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때 쯤이면 2004년도 최후의 몇분 만을 남기고 있겠지. 올 한해를 마무리하는 혼자만의 시공으로 남은 한시간을 쓰려 한다.

긴 여행이었다. 떠날 때는 막막하고 아득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아무리 양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가늘게 떠봐도 종착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 곳의 기후와 생활여건,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목이 타게 찾았던 것은 돌아보니 이제 알겠다. 편안함. 그리고 안정.

불혹을 넘어서야 나의 몸 나의 혼은 피곤을 호소해왔다. 영원할 것 같았던 눈동자의 별빛은 사라졌다. 거친 삶과 황폐한 관계는 내 입술을 갈라터지게 했고, 조급한 마음 그리고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불운의 징후로 나는 편한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먼 훗날 궁금해질까봐 적어놓는다. 원래 난 그렇게 2004년을 시작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닳아버린 살틈으로 인광을 번쩍이며 드러나는 내 백골을 망연자실 볼 용기가 없었다. 난 그런 놈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그리 됐을까. 내 마음속에 꽁꽁 갇혀있던 백수의 욕망을 노크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그들은 천천히 좋은 일을 찾으라고, 서둘지 말라고 했던 얘기였을 게다. 그런데 내가 자발적으로 오해해버렸다. 나중에 그들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적잖이 당황하는 듯 했다. 그렇게 2004년 나의 여행은 타의와 오해로 출발됐다.  

처음 석달동안은 내가 놓인 낯설은 지점에 적잖이 당황했다. 요즘 뭐하느냐는 말에 대답을 찾느라 우물쭈물했다. 그땐 이렇게 대답했다. <어... 후배들 사업 도와주고 있어. 좀 쉬면서.> 그러면서 속으로 내게 말했다. <그렇게 창피하면 그냥 일하지 그래?>  그 무렵 책을 많이 읽었다. 결코 쉬지 않았다. 아니 쉴 수가 없었다. 시퍼렇게 날을 새워야 했다. 그리고 가족들을 파리로 보냈다. 정면 승부를 걸었다. 정말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활들을 현실로 맞게 됐다. 가족의 도불은 최대한 그들 스스로의 결정에 맡겼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진정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때 나의 결정은 아마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뒤바꿔놓을 것이다.  

봄이 되면서 내 대답도 세련되게 변했다. <음. 올핸 안식년이야. 일년쯤 쉬어줘야 또 움직이지.> 아직 허위와 가식에서 석방되지 못했다. 한심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0.78평 독방에서 40년형을 마치고 나온 장기수였다. <당신의 사상과 행동에 아직도 확신을 갖고 있나요?> 이따위 싹없고 무식한 질문을 하는 기자놈은 딱 일년만 그 방에 쳐넣어야 한다. <나는 지금 그 방에서 나왔을 뿐이오. 기자 양반.> 어쨌든 스스로 주는 안식년이라. 백수를 다시 정의할 때 써먹을만한 표현 아닌가. 듣는 이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짜식, 돈푼깨나 모은 모양이군. 기러기에다 안식년이라? 조오케따.> 아이들 교육에 대해 연구 많이 했다. 이 또한 생전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성공하는 아이들의 공부습관 개념을 잡고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제법 많은 일을 해냈다. 아버지가 키운 토마토와 신선한 야채들. 녹차 프라푸치노, 황홀한 봄꽃 향기, 싱그러운 초여름의 풀냄새,  적당히 감미로운 고독과 일.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때 나의 생산성이 최고로 발휘된다는 사실.

뇌성벽력의 시간이 왔다. 광인처럼 좌절하고 분노했다. 내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이런 경험도 처음이다. 계기는 없었다. 어느날 심한 우울증이 덮쳐왔다. 그러다 며칠가면 괜찮아 지겠지. 난 원래 낙천적인 놈이니까. 한주가 가고 한달이 가도 증세는 더 심해졌다. 24시간 잡념과 울렁거림이 숨통을 조였다. <실패한 인생이잖아. 까불다가 깨졌으니까 반성해야지. 내가 맨날 그 모양 그꼴이지뭐. 능력도 없는게 조용히 살란다.> 책도 팽개치고, 일도 놓았다. 머리속이 와글거리고 부글부글 끓었다. 8월말부터 9월말까지 정말 힘들었다. 이 여행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언제쯤 육지에 닿을 것인지 불안했다. 하릴없이 걷고 달렸다. 티셔츠를 비틀어짜면 한컵이상의 땀이 주르륵 쏟아졌다. 그래도 죽기살기로 계속 달렸다. 이러다 이대로 망가지는게 아닐까.

늪으로 빠져들고 있던 내게 잠깐 희망의 손을 뻗쳐준 것이 코칭이다. <어어 이건 얘기가 틀린데>(협회 사무처장 제안을 느닷없이 받고)하다가 <그래 까짓거 노느니 방위간다고 도와주지>(연말까지 딱 석달만 공짜로 뛰어주께)  이렇게 놀멘놀멘 시작했던 일이 죽음같은 무력감에서 나를 구해주었다. 회사 사람들과 일로 만나게 됐다. 돈이 개입되지 않으니 심신도 편할 밖에. 즐겁게 일했고 좋은 사람들이 작은 힘을 모아 큰 힘이 되게 해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말라.  기대하지도 말고 그저 결과에 만족하라.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오고 좋은 마음이 들어가면 좋은 결과로 나올 것이다. 예전같으면 말도 안되는 얘기를 신실하게 믿게 됐다.

사람들을 안만나고 일년을 보낼 줄 알았다. 그런데 만날 사람들은 만나게 돼있는 모양이다. 새 사람들을 새 마음으로 만났다. 변치말고 그 마음으로 만날 생각이다. 하루하루 해야할 일들과 만나야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저 겸손하게 하루를 보내면 그뿐이었다. 코치대회를 마치고 코칭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빠리에 갔다. 열이틀동안 이국의 거리를 걸으면서 내게 소중한 것들을 생각했다. 처음에 안보였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너무 멀었고 너무 컸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총기를 잃었으며 그나마도 거듭된 불면으로 촛점을 맞출 수 없었다.

결국 보일 것은 보이게 마련이다. 적어도 보려는 의지만 살아있다면 반드시 볼 수 있다. 그렇게 내 여행은 종착점을 저 앞에 두고 있다. 끝이 보인다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하다. 그게 신기루이든 진짜 종점이든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곳부터 새 길이 열린다는 사실. 그 길 역시 평탄하게 닦인 길은 아니겠지만, 행복하게 갈 것이라는 점이다.

올해를 함께 보낸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한해를 무사히 잘 마친 내 자신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04년 내 궤적의 일단을 여기 알라딘의 서재속에 남기고 2005년을 맞으러 간다.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 미명의 새벽, 서릿발을 깨치면서 그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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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1-0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5년도에도 변함없이 알라딘에 또 오실거죠? 여긴 님의 서재니까.

제가 효자님 서재를 처음으로 노크한게 가을 되오면서부터 인 것 같아요. 그때 님의 글에서 스산한 외로움이 느껴졌었죠. 그래도 잘 해쳐나오셨다는 생각이 이 글에서 물씬 느껴집니다.

40대면 불혹이라해서 좀 더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사추기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님의 글이 남의 글 같지 않아 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2005년은 효자님의 해가 될 것 같구요. 힘든 시기가 있으면 안정기도 있다잖아요.

올 한해 그저 좋은 일만 있기되길 기원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자, 아자! 화이팅!!

로드무비 2005-01-0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효자님, 2005년 한 해 건강하시고 평안하세요.

전 님의 글이 너무 좋습니다. 마음의 벗을 만난 듯하달까.^^

2005-01-01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1-01 1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샴푸의요정 2005-01-0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곳의 보이지않는 단골팬인거 혹시 아시려나...

조선효자님을 알게되어 참 기쁘고 감사합니다. 마음에서 깊이 우러나오는 진심입니다.

2005년에는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는 황홀한 광경을 목도하시길... (로마서 8:28)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또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