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네덜란드 거래선 담당자 Robert와 저녁을 먹었다.

Robert는 180cm가 약간 넘는 큰 키에 곱슬머리 금발, 40대 후반의 네덜란드 남자.
대학 졸업 후 쭈~욱 chemical sales를 해 온 이 바닥의 베테랑이다.
1년에 3개월 이상은 중국 출장을 다닌다.

저녁을 먹으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암스테르담에 처음 갔을 때 내가 겪은 "정신적 충격"을 말했다.

그 얘기를 했더니 Robert가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하면서 말했다.
" I can understand your feeling. I fully understand you."

어렸을 때, <안네의 일기>를 읽고 안네가 불쌍해서 막 울었다.
아....가엾은 안네! 얼마나 무서웠을까....

많은 어린이들이 울었겠지.나처럼.
지금도 이 세상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안네의 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겠지.

그런데....
내가 처음 암스테르담에 갔던 1995년.
"Anne Frank House"를 방문한 나는 너무너무 놀랐다.

어렸을 때, <안네의 일기>를 읽으며 아주아주 비참한 환경을 상상했었다.
전쟁 통에, 그것도 숨어 살았으니 얼마나 열악한 환경이었을까....생각했다.

그런데...안네가 살았던 집은....너무 좋았다.
건물 외부도, 내부도....훌륭했다.
고풍스런 가구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다.(소리 때문에 물을 내릴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안네가 그 집에 살았던 시기는 1942년 6월부터 1945년 3월.
생각 보다 너무 "럭셔리"한 Anne Frank House에서 쌩뚱 맞게 이런 생각을 했다.

1942년에,
일본 식민지였던 그 암담하고 가난하고 서러웠던 시기에,
도대체 우리 할머니는 어떤 집에 살았을까?

그 생각을 하니...
<안네의 일기>를 읽었을 때 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마구마구 아팠다.
도대체 우리 할머니는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을까?

Robert가 말했다.
70년대 초에 중국 출장을 처음 갔는데, 너무 가난해서 놀랐다고...
특히 화장실에 갈 수가 없어서 계속 꾹꾹 참으면서
미팅 내내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아!"를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고....

Robert가 11년 전의 내 기분을 이해한다며 말했다.
Anne Frank House는 솔직히... 요즘 중국 시골에 있는 집들 보다도 좋다고...

11년 전, 학생이었을 때 느꼈던 굉장한 "쇼크"를
이젠 편하게 술안주 삼아 말하게 되었다.

11년 전, 난 노가리 안주를 사치로 생각하는 학생이었고,
11년이 흐른 지금, 난 고급 한정식집이나 일식집에서
바이어들이랑 저녁을 먹으며 농담 따먹기를 하는 회사원이 되었다.

정말....많은 것이 변했다.
너무 큰 충격이었고, 또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이젠 편하게 얘기한다.

어제 11년만에 Anne Frank House에 다녀온 소감을 얘기했다.
11년 전 말하지 못했던 솔직한 견문록. 끝~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돌이 2006-04-2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네의 가족들은 다락방에서 살았다고 알고 있는데 저런 집이었단 말이죠.
저도 처음 알았네요.
가끔은 저도 그런 생각해요. 예전에는 맥주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사치여서 늘 소주만 먹었는데.... 학교앞 자장면도 어쩌다가 먹어보는 사치였고....근데 지금 너무 잘사는게 아닌가 괜시리 세상에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프레이야 2006-04-26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도 안네의 방을 나름대로 상상해보곤 했는데.. 충격적이네요. 문화의 차이랄까요 사는 방식의 차이랄까요..

moonnight 2006-04-2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래요? 저도 몰랐어요. 책 읽을 때는 아주 좁고 불편한 곳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차이가 크네요. ㅠㅠ;;

비로그인 2006-04-26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럴 줄 알고 첨부터 안네의 일기를 읽지 않았습니다
ㅡ,.ㅡ 힝

kleinsusun 2006-04-26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그죠? 님도 안네가 다락방에서 살았는지 알았죠?
11년 전, Anne Frank House에 갔을 때, 전 정말 집이 너무 럭셔리해서 깜짝 놀랐어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침략군에게 죽음을 당한 한 가난한 나라의 시골 소녀가 쓴 일기가 발견됐다면, 과연 그 일기는 <안네의 일기> 처럼 될 수 있었을까?

혜경님, 월요일 밤, 술 한잔 하면서 이 얘기 저 얘기하다,
11년 전 Anne Frank House가 생각났답니다.
Anne 가족들은 원래 부유했어요. 부자고 아니고에 관계 없이, 나찌의 만행과 숨어 사는 공포가 본질적인 거지만, 그래도 상상을 통째로 깨는 Anne Frank House를 처음 봤을 때, 전 큰 충격을 받았답니다.

달밤님, 아....저만 그렇게 상상한 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책에 그림도 없었는데 혼자 그렇게 상상했구나...하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담에 네덜란드 여행 가시면 한번 가 보세요! 아....여행가고 싶다.^^

나를 찾아서님, 제가 어렸을 땐 독후감 숙제 때문에 모두가 읽었답니다.ㅎㅎㅎ

BRINY 2006-04-26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략군에게 죽음을 당한 한 가난한 나라의 시골 소녀가 쓴 일기가 발견됐다면, 과연 그 일기는 <안네의 일기> 처럼 될 수 있었을까? -->동감입니다.

2006-04-26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6-04-26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런 생각하면....씁쓸해요. ㅠㅠ

stella.K 2006-04-2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도 몰랐어요. 너무 나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 버릇은 여전하군요.

kleinsusun 2006-04-2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 "나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 버릇"이 아닌 것 같아요.이 경우엔....
식민지 시대, 6 25 , 베트남전 다큐멘터리를 보고 자란 우리들에게
전쟁 통에 숨어 사는 집이란 당연히 아주 황폐하고 피폐한 환경이라고 상상할 수 밖에 없었죠. 그렇지 않을까요?^^

플레져 2006-04-26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영화에서도 방공호가 더 멋있더라구요 ㅎㅎ
환경이 사람의 상상력까지 지배한다는거... 당연한건데 괜히 오싹해요.

kleinsusun 2006-04-26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저도 오싹해요. 우리의 상상력이라는게.....공간적, 시간적 환경의 제약 속에 정형화 된다는게.... 다들 비슷한 상상을 한다는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