음이 끌렸어요. 크고 대단한 사건들인데 모든 사건들이 아름답게 나타나지요. <모든 걸 일상화시킨다>고 생각했어요. 
 



삼년 만에 발표한 장편입니다.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을 쓰지 않는 시간이 더 많지 않으셨을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는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작가 역시 지극히 세속적인 현실을 살아요. (영수증 내고 그런 것도요?) 당연히 하지요. 글 쓰다 밀리기도 하고. 문제는 글을 쓰는 언어로 인생을 살다 보니 글을 안 쓸 때는 밀린다는 느낌이 들어요. 뭔가를 하고 나서 쓸 게 없다고 느낄 때도 있구요. 글을 쓰고 있을 때 희열을 느끼지요.

거의 글 바깥으로 해방되지는 못하시는 건가요?

해방되기는 해요. 모든 생활에서 모든 것이 움직이고, 맹렬하게 활동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확실히 뭔가를 쓰고 있을 때 안전하다고 느껴요.

이 쯤에서 다시 떠오르는 선생님의 명언 “어울리는 피로!” 

 



 작가가 되기 전, 소녀시절 가장 즐겨 읽었던 책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가장 최근에 읽으신 책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박씨전을 읽었어요. 나한텐 여자가 변신하는 게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말 그대로 소녀시절이었으니까요. 독문학과를 나왔으니 카프카도 많이 읽었지요. 책으로 독해도 하고. 니체며 릴케도 많이 읽었어요. 까뮈의 이방인이라든지. 정말 소녀시절엔 폭풍의 언덕도 좋아했어요.

그리고 가장 최근은.. 이걸 보고 웃었는데요, 출판사에서 세 권을 주셨어요. 윤대녕작가 책을 보았구요 (MD 주: ‘대설주의보’로 추정합니다.) 프랑스 작가 장 에슈노즈의 일년이라는 책을 봤어요.

아, 낮에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가 반납일이 늦어 책을 빌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서서 <말테의 수기>를 읽었어요. 그 책을 중간중간 보고 제대로 보질 못했었어요. 중간중간 보는데 릴케의 맑은 의식의 흐름이 진짜…. 

 


세 작가를 꼽아 추천해주신다면 어떤 작가를 꼽으시겠습니까?

하루키, 밀란쿤데라, 마르케스를 꼽을 수 있겠죠. 헝가리 작가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도 좋아요. 나이가 들수록 작가가 글 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책을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그게 좋아요. 얼마 전 명절엔 시골에 가면서 차가 막히니까, 핸들 위에 책을 올려두고 천천히 운전하면서 읽었어요. 어차피 못 움직이니까요. 그게 너무 아슬아슬하고 맛있는 독서였어요.

소설도 그렇고, 원래 아슬아슬한 걸 즐기시나요?

나의 취약함 같아요. 아슬아슬한.. 그게 굉장히 위험한 건데 또 반대로 아슬아슬하게 빠져드는. 

 


<풀밭 위의 식사>는 토지문학관에서 작가분들과 함께 쓰셨다는 얘기도 해주셨습니다. 교류하고 계신 작가가 있으신지, 혹은 눈 여겨 보고 있는 작가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국내 작가도 좋고, 해외 작가도 좋습니다.

토지문학관에서는 은희경씨, 김인숙씨와 함께 있었어요. 윤대녕씨와도 만나기도 하구요. 글도 쓰고 산책도 하고…. 재미있었어요. 나와서 특별히 자주 만나게 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좋았어요. 집이 일산이라 일산에서 김연수씨를 가끔 봐요. 워낙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라. (웃음) 그래도 자주 보진 못해요. 작가들은 자기만의 체험을 해야 해요. 서로 지켜야 할 영역이 있구요. <자기 세계를 지킨다>고 할까요. 

 


서점 광고 카피가 기다렸던 3년만의 장편이었어요. 너무 이르지만, 차기작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또 3년을 기다려야 할까요? 어떤 내용을 구상하고 계신지 살짝 여쭈어봐도 될지요.

그 카피 보고 감동받았어요. 날 기다리나? 생각했어요. (웃음) 쓸 소재가 있긴 있는데, 아직 확실하게 말하긴 그래요. 미리 말하는 건 의미가 있지 않은 것 같구요. 인물에 대해 의논을 해야하는 단계구요. 차기작은 3년보다는 빨리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인터뷰를 진행하며, <풀밭 위의 식사>는 '전경린'다움의 한 가운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전 작품과 <풀밭 위의 식사>가 달랐듯, 다음 작품도 놀라운 작품이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가슴을 치는 문장이 가득한 소설처럼, 전경린 작가와의 대화는 예리한 문장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말마따나 <삶의 표면들과 관계를 지으면서> 선생님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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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oomi 2010-04-2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보구 가요. 은희경 작가님도 추천하신 책인데..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한국소설/시/예술MD 2010-06-11 00:21   좋아요 0 | URL
엇.. 감사합니다. 답변이 늦다 못해 쉴 지경이네요. ^^;;
 

   가난은 조금 불편한 게 아니라 죽도록 불편한 것이다. (8p)

   문장은 가감없이 솔직하다. 순진하게 살다가 뒤통수 맞는 인생은 끔찍한 인생이라고 소설은 말한다.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등장한 '기린'의 선언은 이 소설 그 자체이다. '죄책감은 배고픔이나 졸음에 비해 아주 하찮다'는 걸 아는 기린은 스스로의 속물성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80년대 후반 태생, 서울 거주, 중위권 여대 사회복지학과, 의대생 남자친구, 중상급 외모. 기린의 '스펙'은 속물스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누가 알아. 빈티라는 건 도대체가 감출 수가 없는 건데. 죽자고 티를 안 내려는 게 더 웃기지. 안 그래?"
명은 지은의 말을 들으며 갑자기 불안을 느꼈다. 지은과 기린, 둘만 있을 땐 자신의 어떤 점을 가지고 비웃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106p)

기린의 주변에도 온통 속물들 뿐이다. 우정은 얄팍하고 생활은 팍팍하다. 기린의 언니는 TV가 너무 좋아 TV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대학 졸업 이후 몇년 째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던 언니는 TV처럼 연애하고 TV처럼 헤어진다. 기린의 남자친구 동운은 자신감 넘치는 못생긴 의대생이다. 유산상속을 놓고 물밑 암투를 벌이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기린의 부자 친구 명, 수시로 남자를 바꿔가며 그들에게서 선물을 얻어내는 기린의 예쁜 친구 지은. 생활력 강한 기린의 어머니, 하는 일 없는 기린의 아버지, 그리고 모든 속물의 롤모델 기린의 사촌언니까지.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놀랍도록 현실을 닮아있다.   

 

   소설 속 문장은 날아갈듯 단출하다. 애써 꾸미는 것도, 멋을 부리는 것도 없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말로, 우리의 속물스러움을 말한다. 연재 당시에도 함께 페이지에 게시된 안태영의 삽화가 군데군데 삽입되어 소설의 맛을 더한다. 가볍게 술술 읽히고, 가볍게 웃음지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뿐인 소설은 아니다.

 좁은 서가를 쭉 둘러보다 시집 코너에서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발견했다. 잡지들만 득실대는 작은 서점 안에 베스트셀러도 아닌 독일 작가의 시집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책을 집어들었다.  (179p)

  기린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결혼할 가능성도 없는 의대생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고, 친구들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필요한 점심값을 벌기 위해 과외를 하고, 성적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사람들은 알까. 기린이 사실은 서점에서 브레히트를 읽고, 속물 남자와의 소개팅 이후 김중식의 시를 떠올리며, 방 문을 걸어 잠그고 기형도의 시집을 보며, 글쓰기를 좋아하는 영혼을 지녔다는 걸.

 

만인의 만인에 대한 열폭이 세상을 지배한다. 우리 동네, 엄마 친구 아들 정도에 머무르던 소소한 열폭이 언제부턴가 전 지구적 스케일로 화化했다. 열폭은 경쟁을 강요하고, 속물 되기를 권한다. 속물이 어디 속물이고 싶어 속물이랴. 속물 권하는 사회를 사는 우리 역시 하나의 거룩한 속물들인 것을. 그래서 이 속물들이 더 안쓰럽고 마음 쓰인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성복의 시를 떠올렸다. 시를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기린에게 보낸다.

소녀들 철없다. 무슨 일 한번 있으면 그만이지 또, 또 자꾸 보챈다. 전에 우리 아이 놀러갈 때면, 버스 언제 와? 언제 도착해? 언제 밥 먹어? 언제 집에 가? 언제 씻고 자? 늘 그러더니, 소녀들 너희 잠시도 머물 줄 모르는구나. 빨리 중학교 들어가고, 고등학교, 대학교 들어가고, 빨리 결혼하고, 애 낳고, 빨리 애 초등학교 들어가고, 그러고 나면 또 뭐 할건대? 소녀들, 너희가 그리워한다는 이유만으로 붉은 장미는 피지 않는다. 너희는 또 지지 않는 붉은 그리움을 너희 딸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소녀들 철없다,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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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 밤, 리모컨을 돌리다 우연히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았다. 결혼 따윈 싫다던 손예진의 마음을 돌려놓은 건 김주혁의 어설픈 프로포즈가 아니었다. 그랬다. 그 순간 그들은 시청 앞 광장에 있었다. 새빨간 비더레즈 티셔츠를 입은 청춘의 가슴을 터질 듯 가득 채운 문구는 바로 대!한민국!  
  철 지난 영화를 보자 비로소 떠올랐다. 그 계절의 머쓱함이. 우리 선수의 이마에서 흐르던 시뻘건 피에 욕지기를 내뱉고, 축구공 하나를 만들기 위해 베트남 소년 하나가 얼마나 부당한 노동을 하는지 따위는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기이한 열정. 열정은 가끔 많은 것을 잊게 한다. 올림픽의 몸값은 바로 그 '기이한 열정'을 배경으로 한 얘기다. 

 

  올해들어 세상은 온통 올림픽 얘기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일본이 가까스로 세계의 인정을 받고 일등국가로 진입하려는 것이다. 자신처럼 세상일에 무심한 젊은이도 나라가 자랑스럽고 가슴이 뛰는 것을 억누를 수 없다. (18p)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둔 도시는 이상스러운 열기에 휩싸여 사소한 불편은 아무렇지도 않게 감내한다. 노동자는 초과근무를, 주부는 수도제한을, 시민은 치안 강화를.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연인의 도피처로 사용되었던 그 아키타현 출신의 곱상한 도쿄대생 시마자키 구니오는 형의 죽음을 계기로 변화한다. 평생 따뜻한 말 한 번 건네주지 않았던 배 다른 형은 평생토록 노동자로서 일하다 끝내 필로폰 과다 투약으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구니오가 딱히 형을 대단히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구니오는 이 모든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형이 하던 일을 그대로 이어받아 형의 삶을 직접 체험한다. 그리고 드디어, 모종의 '행동'에 나선다.

"도쿄하고 아키타는 같은 나라도 아닌 것 같아. 한쪽에서는 올림픽을 앞두고 축제 준비로 바쁘게 돌아가는데, 한쪽에서는 애비가 먼 도시에 나가 허덕허덕 몇 푼 벌어 부쳐주면 그걸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잖아. 하느님은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어." (99p)

  시마자키 구니오의 건너편 세상에 스가 다다오가 있다. 같은 도쿄대 동급생이며 대대로 경찰 간부인 명문가의 자손인 그. 텔레비전 방송국에 근무하며 호스티스와 연애를 즐기는 그는 아키타 같은 세상은 전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을 계기로 도쿄 올림픽을 위협하는 불온한 세력이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조금씩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다 그곳에 숫기없는 대학 동창생 시마자키 구니오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오쿠다 히데오의 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구니오를 둘러싼 여인들 이야기, 노동현장 인부들 사이의 유대감, 남색가에게서 다이너마이트를 얻기 위해 최악의 사태(?)를 각오하는 장면 등에는 여전히 오쿠다 히데오스러운 쫀득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태생이 발랄한 것 같은 이 작가의 작품이라 하기엔 이번 작품은 제법 진지하다. 도무지 발랄하게 만은 살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일까.

  1964년 도쿄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까지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다른 게 있다면 불공평을 언급하는 자체만으로도 촌스러워지는 세태 정도. 해리는 귀엽고 신애는 구질구질한 게 우리들의 정서 아닌가. 시마자키 구니오의 반역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더욱 그 불공평이 공고화된 세상에 살고있기 때문이 아닐지. 도쿄 올림픽을 위해 도시 미관을 해치는 노점상을 밀어내는 걸 당연히 감수했던 그들처럼, 우리 역시 도시의 쾌적함이란 명목으로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데에 익숙한 사람들이니까.
  


  아시아인 최초로 장거리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한다. 선수들의 성취를 보며 또 다시 감동하고 환호한다. 그 사이 우리 안의 기이한 열정은 우리의 눈을 슬며시 덮어줄 것이다. 불편한 진실을 바라보지 않으면 생활은 무척 쾌적해진다. 스스로의 처지를 당연하게 생각하던 소설 속 노동자들이 그랬듯, 대학 나온 사무직들은 다른 거라며 시마자키 구니오에게만 유독 친절했던 건설회사 신입사원이 그랬듯.

  자기 멋에 취해 새벽에 갈겨 놓은 미니 홈피 일기처럼, 열정이 지나간 자리엔 대개 머쓱함이 남는다. 가끔 겁이 난다. 아주 먼 훗날 머쓱한 기분에 작은 소리로 반성하게 되지 않을까. 그때는 미처 몰랐어요. 우리의 기이한 열정 뒤에 가려져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게 무엇이었는지. 시마자키 구니오의 반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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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진실은 무엇인가요? 고민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이 도대체 있을까요? 그리고 사춘기 이후에 모든 고민은 어차피 사랑 고민 아닌가요? (125p) 

   여주인공 '조야'가 말한다. 사춘기 이후 모든 고민은 어차피 사랑 고민이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잘 팔리는 아이템이 사랑인 것도 같은 이유이다. 모든 사람의 사랑이 주말 저녁 만날 수 있는 조권과 가인의 시트콤 같다면 얼마나 유쾌할까. 여기 멜랑콜리한 독일작가 카챠 랑게-뮐러가 쓴, 가상연애의 정 반대편에 있는 어떤 흔해빠진 연애담을 소개한다. 

 

   소설은 하나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여주인공 조야는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연인 해리에게 편지를 쓴다. 헤어지고 몇 년, 겨우 열어볼 수 있었던 그의 노트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사랑을 잃고 한참 뒤, 조금은 평온해졌을 조야의 시선이 그들이 사랑했던 시간을 좇는다.

  그는 어리고 잘생긴 서독 남자였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사랑의 순간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동독 여자, 위대한 빨치산 여전사와 이름이 같은 그녀는 언제 그 남자에게 사랑을 느꼈을까. 그가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듣고도 남들이 다 그랬듯 비웃지 않았을 때. 그녀가 단 한 번도 받아보질 못했던, 섹슈얼한 느낌이 전혀 없는 '애기키스'를 해주었을 때. 그러나 그는 정키였고, 쓰레기였다. 아무런 꿈도 없는 그의 그 동공이 활짝 열린 시선까지 그녀는 경탄하고 또 증오했다.   

  처음에는 죽음에대한 불안, 그 다음에는 그 불안에 대한 불안, 그다음에는 아무런 공포가 없는 것, 그러니까 어떤 보호막도 없다는 점에서 너와 마찬가지 신세라는 불안감, 우리가 더 똑같아지고, 더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같아지고 또 같아지고...... (196p)

  그들의 사랑은 빤히 앞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같아지고 또 같아질 때까지 함께 낙하한다. 다른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 그녀는 그를 의심하고, 그가 아닌 남자를 만나고, 온 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극한의 분노를 맛보고, 결국 그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모든 사랑이 그렇듯 '결국 흔해 빠진 사랑'얘기다. 그러나 간단한 정보로 연상할 수 있는 극한의 신파를 이 소설이 지향하고 있는 건 아니다. 동독과 서독, 마약중독자, 질병, 섹스, 나태함, 도시의 우울... 그러나 위대한 빨치산 여전사 조야 코스모뎀얀스카야의 단단함이 내재된 여주인공 조야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기에 너무 강하고 소박하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그 찬란하던 추억을 애써 포장하지 않는다. 우스꽝스럽고 슬픈 문장들이 묘한 멜랑콜리가 되어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감싸고 돈다.

  시간이 없거나 네가 더이상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때문에 가슴이 미어졌기 때문이었어. 다른 표현을 쓴다면 조금 덜 통속적이겠지. 하지만 그만큼 덜 진실할 것 같아. (251p)

   이 계절이면 생각나 벌써 몇 년째 듣고 있는 노래가 있다. 대단한 완성도라고 생각하는 것도, 엄청난 역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님에도, "Oh, Love, Never knew what I was missing"을 흥얼거리며 괜히 코끝을 한번 만지게 되는.  

  통속은 진실하다. 통속이 통속인 것은 그것이 이미 보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속에는 늘 공감할 구석이 있다. 그 흔해 빠진 사랑 얘기가 사춘기 이후 모든 고민의 핵심인 것처럼. 번역이 잘 된 문장은 코끝이 찡한 와중에도 순간순간 피식 웃게 만든다. 공감이란 참으로 위대한 것. 가벼운듯 소박한 문장 사이에서 지금껏 표현되지 못한 채 혀 끝에서 맴돌던 바로 그 문장을 건져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좋은 연애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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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전 2010-02-09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랑은 다 통속이 아닐까요? 낡은 잡지같지만 어쩌겠어요. 그런 게 사랑이라면요. 그냥 제 생각이에요.

한국소설/시/예술MD 2010-02-15 11:24   좋아요 0 | URL
폐부를 찌르는 댓글이라 '차마 그 리플을' 달지 못했군요...(이것으로 저의 게으름을 갈음하고 ^^) 그 통속을 반복해서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참 재밌죠. 기대도 실망도 없이..
 
속죄
미나토 카나에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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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방석을 나란히 깔고 누운 제게 찬 보리차를 따라 주며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죠. 그러다 문득 낮게 중얼거렸습니다.
"우리 딸이 아니어서 다행이야."-31쪽

넌 여기서 뭐하는 거니? 이런 때일수록 제일 똑똑한 네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해야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되겠니? 한심하게.
한심해, 한심해......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제 머리와 등을 연신 철썩철썩 때렸습니다. 전 울면서 "잘못했어요."하고 몇 번이나 빌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향해, 누구를 향해 비는지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88쪽

그걸로 충분해요. 곰 가족에게는 그걸로 충분하다고요.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새언니 탓이 아니에요. 곰 가족이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잊고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해서 벌을 받은 거라고요. 불행에 빠진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건 자기밖에 없다며 교만을 떨 것이 아니라, 곰한테 딱 맞는 건강하고 수더분한 상대를 만나 결혼했더라면 나름대로 귀여운 자식도 보고 좋았으련만. 그 아이도 모두 예뻐했을 텐데. 예쁘장한 아이가 곰의 집에 들어왔다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마냥 들떠서 좋아하다가 이런 중대한 사실을 다들 간과하고 만 거라고요.-166쪽

수사는 심야까지 이어졌다지만 난 9시쯤에 순경 아저씨와 함게 귀가했어요. 현관을 열고 순경 아저씨의 얼굴을 본 순간, 어머니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군요.
어머, 이거 미안해서 어떡해요. 그렇잖아도 지금 막 데리러 가려던 참인데. 초등학교에서 사고가 났다는 얘기는 시노하라씨한테 전화로 들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얘 언니가 몸이 너무 안 좋은 거예요. 네, 천식이 아주 심하거든요. (...) 사람이 한 명 죽어 나갔다는데 생글생글 웃으며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어머니를 보자 눈물이 나더군요. 한심하다고 해야할지 슬프다고 해야할지.....-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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