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링 인 폴 / 백수린 지음 / 2014년 2월 14일 발행




적확하고 아름답다. 1982년 태어나 2011년 등단한 소설가의 첫 책. 설렘을 담은듯 푸르게 반짝인다. 언어와 기억에 관한 작가의 신선한 시선이 사고를 환기한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


 "감자가 사라졌다" 

<감자의 실종 中>


  언니의 약혼자가 방문해 함께 가족의 사진첩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가족의 풍경. '나'는 '감자'를 즐겨 먹었다는 가족의 말에 기함한다. "감자를... 삶아먹고, 볶아먹고, 쪄먹는다고? 엄마는 무슨 그런 끔찍한 농담을 해?" 가족들은 당황하지만, 그녀는 역겨움을 참을 수 없다. 어느날 갑자기, '개'라는 단어가 '감자'라는 단어로 대체된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감자탕을 먹을 수도, 감자를 상상할 수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과 내가 사용하는 말 사이에 틈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황당한 일을 겪은 모든 사람이 그러듯 나는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그녀는 "내가 발설하는 문장들이 투명하게 전달되리라는 믿음"과 함께 말을 잃었다. 사람들은 조용해진 그녀를 점차 밀어내기 시작한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녀는 자신과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이들을 만난다. 누구에겐 '감자'가 우체국이었고, '피아노'였고, '중오하다'이거나 '느긋하게' 였다. 그녀는 비로소, 언제나 그의 곁에 존재했던 '말'에 대해 발견한다. 소통하지 않는, 혹은 소통할 수 없는 두려움.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말'을 상상한 작가의 문장을 따라,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는 말의 물결이 보이는 듯하다.



"그녀는 그들이 하는 말들을 때떄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이 언급하는 사상가나 이론 들을 알지 못했다." 음악을 전공한 여자와, 그녀의 과외선생님이었던 가난한 남자친구의 소통불능의 세계. 말은 필연적으로 오독을 낳는다. <부드럽고 그윽하게 그이가 웃음짓네 中>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세계에서, "그가 무엇인가 중얼거렸는데, 바이올린 소리가 너무 커서 그녀는 그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와 같은, 어느 연인의 소통불능의 풍경은 무척 새삼스럽고 아프게 읽힌다. 



소설은 말로 하는 예술이며 동시에 말에 관한 예술이다. 백수린이라는 '새로운' 소설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폴Paul이라는 이름을 지닌 교포 청년을 두고 사랑에 빠진, 한국어 강사의 이야기 <폴링 인 폴>의 다층적인 제목은 경쾌하게 들린다. 경쾌함과 우직함 속, 진지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직조한 아홉 편의 소설은 정성스러운 소설을 읽는 것이 즐거운 경험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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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순간 예상치 않았던 낯선 곳에 당도하는 것이 삶이고, 그곳이 어디든 뿌리를 내려야만 닥쳐오는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음을 말하는 소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라는 인상적인 제목의 소설집으로 돌아온 은희경 작가를 홍대의 한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고독과 소설에 관한 대화를 전합니다. 인터뷰 진행은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도와주셨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책에 대한 첫 인상에 대한 말씀을 먼저 나누고 싶어요. 표지와 참 어울리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체적인 흰 톤과 푸른색 글씨, 반짝이며 떨어지는 꽃 이미지 같은 것들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책을 처음 받으셨을 때 감상이 어떠셨나요?

 

 

, 느낌이 좋아요. 책이 예뻐서 호감을 가질 만한 그런 요소가 있지요. 책이 손에 잘 들어오는 것 같고, 제 얘기를 잘 포장해주는 것 같아요. (웃음)

 

 

 

 

 

트위터에서 예약판매 구매 혜택이던 넘버링 사인본에 관해 감사 인사를 보내는 독자도 있더라고요. 책이 나온 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텐데요, 근황을 여쭙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인터뷰도 많이 하고, 방송 출연도 좀 하고 있어요. 다른 책들보다 좀 반겨주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이전 책들이 조금 낯설고 했는데, <눈송이>는 좀 익숙한가 봐요.

 

삼천 부 사인을 했는데요, 제가 원래 사인을 되게 빨리 해요. 글씨를 빨리 쓰는 편이라서요. 사인회를 할 때 엄마랑 같이 온 꼬마가 와서 와 작가라서 그런가 빨리 쓴다이런 적도 있거든요그래서 하루면 다 쓰겠지 생각을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일을 끝마치면 여행계획을 세우는 편이에요. 그 즐거움으로 에너지도 생기고 하니까요. 책 준비를 다 마치고, 엄마가 팔순이시라 엄마 모시고 캄보디아 여행을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떠나는 날까지 사인을 했어요. 덕분에 작가의 말은 캄보디아에 가서 아이패드로 썼어요. (웃음)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때도 일본 여행 계획이 있었는데, 결국 일이 안 끝나서 버스 안에서 교정을 봤어요. 남들이 보면 쉬지 않고 일하는 것 같겠지만 실은 일이 안 끝난 거예요. 그렇게 바쁘게 지냈네요.

 

 

 

 

 

눈송이 연작이라고 이 소설집을 읽을 수 있어요. ‘뜨개질을 하는 모습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개개인의 시간이 느슨하게 얽혀, 멀리서 보면 결국 한 이야기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을 뜨개질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눈송이 연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단 하나의 눈송이> 속 이야기들은 연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따로 읽어도 상관은 없어요. 그렇지만 이야기 하나하나가 눈송이라면, 이야기들이 모였을 때 눈발처럼 큰 풍경을 이루는 모습을 상상하긴 했어요.

 

모든 눈송이가 다르듯, 눈송이처럼 하나하나가 독특한 얘기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각각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풍경으로 펼쳐지도록 제 머릿속에서는 구성을 한 거죠. 짜맞추면서 읽을 필요는 없어요. 쓰는데 자유로우면서도,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까지 할 수 있어서, 저에게 이 형식이 필요했어요.

 

 

 

 

 

<생각의 일요일들>이라는 첫 산문집도 기쁘게 읽었습니다. 오래간만의 소설집에서 만나는 압축적이고 색이 뚜렷한 문장이 무척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작업하면서 이 문장이 유독 마음을 끈다고 담아두신 부분이 있었을까요?

 

 

사실 소설을 쓸 때는, 특별히 문장에 신경을 쓴다기보다는 그때 강렬하게 사로잡힌 것이 대해 집중하다 보면 문장이 떠오르곤 해요. 이 문장이 소설에서 정말 중요하다, 이런 건 별로 없어요. 독자들이 많이 반응을 보이면 이게 괜찮았나?’ 거꾸로 그러기도 하고요. 독자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문장을 좋다고 올려주시기도 하고, 소설에서 뺄까 했는데 좋다고 소개해주시기도 하고요. 이 말은 정말 하고 싶어서 했는데, 독자가 알아봐준다고 하면 역시 반갑고요.

 

이 소설집에서 저는 <T아일랜드…….>에서요, “허기와 절망. 그런 감정들은 행복의 변방에서 서로를 알아본 순간 경계를 넘어 조용히 연대한다.”, “스치듯 짧은 포옹을 끝낸 뒤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일 것이다.” (116)라는 문장을 좋아해요.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연대죠. 이번 소설을 따뜻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이 있다면, 이런 연대의 감정 때문이 아닐까 해요. ‘고독의 연대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나만 고독한 게 아니고, 인간의 고독이라는 게 타고난 조건이라는 걸 받아들이면 고독한 사람들끼리의 연대감이 생긴다고 생각을 했어요. 허기나 절망이랄지, 슬픔이랄지, 고독이랄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끼리 서로 알아보고, 서로에게 이방인으로서 짧은 호의 같은 것을 베풀 수 있는, 그런 게 연대라고 저는 얘기하고 싶었고, 그래서 독자들이 이 구절을 인상 깊게 보는 것 같아요.

 

(: 제 경우엔 이 문장이 좋았습니다. 엄마는 인생에 대단한 것은 없고 모두가 고독 속에 죽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은 견디기 쉬워진다고 한다<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146>)

 

 

 

 

 

소설의 인물들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 소설마다 호칭이 달라지지만, 이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걸 마지막 작품 <금성녀> 즈음엔 어렴풋하게 알 수 있게 돼요. 세례명인 루시아, 안나, 요한으로 칭해지던 이들이 엄마로 지칭되고, 유리, 마리로 지칭되던 소녀들이 할머니, ‘이라는 소년이 완규로 호명되는 식인데요, 이렇듯 조금씩 이들의 호칭을 다르게 서술한 이유에 대해 여쭙고 싶어요.

 

 

인물들을 각 이야기에서 딱 맞추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독립적인 얘기로 쓰기 위해서 호칭을 다르게 했어요. 힌트만 두고, 이 사람이 그 사람일수도 있지만, 아니어도 상관이 없는 거잖아요. 연작이지만 연작이 아니게 읽어도 되는 소설이라고 생각했고요, 각 소설에서 맡은 역할이 좀 다르니까 같은 인물이라는 걸 강조하지는 않았어요. 개별적인 개인들이라는 이미지를 주고 싶었고요.

 

읽는 분들 중엔 뜨개질 이야기(<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는 조금 관련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제가 소설을 쓸 때는 이 소설 속 태현이라는 인물을 <금성녀>이라고 생각하고 썼어요.

 

 

 

이 소설이 서술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소설 속 화자가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신도시라는 공간에서, 화자들은 낯선 공간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프랑스어 회화, 독일 아이들의 동화, 스페인에서 부치는 엽서 같은 것들이요. 실제로 이민을 떠나는 모자도 있고요. 도시-낯섦-떠남이 반복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95년에 작가가 됐는데, 95년에 신도시로 이사를 가서 지금도 계속 살고 있어요. 신혼생활도 신도시에서 시작했고요. 저에게 신도시라는 공간이, 새로 질서를 잡아야 하는 인생의 이미지. 낯선 곳에서 질서를 잡아야 한다는 이미지가 강하게 있어요. 신도시에서 18년을 사는 동안에, 편리함을 추구하고, 정이 들만하면 바뀌고, 낡아 버릴 시간도 없이, 계속 새로운 것이 지어지더라고요. 이 공간은 영원히 신도시인 것 같은 느낌이 들겠구나,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곳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게 비극적이거나, 상실인 게 아니고, 그것 역시 인간의 삶의 조건이라고 생각을 해요. 우리 모두 지금은 뿌리를 내리기보다 떠돌아다니는, 노마드적인 존재잖아요. 신도시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게, 이런 유동적인 이야기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고향을 잃었다, 뿌리를 상실했다, 이런 게 아니고 낯선 곳에서 고독하긴 하지만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들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인상적이었던 부분인데요,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 인물들의 자아라는 게 느껴졌어요. “세상에 태어나는 것들은 다 혼자니까. 그 순간 엄마의 뱃속에서 나는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프랑스어 초급과정 > 태아가 하기엔 너무나 조숙한 대사예요. 반면, 일반적으로 할머니로 뭉뚱그려 지칭되는 <금성녀>의 마리 할머니에게도 입맛이나 사람에 대한 명확한 기호외 취향이 있고요.

 

 

맞아요. 제가 소설을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고 쓰는 것이기도 해요. 모든 인간에게 고유성을 찾아주는 게 문학이 할 일이라는 말에 공감을 해요. 할머니에서 태아까지, 각자의 개별자로서 고유성을 그리고 싶었어요. 가족관계 속에서도 할머니다, 아기다 이런 역할이 주어지잖아요. 저는 그 존재 개인으로서의 고유성을 쓰고 싶었어요.

 

 

 

 

 

<독일아이들만 아는 이야기>라는 소설의 이원이라는 인물은 개성적이면서도 구체적이라 실제로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원은 실수가 잦고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이에요. 이원의 친구인 유나의 눈에 비친 이원은 자아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욕심이며 자존심 같은 게 없는 친구이지만 사실 자신의 마음 속에는 못 외운 게 아니라 헛갈린 것’, ‘들으나마나 모를 것이어서 안 들은 것처럼 행위의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이유가 있어요.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규정되지 않는 인물이이에요.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사람에 대한 규정된 틀이 있잖아요. 저는 타인을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규정된 틀 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해요. <타인에게 말 걸기> 같은 것을 쓸 때도, 우리가 남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에 관해 썼어요. 그 이야기의 연장선상일 수 있겠죠.

 

이원이라는 인물이 개성적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럴까요? (웃음) 실은 디테일이 다 제 얘기예요. 실수하고, 망가뜨리고, 사고를 일으키는 모습들. 한때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거라는 점을 의식했기 때문에 실수하고, 엉뚱한 일을 하는 걸 숨기려고 했어요.

 

어느 순간부터 이런 것이 나의 고유성일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만 내 나름의 질서가 보편적인 기준하곤 맞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이렇게 이해하니 달라지더라고요.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드러내지 않으려고, 실제의 나처럼 엉뚱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둘 때보다 친구도 많이 생기고요 (웃음)

 

이원이라는 인물이 독특해 보일 수 있지만, 우리들 모두가 그런 기이한 면을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겠죠. 이해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한두 가지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남을 볼 때 틀에 맞춰 보니까요. 오히려 유나라는 인물이 더 이해하기 쉬운, 상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고요, 유나에 비해 이원은 고유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오해하곤 하잖아요. 유나처럼 모두가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원이라는 인물을 조금 애정을 가지고 썼어요.

 

 

 

 

 

소설 속 젊은 세대의 떠돎도 인상 깊게 읽었어요. 2002년 월드컵 즈음 학생이었던 세대라면 대략 제 세대이기도 한데요, 독자로서 제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들, 한 세대의 이주, 취업준비, 지루한 직장생활, 군입대 같은 이야기가 서술되어 반가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어떤 세대니까 (은희경 작가는 1959년생입니다) 내 세대를 대표하는 이야기를 쓰겠다, 이런 생각은 없어요. 내가 어떤 세대다 이런 소속감보다,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살아있는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생각을 해요. 나와 같이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이야기도 있고, 내 위세대의 이야기도 있겠죠.

 

우리 세대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고, 그 모든 인물들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어요. 자기 삶의 조건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요. 누구를 판단하거나, 누군가의 입장에서 연관관계를 찾는다거나 그런 이야기가 아닌, 지금 세대의 인생, 부모의 인생, 나의 인생이 같이 들어있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요.

 

 

 



소설 속 인물들이 이야기가 품은 감정에서 한걸음쯤 비껴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이라는 소설에선 길고 아름다웠던 그 여름 날 한 번도 엄마와 같은 편이 되어주지 않아 미안해서 하는 말이다같은 문장은 무척 마음 아프게 읽히더라고요. 이 소설 속에선 대체로 지나간 시간에 대해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데요, 실은 격정적인 사건이었을 텐데,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쓸쓸함 같은 것이 소설 전반에서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부닥쳤던 문제, 휩쓸렸던 문제들. 그 시간들이 지나간 순간 있잖아요.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문을 닫고 나가려고 하다 다시 돌아볼 때의 내 그림자 같은 것. 소설로 그런 느낌을 전하고 싶었어요.

 

나라는 좁은 세계를 공간적으로 확장시킬 수도 있겠지만, 시간을 확장시킬 수도 있겠죠. 시간을 확장시키면 그 무렵 나에게 중요했던 일이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이 소설 속에서는 언젠가 일어났던 어떤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걸 관통하는 시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지금 이렇게 몰두하고, 혹은 기뻐하고, 고통 받고 있는 것들. 혹은 고독하고 고립되어 있는, 이런 문제들을 시간의 스펙트럼에 넣어보면 조금 더 거리를 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공간에서, 시간에서, 문제에서 떨어트리고 바라보는 것. 그런 분위기를 좀 주고 싶었어요.

 

 

 

 

 

<T 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에서, 무명작가의 책을 사는 엄마의 모습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렇듯 더 알려지지 못해 서운한 책이 많을 텐데요, 독자께 정말 읽어보셨으면 하는 작가를 한 명만 소개해주신다면.

 

 

글쎄요. 저도 발굴하고 읽고 그런 독자는 아니고, 알려진 사람 책만 읽는 편이라서요. (웃음요즘 좋아하는 소설가는 미셸 우엘벡이에요. 저는 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를 쓰는 사람에게 매혹되는 유형은 아닌 것 같아요. 나도 무언가를 알고 있잖아요. 내가 알고 있는 것들, 나와 비슷한 생각과 철학을 가진 사람이 나보다 반 발짝쯤 먼저 갔을 때 열광하는, 그런 타입인 것 같아요. 점점 저도 독서의 폭이 달라지니까요. 예전에는 밀란 쿤데라를 좋게 읽었고, 최근에는 우엘벡을 재미있게 읽고 있고요. 내가 하려고 하는 얘기를 하는구나, 이런 작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게 사실이에요.

 

 














 

 


 은희경이라는 장르, 은희경이라는 브랜드를 지닌 소설은 계속될 텐데요, <……단 하나의 눈송이>가 은희경 소설이 라는 길에서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요?

 

 

소설을 시작할 때는 내 문학여정, 전체를 두고 이 작품이 무엇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시작하진 않아요. 쓸 때는 그때그때 질문에 사로잡히고, 최대한 잘 써보자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죠. 책으로 묶어 나오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긴 해요.

 

뭐랄까, 저한테는 두 가지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전 <태연한 인생>이라는 책에서는 약간 극단화되어 나타났죠. 시니컬하고 농담 잘하는 사람, ‘요셉같은 세계가 있고, 정밀하고 사려 깊은, ‘의 세계가 있고요. 그 두 가지 이야기를 다 써본 게 <태연한 인생>이었다면, 이번 소설집에서는 의 세계가 좀 더 많이 드러났던 것 같아요. <태연한 인생>요셉의 세계는 잘 아는 이야기는 아닌데, 흥미를 갖고 있는 세계에요. <……단 하나의 눈송이>는 어떻게 보면 제가 잘 쓸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내가 나 자신과 가장 동일시하는 이야기, 내가 잘 아는 이야기니까요.

 

 

 

 

 

<새의 선물> 이후 약 20여 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젊은 작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을 귀띔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 자신을 젊은 작가라고 말하기보다, ‘현재형 작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 소설 작가 후기에도 썼듯 (: 풍경을 보기 위해 내가 간다. 대체로 헤맸다. 익숙한 시간은 온 적이 없다. 늘 배워왔으나 숙련이 되지 않는 성격을 가진 탓이고 가까운 사람들이 자주 낯설어지는 까닭이다……) 저는 늘 헤매고, 익숙해지는 게 없고, 배워봐야 쌓이지도 않고 그런 느낌을 받는데, 그게 작가에겐 좋은 재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제겐 아직도 세계가, 다 알아버린 느낌이 아니에요. 항상, 항상 모르겠어요. 질문이 있어요. 그런 질문들이 내 소설이 되는 거겠죠. 늘 저에겐 낯선 시간들이 오기 때문에, 저 자신에겐 낯선 시간들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고민을 하고, 그 고민과 질문이 소설이 되는 거거든요. 나는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가겠다, 소설을 계속 쓰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뿐,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겠다, 내가 추구하는 소설은 이것이다, 이런 건 별로 없어요. 다만 내가 살아가면서, 도대체가 익숙해지지 않는 이 세계에서 발견하게 되는 질문들에 대해 쓸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젊게 쓰겠다, 연륜 있게 쓰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저는 애초에 그런 구분이 별로 없어요. 후배 소설가들의 소설을 볼 때도 좋다, 나쁘다 이런 생각보다는 각기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나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계속 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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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집 이층 / 신경림 지음 / 

2014년 1월 14일 발행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 나희덕 지음 /

2014년 1월 13일 발행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이 있다. '클래스'라고 칭할 만한 경지에 오른 이들은 으레 믿을 만한 결과를 내놓는다. (엄밀하게는 2014년 1월 출간된 시집이지만) 2014년 2월에는 '클래스'를 증명하는 시집들을 만나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신경림, 갈대 부분) 같은 문장을 만났을 때,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나희덕, 뿌리에게 부분) 같은 문장을 만났을 때의 마음의 수런거림이 떠오르기도 했다.



강언덕에 위태롭게 앉은 집이 사공이 사는 오두막이었다. 다리를 저는 사공이 기우뚱대며 배를 미는 동안, 그의 딸은 이마를 덮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빈대떡을 부쳤다. 종일 그 집 툇마루에 안아 구렁이처럼 꿈틀대는 강물을 구경하고 싶다는 내 생각은 한번도 이루어진 일이 없다.

그 툇마루에 가 앉아 있고 싶다. 네 등 뒤에 숨어.

네 가슴팍 사이에 숨어, 너로 해서 비로소 스무살이 되어.


신경림, <네 머리칼을 통해서, 네 숨결을 타고> 부분


1935년 태어나 이미 80해를 보낸 신경림 시인의 눈은 대부분 지나간 시간에 머물러있다. 가난했던 날들, 오래도록 믿어오던 것들, 역전 사진관집 이층이라는 젊은 날의 꿈. 한도 꾸밈도 여한도 없는 담백한 문장들을 따라 읽다보면 "작약과 들국화와 쑥부쟁이와 찔레꽃과 매화꽃과 복사꽃"같은, 꽃과 꿈 같던 날들이 펼쳐지는 것 같다.



손보다는 섬모가 좋다

인간다움이 제거된 부드러운 털이 좋다

둥글고 잘 휘어지는 등이 좋다

구불구불 헤엄치는 무정형의 등이 좋다

휩쓸고 지나가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온순한 맨발이 좋다 (...)

너무 많은 물은 머금지 않는 수축포가 좋다

물과 공기가 드나드는 투명한 막이 좋다

일정한 크기가 되면

둘로 쪼개지는 가난한 영토가 좋다

둘로 나뉘지만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아서 좋다


나희덕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부분



극단적으로 경제적인, 생활과 시스템의 효율성에 지쳐 마음이 아주 힘들 때 이 시를 만났다. 사람의 몸과 미생물의 몸. 지금도 세포분열을 지속하고 있을 몸의 성실함을 함께 생각했다. 그 언젠가 미토콘드리아의 시절도 있었을 것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나희덕의 시집에 등장하는 물고기의 지느러미며 불가사리며 새, 장미며 나비 같은 이미지들을 상상하면 보이지 않는, 보지 못한 것들의 성실함에 마음이 울린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온순한 아메바들이, 서로의 온기를 찾아 무정형의 몸을 웅크리며 서로를 안는 장면을 상상하면 감동스럽다. 2013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2014년의 두 달이 지났다. 3월이 되었고 이제야 비로소 2014년을 맞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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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연습 / 김승옥 지음 / 2014년 1월 15일 발행




  김승옥은 1942년 태어났고, 1960년 대학에 입학했다. 1962년 <생명연습>이 당선되며 등단했고, 1965년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의 무진 같은 이미지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2014년을 맞아 다시 김승옥이라니, 새삼스럽다. 그러나 김승옥이 1962년에(무려 50년도 더 전에) 서술한 이 낯익은 풍경이라니.



형은 종일 다락방에만 박혀 있다가 오후 네시나 되면 인적이 드문 해변으로 나갔다가 두어 시간 후에 돌아와서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밥은 마루방에서 나와 누나와 함께 셋이서 먹는 것이지만 밥만 먹으면 그냥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사닥다리를 삐걱거리며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아아 형은 하늘로 가는구나, 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왔다. 다락방은 이 세상에 있지 않았다. 그건 하늘에 있었다. (<생명연습> 中)



21세기 어느 '잉여'의 삶의 르포타주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서술이다. '형'이 골몰하는 것이 60년대의 풍경이 아닌 인터넷 커뮤니티거나 게임, 혹은 우리 시대의 개성적인 취미생활이라고 상상해보아도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으음 앞으로 뭐든 열심히 안 해야지. 아 잠만 열심히 자야지 열심히 안 해 아무 것도. 지금까지 열심히 한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안 한다. 안 해 절대 안 해." (<안해>, 박솔뫼, <<그럼 무얼 부르지>> 中, 2014년 1월 발행) 1985년 태어나 2009년 등단한 젊은 소설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도 같은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을 법한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개인의 발견.


과거를 지금-여기로 호출하고, 현재에 대한 의미부여, 미래에 대한 상상을 꿈꾼다는 한 문학전집의 출간에 맞추어 김승옥의 이름이 첫 권을 장식했다. 김승옥의 소설 속 사람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서울 1964년 겨울)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청년성'이 오늘, 우리가 마주쳤을 한국문학의 얼굴과 겹쳐 상상된다. 가로수길에, 경리단길에, 홍대 합정 상수 그 즈음에, 그 김승옥들은 여전히 서성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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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소설집 <이 인간이 정말>을 출간한 성석제 소설가를 가을날 카페 꼼마에서 만났습니다. 기억과 말,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인터뷰 진행은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협조해주셨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기록되는 것, 기억하는 것



오랜만에 만나는 소설집입니다. 전작 <위풍당당>은 한 마을의 당당한 싸움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이번 소설집 작가의 말엔 오늘이 어제의 기억으로 지탱되듯이 현재를 기억함으로써 미래가 만들어진다. 잊지 말지니, 기억의 검과 방패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이라는 말을 해주셨습니다. 이렇듯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모으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가 기억에 대한 찬가 같은 거죠. 물론 기억만 가지고 소설이 되진 않지만, 기억을 불씨 삼아서 불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기억에 의지하기도 하고 위안을 받기도 하고요. <이 인간이 정말>에 실린 글은 2008년부터 작년까지 발표한 단편 소설들인데, 책을 묶기 전에 전체적으로 보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게 굉장히 힘들구나, 사소하구나, 무의미하구나, 많은 사람들이 응급한 대로 살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내 발로 땅을 딛고 살아가는 게 아니고, 헛걸음을 걷는 것 같은 느낌


우리가 쓰고 있는 것들, 대화하는 방식이 그렇게 된 현상 자체를 부인할 순 없겠죠. 그렇지만 내 친구나 가족이나 이웃 같은, 나와 같이 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유성이나, 정체성, 사람됨, 이런 것들이 퇴행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보면 거대한 치매증에 걸려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가 편리하다고 쓰고 있는, 개발되고 있는 도구들, 앞에 스마트가 붙은 도구들과 정보, 매체 이런 것들이 점점 우리를 퇴행시켜가는 것 같아요. 중세시대에 교회가 사람들을 겁주고 억압하면서 무명의 상태, 무지의 상태를 원했던 것처럼 우리가 우리 스스로 무지의 상태를 초빙한 게 아닌가 싶죠. 이익을 얻어내려는 집단이나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기억 같은 것들을 강탈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간접세를 내는 것처럼 우리가 가진 것들을 모르는 채 빼앗기다 끝내 나에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상태가 되는 거죠.


 

그래서 기억을 중심으로 한 소설을 엮으셨나요?


 

기억은 과거로 가는 열쇠 같은 거죠. 기득권층들이나 나이든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강조하면서 상대방을 협박하는, 그런 경우에 우리가 과거지향적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지금은 그런 의미의 과거마저 희귀자원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재는 기억되지 않을 과거라는 생각을 해요. 매체나 뉴스, 인터넷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집단의 기억을 가져가버리고, 개개인에게 남은 것은 굉장히 적죠


비슷한 음식을 먹고, 뭔가 소비하고, 감각적으로 자극 받고, 그만큼 반사적으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는데 뭘 하고 살았나 싶고 기억은 안 나는 거죠. 지금이라도 그것을 쉽게 보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말로, 언어로 기록하고, 붙잡아야 나중에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칭할만한 게 남게 되지 않을까요


SNS나 인터넷 매체가 실시간으로 개개인의 삶을 기록하지만 기억되진 못한다고 생각해요. 매체가 갖고 있는 약탈적인 성격이 개개인의 개성이나 삶의 본질 같은 것들을 덮어버려요. 트위터의 140자라는 형식이 한 사람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결정해버리는 것처럼요. SNS라는 형식 자체가 우리를 제한하고 간섭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효과가 있든 없든 문학 같은 예술이 이러한 현상에 저항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라고 봐요.

 


 

이 책의 표지 그림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조문기 작가의 <굴절과 분산>이라는 작품인데요프리즘을 사이에 둔 남녀의 모습이 시선을 끕니다

 

책 만드는 분들이 디자인 요소를 결정을 해요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데대개는 좋아요를 누릅니다느낌이 좋았어요화사해서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는 모습에 어떤 포인트가 있는 것 같았고요.






'이 인간들'이 정말



<인간적이다>, <인간의 힘> 같은, ‘인간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소설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번 소설집에선 다소 진상이라고 할 만한 어떤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표제작에 등장하는데요.

 

앞 소설 제목들은 제가 정한 건데, 이번 소설집 제목은 제가 정하진 않았어요. ‘인간을 많이 사용해서, 안 썼으면 했는데 이 제목이 제일 낫다고들 하더라고요 (웃음) 우길 수도 없고 해서, 그러자고 했죠. <인간의 힘> 같은 소설을 냈을 때는 지금보다는 인간이 값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인간의 힘> 같은 경우엔 조선시대의 인물을 불러내서 쓴 글이죠. 그 조선시대 인물의 삶과 행적이 지금보다 인간적이었을 거예요. <인간적이다>라는 책은 짧은 소설인데, 인간과 비인간을 왔다갔다하는 상황을 굳이 말로 붙잡고 싶어서, 우연히 그 말이 들려와서 그 제목을 잡은 거지 싶어요.


<이 인간이 정말>이라는 단편이 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데, 소설 속 주인공인 이 인간은 오리지널리티라는 게 거의 없죠. 파편으로 챙긴 정보들만 있는 사람이에요. 그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서 획득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없죠. 남이 준 말을 바탕으로 말을 하는데, 그가 하는 말이 맞는 말 같긴 하나 따지고 들면 정확한지 아닌지 본인도 모르고 있어요. 잡다한 정보로 가득 찬 사람이고,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 보여줄 수 있는 게 그런 것뿐이죠.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잖아요, 사실은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죠.


이 모습이 우리의 현재인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있는 식당 같은 데에 가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는데, 화제가 점점 바뀌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TV에서 봤는데, 신문에서 봤는데, 영화에서, 라디오에서이렇게 말을 하는데, 요즘은 갑자기 특 튀어나오는 게 인터넷 아니면 트위터잖아요. 매체의 유행어가 투두둑 튀어나와요. 이 와중에 TV에서 봤는데, 어제 드라마에서 누가이러면 촌스러운 사람이 되죠. 다른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대화의 소스가 점점 변해가는 것 같아요.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대화라고 생각하는데, 이 대화가 빈약해지는 거죠. 대화의 화제가 되는 소스가 지금처럼 빈곤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의 근거가 불확실해요. 내 삶도 아니고 남의 삶도 아닌 걸로 지저귀는거죠. 매체가 워낙 많으니까, 점점 극성스러워지는 게 아닐까 싶죠.

 



<이 인간의 정말>의 주인공 남자의 대화에는 정작 눈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어요.

 

사실 그 남자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불안이죠. 불안이 노출된 건데, 본인도 통제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매일 집어먹는 수많은 약만 봐도, 약이 아니라도 다른 방법이 있잖아요. 예전 같으면 배가 너무 부르면 나가서 운동을 하겠죠, 잠이 안 오면 목욕을 한다든지 책을 본다든지 했을 거예요. 지금은 살이 찌면 거북하니까 남미 어디 숲에서 나왔다는 열매를 추출해서 먹는단 말이죠. 잠 안 오면 알약을 먹고요. 처방 과잉이에요. 약이라는 건 원하는 기능을 얻기 위해 압축하거나 정제한 것이잖아요. 반드시 부작용이 있죠. 중독상태에 습관적으로 빠져 계속 약을 먹어야 하겠죠.




<찬미>의 여주인공 이민주를 보면서 <단 한 번의 연애> 민현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소문, 해프닝, 능청스러운 사건이 결합된 이야기를 보며 이것이 성석제식 로맨스라는 생각을 했어요.

 

짝사랑이죠. 시골서 성장한 숫기없는 아이들이 읍에 사는 여학생을 향해 품는 흠모의 정 같은 것들. 개개인의 이야기가 하나의 광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이야기, 짝사랑의 경험이 제겐 연료효율이 높은 경험이에요. 응용분야가 많죠. (웃음)


민주는 상당히 적극적인 여성이죠. 자기 얘기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인물이고요. 민주를 흠모하는 시골 아이들 생각과는 전혀 다른, 자기 나름의 인생을 살아가는 거죠. 주변에서 바보 같은 시골애들이 저들 멋대로 생각하는 점에 대해 마지막에 아주 기분 좋게. 한 방 먹이죠. 그런 태도가 참 좋아요. 어릴 때부터 가족을 부양한다든지, 부모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든지,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한다든지, 이런 민주의 운명 자체는 흔한 건 아니죠. 본인에겐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고, 그 무렵의 또래 애들이 누렸을 기쁨들을 많이 누리진 못했을 테고, 많은 걸 놓치며 살았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제겐 그런 점들이 멋져 보여요. 일찍 철이 들고 세상을 빨리 알아간, 이 모습이 민주라는 인물의 인생이니까요. 평균적으로 초,,고 졸업하고 적당히 군대가고 직장 잡고, 추첨해서 아파트 분양 받고 1/n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에 비해서 이 여성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자기결정권이 있는 사람인가 싶어요. 평범하게 쭉 살아오던 사람들일수록 나중에 인생 후반으로 가면 피동적인 인간이 되는 것 같아요. 자기가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게 아니고, 외부에서 자기 인생에 대한 결단을 내리고, 끝장을 내주는 거죠. 그런 인생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사람과 민주는 다르죠. 자기결정권이 강하고, 선택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점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이야기의 안과 바깥


민주를 서술하는 방식도 인상적이었어요. 그에게 일어난 사건 자체만으로는 여인의 일생이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신산스러운 삶인데도, 그 삶의 비참함이 서술되지 않고, 정말 이 여자의 삶을 찬미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민주의 삶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한 면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민주같진 않더라도, 이런 사람들 사이에 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아직은 참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죠. 내가 이렇진 못하지만, 이런 지지 않고, 허물어지지 않는 강한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죠. 아직 세상이 버티는 건 이런 사람들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주선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홀린 영혼>이라는 작품은 <찬미>와 함께 읽힙니다. “현세와 우주, 지상에서 단 하나뿐인 너의 영원한 벗이라는, 오세호에게 보낸 편지의 과장됨이 주선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어요.

 

주선은 일종의 자기중독자예요. 스스로에게서 출발한 소재를 갖고. 남들에게 계속 뭔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 중독자죠. 그의 실체가 과연 그의 이야기와 얼마나 합치하겠어요. 그렇지만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고 믿고 있겠죠. 그런 팩트가 재미있어요.


주선이 오세호에게 보낸 편지의 과장됨은, 중학교 일이학년 때엔 그런 문구도 쓸 수 있어요. 물론 아무나 쓰는 건 아니지만요. 주선의 경우엔 거짓말에도 기본이 되어 있죠. 거짓말에도 나름 여러가지 실력이 있어요. 전혀 근거없는 건 아니고, 침소봉대를 하는 거죠. 이 거짓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가져온다든지, 정서적으로 큰 상실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에요. 만나면 계속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피곤하긴 하겠지만요.


주선과 같은 인물들이 참 많아요. 제 눈엔 많이 보여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실질이 뭔지를 자기가 잘 모르는 게 큰 문제죠. 사방에 막 떠벌려놓고 집에 들어가서 넥타이를 풀고 양복을 벗고 앉았을 때 굉장히 허무하지 않겠어요? 자기 이야기에 중독된 좀비들이 한편으론 굉장히 증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요.

 



찬미를 서술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주선이라는 인물을 그리고 있는데요, “그러고보니 그의 주름은 환상과 이야기라는 흡혈귀에 생의 피를 너무 많이 빨려 생긴 것처럼 보였다.” 같은 문장은 공포스럽기까지 했어요.

 

무섭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내가 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일 것 같아요. 혹은 내가 저 사람처럼 될 수 있다, 그런 불안일 수도 있고요. 주선의 거짓말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나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나도 저렇게 될지 모르겠다’, ‘나 역시 사실은 저 비슷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그런 불안이 느껴질 수 있지요. 그게 확대되면 두려움이 될 수 있고요.



 

아버지의 외투에 관한 짧은 소설에선 외투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소맷단과 아랫단의 솔기가 더 많이 터진 것 같았고 곰팡이의 균사를 확대해놓은 것처럼 실뿌리처럼 생긴 잿빛 실밥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가 싶게 수백 가닥이 뻗어나와 있었다.” 구체적인 묘사가 외투의 신비성이 납득되도록 해주었습니다.

 

제가 입어봤던 외투 이야기예요. 내 외투가 아니라 아버지의 외투죠. 대학 다닐 때, 군대 갔다 휴가를 나왔었어요. 초겨울에 아버지의 봄가을외투를 입고 다닌 적이 있어요. 코트도 있고 오바도 있었는데 간편하니까 얇은 아버지 외투를 입고 돌아다니며 친구들도 만나고 했죠. 아버지의 중절모를 덮어쓰고 다니기도 했는데, 그땐 젊을 때라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게 싫은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자기 현시에 사로잡혔다고 할까요. 오토바이에서 소음기를 떼어버리고 큰 대로를 쏘다니는 사람들 있잖아요. 제겐 아버지의 외투와 중절모가 그런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아닌, 배우가 되어서 연기를 하는 느낌. <외투>라는 소설을 쓸 때는 그때 그 외투를 많이 참고했죠.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 소설



예전에 시내 도서관 행사에서 성석제 작가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외부 활동을 하시면서도 독자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시게 될 텐데, 이러한 만남이 작가님의 소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합니다.

 

독자와 만나 어떤 얘기를 하려면, 저 자신이 정리가 좀 되어야 해요.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잘 몰랐던 걸 알게 되기도 하고요. 독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소년들을 볼 때가 있어요. 열몇살 쯤 되는 소년들을 만나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군.’ 하는 생각이 들죠. 내가 처음 작가들의 소설을 접하게 된 게 그 무렵이에요. 11, 12살 무렵부터 단편소설을 읽었죠


그 당시엔 자유교양문고라는 일종의 독서캠페인이 있었어요. 책을 시리즈로 백 권 넘게 만들어서 전국 초, , 고에 배포를 해서 읽힌 후에 독서 경진대회를 하고 독후감을 내고 했죠. 시험을 보러 가야 되니까 할 수 없이 책을 읽었어요. 누나, 형들, 친척들이 많아서 중고생용 자유교양문고도 집에 여럿 있었어요. 농사일 거들랴, 학교 다니랴, 일하랴, 공부하랴 그 와중에 책까지 읽어야 하니까 형들이나 누나들은 그게 싫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제 경우엔 좋았죠.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문학작품을 접했어요. 나도향, 김동인, 현진건 이런 한국문학 단편선을 읽었죠. 처음, 내가 문학을 접했을 때의 마치 감전된 것 같은, 그 느낌이 생각나요.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 시대, 환경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남의 이야기 같지 않고 내 이야기처럼 실감나는 느낌. 그 이유가 뭘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저릿저릿하면서, 슬프고 눈물이 나는


무협지에서, 역사 추리소설에서,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이야기책에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주는 감동, 문학 작품이 지닌 힘, 그것을 지금 여기 내 앞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소년들이 느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죠. 단 한 명이라도 그런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작가가 된 보람이 있겠다고 생각해요. 문학작품을 읽고 제가 그랬으니까요. 소년들의 표정과, 소년소녀들의 기대에 찬 눈망울을 보면 조금 더 다듬고,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이게 만들어요.

 



작가 성석제가 읽은 맛있는 문장들을 책으로 엮어 보여주신 적도 있는데, 최근 읽은 책 중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은 맛있는책이 있을지요.

 

요즘은 경제쪽 책에 관심이 많아서요. 소설과 직접 상관이 있는 건 아닌데, 취미 같은 거예요.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 라는 빅데이터에 관한 마케팅 책이 있어요. 효율적으로 잘 조직된 자본주의와 과학과 기술과 의학적인 데이터로 무장된 마케터들이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 부자가 아닌 사람들을 상대로 이기를 취할 때 쓰는 방법과 결과들이 나와있죠. 그런 것들에 관심이 많아서 읽고 있네요. 소설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소설을 잘 안 읽게 돼요. 영향을 받을까 싶기도 하고요. 소설을 쓰고 나서 쉴 때, 내가 쓴 것들을 잊고 싶을 때 주로 소설을 보죠.

 










기억이 무기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최근 경험한 일 중 소설가 성석제의 눈에 비친 소설적인 풍경에 관해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벌어지는 일에 비하면 나의 경험은 미약한 것 같네요. (웃음)

 



연재를 하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요, 차기작 계획이 궁금합니다.

 

(창비 계간지에 <투명인간>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아마 연재를 두 번쯤 더 해야 끝날 거예요. 그럼 내년 하반기 즈음에 장편소설이 출간되겠죠. 현재 그 다음 계획은 없어요. 소설가란 청탁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계들이기 때문에 (웃음) 뭐 계속 해나가겠죠. 그런 식으로 읽고 보고 듣고 하며 살아가겠죠. 휩쓸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휩쓸린다면 할 수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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