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이번에 건물 짓는데 쓴 빚을 다 갚고 가시겠단다. 용을 쓰면 한 5년 걸릴텐데 그전엔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고 한다. 나중에 무슨 소릴 들을려고 빚을 남길소냐, 재산은 못남겨도 빚은 절대 안 넘길테니 걱정말라 하신다. 정말 걱정이다. 어머니가 빚을 빨리 갚게 될까봐 큰 걱정이다. 보아라. 나는 그 빚이 절대로 다 갚아지지 않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다. 동방삭이 삼년고개에서 내리 굴렀듯 빚이 계속 남고 남아서 어머니가 백년천년 만수무강해야 한다. 도대체 어머니의 사생관을 나같은 범부는 가늠조차 할 길이 없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숨을 깊게 들이 쉰다. 이윽고 허파의 꽈리들이 산소를 충분히 빨아 들였다고 느꼈을 때 길게, 아주 길게 토해낸다. 나는 호흡한다. 호흡하므로 살아있다. 마지막 호흡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번 내쉼으로 이생이 끝난다면..더 이상 호흡하지 않을 때 죽음이다. 산소결핍으로 심장이 멈추고, 뇌가 멈추고, 내 몸의 모든 장기들이 작동을 중지한다. 정적이 깔리고 서서히 암전이 된다. 살아온 시간들, 수백억 기가바이트의 기억들이 지워진다. 최후의 파노라마가 뇌리를 스쳐간다. 사랑도 슬픔도 고뇌와 기쁨. 그렇게 의미지우려 했던 많은 것들이 그저 하나의 스틸사진으로 지나간다. (사진의 미학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떨굴 마지막 눈물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삶을 말할 때는 그리도 방정을 떨던 혀가 죽음 앞에서는 빳빳이 굳는다. 지구에 살았던 인간들이 저마다 한번씩은 맞닥뜨렸을 그 순간이 언젠가 내게도 올 것이다. 

오전 9시경 아침을 먹던 중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어머니에게서 온 것인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설명 없이 '빨리 대학병원으로 오라'고 하셨다. (2000. 5.29)  

어느날 나의 가족에게도 이런 순간은 오리라. 그들은 암이나 당뇨, 또는 그와 유사한 병에 대해 듣게 될 것이고,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게 될 것이다.  석달이라면 짧다고 생각할까, 일년이면 아직 멀었구나하며 안도할까. 그리고나서 가족들은 내게 그 사실을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아주 짧게 논의할거다. 만약 알리지 않았다간 막판에 무슨 봉변을 당할 지 모를테니, 아마 누가 알릴 것인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겠지. 누구라도 상관없다. 다만 석달'이나', 일년'이나' 남았다고 말을 꾸며주길 바랄 뿐. 나는 귀가 얇은 사람이니까.

내가 신을 믿지 않고 확고한 내세관이 없다면 많이 당황할 것이다. 힘들고 고단한 삶이었을 지언정 죽음의 공포와 고통에 비하면 춘삼월 꽃놀이패 아닌가.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말은 하지만 죽자고 달려들면 일단 피하고 보는게 인지상정이다. 교회를 다녀볼까, 불경을 다시 한번 읽어볼까. 병든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으려니와 무엇보다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 평생 좌충우돌하며 살아왔는데 마지막까지 왔다갔다 수선을 떨면 곤란하지 않겠나.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빛, 색깔, 공기>(대한기독교서회)는 고 김치영목사가 간암진단을 받고 4개월동안 살다 가시는 과정을 아들의 눈으로 보고 쓴 책이다.  최근 몇년동안 족히 수백권의 책을 들었지만 이번만큼 정독하려고 애썼던 적은 없었다. 예전같으면 반나절이면 다 읽고 서가 저 윗칸에 꽂을 책이었는데. 더 솔직히 말하면 기독교 출판사가 펴낸 목사님 책은 아예 살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인데. 나는 몸살로 신열에 들뜨면서도 얄팍한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평생 신을 모셨던 이 양반이 도대체 어떻게 죽는가를 뚫어지게 보면서, 나는 내 죽음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암이라는 말을 듣고 긴장하셨다. 아버지는 그 순간의 당혹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성적으로는 담담한 것 같다. 그런데 조금전에 혈압과 맥박을 쟀는데, 혈압이 상당히 높게 나왔어. 나도 모르게 불안한 모양이야." ...  나는 일반적으로 아버지와 같은 상태의 환자라면,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어느 정도 될 지 물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아버지가 평소 남기시려고 한 책을 쓰실 시간이 될지를 생각했다. 의사는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3개월이라는 말에 나는 매우 놀랐고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2000.6.5)

아버지는 어젯밤부터 심한 고통에 시달리셨다. 주치의가 처방해준 진통제로는 효과가 없었다. ... 저녁 무렵에 갑자기 많은 피를 토하셨다. 간호사가 뛰어와 바가지로 피를 받았다.... 수술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버지 곁으로 갔다. 나는 아버지의 손이 너무 차가워 가슴이 철렁했다. 아버지가 조그맣게 말씀하셨다. "너무 놀라지 마라. 지금 이렇게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아주 편안하단다." (2000. 7.24)

그 후 김목사는 자기가 쓸 소나무관을 만들고, 터너의 그림을 보며 기뻐하고 자기 장례예배의 설교문을 구술하며, 제자들을 만나다가 문득 아들에게 링거 주사를 뽑으라 한 후 오직 남은 시간을 주님과의 영적교제를 나누며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썼다.

오후 4시경 아버지의 숨소리가 약해지셨다. 너무나 평안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흡사 잠이 들어있는 듯 했다. 우리들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잘 가세요, 그동안 미안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 사이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어버지는 고요히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2000.10.7)

김목사에게 큰 딸은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다른 자식들이 아비의 죽음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담담하게 아버지에게 죽음을 전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아비와 딸은 그렇게 죽음 앞에서 마치 공깃돌을 놓듯 명랑하게 주고 받는다. 죽음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 생을 거쳐 다음 생으로 건너가는 과정이라는 믿음. 그리고 당사자가 능히 그 믿음에 충만해있다는 걸 잘 아는 사람만이 갖는 자신감.

그렇다. 어떠한 죽음도 결코 미화되지 않는다. 고통은 현실이며 웬만해선 피할 수가 없다. 고통도 없고 잘만하면 영원히 죽지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건 사기다. 그러고 보니 성서도 죽음의 실체를 가감없이 소상하게그려내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는 무한고통과 허무, 극복이 곧 성서의 양과 질면에서 모두 요체를 차지하고 있다. 이 대목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오늘날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테고, 성경도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졌을 것이다.

부활을 알지 못하는 나는 <부활로 나아가는 죽음>이란 손에 잡히지 않는 연기와 같은 얘기다. 또다른 생의 가능성이 열리지 않는다면 이생의 삶은 덧없을 뿐.  그렇다.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내세관이 반드시 있다는 것. 만일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오늘 하루의 삶이 얼마나 가치있는 시간으로 변할까. 하바드대학 도서관에 붙어있다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갈구하던 바로 그날이다>라는 어구만 떠올려도 잠깐이나마 정신이 버쩍 나는데.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정말 단 한쪽의 무지개도 허락되지 않는 걸까.

뒤에 부록으로 붙은 설교문은 미처 못읽었다. 시간이 없어서라기보다 눈에 들어오지 않아 못읽었다. 본문안으로 들어가는데 나같은 무신자들은 걸림돌이 많다. 기독교책은 이번이 처음이니 말 다했다. 오랜만에 교회를 한번 가볼까 생각했다. 공연히 마음에 품고 들어갔다가 빈 마음으로 나오는게 아닐까. 모처럼의 발심을 소중히 간직하려고 잠시 미뤘다. 발심 만으론 어림없다던데. 어디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나저나 천당도 부활도 별 생각없으시고, 당장 빚 말고는 이생에 특별한 집착도 없으신 우리 어머니. 언젠가 내가 개똥철학을 푸니까 같잖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 인생? 그거 그냥 지질하게 살다 가는거여.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별루 달블 거 없다. 괜시리 엄헌데다 헛심쓰지 말어라.>  아이고. 엄니.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샴푸의요정 2004-11-19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독하셨다니 기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