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욕망의 음화(陰畫) - 로맨스의 고전:

에밀리 브론테(1818-1848),  <폭풍의 언덕>(1847)

 

 

 

 

 

 

 

 

 

 

 

 

 

 

 

  

 

에밀리 브론테의 유일한 소설인 <폭풍의 언덕>의 인기가 오늘날도 사그라질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유를 소설 시학의 관점에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34장짜리 소설에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먼저 록우드는 외지에서 온 관찰자이자 기록자이다. ‘유령이 출몰하는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의 음산한 분위기에 이끌린 그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자는 또 다른 화자인 넬리(엘렌: 딘 부인)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언쇼 집안(워더링 하이츠)과 린튼 집안(트러시크로스 그레인지)의 충직한 하녀로 살아온 만큼 두 집안의 역사를 속속들이 알뿐더러 그들에 대한 애정도 갖고 있다. 두 화자 모두 성격과 개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인물이라기보다 이 소설에 사실성과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에 가까워 보인다. 과연 어떤 이야기이기에 증인이 둘씩이나 필요했을까. 익히 알려졌듯,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인 사랑은 그 연원이 깊다. 워더링 하이츠의 지주가 외지에서 데려온 까무잡잡한 소년은 주인나리의 사랑에 더하여 주인집 딸의 사랑까지 얻어낸다. 하지만 캐서린은 고민 끝에 에드거 린튼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히스클리피는 족적을 감춘다. 3년쯤 뒤에 귀향한 그는 캐서린의 출산과 사망을 계기로 오랜 세월 축적한 원한을 설욕하기 시작하는데, 자신에게 반한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와 야반도주하여 결혼하는 것이 그 시발점이다. 인연의 고리는 자연스럽게 히스클리프와 이사벨라의 아들(린튼 히스클리프), 힌들리의 아들(헤어튼 언쇼), 캐서린과 에드거의 딸(캐시 린튼), 즉 다음 세대로 넘겨진다

 

대체로 <폭풍의 언덕>은 작품의 길이와 시간대에 비해 등장인물도 단출하고 사건의 규모 역시 소박하다. 인물들은 극도로 폐쇄된 공간에 유폐되어 있고 그들 모두를 엮어놓은 연애와 결혼의 사슬은 근친상간의 흔적기관처럼 보인다. 한배의 쌍둥이 같은 느낌을 주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사랑을 이루지지 못했음에도 세계문학의 어느 연인보다도 더 강렬한 정염의 화신이다. 나아가, 캐서린과 이사벨라는 시누이와 올케 사이임에도 한 남자를 공유하는 형국이다. 소설의 후반부, 캐시와 린튼은 엄연한 사촌(고종사촌-외사촌)임에도 결혼한다. 린튼이 죽은 이후에 결혼하는 캐시와 헤어튼도 마찬가지로 사촌지간이다. 이들의 의사(擬似) 근친상간은 18세기 앤 래드클리프와 그 아류의 고딕소설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 친인척의 위계질서가 정립되지 않았고 사실상 근친임에도 상간하였던 신화시대를 연상시킨다.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는 인물들이 엄밀한 동기화 없이 수시로 요절하는 것도 놀라울 따름이다. 요컨대 <폭풍의 언덕>은 건전한 중산층(신사-지주)의 생활과 모럴의 사실적인 기록을 지향한 19세기 중엽의 규범적인 소설에 거의 부합하지 않는 작품이다. 때문에 천재작가가 쓴 놀라운 작품임은 분명하지만 영국문학사의 위대한 전통의 맥락에서 보자면 일종의 변종이라는 평(리비스, <위대한 전통>)이 지배적인 듯하다. 달리 말하자면 일탈적인 측면이 곧 매력인데, 그 핵심이 워더링 하이츠의 육화인 히스클리프(그리고 캐서린)이다.

 

그는 이름도, 나이도, 출신도 분명치 않을뿐더러 검은 얼굴과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항상 악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고 실제로 모든 재앙의 원흉이 된다. 에드거의 청혼을 받고 천국에 가는 꿈을 꾼 캐서린이 넬리에게 하는 말을 보자.

 

천국은 내가 갈 곳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 했을 뿐이야. 나는 지상으로 돌아오려고 가슴이 터질 만큼 울었어. 그러자 천사들이 몹시 화를 내며 나를 워더링 하이츠의 꼭대기에 있는 벌판 한복판에 내던졌어. 거기서 나는 기뻐서 울다가 잠이 깼지. 이것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내 비밀을 설명해줄 거야. 나는 천국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에드거 린튼과 꼭 결혼할 필요도 없는 거지. () 그러나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지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에게 알릴 수가 없어. 히스클리프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133)

 

자상한 미남인데다가 많은 재산의 상속자인 에드거 린튼은 천국인 반면 히스클리프는 (캐서린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옥이다. 여기서 갈등구도는 신분과 계급 중심, 즉 무척 단순하다. 그리고 히스클리프의 악마성은 이런 계급적 토양과 무관하지 않다. 캐서린의 말대로 그는 세련된 데라고는 없고 교양도 없는 야만인”, “메마른 들판과 같은 인간”, 간단히, ‘문화-문명에 대비되는 자연-야만의 상징이다. 그런 그가 자본의 생리와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가. 우선 그는 아내가 죽은 다음 서서히 술과 노름에 빠져든 힌들리의 재산을 교묘하게 빼돌리고(그리고 죽도록 방치하거나 심지어 직접 죽이고) 이사벨라와의 결혼을 통해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고, 끝으로, 자신의 병약한 아들을 캐시와 결혼시켜 두 집안의 영지를 모두 손에 넣는다. 이런 세속적인 승승장구, 즉 완료된 복수극은 캐서린을 향한 그의 열정이 거의 광기에 가까웠음을 상기한다면(그녀의 무덤을 맴돌며 관 뚜껑까지 여는 것은 고딕소설의 시간(屍姦)의 변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초라한 종말처럼 여겨진다. “두 집을 부숴버리려고 지렛대며 곡괭이를 장만해 놓고 헤라클레스와 같이 괴력을 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훈련했건만, 막상 만반의 준비가 되고 내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자 어느 쪽 집에서도 기와 한 장 들어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으니!”(538)

 

록우드의 평가대로 이토록 지루하고 음산한 얘기의 작가가 이십대의 처녀였다는 점이 새삼스럽다. 에밀리 브론테는 다른 자매들, 남동생과 함께 요크셔 지방을 거의 떠나지 않고 살았는데, 그녀의 소설은 그 못지않게 유명한 언니의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외삼촌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불쌍한 고아 소녀가 간난신고 끝에 손필드 저택의 어엿한 안주인이 된다는 내용의 행복한소설이다. 왜소한 체구와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당차고 야무진 제인 에어는 샬럿의 분신이며 이십대 처녀의 사랑과 흠모를 받는 사십대 홀아비 로체스터는 샬럿의 이상형이었을 법하다. 반면,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들은 에드거와 넬리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상식과는 거리가 먼, 폭풍우 치는 언덕과 히스 꽃 같은 존재이다. 그것의 육화인 히스클리프(캐서린)는 작가이기보다는 여자로 살아야 했던 19세기 여성 작가의 정신세계를 반영한 페르소나일 것이다.

 

사춘기 시절이나 중년의 문턱에 들어선 지금이나 <폭풍의 언덕>은 환상적인 소설이다. ,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음에도 여전히 아리송한 우리의 욕망과 인생의 깊은 속살, 그것을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이십대 여성 특유의 거칠고 날선 야성의 문체로 포착한 음화(陰畫)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폭풍우와 히스 꽃, 연인들의 포옹과 키스, 심지어 브론테 집안을 점령한 요절의 유전자(어머니도 단명했다)와 성화(聖畫) 같은 분위기의 초상화까지 합세하여 이 소설은 우리 청춘의 영원한 노스탤지어로 남을 것이다.

 

2015년 ??월 <책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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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본 줄리에트 비노쉬와 랄프 파인즈가 나온 영화. 그 무렵 비노쉬를 정말 좋아했지만, 이 영화에서의 그녀는 그녀를 좋아했던 만큼이나 정말 별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랄프 파인즈 역시, 인상은 강렬했지만, 뭔가 잘 맞지 않는. 그런데 이 배우는 영국배우임에도 영국인 아닌 역할이 더 잘 어울리는 건 또 뭔지. 왠지 열정, 악, 광기, 파멸 등은 (정말 편견이지만!!!) 영국과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녕 이럴 때 우리는 셰익스피어가 영국인임을 망각한다^^;;

 

브론테 자매는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듯한데, 영화에서는 오히려 평범한 배우를 찾기 힘드니(^^;;) 제각기 미모가 돋는다. 이자벨 아자니가 에밀리, 그녀와 동갑인 이자벨 위페르가 앤(막내)의 역할을 맡았다. (샬럿을 맡은 배우를 잘 모르겠다.) 미모로는 누구도 따를 자 없었던 이자벨 아자니, 있는 듯 없는 듯('레이스 뜨는 여자 뽐므'!) 매력적인 이자벨 위페르를 보는 재미로 본 것 같다. (자막이 없었다오..ㅠ.ㅠ) 

 

 

 

- 나에게 요크셔는 '요크셔테리어'의 고향이 아니라 이 소설의 고향이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다시 볼 수 있을까?) 그가 성장기를 보낸 곳이기도 해서, 한 번 뒤져봤다. 지금 읽으면 조금 더 감상에 젖을 수도 있을 법하지만,  대략 정신이 차려지는 것을 보니 워더링하이츠의 산들바람이었나 보다.^^;; 이와 맞물려 거의 모든 리비도가 아이에게로, 즉 아이의 띨빵함에 집중되어, 차라리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바람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것도 곧 정신 차려지겠지. 아이가 유치원에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해 나도 겸사겸사 시작했는데, 마흔 셋에 처음 배우는 남의 말, 정말 정신을 번쩍 차리게 만든다. 최고로 어렵다 -_-;;

 

- "아빠, 왜 똥강아지는 있는데 쉬강아지는 없어?"

 

얼마 전 아이가 엄청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아빠에게 던진 질문이다. 아이의 발달 지연이 얼마나 심각한지 여전히 오락가락하지만(만 6세가, 즉 검사의 그 날이 멀지 않고나 ㅠ.ㅠ) 저럴 때는 정말 멀쩡해 보인다. "혹시 엄마가 아이에게 너무 많은 성취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라는, 애 둘을 다 키워놓은 후배의 말이 계속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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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에 나온 <잉.페.>를 보니 배우들의 모습이 새롭다.

 

 

유명한 무도회 장면. 깍아지른 것 같은 머리, 즉 옆머리를 다 치고 앞머리를 위로 다 올린 스타일, 그에게는 참 매력적이다. 무엇보다도 저 엄정한 자세와 날카롭되 열정적인 눈빛이 압권.

 

 

남편 몰래(실은 그 남편이 호텔-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차 안에서 밤 샜다, 불쌍한 제프리(콜린 퍼스), 연인과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카이로의 시장. 이 장면 너무 좋다!

"Shall we be all right?" "Yes." 좀 있다가 한 번 더 "Yes". 다시 잠시 뒤 "Absolutely." 이 대답 패턴은 모래 바람에 갇혔을 때 알마시의 답과 똑같다.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는 흑발보다(이건 [네번의 결혼식...]) 금발이 더 잘 어울리고, 특히 이 영화에서 다소 긴, 옅은 웨이브 진 금발 머리를 묶은 저 하얀 리본이 무척 예쁘다. 처음 그를 찾아왔을 때도 (목이 깊게 파인 흰 원피스와 함께) 저 리본을 하고 있다. 백인이라 이런 화이트 원피스, 화이트 재킷도 잘 소화되는 듯.

 

 

이건 <쉰들러 리스트>에서의 랄프 파인즈. 배우와 배역 사이의 찰떡 궁합.

 

이랬던 그가 최근 <비거 플래쉬>에서는 정녕 안타까운 모습이다.(<해리 포터>는 그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ㅋㅋㅋ) 사십대까지는 그래도 괜찮더니(<더 리더>) 오십을 넘으며 M자 형 탈모가 진행, 아, 정녕 없어지는 머리카락을 막을 길 없구나. 하지만 놀라운 건, 저렇게 허물어지고 망가진(?!) 모습으로 당당히 자신의 맡은 바 역을 수행하는 그 프로 정신이다. 그 때문인가, 헐렁한 뱃살을 마냥 드러내고 즐겁고 명랑하게 헐렁한 춤을 그의 모습이, 묘하게, 위안을 준다. 사실 오십대가 이 정도 몸이면 정말 관리가 잘 된 것이라는 사실이 또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체호프의 희곡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기분. 마치, 얼마 전 포착된 디카프리오의 '물총' 놀이 사진이 그렇듯, 어쩜 그리 행복해 보이냐. 위의 저 무도회 사진과 너무 대조적이다.

 

 

<올란도> 시절부터 진짜 4차원 배우로 여겨지던 틸다 스윈턴과 함께. 진짜 4차원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늙음이 별로 안 느껴지는 정말 특이한 배우다.

 

 

노년.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을 향해가는 속도가 만만치 않다. 벌써부터 내 인생의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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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던가,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얘기를 쓴 기억이 있다. 그대로 밀고 가고 싶었으나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다. 바빠서는 물론 아니고(사랑할 시간은 언제든지 있다! 그러게 사랑이다!) 아무래도 짝사랑이어서 그렇다. 모선배의 지당한 충고대로, 스무살도 아니고(그런데 요즘 스무살이 누가 이렇게 연애함?-_-;;) 짝사랑 얘기는 소설에나 쓰는 것이 좋을 법하다. 하지만 요즘 진짜 너무 바빠서(남의 소설 읽느라-_-;;) 직접 쓰지는 못하고 그런 소설을 몇 편 골라본다. 혹여, 기회가 되면 이런 주제로 강의를 해도 좋겠다 싶어 리스트 겸 만들어본다.

 

아무래도 연애소설의 정전은 젊은 괴테의 이 소설. 길이도 짧아 너무 좋다. 청춘, 낭만주의, 열정, 자살 등 모든 것이 '짧음'(찰나)과 무관하지 않다. 궁정식 사랑 이후 낭만적 사랑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본격 불륜(?)은 아니나 이 소설 역시 짝지 있는 여자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사랑-불륜 문제를 환기한다.

 

 

 

 

 

 

 

 

 

 

 

 

 

 

 

이 문제를 좀 진지하게 파고 들면, 언제나 재독하고 싶은 두 편의 프랑스 소설. [적과 흑]은 연애 소설이지만 [보바리]는 차라리 연애(욕망)의 환멸을 다룬 소설이다. 사랑의 격정을 더 맛보고 싶으면 전자를, 그 냉소를 연구(!)하고 싶으면 후자를.

 

 

 

 

 

 

 

 

 

 

 

 

 

 

 

 

결혼은 사랑의 무덤, 임을 실감한 석달이었다. 내 추억 속의 멋진 연인이 지금 나와 한 집에 살고 있는 이 남자, 라는 사실이 수시로 상기되었다.(그러려고 노력했다.) 사랑과 결혼의 문제 역시 소설이 즐겨 다룬 것인데,  그 초입, 즉 연애-청혼-결혼(식)은 아무래도 제인 오스틴을 따라갈 자 없겠다.  

 

 

 

 

 

 

 

 

 

 

 

 

 

 

 

 

 

정녕 영국식 정원-공원처럼 가뿐하고 경쾌한  우리 삶의 한 단면(연애, 청혼 등)은 결혼'생활', 즉 일상에 직면하면 전혀 다른 울림을 낸다. 아무래도 최고의 가정소설이자 불륜소설이자 사회소설이자, 뭐, 그냥 최고의 소설인 <안나 카레니나>. 그토록 정숙하고 도덕적인 여인(안나)마저 무너뜨린 그 대단한 사랑, 하지만 그 사랑조차 무참히 짓밟는 것은  결국, 연인의 배신 따위도 아닌, 시간-일상의 저력이다. (여기에 출산이 반드시 개입되어야 한다. 아이 낳은 여자, 즉 '아줌마'는 연애를 함에 있어 여러 모로 너무 골치이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 참담하다...

곁들어, 불륜 소설의 경우, 아저씨(유부남)-처녀의 연애가 아닌 아줌마(유부녀)-총각의 연애가 성사되려면 절대적으로 총각이 부지런해야 한다. 아줌마는, 아줌마라는 말 속에 이미 육아와 살림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 바쁘고 너무 정신없다.

 

 

 

 

 

 

 

 

 

 

 

 

이어지는 최고의 연애소설을 꼽으라면 <롤리타>이다. 이제는 불륜조차 사랑의 힘을 증명(?)하지 못하는 어느 지점, 대단히 지적인 작가 나보코프는 소아성애라는 파격적인 주제로 사랑의 소설을 쓴다. 예술가소설이든 연애소설이든 나보코프의 키워드는 '맹목'이다. 눈 멀지 않으면, 그 정도로 격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비교적 현대소설 중 연애소설을 꼽으라면 혹자는 하루키를 기억하겠으나 나는 쿤데라의 학구적이고 분석적인 소설이 좋다. 젊은 날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줄리에트 비노쉬의 열연이 두드러졌던 영화 <프라하의 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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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더 많은 목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 <닥터 지바고>, 뭐 이런 것도 넣어야 할 듯도 하다.) 로맨스는 우리를 영원토록 흥분시키니까. 어쩌면 그렇기에 더더욱 연애 소설의 새로운 문법을 확립하기 힘들다.

 

 

 

 

 

 

 

 

 

 

 

 

 

 

 

 최근 겸사겸사, 없는 시간 쪼개서 토막토막 (다시) 본(보고 있는) 영화. 

젊은 날의 비노쉬는 물론 매력 있지만, 나는 그녀가 프랑스 영화에서 프랑스어로 말할 때 더 좋다. 여주인공 역을 맡은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도 좋다. 그녀의 이지적이고 상당히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 오히려 이 배역에는 잘 맞는 듯. 미모가 너무 돋는(특히 관능적이고 섹시한) 여배우가 맡았다면 영화가 좀 천박해졌을 법하다. 예전엔 그냥 지나쳤던 듯한데 콜린 퍼스(미스터 다~시!)도 새롭게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건 랄프 파인즈. 이 배우를 처음 본 건 <폭풍의 언덕>(비노쉬와 함께 나왔는데, 뭔가 부조화스러운 영화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다음, 다들 그렇겠지만, <쉰들러 리스트>의 아몬 괴트. 그리고 <잉.페.>인데, 그의 눈빛이 스크린을 뚫을 것 같다! 콜린 퍼스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저음의 대단히 딱딱하고 날카로운 영국식 영어 발음,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는 짧게 깎은 머리가 무척 잘 어울린다. 아마 그래서 히스클리프보다는 아만 괴트, 알마시 등의 모습이 더 매력있어 보이는지도.  겸사겸사, 알마시와 캐세런의 뒷부분 정사 장면 어디에서 <안나 카레니나>가 언급된다. 역시, 연애소설의 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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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영어(미국 말 영어 말고 영국 말 영어)를 좀 잘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한 시절 대영제국이라 불린 이 나라의 말을 실제의 대화 상황에서 (아주 조금이지만-_-;;) 경험하는 느낌이 무척 새롭다. 지금껏 영어권 원어민과 대화를 나누어본 경험이 전무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음, 역시 이건 사람-개인의 문제인 것 같다... But i didn't mean it!

 

그래서, 끝으로, 영국의 연애소설 두 편을 꼽아본다. 둘 다 너무 로맨스라 소설사적 의미가 잘 찾아지지는 않지만(그래서 위에서 빠졌다), 어쨌거나 우리의 성장기부터 함께 해 온 사랑, 심지어 (여성작가들이 써서 그런지) 소녀들의 연인이다. 개인적으론 히스클리프 쪽이 미스터 로체스터보다는 더 끌렸던 듯.

 

 

 

 

 

 

 

 

 

 

 

 

 

 

 

 

 

애 잠든 뒤 (정말 간만이다!!!) 밤에 영화를 봤더니 하루 종일 졸린다. 빨리 정신 차려야하는데 짝사랑도 사랑인지라(웃어야 하나?!) 잘 차려지지 않는다. 어디서 스팸 전화라도 한 통 와주면 좋겠다 싶은 오후. 이 또한 지나가겠지.

 

 

이건 오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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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4 2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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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5 10: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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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7 1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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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혁명의 시: <닥터 지바고> 

 

겨울방학이다. 지난 반년 동안 방치해둔 번역원고 파일을 연다. 겨울에 잘 어울리는 소설,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닥터 지바고>(1957: 이하, <지바고>)이다.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마뜩치 않은 구석이 많지만 독자의 눈으로 보면 역시 20세기 러시아, 즉 소련 소설 중 가장 사랑받을 만한 작품이다.

 

 

 

 

 

 

 

 

 

 

 

 

 

 

<지바고>는 시대적으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두 혁명(19172월 멘셰비키 혁명, 10월 볼셰비키 혁명)과 내란, 부분적으로 양차 세계 대전을 아우른다. 이 보편의 역사와 맞물려 유라, 토냐, 라라, 파샤 등 주인공들의 삶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의사가 된 유라, 즉 유리 지바고는 많은 시간을 시를 쓰는 데 할애한다. 그의 삶을 침범한 역사적 사건에는 대체로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한다. 사생활 역시 그러한데 아내(토냐)를 사랑함에도 빨간 마가목 열매’, 즉 라라를 그리워한다. 역사와 사랑의 딜레마 앞에 선 그는 스스로를 햄릿’, 정확히 햄릿 역을 맡은 연극배우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편, 라라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숭배해온 파샤(안치포프-스트렐니코프)와 결혼하지만 혁명과 내전 중에 거듭된 해후를 통해 지바고와 비극적인 사랑의 인연을 맺게 된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파샤의 운명은 더 절절하다. 구시대의 악을 척결하기 위해 그토록 사랑한 가족까지 내팽개치고 혁명에 뛰어든 그는 이후 토사구팽의 논리에 따라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그의 자살, 특히 바르이키노의 하얀 눈밭을 물들인 붉은 피는 혁명(이상)과 정치(현실)의 양립불가능성을 시적으로 보여준다. 하나같이 선과 미의 육화인 젊은 그들옆을 맴도는 늙은변호사 코마로프스키는 봉건제의 악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악역이 아니다.

 

모스크바의 유대계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파스테르나크는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겐치아의 전형이자, 소설가가 아닌 시인이었다. 무엇보다도 타고난 귀족적 성품상 소련이 요구한 과격한 이분법적 세계관과는 잘 맞지 않았다. 동반자 작가인 그가 스탈린의 저 악명 높은 숙청을 면한 것은 조용한 광기’, 아니 광기의 조용함덕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지바고>가 소련도 아닌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간되어 이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 냉전시대의 역학관계에 힘입어 물의를 일으킨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이 소설은 어쨌거나 문학사의 심판을 거쳐 살아남았다.

 

 

 

 

 

 

 

 

 

 

 

 

 

 

(최근에 나온 '사람들과 상황'은 두 단어가 어차피 다 복수니까 그냥 '사람과 정황(혹은, 상황)'으로 번역하는 편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덧붙여본다.)  

 

1988년을 전후한 언젠가, 두 동생이 잠든 늦은 밤에 <지바고>를 읽었다. 애지중지한 빨간색 라디오에서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 <지바고>(1965)에 삽입된 라라의 테마가 흘러나왔으리라. 지바고와 라라의 피난처처럼 쥐가 들끓는 단칸방에서 이런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 행위 자체가 참을 수 없이 문학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적 망명에 처해진 시인이 쓴 소설을 무명의 아줌마 소설가가 번역하고 있는 이 정황 역시 그렇지 않은가. 그러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  서울대동창회보: <나를 움직인 책 한 권>

 

 

쓰기는 저렇게 썼지만 죽을 맛이다. 정말 죽도록 하기 싫어서, 그런 느낌이 들 여유가 없도록 죽도록 달리고 있다. 대략 12월부터 다시 시작, 아이 없는 시간에 죽도록 매달려그래도 꽤 많이 왔다. 말하자면 1차 초고는 오래 전에 나왔고 지금 작업은 2차초고(즉, 어지간히 쓸 만한 초고)를 만드는 것. 올 겨울, 더 욕심 내면 1월까지 쫑~하고 봄-여름에 최종 작업 하는 것이 목표이다. 

--  흠, 이렇게 쓰고 보니 유치원생의 <방학계획표>(--_-;;;) 같은 느낌이 든다. 

- "일찍 자요 ~ 일찍 일어나요~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요~ 골고루 많이 먹어요~"  

 

다시금, 정말 죽도록 하기 싫다.  번역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제발 나에게 다른 일감을 달라.  앗, 다른 일감을 만드는 일 역시 내가 할 일. 계속 바쁘다고 하다 보면 정말 바쁜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바쁠 일이 뭐가 있나. 나는 바르이키노를 달리는, 썰매 끄는 말이 아니다! 차라리 <죄와 벌>에서 두들겨 맞는 늙은 암말에 가깝나?? -_-;;

"올해가 러시아 혁명 100주년 되는 해니 (<지바고> 번역을)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다", 라고 한 선배가 충고해주었지만, 얼마나 고색 창연한 이름인가, 혁명이라니.  '혁명'보다는 차라리 버락 오바마의 퇴임연설이 '사랑과 시'처럼 와닿는다. 미셸, 말리야, 사샤~^^;;

 

사족. 홍상수와 김민희. 애 키우는 아줌마로서야 , 또 건전한 상식과 윤리를 가져야 하는 사회인-생활인으로서야 '버럭~'이지만, 그저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사랑과 시(영화)'가 참 부럽구나.  신작도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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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학을 공부하면서 그들의 '정신-머리 구조'의 괴상함에 자주 놀라곤 했다. 그들의 역사 중 제일 극적인 대목은 아무래도 제정 말기일 텐데, 최근에 검색어 순위에도 오른 괴승(요승) 라스푸친의 등장과 전횡이 특히 그랬다. 얄궂은 땡중 하나가 나타나 황실을 뒤흔들었다, 왕자의 혈우병을 고쳐주어 단번에 황후의 신뢰를 얻었다,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아 죽이는 데 애먹었다 등. 생김새가 어떠하였을까. 늙은 사진. 아, 너무 못생겼구나. 젊었을 때는 좀 나았겠지, 그래도 황후를 후린 사람인데. 웬걸, 정말 너무 아닌 얼굴이다, 슬프다 -_-;; 마흔 넘으면서 진정한 외모지상주의가 돼 버린 내 눈에 그는 이 점이 제일 도드라진다. 그러게, 러시아. 

 

 이런 식의 참칭의 연원은 물론 깊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가짜 드미트리, 보리스 고두노프 등)이 등장한 동란의 시대가 대표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정치소설'(정치팜플릿) [악령]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메커니즘도 이것. 굳이 말하자면,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는 '가짜 드미트리'인 셈이고 그를 움직이는 진짜 수장은 '악령 스타브로긴'. 그러나 그 '스타브로긴'마저 꼭두각시라면? 그렇다면 그를 움직이는 더 근원적인 힘은 무엇? 여기서 소설을 한층 복잡해지고 '정치소설'이라는 장르와 결별, 더 높은 층위로 이월한다.

 

 

 

 

 

 

 

 

 

 

 

 

 

 

 

<악령>에서 포착된 테러-혁명의 씨앗은 20세기 러시아역사에서 실제로 실현된다. 이 소설 속 쉬삐굴린사태는 1860년대 트베리 시의 소요를 모델로 했다. 밀린 품삯을 받기 위해 도지사 앞에 몰려든 '선량한'(!) 노동자들을 도지사(폰 렘브케 - 그는 못 됐다기 보다는(이게 더 무섭다!!!) 그저 띨빵하고 한심한 지휘관의 상징이다)는 '폭도'로 몰아버린다. 여기서는 '발포'까지는 등장하지 않으나, 이런 것이 1905년, 1917년 혁명으로 이어졌으리라. 간만에 상기해본다. 

 

 

 

 

 

 

 

 

 

 

 

 

 

 

 

결국,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 어쨌거나 이건 남의 나라 얘기인지라 오랫동안 학적, 미학적 호기심을 갖고 읽어 왔다. 까도 까도 나오는 양파, 라는 표현이 자주 들리는데, 역시나 이런 것이 떠오른다.

 

마트료쉬카는 피스가, 속의 갯수가 많을 수록, 또 그림이 스티커를 붙인 것이 아니라 장인이 손으로 직접 그린 것일 수록 비싸다. 이런 조잡한 것도 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까야(열어야) 바닥이 보이는 거냐.

 

  

남의 나라 얘기인 줄 알았던 일들이 지금, 여기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어 놀랍다.

또한, 과거 얘기인 줄 알았는데 바로 지금, 어제오늘내일 일어나고 있어서 놀랍다.

('과거'라 함은 내가 요즘 현대문학사를 읽고 정리하는 중이라서 그렇다.) 

 

도무지 초현실주의 국가,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같다. '기생수'와 그 기생수에 먹힌 숙주의 나라. 그런데 그 기생수가 정녕 무시무시한 생김새의 만화 속 기생수도 아닌, 뭐뭐뭐 같이 생긴 뭐뭐뭐, 라니, 헐헐. 

 

 

텔레비전 없이 산 지 20년 넘었다. 당연히 티브이 뉴스를 따로 챙겨본 적이 없다. 어제는 뉴스를 보려고 컴퓨터를 켰다. 따뜻한 방안에 앉아 있는 것이 미안할 수밖에. 마음만은 나도 애 데리고 가서 말하고 싶었다. "관악구에 사는 아줌마입니다~ 우리 공주님이 '하야'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등등. 그리고 내가 낸 세금 다시 내놔,~ 이런 말까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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