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이슈에 대해 별로 반응하는 편이 아니지만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해서는 나도 연일, 버럭, 의 연속이다. (지난 번 부산외대 사건도 그렇지만)  승객의 대부분이 아이들이니, 그저 참담할 뿐이다. 사고 소식을 접한 그날, 노란 셔틀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질 것 같더라. 아이를 가진 모든 부모의 심정이 그랬을 법하다. 내 아이가 저런 상황이라면. 혹자는 마침 아이가 수학여행 떠난 상태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반면 여기에는 또 얼마나 도저한 이기주의가 개입되는가. 내 아이는 살아 있다, 라는 아슬아슬한 안도감.  아이가 생기면 그래도 좀 이타적이 될 줄 알았는데, 웬걸, 자기 아이 일 아니면 잘 모른다더니, 그 말도 이제 알겠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굳이 어떤 누구의 잘못을 캐기보다는 그냥 일이 그리 되려고 그랬나보다, 라고 생각하는 쪽, 그러곤 지난 일을 빨리 잊고 다음 일을 도모하려고 애쓰는 쪽이다. 그럼에도 이 참사는 침몰을 전후한 상황이 너무 부조리하다. 19세기 소설에도 곧잘 배가 등장한다. 그런 배를 저 지경이 되도록 수습을 못했다는 것이 나같은 문외한으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구조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에게 네 목숨 버리고 남 목숨 구하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으나(아무도 그러지도 않는다) 특정한 자리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책임은 있다. 자기 몸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가라앉는 배에서 내빼버린 선장의 사진을 보며 누가 분노하지 않겠나. 모든 선장이 배와 더불어 바닷속으로 함몰할 수는 없겠지만 이거야말로 '선장'(캡틴)이라는 말에 대한 배반이 아닐 수 없다. 공분, 이라는 단어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같다.

 

2주쯤 전 일요일, 아이가 발작을 일으켜 응급실로 달려갔다. 유아 발작은 진짜로 위험한 건데 왜 이리 태평이냐고 소리치는 것이, 아무리 침착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흥분하는 것이 애 엄마의 자리이다. 그걸 멀뚱멀뚱 바라보며 저 아줌마는 왜 저리 소란이냐고 생각하는 것이 또 관객들(그들도 제각기 아프다!)의 자리이다. 입원 수속부터 받으라는 것이 원무과 직원의 자리이다. 그 와중에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며(경련하는 환아를 처음 본 것 같던데, 그래서 경련 상태인지 아닌지 자기도 헷갈려 하고) 상황을 판단, 부작용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이의 몸에 진정제를 놓아야 하는 것이 또한 의사의 자리이다.(최근 응급실을 자주 가면서 주말에도 고생하는 젊은 수련의들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요즘은 여성 의사들이 정말 많더라.) 

 

 

 

 

 

 

 

 

 

 

 

 

 

 

 

 

 

언젠가 <맥베스>를 다시 읽으면서 맥베스의 광기에 대해 죄의식, 죄책감은 죄의 크기가 아니라 죄를 느낄 줄 아는 마음(의식)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쓴 적이 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건 아무래도,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껏 쭉 반복적으로 읽어온 <카라마조프...> 때문이다. 이반은 왜, 자기가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스메르쟈코프에게 노골적으로 살인을 사주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죄책감에 시달리는가. 이 물음을 풀어가는 과정이 이 소설의 삼분의 일, 어쩌면 절반을 이룬다.

 

  

 

 

 

 

 

 

 

 

 

 

 

 

 

 

<대심문관>에서 암시되듯 우리 모두 천재-선지자(=예수)처럼 살 수는 없다. 우생학적 이분법(이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할지라도)을 빌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 대부분이 '평민'(=양떼: 라스콜니코프의 표현으론 '이[蝨]')이다. 평민한테 그 이상의 것(가령, 소설 속에서는 기적과 신비에 의지하지 않은 순수한 믿음, 그리고 자유의 윤리적인 행사)을 요구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라는 자리에 맞는 최소치의 책임과 의식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고 보니, 오늘이 4월 19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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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읽는 루쉰이 감동적이다. 돌이켜보니 고등학교 때 읽은 다음, 저 번역본으로 대학시절 왕창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기왕지사 읽었던 <광인 일기>, <아Q정전>에 덧붙여 <<고사신편>>을 새로 접한 것이 큰 소득이었다.

 

 

 

 

 

 

 

 

 

 

 

 

 

 

 

러시아문학 전공자가 돼서 다시 읽는 중국 현대 소설의 거장은 우선 그 대륙적인(!) 스타일로 독자를 압도한다. 혁명의 시기(신해혁명~), 작가는 붓(펜)을 메스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을 터.(러시아 작가들과 비슷하다!) 루쉰이 젊은 날 의학도였음은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아무튼 소설 곳곳에 선혈이 낭자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지면이 작아서(그 와중에 14매에서 12매로 줄었다..ㅠ.ㅠ) 여기다 쓴다...^^;;  이번에  읽은 번역본은 전형준 역, 창비에서 나온 것. 그는 나의 첫 소설집의 해설을 써주신 비평가 성민엽 선생이기도 하다.

 

 

 

 

 

 

 

 

 

 

 

 

 

 

폐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려고 살해된 죄수의 피를 적신 만두(‘인혈만두’)를 구해오는 부부(라오수안과 화 부인)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약」. '인혈만두', 이 무슨 섬뜩한 말인가! 사람의 생피를 적신 만두, 라니! 무슨 무협 영화도 아니고. 그럼에도 자식을 살리려는 부모의 심정이(정녕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십분 이해된다. 아무튼. 결국 죽고만 아들의 무덤을 찾은 화 부인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옆의 무덤이 자기 아들이 먹은 ‘인혈’의 주인공, 즉 민중을 위해 투쟁하다가 바로 그 민중에 의해 살해된 비운의 혁명가의 것임을 알게 된다. 두 어머니의 조우는 곧 민중(우매함)과 지식인(나약함)이 만남, 나아가 화해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무덤 위로 날아오르는 까마귀(혁명가의 빙의처럼) 역시 그 나름으로 희망의 상징처럼 읽힌다.

 

[고향]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거의 삼십년만에, 어린 시절, 해변의 수박 밭을 덮치는 오소리를 잡던 유년의 벗 룬투와 재회한다. 어머니가 룬투가 온다는 말을 하자 화자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어린 룬투의 형상이 목가적이다. 나 역시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 순간, 나의 뇌리에 문득 한 폭의 신비스러운 그림이 떠올랐다. 쪽빛 하늘에 황금빛 둥근 달이 걸려 있고, 그 아래는 해변의 모래밭인데 온통 초록빛 수박이 끝없이 심어져 있다. 그 속에서 열한두 살 된 소년이 목에 은목걸이를 차고 손에 죄작살을 들고서 한 마리의 차(오소리~~~)를 힘껏 찌르는데, 차는 몸을 비틀어 그의 가랑이 사이로 도망친다.”(51)

 

 

그러나 막상 눈앞에 나타난 룬투는  바닷가 농부의 고생스러움을 고스란히 반영한 주름 가득하고 신산한 얼굴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가 내뱉은 첫마디. “나으리!” 더 이상 너나들이를 할 수도 없는 것이다.(체호프 초기소설 <홀쭉이와 뚱뚱이>를 연상시킨다.) 해맑은 소년 대신 “많/은 자식들, 계속되는 흉년, 가혹한 세금, 군벌, 비적, 관리, 향신, 이 모든 것들” 때문에 “하나의 나무인형”(61)이 된 룬투. 그는 심지어 화자의 물건까지 일부 빼돌린다. 어쩌냐. 먹고 살아야 되는 것을. 작가는 묻는다. 이 뼈아픈 ‘격절’을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삼사십대의 야심찬 작가, 계몽가의 면모가 드러나는바, '희망'을 얘기한다.

 

“나는 희망한다. 그들은(수이성과 훙얼) 더 이상 나처럼, 사람들끼리 격절되지 않기를... 그러나 나는 또한, 그들이 한마음이 되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나처럼 괴롭고 떠도는 삶을 사는 것은 원하지 않고, 그들이 룬투처럼 괴롭고 마비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괴롭고 방종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땅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을.”(63)

/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64)

 

 

 「복을 비는 제사」에서는 수더분하고 성실하고 솜씨 좋은 일꾼이었던 샹린 댁이 영락한 사연이 나온다. 두 번에 걸친 강제 결혼, 강간도 당하고, 지옥 같은 노동에 시달리고 등등. 모든 것은 다 참아도 ‘아차’ 실수로 어린 아들을 잃어버리고는 그녀도 무너진다. 폭삭 늙어버린데다가 일도 잘 못하고 거의 반편이처럼 돼서 온갖 사람을 붙잡고 아이를 잃어버린 사연을 얘기한다. 모든 어미는 자식 앞에서 죄인이다. (낳은 것 자체가 죄다..ㅠ.ㅠ)

 

“저는 정말 바보였어요, 정말.” 그녀는 말했다. “눈 오는 날에만 짐승들이 깊은 산에 먹을 게 없으니까 마을로 내려오는 줄 알았죠. 봄에도 그럴 줄은 몰랐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문을 열고, 소쿠리에 콩을 담아서 우리 아마오에게 문턱에 앉아 콩을 까게 했지요. 그 애는 말을 아주 잘 듣는 아이라서, 제 말이라면 뭐든지 다 들었어요. (애 소리가 안 들리고.. 가시덤불에 신 발 한 짝.....) 다들 말했죠, 끝났군, 이리를 만났나봐, 더 들어갔더니 과연, 그 애가 풀섶에 쓰러져 있는 거예요, 뱃속의 창자를 벌써 다 먹혀버렸는데, 불쌍하게도 그 애는 손에 그 소쿠리를 꼭 잡고 있었어요...”(146-7)

 

 

처음엔 동정을 갖고 들어주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귀찮아하거나 지루해하거나, 심지어 그녀를 놀리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동정 없는 세상! ^^;;) 아무튼 그런 그녀가 “배운 사람”이고 “대처 사람”인 ‘나’를 향해 묻는다. “사람이 죽은 뒤에, 도대체 영혼이 있는 건가요?”(133)  “그러면, 지옥도 있나요?”  “그러면, 죽은 식구들은 다 만날 수 있나요?” 그녀의 인생사를 생각해 보면 이 질문(들)에는 공포과 기대가 같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즉, 사후 세계가 있다면, 남편도 보게 되는데, 남편이 둘이나 되니, 옥황상제가 샹린 댁의 몸을 반토막 내서 두 남자에 줄 거라는 공포(누가 이렇게 놀렸다..ㅠ.ㅠ). 그 다음, 죽은 다음 죽은 아들을 만나고 싶은 열망. 옛날에도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던 소설인데, 애 낳고 읽으니 더 그렇다. 

 

대표작인 <아Q정전>에서 아Q가 심문 끝에 서명을 해야 하는 장면은,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이 소설을 처음 읽던 고교 시절로 나를 되돌려 놓는다. 맞다, 이런 장면이 나오는 소설이었지!

 

그러자 장삼을 입은 사람 하나가 종이 한 장과 붓 한 자루를 아Q 앞에다 가져다 놓고 붓을 그의 손에 쥐여주려고 했다. 그 순간 아Q는 몹시 놀라서 거의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손이 붓을 잡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잡아야 할지를 몰라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오히려 한군데를 가리키며 그에게 서명을 하라고 했다.

“저는... 저는... 글자를 모르는데요...” 아Q는 덥석 붓을 움켜잡고서 황공해하면서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그러면, 너 좋을 대로, 동그라미나 하나 그려라!”

아Q는 동그라미를 그리려 했지만 붓을 잡은 손이 떨리기만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종이를 바닥에 펴주었고, 아Q는 엎드려서 평생의 힘을 다 쏟아 동그라미를 그렸다.(124)

 

그리하여 있는 힘을 다해 하나 그렸지만, 호박씨 모양으로 찌그러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다시 감방 안으로 들어간 아Q. “이 세상에 살다 보면 원래 끌려들어가고 끌려나오고 하는 때도 있는 법이고 또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일 터인데 다만 동그라미를 동그렇게 그리지 못한 것만은 그의 ‘행장’에서 하나의 오점으로 남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개운해졌다.”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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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은 도..키를 비롯, 러시아문학에 조예가 깊었는데(당연하다!) 그의 데뷔작 <광인 일기>는 고골의 <광인 일기>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말년의 루쉰이, 역시나 고골이 말년에 쓴 <죽은 혼>을 번역했음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고골은 이 소설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이거 쓰다가 자기도 죽고, 번역하던 루쉰도 힘들었을 것이다 -_-;;  이런 운명의 소설-책이 있는 거다...!

 

마지막. <고사신편>에 수록된 <관문 밖으로>. 늙은 노자(스승)와 젊은 공자(제자)의 만남을 루쉰이 새로 쓴 소설이다. '고사신편' 자체가 옛날 얘기를 자기가 새로 쓴 것으로,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일부 소설들과 비슷하다. 아무튼, 간만에 접하는 동양적(!) 아포리즘이 웅숭깊다.

 

공자(공구)의 첫 방문에  노자가 하는 말: 성(性)은 고칠 수 없고, 명(命)은 바꿀 수 없고, 시(時)는 멈출 수 없고, 도(道)는 막을 수 없어. 도를 얻기만 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지만, 만약 잃어버린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217)

석달 뒤. 두번째 방문 뒤 노자의 말: “우리는 여전히 도가 다르다. 설사 같은 한 켤레의 신발이라 할지라도, 내 것은 사막으로 가는 것이고 그자의 것은 조정으로 오는 것이다.”(220)

 

여기서 “조정”(정치)의 길을 가는 공자와 “사막”(은둔)의 길을 가는 노자 모두 루쉰의 분신처럼 읽힌다. 혁명의 시대를 산 지식인 작가의 두 모습.(얼핏, 도..키와 체호프가 동시에 떠오른다.)

 

끝으로. 루쉰은 잡문을 엄청 많이 쓴(사실 소설은 다 해야 중편1편, 단편 32편이다) 작가인데, 그의 산문시 한 구절을 되새겨본다.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이.”(<들풀[野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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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긍정과 생성과 기쁨의 철학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물론 철학자 니체가 쓴 철학책이다. 하지만 동시에 몹시 독특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한 천재 작가가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아름다운 문학책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존의 엄정한 철학서와는 달리 모종의 문학적 설정도 있다. 서른 살에 고향을 떠나 산을 들어간 차라투스트라는 10년간 고독 속에서 정진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아침의 태양을 맞으며 세상에 나온다. 이후 그는 적잖은 시련을 겪는 와중에도 도시와 산속을 오가며 자신의 ‘말’을 설파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대들에게 초인(超人)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이렇게 그는 운을 뗀다. ‘초인’(위버멘쉬: Übermensch)이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중략) /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橋]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19)

 

 

건너감과 몰락의 의미는 또한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를 여는 아포리즘은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다룬다. 낙타는 끊임없이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인내의 정신으로서 그 짐을 지고 사막을 달린다. 저 고독한 사막에서 정신의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제 정신은 사자가 된다. 당위와 의무(‘너는 해야 한다’)에 맞서 사자는 의지와 자유(‘나는 원한다’)를 주장한다. 그 순간 정신은 또 한 번의 변화를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말하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38)

 

 

이 책에 만연한 여러 비유 중 아이는 인간의 정신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단계를 상징한다. 아이는 끊임없이 ‘건너가고’ ‘몰락하고’ 그로써 끊임없는 긍정과 창조를 실천한다. 아이는 ‘(과거에) 그러했다’라는 원한(르상티망: Ressentiment)을 모른다. 2부의 한 아포리즘은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했다. 이것이 분노하며 이를 부드득거리는 의지와 고독하기 그지없는 슬픔의 이름이다. 이미 이루어진 일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한 의지는 모든 과거의 일에 대해 악의적인 방관자일 뿐이다. / 의지는 과거로 되돌아가 의욕할 수가 없다. 의지가 시간을 부수지 못하고 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가장 외로운 슬픔이다. / (중략) /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원한이다. 과거에 있었던 것. 이것이 의지가 굴리지 못하는 돌의 이름이다. / 그리하여 원한과 불만에 찬 의지는 돌을 굴리고 자신과 같이 원한과 불만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복수를 한다.”(「구제에 대하여」, 248-249)

 

 

이 맥락에서 보자면 니체의 저 유명한 영원회귀 사상은 결코 얄팍한 니힐리즘이 아니다. 동일한 것의 끊임없는 반복과 권태를 말함도 아니며 단 한 번뿐인 삶이나 존재의 비극을 말함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수히 쌓아졌다가 무수히 허물어지되 그러면서도 설움과 분함을 모르는 아이의 모래성 같은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를 에워싼 동물들의 말대로, 춤이며 웃음이며 영원한 시작이며 영원한 움직임이다.

 

 

우리처럼 생각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물 자체가 춤춘다. 만물은 다가와서 손을 내밀고 웃다가는 달아난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다. /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둥근 고리는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球]이 회전한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굽어 있다.(「치유되고 있는 자」, 383)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행복의 섬에서」, 148-149) 그리하여 당당히 신을 죽여 버리고 독수리와 뱀을 거느린 채 악동처럼 웃는 자.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낡아빠진 망상이 있다.”(「낡은 서판(書板)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357) 그 망상을 뒤엎고 ‘선악의 저편’을 꿈꾼, 아침놀과 한낮의 태양을 사랑한 자. 그는 부정과 어둠과 비극에 맞서 끊임없이 긍정과 생성과 기쁨을 역설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신의 존재, 선악의 무게,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 등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그 무게를 거부하며 자유를 쟁취한 후 ‘아이’의 정신으로 영원히 회귀하기 위해 포효했던 ‘사자’는 곧 니체가 아니었을까.

 

(네이버 캐스트)

 

 

 

 

 

 

 

 

 

 

 

 

 

 

 

- 작년말에 정간한 <책앤>에 다시 글을 연재하기로 한 참에 오래 전에 쓴 글을 하나 올려본다.

 

- 근황. 날은 포근해졌지만 최근 아이의 경련이 잦아지고 정도가 심해져 다소 우울하다.

(각종 과거에 대한) '원한'을 갖지 않기 힘들다. 자책도 도움이 안 된다, 당연히. 오랜만에 루쉰의 소설들, 특히 [아Q정전]을 다시 읽고 감동했는데, 아Q처럼,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 보면 뭐 이런 일도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어쨌거나 말도 하고 걷기도 하지 않느냔 말이다. 이제는 혼자서 레고도 쌓는다.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면 다시 집을 탈환하게 될 줄 알았는데, 웬걸, 아이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생경해, 아침 일찍 아이와 함께 도망친다. 그런 다음엔? 잠시 도망 놀이를 하다가 다시 제자리. 그래도 (아Q처럼! 아이들처럼!) 재빨리 망각하고 다시 놀아보자.

 

니체의 이 책에서 출발하는 소설.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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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 2014-07-1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 아이가 너무 예쁘네요 ^ ^ 특히 정말 예쁜 눈을 가졌어요 .
 

악몽(2)

 

 

 

1.

 

 

전깃불도 없는 산골짝, 장맛비가 쏟아진다. 날카롭고 들쑥날쑥한 산들의 틈새를 비집고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다. 일곱 살 아이는 묵직한 부엌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시커먼 웅덩이가 괴물처럼 아가리를 벌린다. 아이는 조심조심 한 발을 내딛는다. 걸쭉한 흙탕물이 정강이를 휘감으며 곧 무릎을 집어삼킬 태세이다. 맨 살에 와 닿는 질척질척하고도 미끈미끈한 느낌에 소름이 돋는다. 아이는 잠시 고민한다. 들어갈까, 말까? 음습한 부엌을 살피던 시선이 어둠침침한 구석에 꽂힌다. 있다. 분명히 있음에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뭔가. 침처럼 질질 흘리는 기분 나쁜 웃음이 있다. 풀어헤친 검은 머리카락의 느낌이 있다. 귀신! 아이는 흙탕물에서 한쪽 발을 얼른 빼내 후다닥 밖으로 나온다.

 

아이는 부엌 쪽은 다시 볼 엄두도 못 내고 얼른 섬돌을 딛고 툇마루로 올라간다. 방안, 호롱불의 일렁이는 춤에 맞추어 신문지를 발라놓은 흙벽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린다. 잠이 든 아이의 꿈속에 부엌 귀신이 보인다. 아니, 기괴한 웃음과 풀어헤친 머리카락의 느낌만 보인다. 먹먹한 침묵의 소리만 들린다. 아무런 형체도, 고로 아무런 이야기도 없는 소름 돋는 악몽이다.

 

 

2.

 

 

‘레피노’ 행 전차. 길쭉하고 좁다란 객실 바닥이 몹시 더럽고 러시아인 특유의 고약한 암내가 자욱하다. 어중이떠중이 행려병자 같은 자들이 필터도 없는 독한 싸구려 담배를 스스럼없이 피워대고 역시나 독한 싸구려 보드카를 마셔댄다. 니코틴과 알코올 냄새에 공기도 어질어질, 현기증이 인다. 등받이 커버도 없는 딱딱한 철제 의자에 오래 앉아 있자니 꼬리뼈의 통증이 척추로 올라간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 벽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본다. 높이도 색깔도 똑같은 자작나무의 단조로운 연속이다. 수시로 덜커덩대는 전차의 진동이 없다면 창밖에 풍경화 하나가 걸려 있다고 여겼을 법하다. 과연. 산이 없으니 차이가 없고, 고로 전망도, 원근법도 없다.

 

자작나무 숲의 맞은편, 철제 의자에 앉아 있는 노파가 눈에 들어온다. 허물어져가는 뼈대와 헐렁한 몸뚱어리가 퀴퀴하고 꿉꿉한 장마철의 빨래를 연상시킨다. 몸통은 얇은 블라우스에 가려졌지만 앙상한 뼈다귀와 빈한한 살가죽은 무자비하게 드러나 있다. 팔과 목덜미는 백색인종 특유의 색소 빠진 듯 희멀건 색깔이고 그 때문에 우중충한 갈색의 저승꽃이 더 도드라진다.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흔적, 사람의 기억이다. 할머니도, 늙은 여자도 아닌 노파. 무릎 위에는 노파만큼이나 낡은 바구니가 덩그러니 얹혀 있고 그 안에는 거무스름한 보랏빛의 열매가 가득하다. 노파가 그를 향해 눈을 찡긋한다. 굵은 바늘로 엉성하게 꿰매놓은 것 같은 두 입술이 달싹이자 얼굴에 파문이 인다. 그도 어설픈 미소를 만들어낸 다음 시선을 자작나무 숲으로 옮긴다. 몇 분 전의 자작나무 숲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다시 노파. 이번에는 미소에 덧붙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노파의 성긴 은발이 날카로운 비늘처럼 이마를 가로질러 두 눈을 찌를 것 같다. 이 눈이 문제다. 신기하게도 흰자위가 전혀 혼탁하지 않고, 새카만 동공과 옅은 회청색의 홍채가 영롱한 빛을 발한다. 청신한 연둣빛 이파리를 가득 입은 하얀 자작나무 숲 위로 펼쳐지는 북국의 하늘빛. 노파의 아름다운 두 눈이 참을 수 없는 우수를 불러일으킨다.

 

갑자기 노파가 그의 허벅지를 톡톡 치더니 바구니에서 열매를 한 움큼 집어 건넨다. 손바닥은 물론 손등까지도 거무스름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열매를 받는다. 노파는 예의 그 쭈글쭈글하고 걸쭉한 미소를 질질 흘리며 주문이라도 외듯 뭐라고 연신 중얼거리다 환히 웃는다. 골이 깊은 주름으로 뒤덮인 희멀건 얼굴 위로 시커멓고 음습한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자 몇 안 되는 금니가 황금빛 광채를 뿜어낸다. 노파는 열매 한 움큼을 자기 입안에 넣고 열심히 씹는다. 먹어도 괜찮아, 맛있어. 이런 뜻으로 짐작된다. 마지못해 그는 열매 두 어 개를 입안에 넣고 미처 맛을 느낄 틈도 없이 꿀꺽 삼킨다. 시큼함 같은 것이 한참 뒤에야 감지된다. 혓바닥이 거무스름한 보랏빛으로 물들었을 것 같아 섬뜩하다. 흐뭇한 웃음을 흘리는 노파의 모습이 흉물스럽다. 이런 느낌 자체가 너무 죄스러워 꼭 천벌을 받을 것 같다.

 

 

3.

 

 

김재현은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툭 치는 것을 느꼈다.

“야, 다 왔다.”

권태웅이었다. 아는 얼굴이라 반갑고 젊은 얼굴이라 반갑고 또 모국어라서 반가웠다. 김재현은 손에 열매를 그대로 든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차에서 내렸다.

“재현아, 그거 크리죠브닉 아니야?”

“아! 이게 그 나무딸기냐?”

권태웅은 열매를 몽땅 자기 입안에 털어 넣었다.

“정말 시다! 그래도 맛있는걸. 색깔도 잘 익은 오디처럼 탐스럽고.”

 

권태웅은 오만상을 다 쓰면서도 입맛을 쩝쩝 다셨다. 주접을 떨듯 이어지는 권태웅의 말에 김재현은 뭔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서 해방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바깥의 빛이 내면의 어둠을 걷어간 것일까. 화창한 여름, 강렬한 태양과 짙은 녹음이 어우러졌다.

 

레핀의 삭막한 화폭과 달리 조붓한 숲 속 오두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늑한 실내, 가이드가 통역해주는 관장의 말이 음악처럼 흘렀다.

“…그만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인 건데요… 이반 뇌제는 피투성이 아들을 엉거주춤 부여안고 망연자실하고…. 기다리지 않았다, 라는 제목의 그림은… 천신만고 끝에 녹초가 되어 귀향한 한 남자가… 반면 집안은 안락 그 자체인데 다들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오두막 밖을 나온 다음 권태웅이 약간 불만조로 말했다.

“고골 그림은 왜 빼먹었대?”

 

그가 말하는 그림은 말년의 고골을 그린 것이었다. 고골은 󰡔죽은 혼󰡕 2권을 썼으나 고된 노동의 결실이 자신의 이름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 원고를 불사르기에 이른다. 자기 소설의 첫 독자로서 냉혹한 심판, 동시에 작가로서 깊은 절망, 평생 문학밖에 몰랐던 한 남자의 괴상한 무채색 삶…. 작가의 두 눈이 하늘에 뚫린 천공처럼 허허롭고 암담하다. 훨훨 타오르는 원고 앞에서 절규하는 그의 얼굴에, 그러나 놀랍게도, 웃으면 천벌을 받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치미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킥킥거리는 것 같은 희극적인 표정이 어리어 있다.

 

“아참, 재현아, 빅토르 아저씨 성이 고골이다?”

“어, 정말? 어쩐지!”

 

빅토르 아저씨는 기숙사의 전기공으로 배가 불룩 나온 짜리몽땅한 중년 남자였고, 기숙사의 배관공인 카프카스 지역 출신의 요염하고 까무잡잡한 아가씨 방에 얹혀살았다. 그는 사생들에게 걸핏하면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는데 원하는 답을 얻기 전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코의 모양이 좀 독특했지.” “그로테스크해.” “말년에는 종교에 빠졌는데.” 마침내 ‘고골’이 나오면 고골처럼 유달리 긴 코를 만지작거리며 그의 소설 얘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태웅아, 고골은 결혼도 안 했잖아? 사생아가 있다는 기록도 없고?”

“글쎄, 속사정을 누가 아냐.”

권태웅은 눈을 찡긋하는가 싶더니 때 아닌 한숨을 푹 내쉬었다.

 

 

4.

 

 

‘레피노’를 떠나는 전차.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잠이 쏟아진다. 기숙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는다. 뭔가가 계속 그의 숨통을 틀어막으며 그를 짓누른다. 온 몸이 저릿저릿하고 묵직한 것이 서서히 마비되는 느낌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어떻게 용케 감지되는 거대한 진자가 사신(死神)처럼 무뚝뚝한 왕복 운동을 반복하고, 그의 몸은 암흑의 나락으로 하강한다. 어느덧 나락이 시커먼 흙탕물로 바뀌고 부엌 귀퉁이에서 뭔가가 자신도 자신의 존재가 두려운 듯 조심스레,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대체 어떤 형상일까? 꿈속의 그는 너무 궁금해서 눈을 커다랗게 부릅뜬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모습을 드러낼 찰나에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반면 꿈밖의 그는 남은 열매를 다 먹어치운 권태웅을 보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한 발을 떼어놓는 순간 선 자세 그대로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쓰러진다. 거무스름한 보랏빛이 그의 몸 위로 번져간다. 의식이 명멸하기 직전에도 그는 이것이 자신이 끝까지 보기를 거부한 악몽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5.

 

 

싸늘한 주검이 된 김재현을 발견한 것은 전기공과 배관공이었다. 고골은 그로테스크한 탄식을 연발하며 호들갑을 떨었고 그의 미녀 애인은 진중하게 알라신을 읊조린 다음 경찰서에 연락했다.

사흘 뒤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유족의 요구에 따라 검시를 했으나 상세불명의 심장마비라는 결론뿐이었다. 그의 시신은 목재 유골함에 담겨 귀국, 유년의 음습한 부엌 뒤쪽, 커다란 감나무 옆에 묻혔다.

 

권태웅은 김재현의 죽음과 장례를 지켜보며 계속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떤 이상한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러했다.

 

 

 

(- 서울대동창회보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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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관한 짧은 글의 마감을 잠시 미뤄둔 채 막간의 여유를 부려본다.  

 

 

 

 

 

 

 

 

 

 

 

 

 

 

이런 저런 놀라운 소설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소설가'라기 보다는 교수이자 학자로 여겨진다. 그에게 있어 소설은 (물론 너무 잘 썼음에도!) 아무래도 호작질(^^;;)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건 또한 그가 본업(연구와 교육, 집필 활동 ^^;)에 너무 충실한 탓이기도 할 터. 암튼, 에코의 정수는 이후의 걸작들에도 불구하고 <장미의 이름>에 제일 잘 표현된 것 같다.

 

 

 

 

 

 

 

 

 

 

 

 

 

상아탑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 '-끼'. '중세'라는 '암흑'의 시대를 깊이 연구한 학자(학위논문 주제는, 이름 조차 고루한 토마스 아퀴나스^^;;)임에도 '속세'(=대중)의 쾌락을 마다하지 않았을 법하다. 그것을 사진 속 유쾌한 에코의 얼굴, 동영상 속 분주하고 말 많고 두툼, 뚱뚱한 아저씨의 모습이 잘 보여준다...ㅋ 어쩌면 그렇기에 이 소설은 (에코가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에서 밝히듯) 보르헤스에 대한 오마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지막 - 한밤중>. 고된 노력 끝에 우연찮게(!) 암호를 해독한 윌리엄과 아드소는 부리나케 장서관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암호 Q-R을 눌러 거울-문을 연다.(키가 커야만 누를 수 있는 위치! ㅠ.ㅠ 키 작은 수도원장은 설령 여기까지 온다 할 지라도 절대 누를 수가 없다..ㅠ.ㅠ) 문 너머,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지적 갈망에 넘친 똑똑한 수도사들의 목숨을 앗아간 책이 보관된 밀실 <아프리카의 끝>. 희미한 등잔불, 가득 쌓인 책들, 그 속에 책상, 그 앞에 앉아 있는 장님 노수도사, 부르고스 사람 호르헤. 너무 말라, 그의 손은 숫제 투명해보인다. 윌리엄(-아드소)와 호르헤의 이 마지막 배틀(!)은 정녕 명장면이다.  

 

“... 내가 보고 싶은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 세상이 소실되었다고 믿거나 아예 쓰이지도 않았다고 믿는 책... 어쩌면 이 세상에서 한 권밖에 남자 않았을지도 모르는 당신의 소장품, 바로 그겁니다.”(829)

 

 호르헤는 “40년 동안 시력 대신 기억력/에 의존해 책을 되새겨 온 사람다운 놀라운 기억력”(830/31)을 뽐내며 책의 내용을 줄줄 읊고 예의 그 시니컬한(^^;;) 평도 곁들인다. 아리스-스의 책에 관한 한, 에코가 직접 몇 자 써주었다.

 

“1부에서 우리는 비극을 다루면서......이 희극이 어리석은 자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비극과 같은 작용을 하는 과정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영혼에 관한 책에서 이미 말했듯이 인간은 하고많은 동물 가운데서도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831)

 

호르헤의 웃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특정 본성, 그러니까 인간 자체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일 터. 암튼,그는 그 자신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최후를 맞는다.  세베리노의 시약실에 훔친 독약을 발라놓은 책을 먹기 시작하는 것.

 

“(묵시록의 7번째 나팔)... 내가 곧 무덤이 될 터이다. 그 비밀을 나는 나의 무덤에 봉인하리라!”(853)

 

이로써 자신을  지식의 일곱번째 제물로 바친다. (앞선 제물 중 제일 보고 싶은 것은, 소설 속에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는 미남 수도사 아델모이다. 그는 문제의 책을 손에 넣기 위해 베렝가리오에게 속된 말로 몸을 판다. 동성애가 얼마나 공공연히 이루어졌는지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어, 그의 반응.

 

그는 웃었다, 그가, 호르헤가, 그가 웃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목구멍으로 웃었다. 입술은 웃는 꼴을 하지 못했다. 아니, 웃는 것이 아니라 우는 것 같았다.”(853)

 

그뿐이냐. 노인은 손으로 등잔을 손으로 꺼버리고, 급기야, 제 손으로 장서관에 불을 질러버린다. 불을 진압하다가 지친 윌리엄은 숫제 울음을 터뜨린다. 암튼. 윌리엄은 호르헤에게 하는 말은 여전히 뇌쇄적이다. 

 

이 영감아,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 봐라, 이 영감은 악마답게 이렇게 어둠 속에 살고 있지 않아! /(....) 널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다.”(848/49) : “하느님의 손은 창조하지, 감추지는 않는다.”(851)

 

“(호르헤가 가짜 그리스도이다.) 호르헤 영감의 얼굴 말이다.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871)

 

 

대학 시절, 추석이었나, 설이었나, 암튼, 부산 내려가는 통일호에서 처음 읽었던 책. 한 6시간은 족히 가는, 등받이가 젖혀지지 않아 잠도 자기 힘들었던(등받이가 젖혀지는 무궁화호는 사치였다!) 기차였다. 책 읽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무려나, 너무 재미었었던 책. 오죽 하면 이 책을 읽지도 않은 동생이 (내가 떠들었던 내용 때문에-_-;;) 기억할 정도. 다시 읽어도 전율스럽다. 이 참에 훑어본 책. 이런 것도 써주시고, 님은 정말, 르네상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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