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지 않은 윗 연배에게 안부전화를 걸어 점심 약속을 잡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난 좀처럼 그런 선행을 실천하지 못한다. 선배나 어른들에게 참 데면데면한 아랫사람이다. 웬만해선 결코 곁을 내드리지 않는 쌀쌀맞은 후배에 분명하다. 그러면서 바라기는 우라지게 바란다. 반갑고도 기특하지 않은가. 간혹 불측한 의도를 가진 친구들이 속내를 드러내긴 해도 그게 두려워 만남의 기쁨을 주저하진 않는다.  


테헤란로 길바닥에서 이십분쯤 기다렸다.(그래도 기분 좋다.) 한낮이지만 하필 서있겠다고 한 좌표가 응달이라 공기가 수월찮게 냉냉하다. (하지만 냉장고 안이라도 상관없다.) 조금있으면 도착한다던 친구가 오지 않는다. 십오분만에 문자가 왔다. 죄송한데 오분만 더 기다려주십사. (O.K. 얼마든지.) 그때부터 아예 가방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시간을 때운다. <지나가는 레이디 흘끔거리기.> 킬링타임의 기본 초식이다. 음... 시커먼 남자들만 떼 지어 걸어 간다. 그렇다면 다음은 <건물 구조 분석하기.> 예전엔 없었던 내공인데 올해 집안 일 때문에 저절로 눈길이 간다. 택시를 타도 지나치는 건물들이 예사롭지 않다.... 역시 화강석 물갈기는 금방 때가 타는군. 처음만 반짝하지 원..... 스텐레스 판넬도 배수처리 안해주니까 눈뜨고 못봐주겠네. ...어라 저 유리창은 무슨 색깔이지? 못보던 건데. 25밀리 블루 복창이 저건가? 


<형님. 저 왔습니다. 너무 오래~> < 어 그래. 오랜만인데. 안변했네. 그대로군.> <와 살 많이 빼셨는데요. 바람불면 날아가겠어요.><허 이사람이. 가세. 밥 먹자구.>  실로 3년반만에 마주 앉아 5천5백원자리 치즈돈까스 모듬 정식 세트 메뉴 A라는 긴 이름의 점심을 두 개 주문했다.


<예전에 TEPS하실 때 말입니다. 그때 뒤로 학원 하나 차리셨으면 지금 돈방석에 앉으셨을 텐데. 곁에서 왔다갔다하던 애들이 지금 장난 아니랍니다. 영어시장이 그때보다 열배는 커졌잖아요.> 그러면서 누구누구 이름을 댄다. 워낙 이름 외우는데 천치라 누군지 가물가물하다. 씩 웃으며 말했다. <왜? 배아프냐?> <그럼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참.><그 친구들이야 피라미들이고. 정말 웃기는 사람들은 따로 있잖아. 시사어쩌구하는 학원 회장하고, 파고다 저쩌구하는 학원 회장님네 말야. 그 양반들 강남에 삐까번쩍하는 빌딩 올리고 지금도 떼돈을 긁어모으고 있지? 근데 30~40년동안 내내 수강료를 욹어먹었는데 지금도 토플평균이 세계에서 꼴찌라면 솔직히 책임지고 배째야 되는거 아닌가. 언젠가 두 양반중에 하나가 자서전 따위를 내면서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산 증인>이라나 뭐라나 주접을 떨어놓은 걸 보니까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나 싶더군.>


당시엔 사람들과 존경과 믿음을 나누는 일도 주위에 널리고 쌨는데, 하필이면 교육이라는 미명아래 고작 눈속임으로 치부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까. TEPS를 시작했다가 재빨리 손을 턴 것도 그 도적질에 한 몫 끼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야. 지금 내게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한들 결과는 마찬가지가 될 거라고 장담하네.


어쩌자고 요새 입만 벌리면 훌륭한 말씀만 늘어놓으실까. 뒷감당이나 하실 수 있겠소? 그 친구와 헤어지면서 속에선 이런 질문들이 쏟아졌다. 한편에선 그래, 말이 씨가 된다하니 부지런히 파종하렴. 나중에 좋은 씨에서 좋은 넝쿨이 나와 내 발목을 꽉 붙들어매게. 이런 말도 들렸다. 에잇 모르겠다. 하지만 뭐 틀린 얘긴 아니잖아.


부랴부랴 이번엔 후배 부친상을 조문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요즘 장안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는 XX월드의 설립자이며 얼마전까지 최대주주였던 친구다. 나도 그 덕분에 그 회사 주식을 꽤 많이 갖고 있었다. 일년 좀 더 됐나보다. 이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형님. 긴히 드릴 말씀이...>< 뭔데. 회사 망했냐?> 워낙 벤처들이 막가던 시절이라 에구 또 하나 접는구만 그렇게 지레 포기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지금 누적부채가 40억에...><그래 그래 그건 아는 얘기고. 내가 좀 바쁘거든. 그래서 어쩌라구?> <예. 그게 주식을 몽땅 인수하겠다는 작자가 나타나서 형님께 매각의사를...>< 뭐 뭐라구? 너 지금 어디야. 의사는 무슨 의사? 빨리 가져가시라구해.><그럼 그런 줄 알고 처리하겠습니다.><야 고맙다. 절이라도 할 판이다. 어이구 이뻐. 술 한잔 사께.>


억수같이 비 오던 날. 우산 받고 뛰어가 굽신거리며 넘긴 주식이 한달후에 거짓말 안보태고 50배쯤 올랐다.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의외로 담담했다.  그때 이미 <돈버는 놈은 따로 있다>라는 대명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차였나 보다. 후배 녀석이라도 뒤로 챙겼으면 화가 날 만할텐데 들리는 소리는 이 친구도 깡그리 넘겼다고 한다. 그때 요행히 한국에 없었으면 대박 나지 않았을까. 기존 주식의 90%이상을 매집해 넘겼다하니(그게 인수조건이었다는 후문도 있고) 누구도 뒤로 뺄 여유가 없었을 게다. 내게 쏟아질 돈벼락이 아슬하게 비껴간 최후의 사례다. 그 친구가 부친상을 당했다.


창졸간에 당한 상이라 사람들에게 제대로 연락도 못했다고 한다. 나도 상주에게 직접 전화를 받고 왔다. 생각해보니 좀 특이한 경우이긴 하다. <형이나 저나 한때는 비서를 두셋씩 두고 썼잖아요. 이번에 회사사정때문에 다 내보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황당하더라구요. 어떻게해요. 내가 직접 걸고 그랬죠. 그랬더니 옆에서 뺏어다 자기들이 연락해주더군요. > 어. 그랬냐. 근데 나 여기 못찾아서 영안실 한바퀴 돌았거든. 다른 분들 오시기 전에 문앞에 세워둔 화환들좀 어디다 치워야겠더라. 먹글씨 이름붙은 화환으로 장사진을 쳐놔서 들어가는 구멍을 못찾겠어.


우리 부모님 만수무강하셔야겠지만, 나는 정말 이렇게 보내드릴 생각은 없다. 마땅히 상주는 크게 슬퍼야 하고 부모의 마지막 가는 길을 효심으로 밝혀야 한다. 이게 기본이다. 알만한 이름의 회사와 사장 명의로 보낸 꽃무덤이 아무리 즐비하다 한들 그것이 상주의 효심을 대신할 수도 없고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승의 모든 욕심에서 홀연히 벗어난 망자가 화환의 열병식을 보며 자식의 출세를 기특하게 생각하진 않으리라. 


상주의 슬픔을 걱정하며 함께 나눌 친구는 두셋이면 충분하고 너댓이면 많다. 고인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생전의 추억을 고인의 가족들에게 전하며 추모하는 것으로 족하다. 망자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관행으로 와서 드리는 인사는 번거롭고 부담스러울 뿐이다. 평소에 고인이 좋아하던 꽃으로 단을 정성껏 꾸미고 사흘밤낮을 정성껏 마음으로 모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고인을 가까이 모시지 못한 자손들에게 어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효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이 소중한 시간을 뺏거나 용훼하는 방문객은 사절하는게 옳다. 아낙들이 음식대접하느라 부산떨고, 상주가 손님 때문에 빈소를 비우고 식당에 와 앉아있어야 하며, 무례한 이들에게 손목을 잡혀 급기야 술까지 들이켜야 하는 작태는 오랑캐도 하지 않는 비례다.


상가를 나오다가 문득 얼마전 역시 부친상을 치른 선배가 생각나 전화했다. 그도 마침 이곳에 오는 중이라했다. <어떻게 지내는거야. 사업은 여전히 잘되는가.>< 으응. 지금 청산중이야. 직원들 다 내보내고 있어. 다음주면 한가해질거야. 연락하께.><그래? 힘들겠군. 불가피하다면 어쩌겠어. 힘내.> 내가 수재로 인정하는 정말 몇안되는 사람중의 하나다. 서울대-KAIST에 20대 박사이며 유창한 경상도 영어를 구사하는 IT 벤처업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4년전에 150억을 모집해 만든 회사를 2년만에 청산하고, 그후 십수억을 들여 세운 회사도 이번에 정리한다는 것이다. 이제 뭐할 건가 차분히 생각해봐야겠다고 한다. 


차분한 생각은 처음 실패했을 때 했어야 옳았다. 아마 그는 자기 실수를 인정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라고 위로하니까 정말 그런 줄 알았던 게다. 자기 실수를 다른 이들이 알기전에 얼른 나무 위로 올라가서 아무렇지 않은 듯 더 심하게 재주를 넘다가 이번에 아주 제대로 떨어진 셈이다. 실패를 가릴 마음을 먹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입증이 됐지만 그건 실수가 아니었다. 분명한 실패였다.


물론 반성했을 것이다. 쓰디쓴 고배도 홀로 들이켰으리라. 하지만 그 반성은 실수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반성이 <어쩌다 내가 그런 실수를 했을까>의 수준이어선 안된다.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실수 그 밑바닥에 혹시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게 아닐까?> 이런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또 그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고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겠다고 하는 점이다. 


남들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진즉에 영어학원 했으면 한몫 챙겼을 텐데> <초상집엔 역시 화환이여. 문전에 쫙 세워놔서 촌놈들 야코부터 죽여> <너 그거 실패 아냐, 어쩌다 실수한거지. 빨리 싹 잊어먹고 새출발해.> 듣기에 좋은 말이다. 또 세상사람들 거개가 그리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은 뭐라 해도 그리 살고 싶지는 않다. 길이 아니면 애시당초 가지 않아야 한다. 상주면 상주답게 효심으로 고인을 보내드리는게 옳다. 실수가 아니라 실패다. 실패를 받아들이고 자기 성찰로 들어가야 한다. 오늘 하루 반나절에 확인한 내 삶의 원칙이 이만큼이다. 세상은 내 원칙과는 궤도를 달리하며 도는 것 같다. 먹고 사는 것도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구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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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26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 나실 때 저의 '오래된 수첩'도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