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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 작가, 번역가, 평론가에게 당신이 사랑하는 아작의 책에 관해 물었습니다.

단 한 권의 아작, 답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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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마지막으로 할만한 멋진 일>

도저히 이 책의 이야기들은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멋진 책. 그런만큼 얼마나 훌륭한 솜씨로 짜놓은 이야기들이 강렬한 힘으로 불타올랐는지 되새기게 되는 이야기들.



김보영 <리틀브라더>

출판사 아작의 화려한 시작을 알린 책. 번역자로부터 “신생 SF 출판사가 생겼는데 책을 보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또 새로운 불나방이 불에 뛰어드려니 했었는데….

김창규 <유령해마>

원숙함까지 겸비한 작가의 사고와 구상화 능력이 빈틈 없이 들어찬, 완성도 높은 SF의 표본.



김초엽 <어떤 물질의 사랑>

천선란 작가의 서늘함을 좋아한다. 천선란의 따뜻한 글도 좋지만 그의 특기는 서늘하고 슬픈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일, 이 단편집에는 그런 매력을 지닌 작품들이 모여 있다.



듀나 <사소한 정의>  시리즈

대명사를 뒤틀고 지우는 것만으로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연작. 그렇다고 이 신나는 시리즈의 스페이스 오페라로서의 재미가 그 아이디어 안에만 갇혀 있는 건 아니다.



문목하 <저 이승의 선지자>

타인을 사랑하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오랜 교훈의 가장 환상적인 변주. 작가가 독자를 울리기 위해 반드시 슬픔이 필요한 건 아니다.

심너울 <돌이킬 수 있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SF 장편 중 하나. 문목하 작가님의 새 장편과 영상화 모두 절실히 기대한다!



정세랑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새로운 감성의 SF를 만날 수 있어 기뻤고, 이 책의 장면장면이 오래 생각난다.



천선란 <체체파리의 비법>

새벽녘까지 소파에 앉아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 읽던 순간, 나는 앞으로 내 세계가 달라질 것을 확신했다. 그런 소설이다.


정보라 <식스웨이크>

정말 신나게 읽었고 강력 추천한다. 정통 SF와 정통 추리소설이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지의 모범을 보여주는 매혹적인 작품.



강다연 <사람의 아이들>

우리의 다음은 무엇인지, 무엇이 있기나 한지,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대체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그런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던 책.

강현 <얼마나 닮았는가>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이해해본 적 없는 인간의 피부 아래로 들어가는 경험을 할 이야기. 온정주의나 냉소주의 없이 한 인간을 이해하는 단편들이 담긴 소설.

고호관 <별의 계승자> 시리즈

괜찮은 아이디어로 성공을 거둔 뒤 후속편에서 지리멸렬해지는 이야기는 많다. 그리고 야심차게 출간을 시작한 뒤 이런저런 이유로 후속편을 제대로 내지 않는 출판사도 많다. 별의 계승자 시리즈는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 

곽유진 <저주토끼>

작가는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라고 말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 같이 조금씩 불행하거나 불행해진다. 그렇지만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기에 그들의 쓸쓸함은 온전히 그들만의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이상하게 위안이 된다. 


구한나리 <화재감시원>

코니윌리스의 세계에 빠지기 시작하는 계기로도, SF의 다양한 분위기를 맛보기에도 최고의 책

김다민 <유미의 연인>

책을 덮고서 사랑할 여력을 그러모아 주먹을 쥐어보았다. “손이 창백할 때 이 책을 펼치세요.”

김수륜 <사소한 정의>

사소한 정의를 처음 읽고 너무 흥분했다. 들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스페이스 오페라 좋아하세요? 안 좋아한다고요? 사소한 정의를 읽으면 좋아하게 될 거예요!”


김아린 <나의 진짜 아이들>

때때로 우리의 삶은 “매우 혼란” 상태이며 기억은 무수히 많은 파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결코 끝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우리 시대의 수많은 트리샤와 팻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한다.


김영리 <리틀브라더> 첫사랑, 첫눈, 첫키스. 처음이란 단어가 붙은 말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아작의 첫책이어서도 그렇지만, 경쾌하게 술술 읽고 덮었는데, 자꾸, 계속, 한번씩 생각나는 작품. 그래서 찐이다.


김유경 <식스웨이크> 우주선 안에서 새로 깨어난 클론들이 자신들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고, 이 작가가 얼마나 영리한지는 결말이 말해준다. 


김이환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가장 좋아하는 작가 하인라인의 책이다. 처음 읽었을 때 정말 감동받았고, 여러 번 다시 읽어도 재미있다. 우주로 가보고 싶은 십 대 소년 소녀가 모험을 통해 영웅이 되고 마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구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는, 영원히 재밌는 소재로 남으리라.


김인정 <구미베어 살인사건>

아작 책에 갑자기 손 대기 너무나 두렵다는 분들께 ‘부담없이 이거 어떠세요?’ 하고 입문용으로 고른다면 이 책!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버려진 곰인형들을 위한 만가>.


김주영 <식스웨이크>

스릴러와 SF, 두 장르의 결합이 맛깔스럽다. 미래의 범죄 현장과 해결 과정을 흥미롭게 따라가는 동안 인간이 불멸하는 미래에 등장할 새로운 범죄 유형을 선뜩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김현재 <완전사회>

작가의 이름과 제목만 들어봤던 작품을 직접 읽을 수 있어 뜻깊었고, 작품에 담긴 선구적인 시각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시간의 흐름과 망각 속에 잠겨 있던 한국 SF 고전의 발굴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저작.


남세오 <증명된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이산화는 비주류에 대한 사랑을 가장 우아하고 세련되게 풀어내는 작가이기도 하다. 마땅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야 할 책.


남유하 <온 여름을 이 하루에>

7년 동안 내리던 비가 멈춘 순간, 나는 금성을 뒤덮은 거대한 숲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레이 브래드버리라는 작가를, 그의 작품을 사랑하게 되었다.


문이소 <붉은 칼>

표지에 칼이 하얀 칼인 건은 몹시 아쉬우나 그래도 <붉은 칼>은 최고! 광막한 우주에서 펼쳐지는 여성의 사랑과 전쟁, 연대와 생존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기를.

모래(손소남) <체체파리의 비법>

나는 바로 이런 걸 읽고 싶었어. 팁트리 주니어의 소설을 읽은 다음에야 이런 걸 읽고 싶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이의 소설집을 한글로 읽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도 오래 기다려야 했다.



물들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표제작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는 내 인생에서 ‘단편’의 맛을 알려준 강렬하고도 날카로운 작품. 꼭 추천한다!



민규동 <돌이킬 수 있는>

아작이 스스로 빚어 내놓은 첫 작품이기에 그 자체로 기념비적이다. 뭣보다, 돌이킬 수 있다면, 이 작품을 읽기 전으로 돌아가서, 그 놀라운 설렘과 훙분을 다시금 느끼고 싶다.



박문영 <저주토끼>

동화와 민담과 설화를 오가는 소설. 스산한 단편들이 묘하게 포근하고 저릿하다. 매력적인 도입부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와 나만 남곤 했던 유년기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박상준 <라마와의 랑데부>

우주를 향한 인류의 원초적인 동경'을 가장 잘 표현하는 거장 아서 클라크의 대표작. 시대를 뛰어넘은 SF의 영원한 정전. 미래, 우주, 외계인, 인문사회적 시야의 확장 등등 SF만이 선사하는 ‘경이감'의 핵심 고갱이들이 오롯이 담긴 걸작.



박송주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나의 현실에서 SF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을 깨닫게 됨을 알게 해주는 책. 우리가 변방에, 주변에서도, 존재하고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넌지시 말해준다.

박해울 <여왕마저도>

이 책을 읽고 코니 윌리스라는 작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유쾌한 분위기를 가졌으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이 매력적. 특히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는 크리스마스에 읽으시길 추천.


배지훈 <중력의 임무>

과학소설의 정의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만약 이런 세계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그리는 장르’라고도 부를 수 있을 텐데, <중력의 임무>는 그 정의에 완전무결하게 부합하는 작품. 중력이 단순히 700배가 되는 행성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도 그려냈다는 점에서 탁월한 작품.

백승화 <지상 최대의 내기>

코미디에 애정을 가진 저에게 곽재식 작가는 지나칠 수 없는 존재다. 푸근하고 엉뚱한, 곰탕 안의 젤리 같은 한국 SF코미디를 찾으시는 분들께 <지상 최대의 내기>를 추천한다.



설재인 <여왕마저도>

이 책을 소개받았던 장면을 또렷이 기억한다. 생맥주를 흡입하던 야외 테이블. 안주는 먹태였고, 나는 입에서 생선조각이 튀어나가는지도 모른 채 소리를 질렀다. “미친! 그런 소설이 있다고요?” 그렇다, 있었다. 그런 소설이.

손지상 <제프티는 다섯 살>

저녁놀처럼 그리우면서도 기괴한 사변소설의 이미지와 가상의 노스탤지어.



송경아 <혁명하는 여자들>

시의적절한 기획과 출간으로 ‘페미니즘 SF’의 존재를 팬덤 밖으로 널리 알려준, 아작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



송은우 <완전사회>

60년대 한국문학 특유의 문체에서 느껴지는 고전적인 정중함이 더욱 매력인 놀라운 SF 소설. 주인공 우선구가 그랬던 것처럼 작가도 작품에 자기를 담아 헤매는 후손에게 메세지를 전하려 했던가? 내 고통을 죄다 남탓으로 투사하며 편을 갈라 싸우는게 정의인 줄 아는 요즘 시대에 필히 읽어야 할 진정한 미래소설.



송한별 <유미의 연인>

숨 쉬듯 혐오를 내뱉는 세상에서 매번 실망하면서도 계속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소설집. 이서영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로서의 사랑을 믿고 계속해서 사랑해 나가는 작가다.



시아란 <증명된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 개념, 무대로부터 시작해, 우리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경이의 세계로 이어지는 단편들의 묶음. SF독자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무지개맛 과자상자이다.



심완선 <야자나무 도적>

좋아할 작가를 찾고 싶을 때 단편집을 손에 든다. 이 여행이 언제나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때로는 지루하기도, 불편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언제나 경험이 남는다. 페미니즘과 SF는 늘 추천하는 여행지. 이쪽으로 떠날 준비가 된 사람에게라면 이 책은 오랫동안 재미있을 것.


엄길윤 <지상최대의 내기>

곽재식 작가는 오직 한국에서만 일어날 것 같고, 꼭 한국에서만 일어나야 하는 하이퍼 리얼리즘 SF와 로맨틱한 SF를 능숙하게 펼쳐놓는다. 이 얼마나 멋진 블랙코미디인가.


엄정진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SF를 처음 읽거나 잘 안 읽던 사람에게 입문용으로 좋다. 재미있고 전개가 빠르며 마지막엔 살짝 뭉클하다. 과학과 공학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을 바탕에 놓고 쓰인 ‘미스터 SF’ 하인라인의 대표작.


위래 <유리감옥>

특이점 이후의 미래, 실험이란 명목으로 21세기의 중산층 가정에 떨어진 주인공이 자신의 허물어진 정체성을 다시 쌓아나가는 싸움을 그린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검열, 신분 도용, 복제와 같은 근대의 낯익은 개념들이 러브크래프트의 괴물들보다도 무섭다고 느낄 것이다.



유목연 <화재 감시원>

농담과 서정과 비애를 완벽하게 저글링하는 솜씨를 보여주는 단편집. 같이 있으면 좋은 사람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했던 책이다. 나 혼자만 웃겨 죽기는 아깝고, 또 사람이 살면서 가끔은 혼자 낄낄웃다가 속으로 ‘아, 이거 정말 웃긴데 어디 말할 데도 없고…’라며 좀 고독해지고 그래야 된다.



윤이안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한참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쌓인, 응축된 서사를 한꺼번에 터뜨리는 것 같은 한 문장이었다. 특별하거나 어려운 단어 하나 없이 감정을 전달한다. 내가 소설을 읽는 건 바로 이런 문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윤주미 <중력의 임무>

과학자들의 상상력과 티키타카가 빛나는 소설. 과학적 이론을 이용하여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을 생생하게 느껴 보길 바란다. 그야말로 ‘Oldies, but goodies.’



이건혁 <양 목에 방울 달기>

혐오마저도 이렇게 유쾌하게 풀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번 놀라고, 꽤 까다로운 전개임에도 단숨에 읽힌다는 점에서 두 번 놀란다. 이 책을 읽으면 사람들이 왜 코니 윌리스, 코니 윌리스 하는지 아시게 될 것. 



이경희 <유미의 연인>

누구보다 다정하고 사랑 가득한 이서영 작가의 신작 소설집. 특히 단편 <센서티브>는 한국 SF 단편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



이규락 <삼사라>

유물론적 사고실험과  약자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이 경탄이 나올 정도로 잘 결합된 소설집. 특히 단편 <유일비>는 좋지 않은 뉴스와 염세적인 풍경으로 가득한 현재에, 모두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나경 <여름으로 가는 문>

다섯 번째 한국어판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안 읽은 사람 없게 해주세요.”


이다혜 <돌이킬 수 있는>

작가에 대해서도 소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채 읽기 시작해 혼자 신나 끝까지, 점점 가속하며 내달리는 기분으로 읽었다. 읽는 동안보다 다 읽은 다음이 더 좋아서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아작에서 내는 한국 작가 소설들은 무조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책.



이도 <나는 바나나다>

한국 소설계에서 등한시되던 SF 장르, 이 장르가 새로운 꽃을 피우기 전 꼭 필요한 책. 편견의 틀 없이 만들어진 <나는 바나나다> 속 중편들은 매우 기발하고 날카롭다.


이동현 <야자나무 도적>

6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비영어권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작품 선정을 통해 페미니즘 SF가 이룩한 성취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는 단편선. 특히 페미니즘을 매도하고 폄하하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 지금 같은 반동의 시대에 더없이 귀한 결실.

이멍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어도 깊은 울림과 생각할 거리를 송곳처럼 가슴에 찔러넣는 SF. 사랑과 운명에 휘둘리며 읽어나가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고 나는 다시 첫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민섭 <무안만용 가르바니온>

따라가려고 노력하다 정신을 잃다보면 어느새 동화되어 있는 책!



이산화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

이 단편집의 표제작이 번역되어 나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 잔혹한 우주를 살아가는 생물들의 사랑과 운명과 죽음에 대한 아름다운 책이자, 아작을 주목하게 된 계기.



이수현 <돌이킬 수 있는>

아작에서 내줘서 고마운 책도 많았고, 좋아하는 책도 많지만 특히 이 소설이 나왔을 때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시도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코니 윌리스의 소설은 대체가 어려운 특별한 경험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다에 담긴 유머, 지적 유희, 서사적 쾌감. 그리고 각자도생의 시대에 더 절실한 어떤 태도와 관점까지.


이재호 <여름으로 가는 문>

냉동 수면과 시간여행, 그리고 고양이, 이 세 가지 조합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작품.  거기다 한국 최고 SF작가님의 훌륭한 번역까지. 이 답답한 시기에 여름으로 가는 문을 열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멋진 고양이와 함께.




이정인 <온 여름을 이 하루에>

충분히 환상을 섭취해야만 현실을 버틸 수 있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집은 책상 위에 올려두기만 해도 든든한 종합비타민제와 같다.




이주혜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천천히 사멸하는 세계가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건 생존을 향해 발버둥 치는 인간이 여전히 사랑하고 미워하며 마주보기 때문이다. 해체된 세계의 생태계에 SF라는 현미경을 들이댄 집요한 사랑 이야기.


이지용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SF라는 장르가 줄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의 전형을 보여주면서, 상상의 즐거움을 시종일관 놓치지 않는 이 수작을 더 많은 분들이 읽어보시면 좋겠다.




이지은 <저 이승의 선지자>

문체가 아름답고 문장이 적확하며 독자를 먼 곳으로 떠나게 해준다. 떠났다가 돌아오면, 다른 사람이 된다. 조금 덜 외로워진 인간이 된다. 


이채하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작중 배경은 인도이거나, 더 멀거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거나 개념임에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확실해서 좋았다.



임욱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이 책의 끝을 잊을 수가 없다. 마지막 단편 <다락방> 소녀의 말대로, 세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벽이 허물어졌고, 나는 아름답고 위험하게 뒤섞인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 속에서 나는 자유로웠고, 또 끝도 없이 두려워 참으로 행복했다.



임태운 <라마와의 랑데부>

누군가 내게 단 한 권의 SF소설만 타임캡슐에 넣어 만년 뒤의 미래로 보낼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1초의 고민도 없이 이 책을 꼽겠다. 우주 저편에서 날아온 원통형 물체 ‘라마’를 탐사하며 그 경이로움을 묘사하는 이 소설은 “하드 SF는 너무 근엄해서 재미의 쾌감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화끈하게 박살내는 어드벤처 액션물이기도 하다.


전삼혜 <크로스토크>

SF계의 최고의 수다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거장 코니 윌리스의 <크로스토크>를 추천한다. 텔레파시와 유전자, 소통과 사생활 침해 사이의 무거운 문제를 빠르고 장황하게 풀어내는 새콤달콤한 책.


전혜진 <나는 바나나다>

신인작가들의 작품은 지금 이 장르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지표와 같다. 신인작가들의 손과 눈으로 빚어지고 중견작가들의 멘토링을 통해 다듬어진, ‘지금 여기’를 보여주는 이정표 같은 책.

정대영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이 세상에 천재는 의외로 많지만, 그 결과물을 풍성하게 내어 놓는 천재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할란 엘리슨이 바로 그런 드문 천재다. 작가가 직접 지은 작품 제목부터 당신의 관심을 확 끌었음이 틀림없을 텐데, 수록된 단편들의 내용도 제목만큼이나 훌륭하다.



정명섭 <별의 계승자>

우리는 SF라고 하면 항상 미래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별의 계승자는 시선을 과거로 돌렸다. 인류의 시작이 어디일까 라는 웅장한 물음에 대한 기가 막힌 답변을 들려준다



정이담 <혁명하는 여자들>

주어가 설명되지 않거나, 주인공이 특별히 묘사되지 않을 때 우린 캐릭터를 무의식적으로 남성으로 특정하곤 하는데, 이 책을 읽을 때는 자연스럽게 모든 주인공을 여성으로 읽는 경험이 가능하다. 재미있고 다채로운 단편들은 SF에 입문하는 분들에게도 추천하기 좋다.



조호근 <터키 갬빗>

괜찮은 추리물, 흥미로운 역사물, 훌륭한 전쟁 첩보물. 고전 장르소설을 향한 갈증을 해소해주는 거칠고 묵직한 필치와, 지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정교한 서술이 공존한다. 아쿠닌의 소설 중 가장 신선하게 놀라웠던 작품이다.



최세진 <기기인 도로>

단일한 주제로 국내 여러 작가가 이렇게 완성도 높은 앤솔러지를 출간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 SF의 양적, 질적 성장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정표다.



최지혜 <올클리어>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의 대단원을 내린 작품. 수십 년에 걸쳐 쓴 작가의 노력과, 여러 역사의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고 사람을 배우고 사람을 사랑하며 희생한 작중 인물들의 목소리가 인류애를 치솟게 하는 소설이다. 시리즈의 인물이 총 집합하는 완벽한 결말로서 길이 남을 본보기.



클레이븐 <중력의 임무>

극단적인 환경에서 펼쳐지는 스토리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치밀하고 정교한 설정은 실존하는 천체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멋진 배경을 탐험하는 발리넌 선장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은 참으로 즐거울 것이다.



해도연 <제프티는 다섯 살>

할란 엘리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이고 감정이고 세계다. 결핍과 과잉, 사랑과 미움, 상처와 치유가 세포막부터 분해되어 섞이면 어떤 이야기가 탄생하는지를 이보다 잘 보여줄 수는 없다.



홍준영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비명을 질러야 한다>

알프리드 베스터의 영향을 받은, 구식 기술과 미래적 상상력이 음울하고 비통하게 이어지는 빼어난 글솜씨.



홍지운 <얼마나 닮았는가>

모두가 반드시 읽었으면 한다. 김보영은 언제나 옳으니까.



황모과 <우리가 추방된 세계>

SF라는 세계가 함의하는 가치를 보여준 걸작들. 작가의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멋진 거짓말’이 펼쳐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또 한 명의 멋진 거짓말쟁이가 되길 꿈꾸기 시작했다.


황성식 <멜랑콜리의 묘약>

첫 단편 <어느 잔잔한 날에>에 감명받아 여자 친구에게 그 내용을 들려줬었다. 거칠게 요약된 줄거리만으로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던 친구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아둔한 말솜씨를 통해 전달되더라도 좋은 이야기는 끝내 사람을 감동시키는구나 싶어 또 한 번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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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 출간을 앞둔 김연수 작가의 작가의 말 전문을 먼저 소개합니다. | 제공 : 문학동네 출판사












작가의 말


1962년 5월, 삼수군의 협동조합에서 일하던 백석은 『아동문학』에 「나루터」라는 동시를 발표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압록강 변에서 나무를 심고 길을 닦는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며 사십 여 년 전 그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에 그 강을 건너가던 ‘나이 어리신 원수님’을 떠올린다. 

‘이 때 원수님은 원쑤들에 대한 증오로/그 작으나 센 주먹 굳게 쥐여지시고/그 온 핏대 높게, 뜨겁게 뛰놀며/그 가슴 속에 터지듯 불끈/맹세 하나 솟아 올랐단다—/<<빼앗긴 내 나라 다시 찾기 전에는/내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으리라.>>

당시 북한의 문학잡지에 실린 다른 시에 비하자면 이 정도는 노골적인 찬양시가 아니”다. 하지만 1956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백석으로서는 처음으로 현실의 수령을 호명한 시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또한 이것은 마지막 찬양시, 아니, 살아생전 그가 발표한 마지막 시가 되고 말았다. 그토록 강요받던 찬양시를 마침내 쓰는 마음과, 그뒤 삼십여 년에 걸친 기나긴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옛말과 흑백사진과 이적표현의 미로를 헤매고 다녔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음악을 많이 들었다. 기행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을 때마다 들은 건 연변 출신의 연주자인 김계옥이 옥류금으로 연주한 <눈이 내린다>다. 이 곡은 원래 가곡이었는데, 문경옥이 옥류금 변주곡으로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평양음악학교의 피아노 선생이었다가 해방 뒤 레닌그라드음악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작곡가로 명예로운 일생을 마쳤다. 소설 속 피아니스트 경의 모델인 이분은 1979년에 죽었다. 

또 자주 들은 노래는 일본 가수 아와야 노리코(淡谷のり子)의 <남의 마음도 몰라주고(人の気も知らないで)>다. 구혼에 실패하고 함흥에서 영어 선생으로 지내던 시절, 학생들은 종종 백석이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들었다고 했다. ‘남의 마음도 몰라주고/눈물도 감추고 웃으면서 이별할 수 있는/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눈물 마르고 몸부림치는/이 괴로운 짝사랑/남의 마음도 몰라주고/야속한 그 사람.’ 유행가 가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고, 청춘의 고뇌도 마찬가지다. 백석보다 다섯 살 많았던 아와야 노리코는 말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99년에 죽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많이 들은 곡은 저먼 브라스가 관악기로 연주한 바하의 칸타타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Jesus Bleibet Meine Freude)>이었다. 자료를 찾다가 두 장의 사진을 본 뒤로 그 선율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나는 1957년 재건 지원을 위해 함흥에 체류한 동독인 레셀이 촬영한, 폭격으로 파괴된 서호의 수도원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1932년 함경도 덕원 신학교 축제 때 관악기를 든 학생 악단을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앞의 두 곡은 백석이 들은 것이 확실하지만, 덕원의 신학교 악단이 연주하는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을 그가 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기행은 1937년의 어느 여름날, 해변에 누워 이 곡을 듣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이오덕이 엮은 아름다운 시집 『일하는 아이들』은 경상북도 상주군 공검국민학교 2학년 박춘임이 쓴 「햇빛」으로 시작한다. 책에는 이 시가 1958년 12월 21일에 쓰였다고 인쇄돼 있다. 이즈음 북한의 백석은 삼수의 협동조합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의 내 나이와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동갑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기행에게는 덕원신학교 학생들의 연주를 들려주고 삼수로 쫓겨간 늙은 기행에게는 상주의 초등학생이 쓴 동시를 읽게 했을 뿐. 그러므로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백석은 1996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제 나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된 그를 본다.

마지막으로, 나의 어머니와, 그분이 살아오신 한 시대에 이 소설을 드리고 싶다.




2020년 여름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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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오늘의 작가상 수상 작가 수상 소감



오늘 아침에 요가를 마치고 나서, 수상을 알리는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7월부터 취리히에 머물고 있는데, 내일부터 한 달가량 취리히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 있을 예정이었다. 인터넷이 없는 그 여행 중에 쓰여질 이 짧은 글은, 이곳 취리히에서 시작하여 여행지의 어디에선가 끝날 것이다.


많은 다른 작가들처럼 나도 작가 이외의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 그건 번역이다. 창작과 번역은 많이 다르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비슷하여, 어떤 경우 창작은 번역이 되고 번역이 곧 창작이 되기도 했다.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략의 규칙이라고 할 만한 습관이 생겼다. 한국의 집에 머물 때는 주로 번역을 하고 외국을 여행하는 동안에는 내 책을 쓴다는 것이다.


며칠 전 어느 매체와 인터뷰를 하는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의 작품에는 유난히 여행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아마도 직접적인 이유는, 내가 여행 중일 때 주로 작품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같은 의미이긴 하지만 좀 더 다른 층위에서 말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내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인식하는 여성이면서 번역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눈앞에 많은 경계선을 둔 사람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을 많이 알지 못한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많지 않고,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더욱 적다. 얼마 전 취리히 구시가지의 한 오래된 서점에 갔는데, 여든 살은 훨씬 넘어 보이는 서점의 여주인이, 자신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주로 얼굴로 기억한다고 말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사람을 이름이나 명칭으로 기억하기보다는 그들이 했던 말로 기억하는 편이다. 이름보다 더 매혹적인 말들이 내 기억 속에 있다. 내가 나에게 기억되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가 한 말에, 혹은 내가 쓴 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말은 이야기일까? 이야기가 없는 말, 혹은 말이 없는 이야기란 어떤 것일까?


며칠 전의 인터뷰에서 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 작품의 줄거리는 매우 불연속적이고 사건이 여러 층위에서 일어나기도 하여 파편적인 콜라주처럼 보인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나는 대답했다.


“나는 ‘이야기’에 대해 매우 양가적 감정을 갖고 있다. 나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느낀다. 어린 시절부터 픽션, 즉 스토리는 나를 사로잡았다. 이야기를 꾸며내며 혼자 놀기를 좋아했던 아이에게서 지금의 내가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나는 스토리에서, 이야기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야기의 멀리서, 이야기가 없는 곳에서, 이야기가 아닌 것에서, 이야기의 목소리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야기가 사람의 이름이라면, 이야기의 목소리는 그 사람이 했던 말이다. 나는 사람의 이름을 굳이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이 했던 매혹적인 말은 오래오래 간직한다.”


이틀 전, 나는 여전히 여행 중이었다. 취리히를 떠나 프랑스로 가서 그뤼네발트의 제단화를 보기 위해 콜마르Colmar에 들렀고, 연극제가 열리는 퐁따무송Pont-à-Mousson을 거쳐 독일로 들어왔다. 석양이 내리는 독일 튀링엔의 드넓은 들판을 보기 위해 고속도로가 아닌 시골길을 하루 종일 달리는 중이었다. 수확이 끝난 밀밭 가득 앉아있던 까마귀 떼가 어떤 신호인 듯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것은 하나의 순간이었다. 차 안에 틀어놓은 오디오극에서 말이 들려왔다.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안에 있으면서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하는 것은?”


뷔흐너의 희곡 「당통의 죽음」에 나오는 대사였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내 입에서 이렇게 변형되어 흘러나왔다.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안에 있으면서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하며 또한 글을 쓰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나는 ‘쓰는 자’라기보다는 점점 더 ‘글의 매개자에 가까워진다고 느낀다. 미래에 어떤 소망이 있다면 오직 그 역할을 조금이라도 더 잘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어떤 소망이 있다면, 이름이 아니라, 말이 되고 싶다. 지금 내게서 흘러나오는 말은 충분히 멀지 못하고 충분히 없지 못하여,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부족한 목소리에게 단 한명의 독자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과분하고 소중한 영광이라는 것도, 나는 잘 안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단 한 명의 당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 마음은, 당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2018년 8월 베를린 인근 반들리츠Wandlitz에서

배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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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독자 2018-09-05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져요!
 



2018 <오늘의 작가상> 심사 경위



키워드는 여전히 ‘페미니즘’, 더 강력히 호출된 ‘여성 서사’


2018 오늘의 작가상의 영예는 『뱀과 물』 배수아 작가에게 돌아갔다. 서로 다른 취향과 기준을 지닌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모인 자리였으나 하나의 현상에는 모두 수긍했다. 오늘날 작품을 써내는 작가와 작품을 선택하는 독자, 양방향으로 ‘여성의 서사’가 강한 영향력을 지닌다는 것이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젠더 감수성’과 ‘페미니즘’은 독자가 작품을 선택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자 그것을 읽어 내는 프리즘이 되었다. 그 현상을 반영하듯 올해 <오늘의 작가상> 본심 심사에서 끝까지 겨룬 작품은 여성 서사의 양 극단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두 작품,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와 배수아의 『뱀과 물』이었다. 오늘을 담은 작품과 오늘이 비출 작품에 대한 지지가 팽팽했으나, 배수아의 작품에 드러난 독특한 ‘오늘’에 대해 이야기하며 표가 기울었다. 이 작품의 원시적이고도 현시적인 여성 서사가 2018년과 닿아 있는 절묘한 지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렸다. 참석한 심사위원들 모두 『뱀과 물』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여성 서사가 더 넓은 상상력을 획득하고 거듭 확장되리라고 예감했다. 문학평론가 강지희는 수상 작가인 배수아에 대해 “여성 서사의 스펙트럼에 대해 생각할 때 항상 떠오르는 작가”라고 말했다. 수상작인 『뱀과 물』에 대해서는 “특히 시대와 한 번도 일치한 적 없던 배수아의 작품 세계에서, 하필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에 쓰인 소설이 『뱀과 물』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라고 설명하며 작가의 수상을 응원했다. 









2018 <오늘의 작가상> 심사평



  배수아 소설에 여성이 돌아왔다. 『뱀과 물』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동안 적극적으로 젠더를 해체하는 실험에 몰두하던 배수아는 『뱀과 물』을 통해 또 한 번 문학적 전회를 이루어 냈다. 전과 달리 『뱀과 물』에는 여성 인물들이 강렬하게 부조되어 있고, 읽다 보면 그 인물들은 마트료시카처럼 겹겹이 겹쳐져 하나의 여성적 형상을 이룬다. 그러나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그 형상은 그림자처럼 흩어지며, 끝내 어떤 하나의 고정된 신화적 규범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배수아 소설을 두고 여성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수아 소설 속 여성은 성녀도 악녀도 아니며, 처음 보는 지느러미를 달고 영원히 어딘가를 헤매며 담담하게 절망적 자유를 만끽하는 새로운 생물체 같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배제되어있기에 여성적인 것이라거나, 비가시화되고 재현 불가능한 것의 드러남과 전복이라 말하며 여성 소설을 타자화하고 싶지는 않다. 『뱀과 물』은 그저 여성이 어떤 존재도 될 수 있는 자유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모호하고 난해한 꿈이 때로 현실을 압도하는 경험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이 소설은 그렇게 여성성의 감각을 확장시킨다.  

  새로 태어난 ‘오늘의 작가상’을 두고 지금 한국의 교양을 재편하는 상이라 생각해 왔다. 교양은 누구의 것인가. 언뜻 객관적으로 들리는 이 교양이라는 단어는 실은 한 사회의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승인과 배제의 정치학이다. 지금 이 세계의 교양은 그간 무질서하고 비합리적이고 나쁜 취향이라 말해져 왔던 쪽으로 꺾이며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배제되어 왔던 그 자리는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놓여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제 어제의 나쁜 취향이 오늘의 교양이 될 것이다. 배수아의 『뱀과 물』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에 이어 이 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고 기쁘다. 여성 소설들은 이렇게 함께 계속 걸어 나갈 것이다.

―강지희(문학평론가)



『뱀과 물』을 뱀과 술, 이라고 종종 잘못 말하곤 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아마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물잔에 맑은 술이 가득 담긴 것을 모르고 다 들이켠 다음 그대로 쓰러져 잠든 적이 있는데, 바로 그런 기분(「뱀과 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과감히 소설 속 “시곗바늘”을 떼어 내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들이 하나의 풍경이 되는 “회전목마” 위로 독자를 안착시킨다. 하여 이 기묘한 유원지 같은 소설은 순차적인 시간성을 거부함으로써 늘 비가시적으로 다뤄지던 여성의 유년 시절과 노년 시절을 드러내고, 곧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까지도 “피부 아래의 아득한 감각”으로 느끼게 만드는 데에 이른다. 

취중에 벌어진 일처럼, 어느 꿈속의 일처럼 흐릿한 순간들이 분명하게 있었음을 서사가 아닌 감각으로 증명해 내는 작품들에 나는 그저 홀릴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경험이 더 낫다. 시간을 지우고, 사건을 지운 뒤 오롯이 남은 감각들은 입 밖에 내기 어렵고, 좀체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이 비밀스러운 감각은 말해질 수 없기에 곧 모든 이야기가 되고,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오늘의 작가상> 본심에 오른 다수의 후보작들이 ‘오늘’을 보여 주고 있었기에 어떤 한 작품을 고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기준에 대해 다시 한 번 자문하는 일이었다. 고민 끝에 내린 답은 이러했다. 어느 날 펼쳐보아도 ‘오늘’이 될 수 있는 작품을 고르는 것. 『뱀과 물』은 그런 작품으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한 번쯤은 보고 겪었을 환영(幻影)같은 순간을 불러오는 이 소설을 오늘도 환영(歡迎)하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믿기로 했다.

―박하빈(독자)



  무엇이 ‘배수아’를 멀리 있게 했던가. 20여 년 전 ‘신세대’의 부박한 취향들 속에서 황막하게 번득이던 그 고독한 격정과 불온함에 매혹된 때부터일까. 10여 년 전, 분절된 개별자들의 세계를 감싸는 그 자유롭고 선명한 언어의 추상성이 이룩한 창조적 정신의 높이 때문이었을까. 언제부턴가, 문자를 통한 사유와 상상이 꿈처럼 음악처럼 흐르는 그 장면들 속에서 줄곧 미끄러지며 헤맸기 때문일지도. 어쩌면 한 세대라고 말해도 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수아’라는 고유명에 입혀진 이런 저런 기억들은 얼마큼 맞고 또 얼마큼 틀렸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들로 사랑했고 또 그런 이유들로 충분히 친숙할 수 없었던 ‘배수아’와의 시간을 이제 다시 펼쳐본다면? 

  우리는 8권의 후보작을 앞에 두고 그 중 하나만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으로 뽑기 위해 숙고하는 중이었다. 난감한 고민과 흔들리는 판단이 오가며 각자의 마음들이 조금씩 뭉쳐질 때쯤, 문득 ‘배수아’에 대한 어떤 생각이 우리에게 점점 선명해졌다는 느낌을 서로 감출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배수아’와의 거리감이란 대체 무엇인지, 누구의 것인지, 어떻게 확신하는지, 우리 중 누구도 그 답을 안다는 듯이 말하지 않았고, 그러자 당연한 뭔가를 비로소 알게 된 기분이었다. 우리 앞에는 ‘오늘의 독자’가 선택한 『뱀과 물』이 놓여 있었으니까. 너무 낯설다, 지나치게 독특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당황스러운 소설이다 등등의 오래 굳은 수수한 감정(鑑定)에 끝내 갇히지 않은 ‘배수아’가 되려 우리에게 ‘오늘의 독자’를 소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의 작가’가 오늘만 빛나는 작가가 아닐진대, ‘배수아’를 오늘에야 빛을 본 작가처럼 말해선 안 될 것이다. ‘배수아’를 읽고 또 읽고, 처음 읽고 다시 읽는 독자들을 언제나 빛나게 해 주는 작가로서, 어제도 그랬듯 내일도 그럴 것이라는 신뢰로써, 배수아는 2018년 오늘의 작가다.

―백지은(문학평론가)



  책방 ‘사적인 서점’을 열고 손님들의 독서 경험에 대해 들을 기회가 많아졌다. 왜 책을 읽는지, 어떤 책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이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소설은 어차피 다 가짜인데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묻는 손님이 꽤 많았다는 거다. 그럴 때마다 나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고 대답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 보는 경험은 소설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우리는 더 많은 소설을 읽으며 더 많은 타인이 되어야 한다고. <오늘의 작가상> 후보작 중에서는 『딸에 대하여』가 가장 그러한 책이었다. 딸에 대하여, 엄마에 대하여, 늙음에 대하여, 혐오와 배제에 대하여, 결국엔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딸에 대하여』가 현실 세계에서 살을 맞대고 사는 타인의 삶을 경험하게 하는 소설이라면, 『뱀과 물』은 이야기가 이끌어 내는 허구의 세상과 만나는 매혹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작품의 독해는 쉽지 않았다. 순차적인 서사 진행 방식도 없고, 단어에 담긴 의미가 해석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빠져들었다. 본능적으로 끌렸다. ‘홀렸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직관의 독서, 유희의 독서. 새로운 독서 경험의 확장이었다. 작가가 만든 환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즐거움을 알려 준 배수아 작가의 <오늘의 작가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정지혜(책방 ‘사적인서점’ 대표) 



  작가가 온 힘을 다 해 완성한 한 권의 이야기를 평가하고 그 중 최고를 뽑는다는 것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각자의 이야기는 모두 고유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상작이냐 아니냐에 따라 독서 여부가 결정된 적도 없다. <오늘의 작가상>에서 심사를 제안받았을 때 잠시 고민을 했다. 과연 내가 가장 좋은 작품을 골라낼 수 있을까하고. 하지만 ‘오늘’이라는 명제를 통해 한국 소설의 오늘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아 심사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8권의 책을 받고 한 상자의 선물을 받은 것 같아 매우 흡족했다. 책 중에는 내가 이미 읽은 책도 있었고, 다소 생소한 작가의 이름도 섞여 있었다. 독서할 때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수상 여부와 횟수, 작가 이름에 절대 휘둘리지 말 것. 8권의 책을 읽으며 한국 소설에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새삼 느끼며 그에 무지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들은 가볍고, 무거우며, 전위적이고, 세련되고, 시의성 짙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각자의 고유한 색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심사는 더더욱 쉽지 않았다. 

  <오늘의 작가상>이라는 상이 가지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을 대변하는 작품이 받아야 할까? ‘오늘의 작가’란 오늘날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작가를 말하는 것일까? 혹은 오늘날 독자들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작가여야 하는 것일까? ‘오늘’이라는 명제는 참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수상작을 결정하는 것 또한 <오늘의 작가상>의 ‘오늘’이 의미하는 바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본심작에는 현 시대에 문제 제기를 하는 소설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 중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는 우리가 짊어진 사회적인 문제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려고 할 때 다가오는 수많은 갈등과 고민들을 매우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한 다른 이를 이해하는 과정은 곧 자기 자신의 이해라는 작은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다. 배수아 작가의 『뱀과 물』은 인간이 어떤 존재나 자기 자신, 혹은 본질에 집중할 때 펼칠 수 있는 순수한 상상과 그 이상의 경이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는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며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라는 물음에 선명한 그림으로 답을 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 두 작품을 두고 심사위원들의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지난 해 수상작인 『82년생 김지영』에 이어 『딸에 대하여』가 수상할 경우 <오늘의 작가상>은 어쩐지 그 의미를 하나의 통로로 단단히 굳히게 될 것이라고 느꼈다. 우리의 오늘을 여실히 드러내며 그 안에서 나름의 성찰을 유도하는 것이 ‘오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당선작은 『뱀과 물』로 결정되었다. 이는 <오늘의 작가상>의 ‘오늘’을 보다 넓은 의미로 바라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들이 내일로 이어지는 새로운 가능성과 다양성에 주목했다.


―지은경 (잡지 《Chaeg》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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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출간 이후 진행된, 악스트 Axt 2018.3.4호에 실린 배수아 작가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컨텐츠를 제공해주셨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text Song Jong won 송종원 

photo Paik Da huim 백다흠 



나는 소설이란 독자의 감수성과 감수능력과 독서력에 의해 완성된다고 보는 편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독자의 상상력이 함께 요구된다고.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마침내 살게 되는 거라고. 나는 내 소설이 상상력이 있는 독자를 스스로 찾아가기를,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1. 


배(배수아 이하 ‘배’) 

나는 질문하고 싶다. 한국 시와 한국어로 번역된 외국 시는 어떤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항상 궁금했다. 시 평론가이니 이론 전문가에 속하지 않는가. 그래서 이렇게 만난 기회에 물어보고 싶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고 봐야 할까? 외국 시가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었다면, 그건 한국 시일까 아닐까. 자주 읽지는 않지만 어쩌다 시를 마주하면 나는 항상 그런 종류의 의문이 들곤 한다. 한국 시와 한국어로 번역된 시가 다르다는 느낌, 그래, 느낌인 것이다. 이 느낌을 설명해주는 언어가 있을까? 


송(송종원 이하 ‘송’) 

한복과 양복은 다르다. 하지만 둘은 옷이라는 유개념에 같이 속했을 뿐 아니라, 상의와 하의의 구분하는 공통의 형식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의 질감, 색감, 세부 기능 등등은 분명 다를 것이다. 한국어로 쓰인 시와 다른 언어로 쓰인 시도 비슷하지 않을까. 외국 시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한국 시와 쉽게 호환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할 부분도 존재할 것이다. 한국어 또는 한국 시의 경계가 거기서 드러날 것이고. 시는 기본적으로 타자의 무엇을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오는 움직임을 취하는데, 외국 시의 경우 번역이 되었다 하더라도 내면으로 회귀하는 과정이 좀 더 복잡하고 수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한국어로 번역되는 외국 시는 한국에 도착 중인 시가 아닐까. 그것이 한국어를 조금씩 바꾸기도 할 것이고. 시뿐만 아니라 크게 보면 소설도 비슷할 것 같다. 


배 

물론 마찬가지지만, 소설보다는 시에게 그 다름이 더욱 확연한 것 같다. 번역된 소설은 그 다름을 속이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다. 그런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더욱 궁금한 것이 있다. 시와 소설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송 질문은 내가 하는 건 줄 알고 이 자리에 왔다. 


노(노승영 이하 ‘노’) 

인터뷰이가 생각보다 인도를 잘한다. 


배 

이건 대화를 인도하는 게 아니라, 단지 내가 호기심이 있기 때문이다. 내 호기심은 매우 즉흥적이고 그만큼 빠르게 휘발되어버리기도 하는데, 일단 떠오른 호기심을 실행해버리면 기억이 오래 남는 경험을 했다. 물리적으로 몸으로 실행하는 것 말이다.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 또한 그런 실행에 속한다. 최근에 독일 여성 시인의 시를 번역하면서 번역 시와 한국 시의 차이에 대해서 평소의 의문이 더욱 커졌다. 번역 시는 원래 외국어로 창작된 시어를 번역했기 때문에 시어의 함축적 특성이 와해되어서 도리어 비전형적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한국 시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는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단순히 언어의 차이 때문인지. 그리고 번역 시도 궁극적으로 한국문학에 포함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나? 


송 생각을 조금 해봐야 될 것 같은데…… 



배 

미안하다. 나는 카오스적인 대화가 좋다. A를 묻는 내 질문에 반드시 A에 대한 답변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시를 다루는 평론가들은 이런 점에 대해서 뭔가 특별하고 전문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시 평론가들은 평소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겠는가? 


송 맞다, 가끔씩 한다. 가끔. 


정(정용준 이하 ‘정’) 그 점은 나도 궁금하다. 시와 소설의 차이에 대해서 평론가들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배 

옛날에 우연히 만난 신용목 시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시와 소설에는 궁극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신용목 시인은 있다는 의견이었다. 왜냐하면 시에는 운율이라는 요소가 들어가야 하므로. 그것은 예를 들어서 스토리 없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는 말과도 유사하게 들린다. 그러면 산문시의 형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산문시와 산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소설을 쓸 때 항상 이런 의문을 갖는다. 내가 쓰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시인가―소설인가? 특히 단편소설을 쓸 때 그렇다. 아 말을 하고 보니,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의 차이라는 것도 궁금하다. 단지 길이의 차이라면, 단편소설의 중첩이 곧 장편소설이 되는 것인가. 


송 일단 기본적인 것부터 정리하자. 운문에 대타항 산문을 이야기할 때, 웬만한 것들은 다 산문에 들어간다. 두 대립항을 논하기 시작했을 때 시가 주로 정형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산문에는 운율이 외부로 드러난 정형시가 아닌 시적인 것들이 대부분 포함될 거다. 그러므로 산문시라는 말도 가능할 거도. 단편과 장편은 같은 소설의 범주에 들지만, 시와 소설만큼이나 다른 장르라고 생각한다. 단지 길이가 아니라, 길이가 다름으로써 세계와의 접촉면이나 타자에 대한 수용력 또한 급격한 차이를 보이지 않겠나. 소설가들은 그렇게도 말하던데, 단편과 장편은 전혀 다른 근육을 쓰는 노동이라고. 


배 

그리고 보통의 산문도 운율이 있다. 우리는 산문을 읽을 때, 그리고 특히 산문을 쓸 때 운율을 의식한다. 적어도 나는 분명 그렇다. 그러면 시의 특징을 단지 운율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송 운율 중에서도 내재율은 정의하기가 어려워서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피해 가는 경향이 있다. 



배 

그리고 외국 시에서는 좀 더 뚜렷하게 눈에 보이는 규칙, 예를 들자면 라임(rhyme)이라거나. 물론 번역을 하면 대개 사라지고 말지만. 그런데 한국 시에는 그런 정형성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럼 시와 산문의 경계는 어디인가. 행갈이? 



송 그런 말이 있다. 잡지의 시란에 실리면 시고 소설란에 실리면 소설. 




배 솔직히 그게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한 답인 것도 같다. 나는 오랫동안 시와 산문의 경계는 인위적으로 강제되었을 뿐, 사실상 없다고 간주하고 글을 써왔다. 그런데 생각이 조금 바뀌는 계기가 있었다. 최근 나는 낭독 공연을 여러 번 했다. 낭독 공연이란, 내가 쓴 하나의 단편소설을 관객들 앞에서 전부 읽어주는 형식이다. 나는 이것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어보고 싶어서, 여기에 음향 효과나 음악, 외국 배우들의 낭독 소리, 그리고 장소에 따라서는 영상 자료를 활용했다. 물론 낭독 공연을 하지 않을 때도 나는 원래 주로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원고를 쓰는 편이었다. 이건 번역을 하면서 생긴 습관이다. 원문을 무의식중에 그대로 다 옮기다 보면 한국어 문장의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관형절이 기형적으로 길어진다거나 문장의 앞뒤가 조화롭지 못하다거나. 일단 그런 문장은 시각적으로도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그 부조화를 다듬는 것이다. 그런데 낭독을 염두에 두고 내 단편을 다시 읽어보니, 눈으로 읽기 위한 글의 시각적 운율과는 또 다른 차원의 변화가 요구되는 것을 느꼈다. 한 예를 들자면, 「도둑 자매」라는 단편의 마지막 문장은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모든 기억이 이토록 생생할 리가 없다”이다. 이 문장을 쓸 때 나는 문장의 형태를 중시했다. 처음 절과 두 번째 절의 길이가 서로 균형이 맞고, 소리가 적당한 화음을 이루며 어우러진다고 생각해서 만족했던 문장이다. 그런데 작품의 낭독 공연을 준비하면서 이 문장을 읽으니, 아주 심하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눈으로 보기 위한 운율과 귀로 듣기 위한 운율은 별개라는 느낌이 왔다. 아니 눈으로 보기 위한 운율과 낭송을 위한 운율은 별개였다. 후자의 경우, 무대의 연극 배우가 대사를 낭송하듯이 실제로 목소리가 움직이고 요동칠 감정의 인토네이션이 필요한데, 원래 내가 써둔 문장은 그런 힘이 없었다. 눈으로 보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소리 내어 읽어볼 때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낭송용으로 단편을 개조하면서 이 문장을 이렇게 바꾸었다. “말해다오 자매여,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는지, 모든 기억이 왜 이토록 생생한지.” 그러자 낭송이 훨씬 용이해졌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와 소설의 차이란, 소리 내어 낭송하기 위한 글인가 아니면 소리 없이 눈으로만 읽는 글인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난 「도둑 자매」의 낭송용 각색 원고 일부를 아예 시로 바꾸어버리기도 했다. 더욱 효과적인 낭송을 위해서. 



송 어떤 과정 혹은 매개를 통해 전달하는가에 따라 세부는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시가 언어의 소리 자질까지 최대한 활용하려고 애쓴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어떤 시는 낭독할 때 눈으로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약화시키기도 하더라. 그러므로 낭송을 기준으로 시와 소설을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좀 더 추상화된 언어가 필요한 거 같은데…… 시와 소설 모두 그 형식 이전에 문학적인 자 극이나 떨림 같은 게 있었을 것이다. 그 떨림의 종류가 다르지 않다고 본다. 가볍게는 지금의 어떤 공식화된 문화에 대한 불만 또는 허무함, 조금 거창하게는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다른 미래에 대한 꿈. 그것이 아마 그 떨림일지도.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가 조금 다른 것도 같다. 시는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부분의 목소리와 시선들을 탄력적으로 이어놓은 형식에 가깝고,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통합을 이룬 인물을 통해, 그 문제적 인물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이끄는 것이 소설이 아닐지. 그러니까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좀 더 분열적인 것이 시이고, 조금은 통합적인 것이 소설인 셈이다. 그런데 고유한 존재 원리를 찾으려는 강박은 장르를 폐쇄적으로 만들고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잊게 한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배 그렇구나. 


송 사실 요번에 『뱀과 물』은 시인들이 좋아할 것 같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어떤 율동이라든가 이미지의 연쇄 같은 것들이 시에서 봐왔던 것들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 

그렇다면 소설의 고유한 특징은 서사라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건가? 


송 그보다는 내가 느끼기에 『뱀과 물』은 명확한 화자가 아니라 죽음과 같은 어떤 거대한 것이 말하는 것 같더라. 황폐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말하는 것 같은, 딱 인칭화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렬할 때 시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는 것 같다. 


배 오,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차이점이다. 새로운 것을 배운 기분이다. 그래서, 우와, 너무 좋다. 



송 아이고. 


정 이 인터뷰로 소설과 시에 대한 완벽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배 

한국에서는 시를 전문으로 쓰는 작가와 소설을 전문으로 쓰는 작가의 경계가 굉장히 예리하지 않은가. 서로 넘어설 수 없는 경계인 듯하다. 그런데 내가 아는 외국 작가들의 창작 영역은 경계가 없어 보이고, 시와 소설, 희곡, 산문을 두루 쓸 뿐만 아니라 직접 연극 연출을 하거나 영화를 만드는 경우도 많은 듯하다. “시인(Dichter)”이란 이름은 시라는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고 서정적인 문학을 하는 모든 작가에게 일종의 존칭으로 부여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번역을 할 때 그 단어를 사전적인 “시인”으로 옮기면 대개의 한국 독자들은 시만 쓰는 한국 시인을 대입해버리게 된다. 한국에는 시를 쓸 자격증이 따로 있고, 소설을 쓸 자격증이 따로 있다. 희곡 자격증이나 시나리오 자격증도 따로 있을 것이다. 과목별 시험을 쳐서 각각의 글을 쓸 자격증을 따는 것 같은. 


송 제도적인 거겠지. 한국은 등단이라는 제도가 시인, 소설가 따로 영역을 나눠 뽑는 관습이 있으니까. 



배 

그것은 곧, 시는 무엇인가, 소설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으니까 가능한 형태가 아닌가.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 결말을 내고 싶은 생각으로 이 화제를 꺼낸 건 아니고,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특히 내가 나서서 그러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냥 이렇게, 문학에 대해 가벼우면서 무심한 대화를 나누는 게 좋다. 모든 인터뷰가 이런 식이면 참으로 즐거울 텐데!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문학은 내게 미지였고, 지금도 여전히 미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기초적으로 보이는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이 여전히 즐겁다.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잘 없기 때문에 당신이 평론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당장 질문하고 싶어졌다. 


송 나는 배수아를 만난다는 말을 듣자마다 내가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배수아라는 아우라가 있기 때문에. 말로 그것을 잘 건드릴 수 있을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만나고 싶은 욕망이 커서 인터뷰에 참여하기로 했고. 사실 명확함 없이 구분되고 유지되는 것들이 태반이지 않을까. 시와 소설 사이에 선험적인 구분 형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때그때 새롭게 생각할 거리들이 많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시를 더 조각난 말들로 여긴다. 부분성이 강한 상태의, 아직 하나의 개체로 통합이 안 된 상태 같은. 그와 달리 소설은 통합된 개체에서 시작한다. 물론 그 개체 안에도 수많은 조각들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 



배 그건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현상일 뿐, 출발점은 아닌 듯하다. 물론 결과를 염두에 두고 거기 맞추는 글쓰기가 가능하긴 하겠지만. 하여튼 내 의문은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 있는 셈이다. 내가 쓰는 것이 무엇 인가?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시인가 ― 소설인가? 나를 소설가로 알고 있는 독자들이여, 용서해달라. 




2. 


송 『뱀과 물』은 사람들에게 꽤 읽힐 것 같다. 


배 

내 책이 희귀하게도 그런 인상을 주게 된 것은, 이 책의 문체 때문일 것이다. 나의 전 작품인 『북쪽 거실』이나 『서울의 낮은 언덕들』에서는 의도적으로 굉장히 긴 문장을 사용했는데, 이 책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아마 사람들은 긴 문장보다는 짧은 문장을 선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긴 문장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던, 혹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을 짧은 문장으로는 이해하거나 받아들인다면, 그건 긴 문장이 적절하지 않은 전달 수단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상상해보라. 긴 문장으로는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던 것을 가독성이 좋은 짧은 문장일 때 역시 마찬가지로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면, 그건 문장 차원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뱀과 물』의 문장이―『북쪽거실』 과 달리―술술 읽히기는 하지만, 작품에 대해서는 역시 모르겠다고 하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이다. 


송 아, 문장!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복문이나 장문은 읽는 훈련이 많이 된 사람들이 흥미로워할 거 같긴 하다. 그런데 가독성은 문장 길이나 형식에만 영향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뱀과 물』이 사람들을 매혹할 만한 흡인력이 있다고 여긴 건 분위기 때문이다. 잔혹동화 같은 느낌이랄까. 이제 이런 유의 분위기는 사람들이 여러 매체를 통해 경험해봤을 것이다. 그래서 아주 낯설게만 느낄 거 같지도 않고. 


배 

만약 그런 이유라면 나는 스스로에게 좀 실망할 것 같다. 나는 이걸 쓰면서 동화처럼 읽히는 것을 많이 경계했고 그걸 거부하는 장치를 주려고 했다. 어린아이가 주인공이니까, 형식적으로는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세계와 감각의 묘사가 설명되고 있으니까 곧장 동화로 읽히는 건 원하지 않았다. 


송 어쨌든 변화를 주었지 않았나. 


배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건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묘사된 세계와 감각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방식인 것은 맞다. 


송 왜 어린아이의 시점을 사용했나? 초기작에서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여성의 목소리가 이야기를 주도했다. 사춘기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그 시기에 겪을 만한 어떤 불안과 저항심 같은 것을 담고 있었다. 『뱀과 물』의 아이들이 특이한 것은 그들이 개체라기보다 계통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이의 형상과 목소리 안에 커다란 집단 같은 게 용해된 인상을 받았다. 


배 

나는 과거에 흥미가 많다. 언젠가 시간이 난다면, 고대사에 관한 책을 많이 읽고 싶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 혹은 문자가 없는 문화권의 역사 말이다. 나는 알타이에서 스키타이족의 무덤을 보았고, 그것이 『뱀과 물』의 첫 번째 단편을 쓰게 된 아주 희미하고 흐릿한 시초를 이루었다. 내게 어린 시절이란, 개인의 선사시대에 해당한다.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흐릿한 경계 지대 말이다. 어휘나 개념을 알지 못하던, 세계를 어휘나 개념의 틀 안에서 이해하기 이전의 개인사. 마치 요람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처럼, 성인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빛의 감각, 난막을 갓 벗어난 병아리 같은 여린 살갗의 체험. 그런 감각에 이야기를 입히고 싶었다. 『뱀과 물』은 내가 초기에 썼던 『바람인형』과 비교할 수 있다. 소설집 『바람인형』에는 주로 성인 여성 화자가 등장하지만 그들을 규정짓는 것은 보이지 않게 드리운 그들의 어린 시절이었다는 점에서 『뱀과 물』과 유사하다. 반면 『바람인형』 속 문장은 여성의 내밀한 음성이지만 거기에는 그들의 사회적 포지션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매우 개성 있고 서정적인 사회소설을 쓰고 싶었던 초기의 나는 그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뱀과 물』은 그렇지 않다. 주인공이나 화자 위에 드리운 그림자는 사회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해설에서는 꿈이라고 표현했지만, 내가 내 용어로 바꾸어 부른다면, 전생 혹은 무의식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기억의 이전의 기억, 개인사의 선사시대라고. 


송 그런데 이 소설집에도 사회적인 것들이 강하게 환기되는 기표들이 있다. 가령, 비행기 신이라든가 전쟁 이야기, 빨치산이라는 기표 이런 것들은 마주하는 순간에 갑자기 현실적인 어떤 것들로 확 다가왔다. 이 소설의 단어들은 시처럼 용해되어 있고 응축되어 있는데 앞서 언급한 단어들은 응축의 성질이 좀 다르더라. 역사적인 것을 환기시키는 능력도 남달랐고. 그래서 이 소설이 기존에 『바람인형』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역사적인 맥락하고 차이가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이 소설집 안에서도 사회·역사적 맥락을 발견할 것이 꽤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 

나는 이 책에서 자명하고 현실적인 것들을 전설처럼 다루고 싶었다. 당신이 말한 어휘나 이미지, 그런 파편을 가져온 건 사실이지만 그 파편들이 현실을 그대로 지적하고 노출하는 방식은 피해 가고 싶었다. 도리어 역설적으로 그 반대의 효과를 노리기를 기대했다. 



송 전설처럼? 여전히 진행 중인 무언가를 전설로? 이건 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긴 한데 문장들이 엄청 사실적이었다. 거리를 두고 일부러 현실이나 이런 맥락도 멀리 둔다기보다, 그래서 ‘꿈’과 같은 말들을 가지고 그런 사실적인 감각들을 지워버리는, 더 모호하게 만드는 식의 해석적인 말들이 만들어질까 걱정되기도 하더라. 


배 

나는 이 책에서 비교적 사실적인 묘사를 쓰려고 했다. “K가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파묻혀 있었다.” 이런 건조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해명할 수 없는 신비한 이야기들처럼. 사실적 묘사와 표현이 곧 사실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반대여야 했다. 비행기, 전쟁, 빨치산, 이것들은 환상, 꿈, 비전과 달리 우리의 현실이지만, 글의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서 환상, 꿈, 비전을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송 어린아이들이 많이 나와서 뻔한 질문이긴 한데, 당신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 


배 신기하다. 그런 질문은 한 번도 직접적으로 받아본 적이 없다. 


송 그런가? 인터뷰들을 보면 청소년기 이야기가 조금은 있던데. 


배 

이 책에 나온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들이 실제 체험인가, 그런 질문을 받았다. 유년 시절 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있는데, 내가 어렸을 때에는 동화책을 읽어주는 레코드판이 있었다. 그걸 즐겨 들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송 그게 레코드판으로 있었나? 


배 

그렇다. 『콩쥐팥쥐』도 있고 『해와 달이 된 오누이』도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은 섬광 같은 깨달음에 강타 당하던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세계 자체가 아이에게는 신대륙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세계의 어떤 면모를 스스로 깨달을 때의 전율이 나를 아찔하게 만들곤 했다. 물론 그중에는 얼토당토않은 깨달음도 많다. 유치원 다니던 때 『선녀와 나무꾼』 레코드를 들으면서 ‘아, 나는 아이를 낳지 말아야겠다’ 하고 결심한 기억이 난다. 그 생각은 매우 강렬하게 내게로 침투해 들어왔다. 왜냐하면 선녀는 하늘로 가고 싶은데 아이를 많이 낳으면 하늘로 갈 수 없다는 말이 나오니까. 나는 하늘을 특별히 원하지는 않았다. 선녀들만 가득 있다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는 “여성이 소망하는 일을 하지 못함”의 상징으로 아이들이 사용되는 것이다. 그건 생각해볼 문제였다. 그리고 선녀가 두 아이를 양팔에, 세 번째 아이를 다리에 끼고 하늘로 올라간다니, 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거기까지다. 엉뚱하고 허황되고 찬란하고 눈부시고 숨이 멎는, 그런 깨달음으로 충만했던 나날이다. 


송 눈으로 이야기를 읽어 내려간 기억이 아니라 소리로 이야기를 듣고 상상한 기억인 셈이네. 가족의 목소리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레코드판의 소리로 전해 들은 이야기라는 것도 특이하고. 요즘 낭독회를 종종 하던데, 레코드판으로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나중에 커서 직접 낭독을 하는 사람이 된 건가. 



배 

내가 낭독을 시작하게 된 건, 책이 나오면 으레 열리는 북토크 자리가 싫어서였다. 그런 자리에서 토크를 한다는 것은,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너의 소설을 해명해봐!”라는 강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해명하고 싶지 않다. 내 소설을 해명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해를 구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터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 역시 일종의 해명이라는 생각이 좀 들긴 한다. 뭐, 하지만 나는 은둔자 역시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부딪히는 것 역시 필요하고 즐거울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내 단편을 낭독하자는 거였다. 단, 오디오북처럼 평면적인 낭독이 아니라, 장르를 포괄하는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시드니의 한 미술관에서 목소리가 전시되는 공간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아마도 영감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나는 무대에 관해서 아무런 테크닉이 없다. 심지어는 파워포인트 등의 프로그램도 다룰 줄 모른다. 영상 편집도 모른다. 그런 낭독 공연을 위해서는 어차피 현장에서 엔지니어링을 담당해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노승영 번역가가 기꺼이 그 일을 맡아주었다. 우리는 단편의 낭독 중간중간에 영상 자료와 소리, 영어로 번역된 텍스트의 낭독을 삽입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의 영상에 다른 소리를 입히고 한글 자막을 넣는 작업 등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목소리 낭독을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보려는 시도였다. 소설 속 이미지들을 다양한 감각으로 느끼게 하고 싶었다. 물론 중심이 되는 건 텍스트다. 목소리로 표현되는 텍스트. 나는 배우가 아니고 한 번도 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 게다가 이번에 낭독을 하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평소에는 그렇지 않다가 긴장하고 흥분하면 사투리 악센트가 분출된다는 것이다. 또 공연 형태를 만들어내기에는 우리가 가진 장비나 기술도 한참 모자란다. 문학 텍스트의 목소리 공연에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된 건 10년쯤 전이다. 이후 계속 마음만 품고 있다가 이번에 『뱀과 물』 출간과 함께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연은 전문 녹음 스튜디오에서 전문 성우들과 만든 매끈하고 세련된 낭독극에 비하면 그야말로 구석기인의 돌도끼 같지만, 이런 작업 과정 자체가 나는 즐겁고 행복하다. 


송 꿈 이야기가 『뱀과 물』에서 꽤 많이 나온다. 그런데 꿈을 쓰거나 꿈에 대해 쓰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 


배 당신의 그 말이 마음에 든다. 


송 다행이다. 꿈을 만드는 작업으로 보였다. 글을 가지고. 꿈을 매개로 뭔가 다른 차원까지 가보고 싶어 하는. 


배 

말한 대로 나는 꿈을 그대로 소설로 옮겨 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꿈에서 내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모티프를 얻기도 한다. 그것은 장면이기도 하고, 문장이기도 하고, 불안의 어떤 종류이기도 하다. 유동적인 현실을 어떻게 하나의 폼(Form)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힌트를 꿈속에서 얻기도 하고. 그런데 꿈은 어디서 오는가? 그건 현실의 감각에서 온다고 믿는다. 의식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주관적 경험에서.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란, 직관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건 『뱀과 물』 속의 한 단편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는 이 하나의 문장에서 출발하여, 이 책을 쓴 셈이다.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송 꿈을 자주 꾸는 편? 

배 그렇다. 

송 꿈을 쓰되 작품을 쓸 때에는 일종의 가공을 한다는 말일 텐데. 

배 그렇다. 나는 그것을 소설화한다. 

송 가공하는 단계가 좀 궁금하다. 

배 

그런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글을 쓰느냐,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느냐, 어떻게 캐릭터를 만드느냐. 그런 이야기는 정말 하고 싶지 않다. 

송 그런가? 

배 

왜냐하면 나는 그것에 대한 규칙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내 글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자세하게 언어화할 수 없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정교하고 치밀한 수공업자가 아닌 듯하다. 나는 매뉴얼이 없다. 나는 숙련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다. 습작생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강연이나 토크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죄 

송하다. 

송 이 책에서 부사 중에 눈에 가장 많이 띄었던 건 ‘멀리’. 



배 아 그런가? 세어보았나? 

송 실제로 세어보지는 않았다. 읽으면서 여기도 있네, 아 또 저기도 있네 하며 봤다. 

배 그런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송 멀리 가는 것에 대한 반복이 있다. 초기작에는 집이라는 공간 같은 것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게 있었고, 

그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배 내가 생각하는 내 서사의 중요 요소 중 하나는 ‘떠나다’이다. 

송 떠나다. 맞다. 

배 그다음은 ‘홀로’. 


송 떠나다. 홀로. 


배 

내가 생각하는 나의 서사는 이런 쪽이다, 라고 처음부터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글을 쓰다 보니 어렴풋이 잡히는 방향이 있다. 그런 것들이다. 떠나다, 홀로. 


송 떠남의 성격이 작품을 써오는 과정에서 조금씩 변했을 거 같다. 초기에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아까 이야기한 작품들은 가족으로부터 떠남이 강했다면 『뱀과 물』에서의 떠남은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멀리, 멀리라고 쓸 때 그 목적지. 꿈을 매개로 어떤 기억의 지대로 향하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정신과 감각의 유년지대라는 말도 가능하겠다. 거기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어떤 상실감을 느끼기에 그런 것일까. 아무튼 그 멀리 가는 과정 속에서 언어를 새롭게 바라보고 또 자신을 위로해주는 느낌도 들었다. 


배 브라보, 멋진 해석이다. 


송 멋지면 안 되는데. 당신이 답을 해주셔야 하는데. 



배 

거기에 무슨 답이 있겠는가. 이 책의 주인공들은 어린 시절을 떠난다. 그럼으로써 어린 시절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어디로, 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 곳으로도 안 가면서 영원히 떠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소설의 힘이 아닐까 한다. 나는 소설이란 독자의 감수성과 감수능력과 독서력에 의해 완성된다고 보는 편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독자의 상상력이 함께 요구된다고.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마침내 살게 되는 거라고. 나는 내 소설이 상상력이 있는 독자를 스스로 찾아가기를, 그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3. 


송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이 특이하다. 


배 

내게 주인공의 이름은 중요하다. 많은 요소를 고려해서 이름을 짓는 편이다. 그래서 약간 비현실적일 수도 있다. 비현실적인 이름이 무의미한 이름보다는 좋다. 



송 그렇기도 하고 소설의 유머라는 코드가 거의 없는 것도 같은데, 이름이 그나마. 


배 그건 아니다. 나는 유머가 많은 소설을 좋아하고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 


송 이번 소설집에도 유머가 크게 작용하는 작품이 있나? 그나마 인물들의 이름이 유머러스하게 다가왔다. 얼이라는 이름이라든가, 예전 소설에서는 혁명이라는 이름을 쓴 적도 있다. 



배 

그 이름이야말로 유머였다. 아이러니와 유머. 그리고 내가 생각한 유머란 디테일에 숨어 있는 장치에 가깝다. 무대 앞에서 관객을 작정하고 웃기는 광대가 아니라,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이름 없이 등장하는 여경처럼. 나는 그 영화에서 그 여경을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로 기억한다. 경찰 제복을 입고는 있지만 하루 종일 남자 경찰들 커피나 타고 종종거리며 심부름이나 하고……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범인의 실마리를 잡아내는 것은 베테랑 형사도, 엘리트 형사도 아닌 그녀의 아이디어였다. 나는 그녀의 존재를 감독이 숨겨놓은 씁쓸한 유머코드로 인식했다. 그리고 『뱀과 물』에서는 음…… 「얼이에 대해서」에서 아이들의 담임교사 이름이 은주다. 그녀는 그냥 은주라고 지칭된다. 난 이런 게 재미있다. 그리고 「도둑 자매」에서 뚱한 표정의 젊은 의사. 난 그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또 「1979」의 교사. 그는 결혼하자마자 신부에게 말한다. 자신은 나이가 많으니 당장 아이부터 낳아야 한다고. 나만 우스운가? 왜 이런 설정을 했느냐고 물으면 뭔가 유머 비슷한 장치를 만들고 싶어서다. 


송 유머에 대한 나의 생각이 협소했던 거 같다. 이름 지을 때 뭔가 고민을 많이 하고 짓는가? 



배 

나는 이름이 정해져야 소설의 스토리를 생각할 수 있는 편이다. 캐릭터가 어느 정도 구체화되거나 성격 이라는 것이 자리를 잡으려면, 아니 스토리나 캐릭터는 없어도 화자라는 존재의 발성, 음색, 목소리가 있으 려면, 먼저 이름이 있어야 한다. 


송 제일 먼저 이름을? 


배 그런 편이다. 


송 여러 평론가들이 당신의 소설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의 즉흥적인 연쇄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배 그런가? 


송 어떤 즉흥적인 연쇄가 가능한 게 당신이 어딘가에 혹은 어떤 분위기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라고 본다. 그 분 위기가 먼저 있고 나서 문장들이 오니까 이것들이 즉흥적으로 연쇄가 되어도 이미지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예전 인터뷰에서 수용체, 안테나 이런 비유를 통해 말한 적도 있더라. 


배 

과거에 쓴 글에 대해서 너무 캐묻지 말길 바란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그리고 그때그때 많이 바뀌는 편이다. 하지만 당신이 말한 수용체 글은 기억이 난다. 글을 쓰기 위해서 나를 만드는 작업……. 그렇다, 나를 곧 화자의 목소리로 만드는 작업 같은 것. 


송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 아무튼 어떤 분위기로 몰입하게 들어가는 과정이 궁금했다. 



배 

그런 글쓰기 전 단계인 몰입의 과정에 이름 정하기가 들어간다. 그 과정에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극단적으로 찢어진 채 존재하는 파편의 사건들, 무관한 이미지들, 독립적인 감정들이 있다. 그 소설이, 혹은 그 목소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어떤 계기들, 그런 것들이 내 의식을 떠다닌다. 투명한 부유물처럼. 물속에. 정신의 원형질 속에 떠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이 없으면 그 파편들은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오랫동안 하나의 이름을 찾아다닌다. 그건 곧 목소리를 찾아다니는 것과 같다. 


송 아직 작품이 나오지 않았지만 만들어진 이름이 있나? 



배 

그렇다. 이름이 있어야 하니까. 이름을 도저히 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하나의 임시로 하나의 이름을 정해놓고 쓸 때도 있다. 그런데 오래 생각한 이름이라고 해서 반드시 근사하고 멋지게 들리지는 않는다. 아주 평범한 이름이 선택될 때도 있다. 그중 하나는 바로 경희였다. 나는 한동안 그 이름을 사랑했으니까. 이렇게 이름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름에 주의를 기울여주는 인터뷰어를 만나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송 이름이 정해지면 어떤 편안함이 오나? 



배 

이름이 정해지면,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구체적인 스토리도 전혀 없지만, 뭔가 완성된 기분이다. ‘아, 나는 그/그녀를 알았어.’ 그런 마음이 된다. 최근에 든 생각인데, 그건 아마도 내가 그 이름 속으로, 이 인물의 목소리로 들어가는 첫발을 내디뎠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작가의 이런 태도는 비판의 소지도 있다. 예를 들어 작품과 작가의 거리감을 중시하는 경우라면 나 같은 작업 태도는 아마추어라거나 초보 소설가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작업한다. 


송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배 

그렇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설을 급하게 쓰느라 적당한 이름을 발견하지 못하면 아예 화자의 이름을 끝까지 명명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름이 없는 주인공이나 혹은 이니셜만을 갖는 주인공들. 그래도 최근에는 이름을 발견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내가 찾는 건 단지 사람의 이름뿐만은 아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내가 창작해낸 이름일 수도 있고, 기존에 존재하는 어떤 이름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노인 울라에서」의 노인 울라 (Noin Ula) 같은 

경우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지만, 그것과 마주치기 위해서 나는 굉장히 먼 길을 지나왔다. 이 세상은 이름으로 넘친다. 그중에서 단 하나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경이롭다. 나는 그 경이감이 내 글 속에 스미기를 원한다. 실제로 단편 「노인 울라에서」의 주인공 아이 이름은 “눈아이”지만, 그 글에서는 지명이 주인공의 이름보다 더 큰 비중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송 이름과 지명,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예전에 한 소설가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배수아라는 이름이 페소아를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은 아닐까 추측했었다. 관련이 있을까? 또한 이름에서 당신 소설의 변화를 감지할 수도 있을까? 배수아의 소설 의 변모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가령 소설가 김사과 씨는 당신의 작품을 『이바나』 전후로 구분하기도 하던데. 



배 

나는 페소아의 작품 『불안의 서』를 번역했지만, 사람들이 저자와 역자 이름의 발음이 비슷하다고 지적하기 전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발음의 음성적 측면이 아니라 한국어로 표기된 글자의 시각적 측면에 치중한 인상일 것이다. 배수아와 페소아라는 한국어 표기가 유사해 보이지만, Pessoa와 Baesuah는 그렇지 않다. 내 글쓰기의 변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나 또한 유기체니까, 당연히 유기체인 나의 뇌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을 테니까. 화학적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생각을 포함해서, 끊임없는 동적 평형의 상태에 놓여 있을 테니까. 당연히 내 생각이나 글쓰기 또한 변한다. 


송 독자로서 또 평론가로서 궁금했다. 작품 세계의 분기들이. 



배 

글 쓰는 환경의 변화라면 겪었다. 처음 글을 발표한 이후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8년 정도는 전업 작가가 아니었다. 독일에 가기 전까지는 직장에 다녔다. 그러다 독일에 간 시점부터 나는 전업작가가 되었다. 그것은 매우 큰 변화였다. 



송 독일 이후에는 변화가 없다? 



배 

독일에서의 생활이 내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겠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영향은 내 삶에서 글이 모든 영역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직장을 통한 반강제적 “사회생활”이라고 부르는 요소가 사라졌다. 나는 해방된 기분을 느꼈고, 그 해방감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몇몇 작가들과 나누던 미약한 교류, 즉 프리랜서형 ‘사회생활’에서도 해방되기를 원했다. 나는 혼자이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독일 시기와 함께 시작 되었다. 독일 이후에는 번역을 하게 된 것이 하나의 큰 변화였다. 주로 글과 관련한 환경이 바뀐 것이다. 


송 번역이 작품 활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말해줄 수 있나. 




4. 


배 

번역을 하면서 나는 독서의 영역이 확장되었고 새로운 번역을 염두에 두고 읽을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 소설을, 그것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소설만을 골라서 읽고 있다. 내게 번역은 큰 의미에서 독서이기도 하다. 그것도 매우 선택적인 독서. 독서는 일반적으로 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번역 작업 자체가 내 글쓰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도리어 (번역을 고려해서 선택된) 독서에 의해서 영향 받은 내 글쓰기가 역으로 번역에 영향을 주는 편이다. 




송 어떤 책에 ‘번역이라는 건 번역할 텍스트를 쓴 작가의 머리에 번역하는 사람의 몸을 이어놓는 작업과 같다’는 말이 있더라. 


배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가? 


송 아니, 다른 저자의 책에서. 머리가 보내는 어떤 시그널들이 있는데 그걸 자신의 몸으로 받아야 되니까 번역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머리의 시그널보다 내 몸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라는 말도 있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번역이란 어떤 이미지인가? 



배 

그 말은, 마치 번역을 육체적인 접신의 행위로 비유한 것처럼 들린다. 동의한다. 번역가의 몸은 하나의 글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동안 머무는 장소이기도 하니까. 


송 육체적이라는 건? 



배 

샤먼이 하는 일은 다른 영혼을 자신의 온몸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번역이 하는 일도 바로 그것과 비슷하다. 다른 영혼이란 곧 다른 언어이다. 원작자의 문장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건 사전적 번역에 그친다고 생각한다. 온몸의 감각을 동반하는 자신의 언어로 옮겨질 필요가 있다. 아까 당신이 인용한 말은 몸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모국어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번역에 관해서는 모든 번역가가 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송 받아들이는 그 작업이 가장 수월했던 작품은 무엇이었나? 



배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서』. 나는 그 책을 번역하면서, 내가 원작자보다 더 앞서 나가지 않게 나 자신을 붙들어 매야만 할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힘든 번역이기도 했다. 내 몸을 통과한 글들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제멋대로 달아나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작업은 중역이어서, 몇 번이나 불확실성 속에 갇혀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책을 통해서 나는 번역가로서의 시각을 좀 더 굳건하게 가질 수 있었다. 



송 지금은 어떤 걸 번역하고 있나? 



배 

최근에는 독일 여성 시인의 시집을 번역했다. 엘제 라스커 쉴러(Else Lasker-Schuler)라는 시인이다. 나는 여성 작 가의 글을 번역하기를 좋아한다. 아니, 사실은 무척 좋다. 그리고 시 번역도 마찬가지로 무척 좋았다. 앞으로도 기회가 있으면 더 많이 해보고 싶다. 얼마 전에는 또 다른 출판사에서 시 번역을 의뢰를 해왔는데, 몇몇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선별 번역해서 시 모음집을 내자는 거였다. 이런 제안은 번역가가 시인과 작품을 고를 수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그래서 아마 진지하게 생각할 듯하다. 


송 여성 시인들을 선집처럼 번역하는 건 당신의 기획인가? 아니면 출판사가? 




배 내가 제안했다. 나는 여성 시인들의 시를 더 많이 번역하고 싶으니까. 


송 요즘 한국 문단에 페미니즘과 관련한 논의가 활발하다. 그래서 출판사들도 부러 관련 도서를 더 적극적으로 찾는 거 같기도 하고. 


배 

출판사에서 내 제안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여성 시인의 작품을 번역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일단 내가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번역에서의 유리함 때문이다. 시 번역은 소설 번역보다 번역가의 자율적인 언어에 의존하는 경향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한다. 번역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원작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도 있지만 번역 가능한 시어인가, 구조나 형태가 전달 가능한 편인가,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인데, 번역가의 언어와 얼마나 호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내 경험상 여성 시인의 언어가 내 번역어와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번역가로서 가능하면 최고의 시너지를 내는 작품을 하고 싶은 것이다. 반면에 내가 즐겨 읽기는 하지만 번역은 하고 싶지 않은 작가가 있다. 왜냐하면 그/그녀의 언어는 번역가에 따라서 큰 변이를 일으키지 않고 비슷하게 번역되며, 따라서 내가 한 번역이 조금이라도 특별하다는 느낌을 스스로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송 여성 시인의 언어의 어떤 면들이 당신의 언어와 잘 맞는 걸까. 또 한 가지 질문. 번역은 자기 언어의 한계 비슷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작업일 것도 같은데. 


배 

물론 모든 여성 시인이 다 내 언어의 호응권 안에 들어오는 건 당연히 아니다. 어디까지나 번역은, 그리고 문학은 ‘소수 선택’을 전제로 한다. 내가 선호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방금도 말했지만, 번역자에 따라서 매우 다른 번역어로 재탄생하는 작가이다. 심지어 같은 원작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대개의 문학작품은 어느 정도는 이 기준을 맞춘다. 반면에 원본이 갖고 있는 견고함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튼튼하거나 너무 구체적이거나 너무 그 자체가 너무 완전해서 번역으로 인해서 파생되거나 변용될 가능성이 덜한 작가가 있는데, 작품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나는 그런 작가의 번역가가 되기를 썩 원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 반대편에는 묘하게 구멍을 가진 문장이 있다. 번역가가 자신의 무엇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심지어 번역가 자신의 구멍으로조차. 텍스트의 이런 두 가지는 유형은 문학적 훌륭함과는 무관하다. 그냥 텍스트의 기질이고 성격이다. 나는 내 언어의 한계를 외국어의 번역보다는 글쓰기를 통해서 더 많이 느끼는 편이다. 아니, 글쓰기보다는 낭독을 통해서 더 많이 느낀다. 이번에 다섯 차례의 낭독 공연을 하면서 그걸 실감했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번역을 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하지만 번역을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는 건 아니다. 


송 당신의 소설 속 인물들을 무성적이니 양성애적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데 이번 소설집은 여성이라는 게 뚜렷하게 감지된 편이다. 


배 

그런가. 나는 이 책에서 성별을 의식하지 않는 여성을 등장시켰다고 생각한다. 성별의 분화가 일어나기 이전이라고 할 수도 있는. 



송 여아의 형상에 수많은 여성의 모습이 끼어든 것처럼도 보였다. 할머니와 20~30대 여성의 목소리가 구분없이 스며들어 있다. 


배 그렇게 볼 수 있다. 


송 요즘 한국 문단에 페미니즘과 관련해 작품을 다시 읽는 시도들이 있던데, 당신의 소설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글도 봤다. 


배 

몰랐다. 내가 보기엔 가장 거리가 먼 텍스트에 속할 것 같은데. 적어도 겉으로는. 


송 음. 어쨌든 요즘 다시 읽기 시작하는 것 같다. 


배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브라질의 클라리스 리스펙토르이다. 그녀는 1977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사후 한 페미니스트 이론가는 그녀의 글을 “여성적 글쓰기(I’Ecriture feminine)의 훌륭한 예”라고 칭했다. 여기서 여성적 글쓰기란 여성의 경험에 기반한 글 Tm기를 통해 여성이 스스로를 표현하고 자율적인 주체성을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리스펙토르의 일생을 살펴보면 개인으로서 그녀가 의식적인 페미니스트였다는,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작가인 그녀는 자신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글을 썼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여성적 글쓰기가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송 단순한 질문이지만 한국문단에서 이야기되는 페미니즘과 관련 작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배 

그렇게 언급되는 작품들을 나는 읽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개별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페미니즘 관련 작품”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그 작품들을 의도적으로 장르화시키는 행위는 아닐까 생각한 적은 있다. 리스펙토르의 예에서 보듯이, 나는 ‘여성적 글쓰기’를 목표가 아니라 도리어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디로든 갈 수 있으며 어디에도 묶일 필요가 없다. 



송 동감한다. 어떤 카테고리를 겨냥하고 쓰는 작가들이 전혀 없는건 아니겠지만, 작품을 특정 범주에 한정하는 식의 언사를 언제나 조심해야 하는데 경솔했다. 한국 소설에 넘쳐나는 것 혹은 한국 소설에 이건 건 너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있나? 


배 나는 한국문학의 전문가가 아닌데 이런 질문을 많이 하면 곤란하다. 


송 나는 넘쳐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가족 이야기인 것 같다. 



배 

많이 읽어봤으니 잘 알겠구나 싶다. 그런데 가족 이야기는 사실 외국 소설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심지어는 가족소설, 혹은 세대소설이라고 하여 하나의 장르처럼 말해지기도 한다. 아무래도 소설은 당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가족은 여전히 인간의 중요한 사회적, 운명적 구조니까, 소설가로서는 그 이야기를 무시하기가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가족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가족 이야기의 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5. 


송 편지, 이메일 같은 걸 주고받나? 소설에 편지가 자주 등장한다. 


배 

가족소설보다는 편지소설이 더 좋다. 편지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문학 중 하나가 카프카의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카프카는 여자를, 사랑을 어떻게 체험했을까, 의문이 생겼는데, 그때 누군가가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 카프카가 정말로 “연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난 종종 카프카의 소설보다 그의 편지가 더 좋을 때가 많다. 


송 어떤 면이? 


배 

그 사람의 열정, 그리움, 기다림으로 나온 언어가 그 안에 들어가 있다. 소설에서는 쉽사리 발견할 수 없었던, 열정적이고 절망적이고, 심지어는 로맨틱한 언어들. 그의 편지가 20세기 초에 쓰인 것을 생각해보자. 그 시절 편지는 오랜 기다림의 대상이었다. 그런 편지는 가장 최고의 연애 문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송 당신의 소설 속에도 편지의 구절들이 있다. 정말 한 구절씩 쓴 것 같은. 


배 나는 편지를 좋아한다. 이메일도 좋아한다. 물론 사적인 통신을 말하는 것이다. 


송 그것을 주로 수신하는 사람이 있나? 

배 

그렇다. 이메일로 서신 교환을 하는 친구가 있다. 실제로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를 번역해서 소설에 쓴 적도 몇 번이나 있다. 나는 비교적 짧으면서 인상적인 이메일을 쓰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여행지에서 보내는 엽서도 좋아한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책을 선물하면서 안쪽 표지에 적어주는 짧은 인사와 같은 말이다. 그 또한 일종의 메시지니까 편지에 포함시킨다. 


송 아까 가족 이야기 하면서 소설이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니까 가족의 형상이 그렇게 나올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뱀과 물』 안에도 한국 사회나 현실에 대한 반영의 지점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걸로 환원할 수 없겠지만 그런 것들을 꼽는다면 어떤 한국 사회의 모습이 녹아 있다고 보는지. 


배 

내가 쓰는 것은 꿈이고 환상인가? 하지만 나는 아무리 환상을 다룬 작품이라도 현실을 반영한다고 보는 편이다. 예를 들어 단편 「1979」 「뱀과 물」은 70년대의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나는 비교적 그 시절 학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도둑 자매」는, 내가 어린 시절에 실제로 체험했거나 체험했었다고 믿고 있는 어떤 만남을 기초로 한 이야기다. 내게 그 이야기들은 사실이다. 물론 여기서 사실이란, 내 경험과 주관이 선별한 사실이다. 현실은 무수한 사실의 집합체가 아닌가. 현실은 내게 내용이 아니라 감각을 제공해준다. 나는 그 감각을 직관의 언어로 번역하고 이야기의 옷을 입힌다. 한 작가에게 이국주의라는 명칭을 부여하더라도, 그가 한국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이면 그가 쓰는 것은 한국적인 것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겠지. 환상도 현실의 파생물이 아니겠는가. 


송 가난과 돈, 이런 요소들에 눈이 가는 작품들도 썼다. 


배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말하는가? 



송 그것도 포함된다. 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당신의 소설을 읽어내는 작품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배 

돈이 중요하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반드시 물질적 풍요라는 측면을 떠나서도 그렇다. 내가 최초로 번역한 문학작품이 말하자면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돈의 미학을 다룬 거였다. 인상적이게도. 


송 어떤 작품을 말하는 거지? 


배 마르틴 발저의 『불안의 꽃』이다. 그 작품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너무 좋다. 


송 뜬금없는 질문이긴 한데 너무 매혹적인 이야기와 풍족하게 쓸 수 있는 돈과 두 개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어떤 걸 고르겠나? 



배 당연히 매혹적인 이야기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송 우문에 현답으로 답해주셨다. 내가 아는 작가들한테 당신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더니 김엄지 소설가가 독일 맛집 좀 알려달라고 요청하더라. 




배 

나는 내가 사는 동네의 맛집도 모른다. 집에서 요리를 해서 먹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여행을 가지 않을 때면 주로 집 안에서 머물고, 밤에 산책을 나가는 일 말고는 거의 외출하지 않는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외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식당 정보에 둔감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은 맛있는 식당이 아니라 사람이 없는 식당이다. 그런 곳은 당연히 맛집이 아니다. 


송 집에서 직접 해서 먹는 편? 


배 요리하는 걸 좋아한다. 나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이 좋다. 


송 집에서 1인분의 요리를 해 먹는 일은 어렵지 않나. 


배 

혼자 먹는다고 반드시 1인분만 할 필요는 없다. 샐러드 같은 건 아침에 많이 해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하루 정도는 충분히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난 한식은 못한다. 


송 한식이 아니면 주로 어떤 걸? 샐러드랑 고기? 


배 

내가 좋아하는 식단은 샐러드와 직접 구운 통밀빵 그리고 커피이다. 샐러드는 원칙적으로 모든 재료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무한한 변주가 가능하다. 달걀이나 마카로니, 와일드 라이스로 밥을 해서 넣을 때도 있고, 간혹 스테이크용 고기를 구워 샐러드에 넣기도 한다. 


송 빵을 직접 구워서? 


배 

그렇다. 나는 호밀빵이나 통밀빵을 좋아하는데, 동네에 그런 빵을 파는 빵집이 없다. 그래서 작은 오븐을 사서 직접 구워보기로 했다. 


송 제빵을 배웠나? 


배 

아니다. 나는 학원에 다니며 뭔가를 배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실패하더라도 혼자서 해보기를 선호한다. 빵은 한 달 정도 실패를 거듭했다. 돌덩이같이 딱딱한 빵만 굽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제대로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레시피를 무시한다. 그러다보니 과연 내가 만든 것이 정통적인 의미의 빵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독일에서 사 먹은 통밀빵과 맛에서 차이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이게 빵은 빵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송 작품 하나 쓰는 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나? 때에 따라 다르겠지만. 

배 

사실 그것이 내 고민 중의 하나이다. 번역을 많이 하고 있어서 작품을 쓸 시간을 내기가 정말 힘들다. 번역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럴 마음은 아니었는데, 점점 더 번역을 많이 하게 된다. 번역은 시간을 다투는 일이 많아서, 먼저 번역을 붙들고 있으면 글쓰기는 점점 뒤로 밀리는 경향이 있다. 또 번역하고 싶은 작품도 점점 많아지고, 번역 기획을 맡기려는 출판사도 늘어난다. 정말 하고 싶은 번역 작품이 생기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문제는 내가 책을 읽는 속도도, 번역을 하는 속도도 느리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본 원칙을 세웠다.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번역은 하지 않고 글을 쓰려고 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번역에 집중한다. 작년 가을 독일에 있는 동안 글을 썼다. 완성하지 못했다. 이제 곧 다시 독일에 간다. 가면 그때 쓰던 글을 계속해서 쓸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 글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거의 생각하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아마도 비행기에서부터 나는 오직 그 글만 생각할 것 같다. 


송 체류 기간을 얼마 정도 정해두는 건가? 


배 

이번에 가면 3개월 정도 머물 예정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이니 기쁘다. 하지만 급한 번역이 있으면 한국에 있는 편이 좋다. 집에서는 번역 속도를 낼 수가 있으니까. 독일에 가면, 주로 집에만 머물지만 간혹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책을 보거나 화집을 보면서, 하루 온종일 게으르게 보내기도 한다. 


송 독일어는 늦게 공부한 편이라고 들었다. 


배 그렇다. 거의 30대 후반에 시작했다. 


송 아이큐가 높다고도 들었다. 그래서 가능했던 걸까? 


배 

아이큐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독일어를 잘하지 못한다. 어휘력도 딸려서 번역은 사전에 의존하고, 하지만 사전의 어휘를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피한다. 아마 번역가 중에서 내가 가장 말을 못하고 어학 실력도 가장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송 번역과 소설쓰기를 번갈아 한다는 건 그 작업 기간이 대략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 환경에서 장편을 쓰기는 힘들겠다는 생각도 든다. 





배 

그렇다. 분량이 나가는 장편을 쓰기에는 아주 불리한 여건이다. 그런데 나는 예전부터 긴 장편보다는 노벨레 사이즈의 소설을 즐겨 읽었고, 쓰는 것도 좋아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모데라토 칸타빌레』 같은 것. 물론 내가 좋아하는 장편 작품들도 많다. 볼라뇨의 『2666』, 포크너의 작품들. 결론은, 나는 소설의 사이즈를 개의치 않고 즐긴다. 그런데, 간혹 생각이 들기를, 모든 단편은 거대한 장편의 일부분이 아닐까? 그러니 하나의 책이 너무나 길어야 할 필요를 잘 못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반드시 짧아야 할 필요도 없다. 이야기의 완결성과 독립성을 중시하는 작가라면 생각이 다르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지구력보다는 순간적인 전류가 흐르는 듯한 글쓰기를 좋아하므로, 나에게 맞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송 단편은 약간 답답한 완결성 같은 것이 있다고 보는 걸까? 


배 

내가 단편을 쓸 때 그런 전제는 갖지 않는다. 장편도 마찬가지다. 장편, 단편의 구분도 시, 소설의 구분처럼, 내게는 애매하다. “어떤 작가는 오직 하나의 작품을 평생에 걸쳐 반복해서 쓴다”는 말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그렇게 나는 그냥 쓴다. 



송 요즘 잡지에서는 단편을 더 짧게 청탁하기도 한다. 40~50매. 



배 

나는 15매 소설을 쓰기도 했다. 1.5매면 또 어떤가. 그러다 보면 하나의 단어로만 된 소설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건 너무 극단이라고 보는가? 스토리가 없다고? 이러다가 우리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송 돌아가지 말자……. 



배 그러다 보면 우리는 결국 시와 소설, 단편과 장편. 그런 형식의 구분에 대해서 많이 회의하게 될 테지. 


송 회의적이지만은 않다. 그런 느슨한 구분이 있으니까 장르성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고 질문하는 실험들이 발생하는 순기능도 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장르 구분 없이 청탁하는 실험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혹 시 청탁 받아본 적은 없나? 



배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질문을 받으니 문득 생각이 났는데, 며칠 전 노르웨이의 친구가 내 책에 대한 서평을 썼다면서 링크를 보내왔다. 나는 그 리뷰 기사를 구글 번역기를 돌려서 읽었는데, 노르웨이-영어 번역은 읽기에 거의 무리가 없이 매끈했다. 그의 서평 마지막 문장은 신기하게도, “배수아가 앞으로 시집을 한두 권 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였다. 


송 아까 언급한 시 번역도 어느 정도 작업이 진척이 된 상황인가? 



배 

아니다. 아직 시인도 선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 읽기 위해서 번역해둔 시들이 있고, 그 시를 중심으로 구성해보려고 생각 중이다. 나는 일종의 취미처럼, 시집을 뒤적이다가 아름다운 시라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한국어로 읽기 위해서 번역해보는 습관이 있다. 특히 그렇게 연애시를 몇 편 번역했다. 굳이 번역을 한 이유는 그것을 한국어로 음미하고 싶어서다. 그러면 원어로 읽을 때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 난다. 그것이 사실 좋다. 소설은 반드시 그렇지 않은데, 시는 한국어로 옮겨서 읽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나는 번역시 읽기를 좋아한다. 


송 기대된다, 연애시. 두 개 이상의 언어 사이를 떠도는 경험도 좋을 것 같고. 

배 그렇다. 

송 작품을 쓸 때 강박적으로 행하는 무언가가 있나? 

배 

음…… 옷을 챙겨 입는다. 번역할 때는 무조건 편하게 입지만, 작품을 쓸 때는 뭔가 여행을 떠나는 그런 마음이 되고 싶기 때문에, 실내복이나 이지웨어만 입는 건 싫다. 그리고 피하고 싶은 단어들이 있다. 

송 피하는 단어는 가령 어떤 단어? 

배 

지나치게 구어체적인 어휘는 피하고 싶다. 나는 창의적인 문어체를 좋아한다. 소설의 대화에서도 그걸 활용하는 편이다. 

송 그런데 이분들은 원래 이렇게 있는 건가? 



배 원래 이러고 있다. 


송 인터뷰 찍힌 걸 보면 중간중간 등장해서 말을 하던데. 


배 

우리는 돌아가면서 한 사람이 인터뷰어를 맡는데, 다른 사람들이 간혹 인터뷰어를 거들기도 한다. 하지만 정해진 건 아니어서, 관심이 없을 때는 한마디도 안 하기도 한다. 


노 아니, 약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면 끼어들려고. 


배 그런데 이번 인터뷰에는 다들 별 관심이 없나보다. 



정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뭔가 견고하다. 


송 희곡 작업이나 연극에 참여한 적은 없나? 


배 

희곡이나 연극? 그런 적 없다. 단 영화에 출연해본 적은 있다. 독립영화고, 짧은 단역이지만. 한국에서가 아니라 독일에서. 연극이라고 하니 생각났는데, 10여 년 전부터 나는 목소리로 표현되는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연히 극단 일을 하는 사람을 알게 되어, 그에게 내 단편 하나를 낭송극 형태로 무대에 올릴 방안이 없겠느냐고 먼저 제안을 했다. 그러자 그가 일단 배우들과 함께 한번 읽어보겠다고 하기에 내 단편을 건네주었다. 단편집 『올빼미의 없음』에 수록된 「밤이 염세적이다」라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다음에 만나서 그가 하는 말이, 극단의 배우들이 그 단편의 낭송을 거부했다고 한다. 


송 왜? 




배 

자신들은 이 텍스트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는 공감할 수 없다. 공감할 수 없는 텍스트를 무대 위에서 앵무새처럼 소리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의 배우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라야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두 가지 점에서 오류를 저질렀다. 배우들이 텍스트를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내 글의 비타협성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송 무산됐나? 



배 

당연히 무산됐을 뿐만 아니라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구나, 만약 누군가 내 글을 ‘기꺼이’ 읽는다면, 그건 아마도 단 하나, 오직 내 목소리뿐이라고. 


송 낭독하는 것을 보았다. 

배 어떤 낭독을? 

송 「뱀과 물」. 

배 이리카페 낭독 말인가. 거기 왔었나? 


송 유튜브에 올라와 있더라. 

배 

유투브에 올라간 건 몰랐다. 이리카페 낭독은 나의 완전 최초 공연이므로 어떤 정신으로 읽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송 처음에 깜짝 놀랐다, 낭독 직전에 태연하게 전화를 받아서. 


배 

그건 연출이었다. 처음으로 “낭독공연”이란 걸 만들어보고 싶었다. 100%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약간의 연출을 기획해서. 


송 이게 연출일까 실제일까. 잠시 고민했다. 


배 

어떤 관객 중 한 명은 내가 전화를 받으니 공연 중에 통화를 하는 줄 알았던지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송 그 웃음소리도 들어가 있더라. 


배 

그 장면은 소설의 처음 신을 지문 없이 연출한 거였다. 사실은 연출을 좀 더 풍부하게 넣고 싶었는데, 이리카페라는 장소를 잘 몰랐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녹음이며 음향이며 아는 것도 없었다. 두 번째 낭독공연은 번역가 노승영 씨의 작업실에서 했다. 물론 그건 공개공연은 아니었고 한 여덟 명 정도 개인적인 친구들을 초대한 거였다. 그 때는 연출을 좀 더 가미할 수 있었는데, 노승영 번역가가 도와주어서 가능했다. 


송 그것도 어디서 볼 수 있거나 들을 수 있는 건가? 

배 

아쉽지만 공연 녹화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2월 초에 일산의 책방 이듬에서. 그때도 노승영 씨가 많이 도와주었고, 나도 좀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노 

낭독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리카페를 못 갔다. 그래서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연출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공연에서 음향 조작을 하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막상 나는 제대로 듣지를 못했다. 


송 비공개 파일 같은 게 있겠다 그럼. 



배 낭독공연을 녹화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노 사진조차 한 장 없고. 

배 

물론 나는 전문 성우나 배우가 아니라서 발성이 취약하다. 처음에는 그 한계점 때문에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나,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용기를 냈다. 이리카페에서의 최초 공연은 연출 준비도 미비했고, 나도 경험이 없어서 공연의 성격보다는 그냥 낭독에 더 가까웠고, 전체적으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찾아온 관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생전 처음이니 속으로 많이 떨기도 했고. 단편 하나를 통째로 사람들 앞에서 라이브로 읽는 건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 었다. 기존의 낭독회 등에서 작품 일부를 읽는 것과는 차원이 좀 다른 일이었다. 


송 최근에 들은 건데 한 출판사에서는 오디오북 작업을 준비하는 것 같더라. 단편 하나씩 녹음하고 그걸 만들 어서 판매한다고. 


배 오 그런가? 오디오북이라면 CD인가? mp3 같은 게 아니라? 



송 그런 것까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아무튼 처음 발표하는 작품을 오디오북으로 만들어서 작가가 직접 낭독하는 형식으로. 



배 

내가 아는 한 보통의 오디오북에는 연출이 들어가지 않는다. 연출이 들어가는 건 오디오극이다. 텍스트를 낭독에 맞게 각색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도 두 번째 공연부터는 각색을 거쳤다. 다음 작품으로 단편 「도둑 자매」를 준비 중인데, 이 단편 공연은 영상을 연출에 넣고 각색도 많이 하려고 생각 중이다. 같은 「뱀과 물」로 공연하더라도 매 공연마다 음악이나 음향은 바뀔 수 있다. 「뱀과 물」 첫 번째 공연에서는 막스 리히터의 음악을 썼는데 좀 밋밋한 것 같아서 두 번째 공연에는 독일의 오디오극 낭송 소리를 전화벨 소리로 만든 다음 그걸 시그널 음악으로 썼다. 중간에 들어가는 인터미션 음악도 오디오극의 소리를 빌려 왔다. 기존의 오디오극은 감독이 무척 고심해서 최고의 낭송과 최고의 배우, 최고의 음향을 마련해놓았다는 걸 안다. 물론 독일의 감독에게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준비하다보니, 연출 자체가 무척 즐거워졌다. 


송 

재밌다. 텍스트에다가 다양한 시그널을 입히는 작업이겠다. 「뱀과 물」을 오디오북으로 만드는 건 어떨까. 


배 그런데 단순히 읽기만 하는 오디오북은, 만드는 입장에서는 좀 재미는 없을 듯하다. 나는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이 더 좋다. 그리고 어느 낭독회에서 독자가 질문한 것인데, 나는 내 텍스트가 다른 성우나 배우들에게 읽히는 것을 이제는 더는 바라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낭독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내 글을 낭독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 어휘 하나하나에 깃든 감정의 온도를, 작가는 어려움 없이 즉석에서 선택해서 읽을 수 있다. 「도둑 자매」 낭독공연을 준비하면서, 나는 외국의 몇몇 친구들에게, 영어로 번역된 「도둑 자매」의 한 구절 을 주고 그것을 각자 영어로 읽고 녹음 파일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짧지만 인상적이고, 시와 같고, 감정이 고조될 수도 있는 구절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감정이 고조되는지는 다들 잘 모르는 입장이다. 그들은 단편 전체를 읽지 않았고, 또 읽었다 하더라도 다들 생각이나 해석이 다를 테니까. 그 결과 는 흥미로웠다. 모두 다섯 친구가 녹음을 보내왔는데, 얌전하고 수줍게 , 감정을 억제하고 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치 무대의 배우처럼 열성적으로 읽은 사람, 그리고 교과서적으로 딱딱하게 읽어 내려간 사람도 있었다. 같은 텍스트를 같은 언어로 읽었는데 음색이나 어조, 강조하는 발성이 너무 달라 마치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하나의 텍스트를 읽는 개인들의 다양한 독서가 목소리로 나타난 풍경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를 돌림노래처럼 약간의 시차를 두고 겹쳤다. 그걸 나의 한국어 낭독 부분에 앞서 틀어 주려고 계획하고 있다. 


송 오! 흥미로운 시도이다. 두 개 이상의 언어 속에서 작업을 하는 작가의 상황을 청각적으로 재현하는 실험이겠다. 당신은 늘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어디서 그 에너지가 오는 걸까. 뻔한 질문 두 개를 마지막으로 던지겠다. 『뱀과 물』 후속으로 하는 작업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그리고, 어떤 작가로 남고 싶나. 



배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어떤’ 소설이 될지는 아직 나도 잘 모른다. 아직은 파편의 단계이므로. 여성 화자의 목소리가 주인공이라는 것 정도만 말할 수 있다. 나는 글을 쓰면서 상상한다. 이 글이 ‘미래의 나’에게 읽히게 된다는 상상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스스로 ‘미래의 나’가 되기를 상상한다. 미래의 나는 사랑할 수 있는 글을 찾아 책들을 떠돈다. 마치 내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미래의 나는 어느 날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를 발견하고, 그의 글을 읽고 사랑한다. 그것이 나였으면 좋겠다. 



20180131 일산 정발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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