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집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 십수일 동안 아침 일찍 나가서 하루 종일 냉동실같은 건물에서 개떨듯 했더니 몸살이 나려고 한다. 하지만 오늘도 어머니는 슬슬 내 눈치를 보면서 같이 나가자는 신호를 계속 보내신다. <저 안 나가요. 먼저 가세요.> 섭섭한 표정이다. 코칭스타일을 모르시는 어머닌 아마 이해 못하실거다. 규범을 철석같이 지키고 농업적 근면성을 숭상하는 어머니는 S형. 나는 그렇게는 죽어도 못 살 것 같은 정반대 D형.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스타일은 존중해주실꺼져.(?!)

(여기서 잠깐. 기록을 남긴다는 차원에서 한줄 적어둔다. 요즘 컬투 정찬우가 <그때그때 달라요><쌩뚱맞져> 등의 유행어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데 그가 흉내내는 사람은 최근 뜨고 있는 영어강사 이모양이라고 한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게  9년쯤 되나.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로 찾아온 이양은 첫눈에도 범상치 않은 외모와 발음의 소유자였다. 자칭 미녀강사였지만 상당한 각도로 돌출한 앞니와 무녀를 연상케하는 부리부리한  눈, 역대로 내가 목격한 색깔중에 가장 붉게 칠해진 입술. 결례의 표현이지만 울퉁불퉁한 몸매에 분주한 걸음걸이. 그날 그녀는 초면인 나를 구석으로 데려가 사주를 봐주었고, 얼마후엔 내 손을 잡아끌며 와이셔츠 바람으로 삼청동 선생님(?)댁에 데리고 갔다. 진위는 알수 없으나 이모양은 귀신이 보인다고 했다.

이양의 꿈은 방송출연. 하지만 아무도 가능성을 높게 보진 않았다. 그러나 이양은 우여곡절 끝에  굿모닝팝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게 됐는데 그 이후 1~2년동안 그녀가 보여준 입지전적인 노력은 눈물없인 볼 수 없는 인간승리 드라마 그 자체였다. 거칠고 갈라진 성대를 타고났고, 영국에서 유학을 했던 탓인지 발음도 다소 낯설었던게 사실이다. 게다가 해괴한 스캔들로 장기집권에서 낙마한 전임자의 빠다바른 듯한 진행과는 대조적으로 투박하고  거침없어서 청취자들의 반발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영어 동네도 빤해서 모진 험담과  금방 떨려날 거라는 구설이 꼬리를 무는데도 정작 당사자는 쾌활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강의는 다 접고 오로지 굿모닝팝스에만 올인했던 그녀는 마침내 자기 스타일을 개발해 오늘날 그 유행어가 전국민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외모면에서도 괄목상대하여 체형이 콜라병모양이 된데다, 얼굴도 작아진 듯 오목조목 예쁜이로 변신했다는 뒷얘기. 나와는 무척 친해서 허물없이 지냈다. 비록 연거푸 몇번 모임 약속을 펑크내는 바람에 그녀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지만. )

요즘 정신이 산란해서 그런지 자꾸 얘기가 옆길로 샌다. 본론이랄 것도 없지만 오늘 오랜만에 책한권을 떼었다.< 위대한 여행 - 별을 따라간 네번째 왕의 전설>(에자르트 샤퍼 지음) 1백35쪽의 작은 책이다. 이쯤은 단숨에 읽어치우리라 쉽게 보고 달려들었다. 활자 크기도 동화책 수준이라 한결 만만했는데. 결국 마지막 장을 덮고나니 겨울해가 뚝 떨어졌다. 네시간 동안 집중하고 읽었다. 다른 책의 세곱쯤 시간이 걸린 셈이다.

러시아의 작은 왕은 위대한 왕이 태어난다는 예시를 받고 그를 경배하기 위해 단신 말에 오른다. 그의 손에는 큰 왕에게 바칠 보석과 아마포, 담비가죽, 그리고 꿀통이 들려져 있었다. 밝게 빛나는 별을 따라가는 여행길에서 세명의 왕을 만났다. 너무 고상하고 위엄있는 세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낀 작은 왕은 사막에 진주를 뿌리면서 <우리 동네엔 이런거 많다>라고 뽐내지만 곧 후회한다. 그날 밤 혼자 마굿간에서 자던 작은 왕은 거지여인의 출산을 돕게 되고 그녀와 아기에게 선행을 베푼다. 그녀는 작은 왕을 마음속의 왕으로 섬기겠다고 한다. 그후 작은 왕은 여행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물로 가져간 물건들을 나눠주고 급기야는 어느 소년 대신 노젓는 노예로 팔려가기에 이른다. 그후로 삼십년이 지나 쓸모가 없어진 작은 왕은 뭍에 떨궈지게 되고, 이젠 거부가 된 예전의 소년과 옛날 은혜를 베풀었던 거지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위대한 왕을 만나겠다는 평생의 소원을 그는 그 왕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순간에 비로소 이루게 된다. 쇠약한 심장이 멈추려는 순간 작은 왕은 부끄럽고 괴로운 마음으로 기도한다.  <저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왕께 바치려 했던 것들은 이제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황금, 보석, 아마포, 모피, 심지어는 어머님이 단지에 가득 담아주신 꿀마저 모두 허비하고 낭비했습니다. 왕이시여, 용서하소서. 그렇지만 러시아는....  하지만 저의 마음, 왕이시여, 저의 마음을.... 그리고 그 여인의 마음을.... 저희들의 마음을 받아주시겠습니까?>

삼십년 전 별을 따라 온 세명의 왕 동방박사 세사람은 위대한 왕의 탄생을 경배했다. 삼십년 후 네번째 왕인 러시아의 작은 왕은 십자가에 매달린 그의 죽음을 경배했다. 앞의 세 왕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바쳤지만 작은 왕은 마음 밖에는 드릴 게 없었다. 그 마음은 거지여인과 아기, 문둥이와 강도 만난 이, 노예와 과부, 유복자, 그리고 미물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즉 위대한 왕이 살아서 보여주었던 사랑이었다. 작은 왕은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워 궁극에는 사랑으로 그 선물주머니를 다 채운 것이다.

반성한다. 비우려 하지 않고 비워지는 것을 두려워만 했다. 마음을 비워 가난해져야 복을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나를 버리면 두개를 얼른 채우곤 했다. 앞서 미녀강사 얘기하다 삼청동 선생님이란 분이 잠깐 나왔었다. 쪽진 머리를 곱게 빗은 그분이 호랑이 그림 밑에서 하신 말씀. <갖고 계신 바구니가 아주 좋군요. 그런데 바구니에 담긴 것중에서 좋고 탐스런 것은 다른 사람이 다 가져가거든요. 그래도요 절대로 화내거나 아쉬워하지 마세요. 조금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것으로 가득 찰거니까 조바심 내지 말란 뜻입니다. 할 수 있으면 더 퍼주시고 더 나눠주세요. 그럼 더 풍성하고 더 빨리 채워질테니 두개 다 얻는 셈이잖아요.>

비록 무속인일지언정 좋은 말을 해주는 분들이 있다. 삼청동 그분의 말씀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듣기 좋은 말이었다. 그땐 나이가 어리고 욕심이 다락같이 높아서 무슨 뜻인지 몰랐다. 지금 <위대한 여행>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한다. 그 말씀이 어디 나한테만 해당하는 말이랴. 신앙과 선행에만 한정된 얘기일까. 지혜를 담고자 하면 이미 갖고 있는 지식과 개념덩어리들을 비워야 마땅하다. 서푼도 안되는 지식과 편협한 고정관념들을 신장대처럼 붙들고 떠는 박수무당 꼴이 되선 안되겠다. 

위대한 왕의 삶을 살고 간 작은 왕은, 신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05-01-11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로군요. 한번 읽어봐야겠는데요.

그 삼청동 선생님 범상치 않으신 분 같군요. 그래서 제가 효자님을 뵙게된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 선생님 저를 보면 뭐라고 하실까요? 그런데 저는 교회를 다니니 평생 그분을 뵐것 같지는 않고, 단지 효자님 글 읽으면서 나의 기도를 더듬어 봤고(내가 뭘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까하는...) 저의 결핍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ㅜ.ㅜ

 

효자님 이런 거 해 보신 적 있으세요? 81111 서재 지인들끼리 서로 이런 거 많이하는데...1일 쪼르라니 4개가 서있어서 잡아 봤습니다.^^

 

   


2005-01-15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