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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레이싱>이라고 불리우는 최악의 경주가 있다. 자동차와 모터사이클로 9천956킬로미터를 달리는 <다카르 랠리>. 그리고 21주동안 자전거로만 3천220킬로미터를 달리는 <뚜르 드 프랑스>.

 지난 12일 이태리의 모터 사이클 주자 파브리지오 메오니가 경주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2001년, 2003년 이 랠리의 우승자이기도 했다. 그의 사망으로 <다카르 랠리>가 시작된 1978년 이후 45명의 선수가 경주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됐다.

 <뚜르 드 프랑스>역시 그에 못지 않다. 그토록 오랜 기간동안 레이싱이 벌어져도 막판 결승점에선 3,4초라는 박빙의 차이로 희비가 엇갈리기 일쑤다. 이 대회를 5연패한, 살아있는 신화 랜스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단 1초라도 중요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줄일 수 있는 시간은 최대한 줄여야 한다. 내 몸의 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구석구석 연마해야 한다고 나는 플로이드(팀의 신참 동료)에게 말했다. 운동복 상의 소매를 어떻게 디자인 하느냐에 따라 몇분의 1초를 단축할 수 있다."

 웬만큼 수준에 도달하면 모두 훌륭한 선수다. 그들 중에 지독한 훈련을 하지 않는 선수는 없다. 그런데도 누구는 우승하고 누구는 좌절한다. 그 차이는 사소한 부분까지 완벽을 기하느냐에 달려있다. 아주 근소한 시간차이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간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다. 내가 이렇게 슬럼프에 허덕이는 동안 경쟁자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슨 소문을 들은 걸까? 오늘 안부 전화라며 걸려온 그의 말투에서 묘한 쾌감을 감지한다. 이러면 안되는데. 냉정해지려고 두 눈을 부릅떠도 칼 끝은 가물거리고 식은 땀만 흐른다.

 사업하는 내 친구들에게 슬럼프 탈출비법을 물었더니 의외의 답들이 나왔다. 이과 출신 한 녀석은 수학 정석을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열고 정신없이 문제를 푼다고 한다. 문과 녀석이 픽 웃는다. 그 놈은 종합영어에 나오는 숙어를 외운다나. 얼마나 집중하는지 땀이 벌뻘 난다고 했다. 그렇게 한식경이 지나면 급한 불은 대충 꺼진다는 것이다. 예상외로 책상 맨 아랫서랍에 닳아빠진 정석이나 종합영어가 들어있는 사장님들이 많단다.

 비슷한 예지만, 슬럼프에서 가장 빨리 빠져 나오는 비결은 <시간을 잘게 쪼개는 것>이라고 한다. 안팎의 타격으로 생활 리듬이 뒤죽박죽 됐을 때 프로들은 시간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분 단위로 일을 잘게 쪼개서 시간당 집중력을 최대화한다. 앉아서 속끓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그들은 안다. 그렇다면 실행 계획을 치밀하게 짜서 로봇처럼 아무 잡념없이 해치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밖에 없다.

 시간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지 않는다.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랜스 암스트롱은 결정적인 순간에 승리하기 위해 시간을 쓴다. 운동복을 연구하고 근육과 심장을 단련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내 시간을 쓰고 있는가. 마음이 공연히 급해진다. 책장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끄집어내 책상에 쌓아놓는다. 컴퓨터에 폴더를 수두룩하게 만들어놓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밤 늦게까지 북새 떤 다음날, 늦잠 자고 일어나면 상황은 종료된다.     

 이럴 때 시간을 잘게 쪼개라 했다. 사소한 일에 시간을 배정한다. 요즘 씀씀이가 헤픈데 금전출납부를 다시 써야겠다. (재작년에 손바닥만한 출납부를 천원주고 샀는데 덕분에 천만원은 아꼈던 것 같다.) 요건 하루에 십분 짜리. 선물받은 성경책이 이틀째 그 자리에 있다. 일하다보면 손에 안잡힌다. 자기 전에 십분만 읽자. 일어나서 쓸데없이 TV보지 말고 역시 십분동안 플래너를 챙겨보자. 피부가 거칠어졌다. 5분만 투자하면 보들보들해질 텐데. 무조건 30분은 책을 읽고, 어떤 일이 있어도 30분은 글을 쓴다. 이렇게 늘어놓다 보니 하루해가 모자랄 지경이다.

 대단한 각오 없이 시간을 쪼개보자. 거창한 계획 말고 안해도 그만인 일을 그 시간에 묶어주자. 그러면 일곱 난장이같은 작은 습관들이 내게 돈을 벌어 주고, 믿음을 튼튼히 해줄 것이며, 성공하는 자의 습관을 갖게 해줄테고, 주름살까지 활짝 펴서 날 젊은 오빠로 만들어 주리라. 믿숍니다.  

 아래사진은 랜스 암스트롱의 멋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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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때 쯤이면 2004년도 최후의 몇분 만을 남기고 있겠지. 올 한해를 마무리하는 혼자만의 시공으로 남은 한시간을 쓰려 한다.

긴 여행이었다. 떠날 때는 막막하고 아득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아무리 양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가늘게 떠봐도 종착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 곳의 기후와 생활여건,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목이 타게 찾았던 것은 돌아보니 이제 알겠다. 편안함. 그리고 안정.

불혹을 넘어서야 나의 몸 나의 혼은 피곤을 호소해왔다. 영원할 것 같았던 눈동자의 별빛은 사라졌다. 거친 삶과 황폐한 관계는 내 입술을 갈라터지게 했고, 조급한 마음 그리고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불운의 징후로 나는 편한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먼 훗날 궁금해질까봐 적어놓는다. 원래 난 그렇게 2004년을 시작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닳아버린 살틈으로 인광을 번쩍이며 드러나는 내 백골을 망연자실 볼 용기가 없었다. 난 그런 놈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그리 됐을까. 내 마음속에 꽁꽁 갇혀있던 백수의 욕망을 노크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그들은 천천히 좋은 일을 찾으라고, 서둘지 말라고 했던 얘기였을 게다. 그런데 내가 자발적으로 오해해버렸다. 나중에 그들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적잖이 당황하는 듯 했다. 그렇게 2004년 나의 여행은 타의와 오해로 출발됐다.  

처음 석달동안은 내가 놓인 낯설은 지점에 적잖이 당황했다. 요즘 뭐하느냐는 말에 대답을 찾느라 우물쭈물했다. 그땐 이렇게 대답했다. <어... 후배들 사업 도와주고 있어. 좀 쉬면서.> 그러면서 속으로 내게 말했다. <그렇게 창피하면 그냥 일하지 그래?>  그 무렵 책을 많이 읽었다. 결코 쉬지 않았다. 아니 쉴 수가 없었다. 시퍼렇게 날을 새워야 했다. 그리고 가족들을 파리로 보냈다. 정면 승부를 걸었다. 정말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활들을 현실로 맞게 됐다. 가족의 도불은 최대한 그들 스스로의 결정에 맡겼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진정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때 나의 결정은 아마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뒤바꿔놓을 것이다.  

봄이 되면서 내 대답도 세련되게 변했다. <음. 올핸 안식년이야. 일년쯤 쉬어줘야 또 움직이지.> 아직 허위와 가식에서 석방되지 못했다. 한심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0.78평 독방에서 40년형을 마치고 나온 장기수였다. <당신의 사상과 행동에 아직도 확신을 갖고 있나요?> 이따위 싹없고 무식한 질문을 하는 기자놈은 딱 일년만 그 방에 쳐넣어야 한다. <나는 지금 그 방에서 나왔을 뿐이오. 기자 양반.> 어쨌든 스스로 주는 안식년이라. 백수를 다시 정의할 때 써먹을만한 표현 아닌가. 듣는 이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짜식, 돈푼깨나 모은 모양이군. 기러기에다 안식년이라? 조오케따.> 아이들 교육에 대해 연구 많이 했다. 이 또한 생전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성공하는 아이들의 공부습관 개념을 잡고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제법 많은 일을 해냈다. 아버지가 키운 토마토와 신선한 야채들. 녹차 프라푸치노, 황홀한 봄꽃 향기, 싱그러운 초여름의 풀냄새,  적당히 감미로운 고독과 일.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때 나의 생산성이 최고로 발휘된다는 사실.

뇌성벽력의 시간이 왔다. 광인처럼 좌절하고 분노했다. 내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이런 경험도 처음이다. 계기는 없었다. 어느날 심한 우울증이 덮쳐왔다. 그러다 며칠가면 괜찮아 지겠지. 난 원래 낙천적인 놈이니까. 한주가 가고 한달이 가도 증세는 더 심해졌다. 24시간 잡념과 울렁거림이 숨통을 조였다. <실패한 인생이잖아. 까불다가 깨졌으니까 반성해야지. 내가 맨날 그 모양 그꼴이지뭐. 능력도 없는게 조용히 살란다.> 책도 팽개치고, 일도 놓았다. 머리속이 와글거리고 부글부글 끓었다. 8월말부터 9월말까지 정말 힘들었다. 이 여행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언제쯤 육지에 닿을 것인지 불안했다. 하릴없이 걷고 달렸다. 티셔츠를 비틀어짜면 한컵이상의 땀이 주르륵 쏟아졌다. 그래도 죽기살기로 계속 달렸다. 이러다 이대로 망가지는게 아닐까.

늪으로 빠져들고 있던 내게 잠깐 희망의 손을 뻗쳐준 것이 코칭이다. <어어 이건 얘기가 틀린데>(협회 사무처장 제안을 느닷없이 받고)하다가 <그래 까짓거 노느니 방위간다고 도와주지>(연말까지 딱 석달만 공짜로 뛰어주께)  이렇게 놀멘놀멘 시작했던 일이 죽음같은 무력감에서 나를 구해주었다. 회사 사람들과 일로 만나게 됐다. 돈이 개입되지 않으니 심신도 편할 밖에. 즐겁게 일했고 좋은 사람들이 작은 힘을 모아 큰 힘이 되게 해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말라.  기대하지도 말고 그저 결과에 만족하라.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오고 좋은 마음이 들어가면 좋은 결과로 나올 것이다. 예전같으면 말도 안되는 얘기를 신실하게 믿게 됐다.

사람들을 안만나고 일년을 보낼 줄 알았다. 그런데 만날 사람들은 만나게 돼있는 모양이다. 새 사람들을 새 마음으로 만났다. 변치말고 그 마음으로 만날 생각이다. 하루하루 해야할 일들과 만나야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저 겸손하게 하루를 보내면 그뿐이었다. 코치대회를 마치고 코칭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빠리에 갔다. 열이틀동안 이국의 거리를 걸으면서 내게 소중한 것들을 생각했다. 처음에 안보였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너무 멀었고 너무 컸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총기를 잃었으며 그나마도 거듭된 불면으로 촛점을 맞출 수 없었다.

결국 보일 것은 보이게 마련이다. 적어도 보려는 의지만 살아있다면 반드시 볼 수 있다. 그렇게 내 여행은 종착점을 저 앞에 두고 있다. 끝이 보인다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하다. 그게 신기루이든 진짜 종점이든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곳부터 새 길이 열린다는 사실. 그 길 역시 평탄하게 닦인 길은 아니겠지만, 행복하게 갈 것이라는 점이다.

올해를 함께 보낸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한해를 무사히 잘 마친 내 자신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04년 내 궤적의 일단을 여기 알라딘의 서재속에 남기고 2005년을 맞으러 간다.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 미명의 새벽, 서릿발을 깨치면서 그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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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1-0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5년도에도 변함없이 알라딘에 또 오실거죠? 여긴 님의 서재니까.

제가 효자님 서재를 처음으로 노크한게 가을 되오면서부터 인 것 같아요. 그때 님의 글에서 스산한 외로움이 느껴졌었죠. 그래도 잘 해쳐나오셨다는 생각이 이 글에서 물씬 느껴집니다.

40대면 불혹이라해서 좀 더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사추기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님의 글이 남의 글 같지 않아 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2005년은 효자님의 해가 될 것 같구요. 힘든 시기가 있으면 안정기도 있다잖아요.

올 한해 그저 좋은 일만 있기되길 기원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자, 아자! 화이팅!!

로드무비 2005-01-0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효자님, 2005년 한 해 건강하시고 평안하세요.

전 님의 글이 너무 좋습니다. 마음의 벗을 만난 듯하달까.^^

2005-01-01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1-01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샴푸의요정 2005-01-0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곳의 보이지않는 단골팬인거 혹시 아시려나...

조선효자님을 알게되어 참 기쁘고 감사합니다. 마음에서 깊이 우러나오는 진심입니다.

2005년에는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는 황홀한 광경을 목도하시길... (로마서 8:28)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또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가깝지 않은 윗 연배에게 안부전화를 걸어 점심 약속을 잡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난 좀처럼 그런 선행을 실천하지 못한다. 선배나 어른들에게 참 데면데면한 아랫사람이다. 웬만해선 결코 곁을 내드리지 않는 쌀쌀맞은 후배에 분명하다. 그러면서 바라기는 우라지게 바란다. 반갑고도 기특하지 않은가. 간혹 불측한 의도를 가진 친구들이 속내를 드러내긴 해도 그게 두려워 만남의 기쁨을 주저하진 않는다.  


테헤란로 길바닥에서 이십분쯤 기다렸다.(그래도 기분 좋다.) 한낮이지만 하필 서있겠다고 한 좌표가 응달이라 공기가 수월찮게 냉냉하다. (하지만 냉장고 안이라도 상관없다.) 조금있으면 도착한다던 친구가 오지 않는다. 십오분만에 문자가 왔다. 죄송한데 오분만 더 기다려주십사. (O.K. 얼마든지.) 그때부터 아예 가방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시간을 때운다. <지나가는 레이디 흘끔거리기.> 킬링타임의 기본 초식이다. 음... 시커먼 남자들만 떼 지어 걸어 간다. 그렇다면 다음은 <건물 구조 분석하기.> 예전엔 없었던 내공인데 올해 집안 일 때문에 저절로 눈길이 간다. 택시를 타도 지나치는 건물들이 예사롭지 않다.... 역시 화강석 물갈기는 금방 때가 타는군. 처음만 반짝하지 원..... 스텐레스 판넬도 배수처리 안해주니까 눈뜨고 못봐주겠네. ...어라 저 유리창은 무슨 색깔이지? 못보던 건데. 25밀리 블루 복창이 저건가? 


<형님. 저 왔습니다. 너무 오래~> < 어 그래. 오랜만인데. 안변했네. 그대로군.> <와 살 많이 빼셨는데요. 바람불면 날아가겠어요.><허 이사람이. 가세. 밥 먹자구.>  실로 3년반만에 마주 앉아 5천5백원자리 치즈돈까스 모듬 정식 세트 메뉴 A라는 긴 이름의 점심을 두 개 주문했다.


<예전에 TEPS하실 때 말입니다. 그때 뒤로 학원 하나 차리셨으면 지금 돈방석에 앉으셨을 텐데. 곁에서 왔다갔다하던 애들이 지금 장난 아니랍니다. 영어시장이 그때보다 열배는 커졌잖아요.> 그러면서 누구누구 이름을 댄다. 워낙 이름 외우는데 천치라 누군지 가물가물하다. 씩 웃으며 말했다. <왜? 배아프냐?> <그럼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참.><그 친구들이야 피라미들이고. 정말 웃기는 사람들은 따로 있잖아. 시사어쩌구하는 학원 회장하고, 파고다 저쩌구하는 학원 회장님네 말야. 그 양반들 강남에 삐까번쩍하는 빌딩 올리고 지금도 떼돈을 긁어모으고 있지? 근데 30~40년동안 내내 수강료를 욹어먹었는데 지금도 토플평균이 세계에서 꼴찌라면 솔직히 책임지고 배째야 되는거 아닌가. 언젠가 두 양반중에 하나가 자서전 따위를 내면서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산 증인>이라나 뭐라나 주접을 떨어놓은 걸 보니까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나 싶더군.>


당시엔 사람들과 존경과 믿음을 나누는 일도 주위에 널리고 쌨는데, 하필이면 교육이라는 미명아래 고작 눈속임으로 치부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까. TEPS를 시작했다가 재빨리 손을 턴 것도 그 도적질에 한 몫 끼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야. 지금 내게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한들 결과는 마찬가지가 될 거라고 장담하네.


어쩌자고 요새 입만 벌리면 훌륭한 말씀만 늘어놓으실까. 뒷감당이나 하실 수 있겠소? 그 친구와 헤어지면서 속에선 이런 질문들이 쏟아졌다. 한편에선 그래, 말이 씨가 된다하니 부지런히 파종하렴. 나중에 좋은 씨에서 좋은 넝쿨이 나와 내 발목을 꽉 붙들어매게. 이런 말도 들렸다. 에잇 모르겠다. 하지만 뭐 틀린 얘긴 아니잖아.


부랴부랴 이번엔 후배 부친상을 조문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요즘 장안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는 XX월드의 설립자이며 얼마전까지 최대주주였던 친구다. 나도 그 덕분에 그 회사 주식을 꽤 많이 갖고 있었다. 일년 좀 더 됐나보다. 이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형님. 긴히 드릴 말씀이...>< 뭔데. 회사 망했냐?> 워낙 벤처들이 막가던 시절이라 에구 또 하나 접는구만 그렇게 지레 포기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지금 누적부채가 40억에...><그래 그래 그건 아는 얘기고. 내가 좀 바쁘거든. 그래서 어쩌라구?> <예. 그게 주식을 몽땅 인수하겠다는 작자가 나타나서 형님께 매각의사를...>< 뭐 뭐라구? 너 지금 어디야. 의사는 무슨 의사? 빨리 가져가시라구해.><그럼 그런 줄 알고 처리하겠습니다.><야 고맙다. 절이라도 할 판이다. 어이구 이뻐. 술 한잔 사께.>


억수같이 비 오던 날. 우산 받고 뛰어가 굽신거리며 넘긴 주식이 한달후에 거짓말 안보태고 50배쯤 올랐다.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의외로 담담했다.  그때 이미 <돈버는 놈은 따로 있다>라는 대명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차였나 보다. 후배 녀석이라도 뒤로 챙겼으면 화가 날 만할텐데 들리는 소리는 이 친구도 깡그리 넘겼다고 한다. 그때 요행히 한국에 없었으면 대박 나지 않았을까. 기존 주식의 90%이상을 매집해 넘겼다하니(그게 인수조건이었다는 후문도 있고) 누구도 뒤로 뺄 여유가 없었을 게다. 내게 쏟아질 돈벼락이 아슬하게 비껴간 최후의 사례다. 그 친구가 부친상을 당했다.


창졸간에 당한 상이라 사람들에게 제대로 연락도 못했다고 한다. 나도 상주에게 직접 전화를 받고 왔다. 생각해보니 좀 특이한 경우이긴 하다. <형이나 저나 한때는 비서를 두셋씩 두고 썼잖아요. 이번에 회사사정때문에 다 내보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황당하더라구요. 어떻게해요. 내가 직접 걸고 그랬죠. 그랬더니 옆에서 뺏어다 자기들이 연락해주더군요. > 어. 그랬냐. 근데 나 여기 못찾아서 영안실 한바퀴 돌았거든. 다른 분들 오시기 전에 문앞에 세워둔 화환들좀 어디다 치워야겠더라. 먹글씨 이름붙은 화환으로 장사진을 쳐놔서 들어가는 구멍을 못찾겠어.


우리 부모님 만수무강하셔야겠지만, 나는 정말 이렇게 보내드릴 생각은 없다. 마땅히 상주는 크게 슬퍼야 하고 부모의 마지막 가는 길을 효심으로 밝혀야 한다. 이게 기본이다. 알만한 이름의 회사와 사장 명의로 보낸 꽃무덤이 아무리 즐비하다 한들 그것이 상주의 효심을 대신할 수도 없고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승의 모든 욕심에서 홀연히 벗어난 망자가 화환의 열병식을 보며 자식의 출세를 기특하게 생각하진 않으리라. 


상주의 슬픔을 걱정하며 함께 나눌 친구는 두셋이면 충분하고 너댓이면 많다. 고인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생전의 추억을 고인의 가족들에게 전하며 추모하는 것으로 족하다. 망자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관행으로 와서 드리는 인사는 번거롭고 부담스러울 뿐이다. 평소에 고인이 좋아하던 꽃으로 단을 정성껏 꾸미고 사흘밤낮을 정성껏 마음으로 모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고인을 가까이 모시지 못한 자손들에게 어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효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이 소중한 시간을 뺏거나 용훼하는 방문객은 사절하는게 옳다. 아낙들이 음식대접하느라 부산떨고, 상주가 손님 때문에 빈소를 비우고 식당에 와 앉아있어야 하며, 무례한 이들에게 손목을 잡혀 급기야 술까지 들이켜야 하는 작태는 오랑캐도 하지 않는 비례다.


상가를 나오다가 문득 얼마전 역시 부친상을 치른 선배가 생각나 전화했다. 그도 마침 이곳에 오는 중이라했다. <어떻게 지내는거야. 사업은 여전히 잘되는가.>< 으응. 지금 청산중이야. 직원들 다 내보내고 있어. 다음주면 한가해질거야. 연락하께.><그래? 힘들겠군. 불가피하다면 어쩌겠어. 힘내.> 내가 수재로 인정하는 정말 몇안되는 사람중의 하나다. 서울대-KAIST에 20대 박사이며 유창한 경상도 영어를 구사하는 IT 벤처업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4년전에 150억을 모집해 만든 회사를 2년만에 청산하고, 그후 십수억을 들여 세운 회사도 이번에 정리한다는 것이다. 이제 뭐할 건가 차분히 생각해봐야겠다고 한다. 


차분한 생각은 처음 실패했을 때 했어야 옳았다. 아마 그는 자기 실수를 인정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라고 위로하니까 정말 그런 줄 알았던 게다. 자기 실수를 다른 이들이 알기전에 얼른 나무 위로 올라가서 아무렇지 않은 듯 더 심하게 재주를 넘다가 이번에 아주 제대로 떨어진 셈이다. 실패를 가릴 마음을 먹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입증이 됐지만 그건 실수가 아니었다. 분명한 실패였다.


물론 반성했을 것이다. 쓰디쓴 고배도 홀로 들이켰으리라. 하지만 그 반성은 실수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반성이 <어쩌다 내가 그런 실수를 했을까>의 수준이어선 안된다.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실수 그 밑바닥에 혹시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게 아닐까?> 이런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또 그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고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겠다고 하는 점이다. 


남들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진즉에 영어학원 했으면 한몫 챙겼을 텐데> <초상집엔 역시 화환이여. 문전에 쫙 세워놔서 촌놈들 야코부터 죽여> <너 그거 실패 아냐, 어쩌다 실수한거지. 빨리 싹 잊어먹고 새출발해.> 듣기에 좋은 말이다. 또 세상사람들 거개가 그리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은 뭐라 해도 그리 살고 싶지는 않다. 길이 아니면 애시당초 가지 않아야 한다. 상주면 상주답게 효심으로 고인을 보내드리는게 옳다. 실수가 아니라 실패다. 실패를 받아들이고 자기 성찰로 들어가야 한다. 오늘 하루 반나절에 확인한 내 삶의 원칙이 이만큼이다. 세상은 내 원칙과는 궤도를 달리하며 도는 것 같다. 먹고 사는 것도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구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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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26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 나실 때 저의 '오래된 수첩'도 읽어보시길......

 

어머니는 이번에 건물 짓는데 쓴 빚을 다 갚고 가시겠단다. 용을 쓰면 한 5년 걸릴텐데 그전엔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고 한다. 나중에 무슨 소릴 들을려고 빚을 남길소냐, 재산은 못남겨도 빚은 절대 안 넘길테니 걱정말라 하신다. 정말 걱정이다. 어머니가 빚을 빨리 갚게 될까봐 큰 걱정이다. 보아라. 나는 그 빚이 절대로 다 갚아지지 않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다. 동방삭이 삼년고개에서 내리 굴렀듯 빚이 계속 남고 남아서 어머니가 백년천년 만수무강해야 한다. 도대체 어머니의 사생관을 나같은 범부는 가늠조차 할 길이 없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숨을 깊게 들이 쉰다. 이윽고 허파의 꽈리들이 산소를 충분히 빨아 들였다고 느꼈을 때 길게, 아주 길게 토해낸다. 나는 호흡한다. 호흡하므로 살아있다. 마지막 호흡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번 내쉼으로 이생이 끝난다면..더 이상 호흡하지 않을 때 죽음이다. 산소결핍으로 심장이 멈추고, 뇌가 멈추고, 내 몸의 모든 장기들이 작동을 중지한다. 정적이 깔리고 서서히 암전이 된다. 살아온 시간들, 수백억 기가바이트의 기억들이 지워진다. 최후의 파노라마가 뇌리를 스쳐간다. 사랑도 슬픔도 고뇌와 기쁨. 그렇게 의미지우려 했던 많은 것들이 그저 하나의 스틸사진으로 지나간다. (사진의 미학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떨굴 마지막 눈물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삶을 말할 때는 그리도 방정을 떨던 혀가 죽음 앞에서는 빳빳이 굳는다. 지구에 살았던 인간들이 저마다 한번씩은 맞닥뜨렸을 그 순간이 언젠가 내게도 올 것이다. 

오전 9시경 아침을 먹던 중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어머니에게서 온 것인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설명 없이 '빨리 대학병원으로 오라'고 하셨다. (2000. 5.29)  

어느날 나의 가족에게도 이런 순간은 오리라. 그들은 암이나 당뇨, 또는 그와 유사한 병에 대해 듣게 될 것이고,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게 될 것이다.  석달이라면 짧다고 생각할까, 일년이면 아직 멀었구나하며 안도할까. 그리고나서 가족들은 내게 그 사실을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아주 짧게 논의할거다. 만약 알리지 않았다간 막판에 무슨 봉변을 당할 지 모를테니, 아마 누가 알릴 것인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겠지. 누구라도 상관없다. 다만 석달'이나', 일년'이나' 남았다고 말을 꾸며주길 바랄 뿐. 나는 귀가 얇은 사람이니까.

내가 신을 믿지 않고 확고한 내세관이 없다면 많이 당황할 것이다. 힘들고 고단한 삶이었을 지언정 죽음의 공포와 고통에 비하면 춘삼월 꽃놀이패 아닌가.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말은 하지만 죽자고 달려들면 일단 피하고 보는게 인지상정이다. 교회를 다녀볼까, 불경을 다시 한번 읽어볼까. 병든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으려니와 무엇보다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 평생 좌충우돌하며 살아왔는데 마지막까지 왔다갔다 수선을 떨면 곤란하지 않겠나.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빛, 색깔, 공기>(대한기독교서회)는 고 김치영목사가 간암진단을 받고 4개월동안 살다 가시는 과정을 아들의 눈으로 보고 쓴 책이다.  최근 몇년동안 족히 수백권의 책을 들었지만 이번만큼 정독하려고 애썼던 적은 없었다. 예전같으면 반나절이면 다 읽고 서가 저 윗칸에 꽂을 책이었는데. 더 솔직히 말하면 기독교 출판사가 펴낸 목사님 책은 아예 살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인데. 나는 몸살로 신열에 들뜨면서도 얄팍한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평생 신을 모셨던 이 양반이 도대체 어떻게 죽는가를 뚫어지게 보면서, 나는 내 죽음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암이라는 말을 듣고 긴장하셨다. 아버지는 그 순간의 당혹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성적으로는 담담한 것 같다. 그런데 조금전에 혈압과 맥박을 쟀는데, 혈압이 상당히 높게 나왔어. 나도 모르게 불안한 모양이야." ...  나는 일반적으로 아버지와 같은 상태의 환자라면,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어느 정도 될 지 물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아버지가 평소 남기시려고 한 책을 쓰실 시간이 될지를 생각했다. 의사는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3개월이라는 말에 나는 매우 놀랐고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2000.6.5)

아버지는 어젯밤부터 심한 고통에 시달리셨다. 주치의가 처방해준 진통제로는 효과가 없었다. ... 저녁 무렵에 갑자기 많은 피를 토하셨다. 간호사가 뛰어와 바가지로 피를 받았다.... 수술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버지 곁으로 갔다. 나는 아버지의 손이 너무 차가워 가슴이 철렁했다. 아버지가 조그맣게 말씀하셨다. "너무 놀라지 마라. 지금 이렇게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아주 편안하단다." (2000. 7.24)

그 후 김목사는 자기가 쓸 소나무관을 만들고, 터너의 그림을 보며 기뻐하고 자기 장례예배의 설교문을 구술하며, 제자들을 만나다가 문득 아들에게 링거 주사를 뽑으라 한 후 오직 남은 시간을 주님과의 영적교제를 나누며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썼다.

오후 4시경 아버지의 숨소리가 약해지셨다. 너무나 평안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흡사 잠이 들어있는 듯 했다. 우리들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잘 가세요, 그동안 미안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 사이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어버지는 고요히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2000.10.7)

김목사에게 큰 딸은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다른 자식들이 아비의 죽음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담담하게 아버지에게 죽음을 전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아비와 딸은 그렇게 죽음 앞에서 마치 공깃돌을 놓듯 명랑하게 주고 받는다. 죽음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 생을 거쳐 다음 생으로 건너가는 과정이라는 믿음. 그리고 당사자가 능히 그 믿음에 충만해있다는 걸 잘 아는 사람만이 갖는 자신감.

그렇다. 어떠한 죽음도 결코 미화되지 않는다. 고통은 현실이며 웬만해선 피할 수가 없다. 고통도 없고 잘만하면 영원히 죽지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건 사기다. 그러고 보니 성서도 죽음의 실체를 가감없이 소상하게그려내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는 무한고통과 허무, 극복이 곧 성서의 양과 질면에서 모두 요체를 차지하고 있다. 이 대목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오늘날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테고, 성경도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졌을 것이다.

부활을 알지 못하는 나는 <부활로 나아가는 죽음>이란 손에 잡히지 않는 연기와 같은 얘기다. 또다른 생의 가능성이 열리지 않는다면 이생의 삶은 덧없을 뿐.  그렇다.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내세관이 반드시 있다는 것. 만일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오늘 하루의 삶이 얼마나 가치있는 시간으로 변할까. 하바드대학 도서관에 붙어있다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갈구하던 바로 그날이다>라는 어구만 떠올려도 잠깐이나마 정신이 버쩍 나는데.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정말 단 한쪽의 무지개도 허락되지 않는 걸까.

뒤에 부록으로 붙은 설교문은 미처 못읽었다. 시간이 없어서라기보다 눈에 들어오지 않아 못읽었다. 본문안으로 들어가는데 나같은 무신자들은 걸림돌이 많다. 기독교책은 이번이 처음이니 말 다했다. 오랜만에 교회를 한번 가볼까 생각했다. 공연히 마음에 품고 들어갔다가 빈 마음으로 나오는게 아닐까. 모처럼의 발심을 소중히 간직하려고 잠시 미뤘다. 발심 만으론 어림없다던데. 어디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나저나 천당도 부활도 별 생각없으시고, 당장 빚 말고는 이생에 특별한 집착도 없으신 우리 어머니. 언젠가 내가 개똥철학을 푸니까 같잖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 인생? 그거 그냥 지질하게 살다 가는거여.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별루 달블 거 없다. 괜시리 엄헌데다 헛심쓰지 말어라.>  아이고. 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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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푸의요정 2004-11-19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독하셨다니 기쁩니다. ^^
 

어제 금요일 저녁무렵부터 잇몸이 솟는다 싶더니 영락없이 몸살이다. 말 그대로 몸에 살이 낀 것이다. 지난 일주일 만사가 귀찮아 운동을 작파했었다. 어젠 하루 종일 공사판에, 부동산 업자에, 협회 간사님들까지 쉴새없이 만나고 돌아다녔다. 연거푸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인상을 썼더니 백수의 수호신께서 응징에 나선 것이다. 뭔 놈의 백수가 그러고 다니냐. 너같은 놈 때문에 다른 일백만 백수들이 낮잠한번 발뻗고 편히 못자는게야. 네 놈을 일벌백계해야쓰것다. 아무렴입쇼. 제 죄를 소인이 잘 압지요.

오후 다섯시만 되면 어둑어둑한게 집에 가고 싶다. 오늘 저녁엔 뭘 해먹을까 하며 지하철 역으로 막 들어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안갔으면 좋겠는데....) 일주일 전에 한 약속을 친구가 잊지 않고 챙긴다. 광화문으로 꼭 가야하나. 그냥 강남에서 만나면 안돼? <그냥 광화문으로 오셔. 앞으로 두시간 있다가 세종문화회관 뒤에서 만나.> 누구누구 오는데? < 잘 아는 사람. 여자만 둘. 나까지 셋. 복터진 줄 아시고.> 아 예~. (혹시 ?)

오랜만에 타본 퇴근시간 지하철은 여전히 지옥철이었다. 역삼에서 교대, 교대에서 종3가까지 땀으로 미역을 감았다. 딴에는 책을 보면서 쉬엄쉬엄 가보자고 탔던 것인데 세상은 여전히 바쁜 인파로 차고 넘쳤다. 압구정에서 한강을 넘어 가는 동안 내내 마음 조렸다. 이러다 한강물에 거꾸로 박히는 거 아냐. 그러면 완전 죽음인데. 아까 압구정에서 내릴 걸 그랬나. 에이XX., 아프다고 집에 가는건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잡생각으로 식은땀을 흘리노라니 벌써 옥수역 플랫폼이다. 나의 이런 병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옛날엔 비행기 타는게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어쩌다 다른 사람 돈으로 비즈니스를 타고 태평양을 건널 때는 스튜어디스의 엽렵한 섬김도, 골라 먹을 수 있는 기내식 메뉴도 내 허영기를 더 바랄 나위없이 만족시켜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탑승 몇분전에 동행인이 재수 옴붙는 얘길 한마디 한 것을 그만 한 귀로 듣고 말았다.  비행기 추락사고의 80%가 이륙후 5분내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날 따라 그 얘기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가뜩이나 찜찜한 판인데 하필이면 이 빌어먹을 비행기가 뜨자 마자 요동을 치는게 아닌가. 그날 일기도 괜찮았는데 탁자의 커피가 쏟아질 정도로 흔들릴게 뭔가 말이다. 나는 오금을 발발 떨어가며 마의 5분을 간신히 넘겼다.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짧지 않은 인생을 오롯이 반추했으며,  내가 잘못을 저지른 많은 분들께 용서를 빌었고, 천운으로 살아난다면 정말 착하게 살겠노라 철석같이 다짐했다. 그날의 사건 이후 나는 두시간이 넘는 비행은 극구 사양했다. 당연히 미국 출장도 딱 끊었다. 물론 그날의 약속은 곧바로 잊었다가 지금 생각났을 뿐이다.

그렇게 부대끼며 광화문 뒷골목까지 겨우 찾아갔다. 옥호가 뭐라고? <그냥 오향장육이라고 써있대.> 주식회사 짜장면이군. 그래 뭐 요즘 중국집 이름 다양하긴 하더라. 진짜루, 빠떼루, 몽고반점, 짬짜볶짜, ... 골목어귀에서 세번째 집을 찾으니 말 그대로 가로 간판에 <오향장육 전문점>이라고 써있었다. 물론 옆에 세로로 一龍 이라는 고유명사도 있었지만. (삼룡이나 구룡은 들어봤어도 일룡은 전원일기 일용엄마 말곤 처음이다. )

대학 졸업한 이후 그런 중국집은 처음이었다. 봉천 사거리 관악구청 맞은편 미도관이 그랬다. 쌍팔년도를 풍미했던 비닐 꽃자수 테이블보가 깔린 탁자와 황학동 고물시장에나 있을 법한 의자들이 등에 때 밀릴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마침 구석자리가 비어 잔뜩 구부리고 앉은 나는 주섬주섬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주인장은 내던지듯 네 개의 물잔과 물수건을 놓고 가버렸다. 딴 집은 식은 보리차라도 따라주더구만. 에이.  진즉에 온다던 친구는 그후로 이십분쯤 지나서야 도착했다. 그 친구도 주위를 둘레둘레 살피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도 여긴 처음이야. 이따가 올 사람이 여기가 그렇게 맛있다고 해서. 하여튼 좀 깬다.>

그 친구가 주차하러 나간 사이, 이 집을 강추했다던 여인(편의상 제2의 여인이라 부른다.)이 도착했다. 곁눈질로 보니 그녀 같았다. 내가 겸연쩍게 눈을 맞췄는데 이 여인 쓰윽 외면하는게 아닌가. 쳇 아닌가 두고보자. 딱 넌데. 이따 친구 오거든 얘기하지뭐. 일찍 수인사해봐야 어색하기만 하고. 난 읽던 페이지에 눈을 돌리고 금새 몰입했다. (그게 가능한 까닭은 제2녀에게 실례가 될 것이므로 밝히지 않는다.)

3~4분 지났을까.  <어 안녕하세요>어쩌구하는 귀익은 소리가 들렸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왜 그 친구는 어렵게 사적 모임을 주선하면서 참석자들의 친소관계를 미리 짚어보지 않았던 것일까. 가급적(절대로) 이렇게 만나길 원치않는 제3의 여인이 나타나신 것이다.

여기서 잠깐 제3의 여인에 대한 나의 불편한 심사를 밝히고자 한다. 한때 딱 일년동안 이벤트로 날새고 해떨어졌던 시절이 있었다. 남몰래 쑈PD를 꿈꾸었던 나는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코엑스 전체를 빌리는 엄청난 규모의 전시회를 그것도 한해에 네개씩이나 저질렀다. 물론 그때 이후로 나는 집안 행사조차 자제할 정도로, 이벤트없는 조용한 세상을 지향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때 만났던 그쪽 업계(이래야 어딘지 불분명할 터)의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자타가 공인하는 삼류(속칭 산마이)였다. 공사장 노가다들보다 일하는게 두서없고, 막무가내 꼴통인데다, 양아치식 위계질서를 숭상하고,  여우처럼 자기보호에 급급한 치들이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아니겠구나 했다. 회사에서 만나면 언제나 씩씩하고 남 잘 챙기는 직원이었기에 내 직업적 편견쯤은 언제라도 내동댕이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수호신이 있다면 , 그녀는 나를 밖에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나도 그녀를 그렇게 만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 쪽이 싫어서 여기로 왔다던 그녀는 그쪽의 대마왕이었으며, 그 삼류근성을 기대이상으로 유감없이 내게 보여주었다.  

<말로 듣던 얼굴이 아닌데요? 얼굴에 살집이 있으며 눈썹이 짙은 형이라고 들었는데 아니잖아요.> 어라. 첨보는 남정네한테 대뜸 얼굴 얘기부터 들이대시는구려. 허허 아마 몇년전의 모습을 얘기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게요. 지금은 그렇게 호남형은 아니신 듯 한데.> 미친X. 그럼 영남형이냐. 아님 범죄형이겠지. 말뽄새하곤. 허허. 반갑습니다. 그렇게 여자 셋과 남자 하나가 초라한 중국집 귀퉁이에 바퀴벌레처럼 몰켜 앉았다.

제2의 여인은 거침없이 오향장육 한접시와 오리알 두접시를 시켰고, <역시 꼬량주 아니겠어> 하며 술을 시켰다. 나는 욱신거리는 잇몸 핑계를 댔지만 그보단 예서 취하면 큰 사단 나겠다 싶어 청하를 한병 달라고 했다. 시커멓게 곯은 오리알이 먼저 나왔다. 입에 채 넣기도 전에 고린내부터 확 풍겼다. 보통 중식당 코스요리에 섞여 나오는 오리알을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한 입 넣은 나는 뇌에 미각중추를 즉각 마비시킬 것을 강력히 지시한 후, 침착하게 표정관리를 하면서 <먹고싶은 요리 리스트>에 등재돼있던 모든 오리알을 영원히 삭제해버렸다. 그보단 오향장육이 좀 나았다. 그게 정통인줄 몰라도 조그만 춘장접시에 수북히 담은 멀컹한 검은색의 오향 젤 덩어리는 있던 입맛도 떨어뜨리는 탁월한 효과를 냈다. 결국 오리알은 연신 <음 맛있어. 이렇게 맛있을 수가.>를 연발하던 제2녀가 말끔히 해치웠고 다른 두 여인과 나는 두 접시의 물만두로 저녁 겸 안주를 대신해야 했다. (그래도 난 오향장육을 부지런히 법도에 따라 먹었다. 나는 매너있는 남자임에 분명하다.) 

그날 무슨 오찬에서 NGO계의 유명인사 최모씨가 식사 후 커피로 가글을 하더란 얘기, 이태원에 가서 신수점을 본 얘기,  요새 한참 수다방의 단골화제로 떠오른 혈액형 얘기, 남녀 궁합 얘기 등을 나오는 대로 주워섬기며 연신 잔을 부딪히고, 옆 테이블의 소음에 양미간을 찌푸려가며 두시간을 보냈다. 이제 그만 가자고 일어나면서 제2녀를 제외한 두 여인이 강남에 가서 한잔 더 하자고 했다. <알어 알어. 이럴 줄 내가 알았남. 나두 깜짝 놀랐어. 걔 특이하데.> 내 질책어린 눈초리를 간파한 친구는 제2녀가 화장실 간 사이 먼저 선수를 치더니 빨리 가자고 팔을 잡아 끌었다.   

밤 열시에 광화문을 떠나 강남에 도착한 것은 무려 한시간 뒤. 오늘의 악녀 제2의 여인께서 집 앞까지 차를 끌고 들어갔던 탓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안하무인의 행동방식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요즘 젊은애들이라면 모를까. 낫살이 마흔을 넘고 사회밥도 스무해 가까이 먹은 사람이.  참 4가지 없다고 생각했다. 불편한 중국집에서 구겨 앉았다가 다시 지프차에서 한시간을 앉아 있으려니 차멀미가 나고 온 입이 욱신거렸다. 긴 여정을 겨우 끝내고 바에 들어온 일행은 잭콕(여인들)과 코로나(나)를 시켜놓고 공짜안주로 나온 양파링을 우적우적 깨물어 먹었다. 그후로 일어났던 일들은 여기 적어놓으면 나중에 혹시 읽었을 때 다시 생각날까 무서워 아예 빼버릴란다. 그날 제3녀의 4가지는 인내의 선을 훌쩍 넘겼다.  

분당으로 돌아오는 새벽 택시안에서 생각하니 한심했다. 바로 엊그제 다짐하길 놀 때 제대로 놀자, 꼭 못노는 놈이 그 시간에 안해도 되는 일을 열심히 하기 땜에 우리나라가 이 모양 아닌가. 타의 모범이 되게 잘 놀자. 일 잘하는 것보다 백배쯤 잘 놀자 했거늘 이게 무슨 횡액이란 말인가. 이러다  <아무래도 난 일이나 하는게 맞겠어> 하고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마음에 병이 있을 땐 오늘 같은 자리는 절대로 피하는게 옳았다. 특히 제2, 제3의 여인까지 등장하는 모임은 금기임을 확실히 기억하자. 간 밤에 구강소독제를 오래 물고 있었더니 아침에 혀 반토막이나 얼얼한게 무감각하다.  이마가 따땃한 것이 열이 나기 시작하고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삭신이 쑤신다.

그렇게 그날 밤 몸살은 내게 찾아왔다.  오랜만에 오신 손님이다. 게다가  내 부덕을 엄히 징치할 목적으로 찾아주셨으니, 잘 보살폈다가 편히 보내드려야겠다.  Thanks  God, It's  Fri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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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14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재밌는 글 오랜만에 읽는군요.

죄송합니다. 몸살기는 좀 가셨는지요?

조선효자님의 글을 자주 읽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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