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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직장을 걷어치우고 작은 연구실 겸 서재를 열었다. 오래된 오피스텔의 미로같은 통로를 헤매다 조그만 문패를 발견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제법 공부하는 이의 방이라는 느낌을 풍긴다. 창밖으론 영동대교와 분당 가는 길이 불빛의 물결처럼 보인다. 하얀 벽, 소박한 나무 서가, 촘촘하게 꽂혀있는 보고서들은 그의 전직을 짐작케한다. 이 방엔 어떤 벽시계가 어울릴까 생각했다. 선물로 벽시계를 사주마 했던 것이다.

 그 친구와 거리로 나왔다. 신문사에 다니는 다른 친구와 셋이 만나기로 했었다. 밤8시가 넘었는데 이제 출발한다고 전화가 왔다. 강남역 근처 맥주집에 둘러앉았다. 오랜만이다. 우리는 대학동기들이다. 대학2학년 때 문학회라는 써클에서 만나 스무서너해 동안 챙겨가며 살았다. 여기서 챙겼다는 뜻은 이렇다. 가끔 전화해서 안부(생사)를 확인하고, 아주 가끔 만나서 서너 시간 두서없이 얘기하는 정도. 

 어제도 비슷했다. 집안에서 건물을 하나 지었다던데 임대가 어찌됐느냐, 역시 주식은 가치투자더라, 분배는 버블로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엔 대여섯개 우량주만 남을 거야. VIP투자펀드가 잘한다던데, 그러다 주제가 또 바뀐다. 네가 다니는 신문사 대주주가 누구라고, 벌써 애들이 고등학교 올라 가잖아, 학벌이 인간을 낙인찍는 세상이야, 서울대 나와서 덕본 거 있냐.... 각자 맥주 한두잔을 비우고 거나해져서 앞뒤없이 쏟아놓은 화제가 족히 한 가마는 넘는 것 같았다. 예전같으면 짜증났을 법한 이런 분위기에 나는 취하듯 젖어든다. 외려 마음이 놓인다. 친구들도 생활도인(道人)이 돼가고 있나보다.

 한 친구는 기자로, 사장님으로, 공무원으로 물방개 튀듯 돌아다니다 백수로 자리를 굳혔고, 연구소를 낸 친구는 미국에서 박사를 따고 돌아와 환경관련 기관에서 쑥쑥 크다가 막판에는 모 위원회 높은 자리에 있었나 보다. 지금도 기자하는 친구는 박봉에 상노가다라고 항상 투덜대지만 놀랄만한 성실성으로 십수년째 그 일을 해오고 있다.

 그렇게 달리 살아온 우리 셋은 작년에 약속이나 한 듯, 방황과 번민, 질풍노도의 시대를 겪었다. 백수를 결행한 나는 사회로부터의 철저한 격리를 선언하고 방구석에 쳐박혀 도를 닦았다. 기자 친구는 느닷없이 일년 무급휴가를 내고 뉴질랜드로 날아가 석달 넘게 혼자 자취생활을 하고 돌아왔다.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 연구소 친구도 안달이 났다. 더이상 공무원 뒷바라지에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노라 했다. 서둘러 공부에 정진해서 재야 학자의 길이라도 걷겠다고 했다. 마누라들은 도대체 남자들이 왜 이러는거냐고 초조해했다.

 대학 다닐 때 생각하면 그들의 방황은 엉뚱하고 우습다. 셋중에서 가장 가방 끈이 긴 연구소 친구는 스스로 얘기하길 <학교 다닐 때 자기가 가장 지진아였다>고 한다. 일어강독을 할 때도 제일 버벅거려 얼마나 쪽팔렸는지 모른다고 했다. 졸업후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중장비를 몰기도 했었다. 공부하고 거리가 먼쪽으로 돌았던 친구는 지금 공부에 한 목숨 걸겠노라 한다. 공부 잘했던 내게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기자 친구는 열혈남아 소노모노(그 자체)였다. 단도직입으로 말하고(말재주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저없이 행동했다. 우물쭈물하는 꼴을 참아 넘기지 않는 과격파(?)였다. 공부를 작파하고 운동에 매진하는 바람에 그는 학사제적을 당했고, 백골부대에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제대후 우여곡절끝에 복학한 친구는 장학금까지 받아가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더니, 정말 어울리지 않게 기자가 됐다. 파란만장한 혁명가로 살 것이 확실했던 친구는 자기가 벌어 집을 가장 먼저 장만했고, 조신한 샐러리맨으로 지금도 하루 열두시간의 노동을 반복하고 있다.

 가장 소시민적이고 속물적이며 생각이 짧은 아이였던 나는 어처구니 없게도 다른 사람들을 돕겠다며 코치의 길을 가고 있다. 툭하면 만나는 이들에게 욕심을 버리라 하고,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라는 허깨비같은 말만 하고 다닌다. 이렇게 세 명은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일들을 하며 살아왔다. 공통점이라고는 작년에 우연히 동시 다발로 고민잔치를 벌였다는 것과, 세 명 다 노무현을 찍었지만 지금은 모두 후회막급이라는 정도.

 생각도 다르고 관심거리도 제각각일 망정, 나는 반갑고 좋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사실, 결코 나쁜 짓 안하고 자신과 세상을 위해 뭔가를 꿍꿍거리며 살고 있다는 소박한 사실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았던 마흔 중반의 남자 셋이 오랜만에 얼굴보고 확인한 진실이다. 다음날 아침 같은 시간에 나는 침대에서, 기자는 지하철에서, 연구소는 책상에 팔을 얹고 코를 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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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마침내 일 하나가 끝났다. 일년도 넘었나 보다. 여러 사람이 엮인 일에 관계한 것이 벌써 그리 됐다. 오늘 코치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밤 늦도록 이어진 뒷풀이에서 부족했던 칭찬도, 묻어둔 비판도 얼추 쏟아냈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와서 성공했다. 행사를 해보면 예상보다 많은 참가자들이 오는 예는 극히 드물다. 그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다. 오늘 아침 개회사부터 오후 축하행사까지 무려 열대여섯개 코너가  쉴새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신기할 만큼 시간이 딱딱 맞는다. 정확히 오전 9시 3분에 시작해서 공식 종료선언을 오후 4시 10분에 했다. 시간표 그대로 진행된 최초의 이벤트다.  

아침 6시반에 눈이 떠졌다. 머리 한켠이 지끈지끈 아프다. 요 며칠 잠을 못잔 탓이다. 후후. 기껏해야 2~3백명 오는 이벤트갖고 쪼는건가. 그건 아니고... 앞에 나서서 나를 따르라는 듯 굴어야 한다는 부담이 계속 쳇기처럼 심중에 걸려 있었다. 샤워를 하고 가리마를 다시 바꿨다. 얼마전에 사십년동안 고집하던 가리마를 바꿔봤는데 자꾸 앞가리마가 생긴다. 이발도 안해서 부스스한데 괜히 신경 쓰이길래 복고하기로 결정했다. 넥타이를 밝은 회색으로 맸다가 윤기나는 짙은 회색으로 바꿨다. 이런 변덕도 흔치 않다. 거울에 비춰보니 오랜만에 입은 양복차림이 괜찮다. 자 이제 가자.

코칭센터 친구들이 이른 아침부터 열심히 일한다. 이벤트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라 행동이 자연스럽고 다들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한결 마음이 놓인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이 했다. 나나 그 친구들이나 이런 일을 굳이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젊어서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이 되면 군말없이 그냥 한다. 일을 대하는 그런 자세가 마음에 든다. 나도 한때는 그랬는데.  일 무서운 걸 몰랐다. 지금은 솔직히 겁부터 난다. <꼭 해야되는 일>이란 것도 감당하기 싫고, 그 일 때문에 사람들이 짜증내는 모습을 보는 건 더 싫다. 내가 뭘 해야하는지도 헷갈린다. 어울려 밤새긴 어색하고 곁에서 빙빙 돌긴 무색한 나이가 된 것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이런 과정을 거쳤다. 다들 힘들었다고 한다. 성과가 좋아서 대충 넘어간다. 

행사 시작 십분전. 이미 좌석이 3분의 1쯤 찼다. 이만하면 썩 괜찮다. 시작 시간이 지나도 앞줄만 간신히 차는 경우가 다반사 아닌가. 대박 조짐이 느껴진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를 이 자리에 서게 한 K씨가 지나가며 눈인사를 한다. <정각에 시작해보세요. 그게 좋아. 좀 늦은 사람들도 벌써 시작했다는 걸 알면 더 서두르게 되거든요.> 어디 한번 그래볼까. 아홉시에서 일분, 이분 넘어가니 거의 객석이 찼다. 아홉시 삼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큰 박수와 휘파람소리가 터져나와 장내를 흔든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10시반에 기조연설이 끝나고 십분간 휴식. 아는 분들이 와서 격려를 해준다. 처음 보는 분들과 인사를 하고 오늘 아침에 받은 코치 명함을 건넸다. 다들 오늘 행사가 너무 좋다고 즐거워 한다. 그런데 이 분들은 뭐가 좋다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문득 생겼다. 나중에 따져보자. 그러나 저러나 패널토의가 걱정이었다. 원래 패널에서 시간을 넘기기 일쑤다. 사회를 맡은 부회장님이 매끄럽고 유연하게 리드한다. 무슨 말들을 하는지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원래 잔칫날 주인은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게 당연하다. 정확히 자로 잰듯 순서를 끝내주셨다. 훌륭한 분들이다.

조선일보 친구가 와서 코칭 공동캠페인에 대해 프리젠테이션을 간단히 했다. 이 친구도 암초의 가능성이 높았는데 웬걸 제법이다. 짧은 시간에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역시 미디어업계에 있어서 그런지,  간단 명료하고 몇마디 키워드로 정리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잘했다.

오후 세션 2시 50분에서 3시 20분까지 강의 하나를 맡았다. 건넌방에서 코칭센터 친구들이 준비한 강의가 진행되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쪽에 사람을 몰아줘야 한다. 처음엔 열댓명이 앉아 계신다. 다들 친숙한 면면의 어른들이다. 과연 오실만한 분들만 딱 오셨다. 그중 한 분께서 <세션 내용과는 상관없이 당신 팬이라서 온거요>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분들이 와 웃으며 서로 자신이 팬클럽 회장이라고 농담을 주고 받는다. 유쾌한 박수들이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었다.  금방 30분이 지나서 질의응답을 충분히 나눌 시간도 없었지만 보람있고 즐거웠다. 

마지막 산이 남았다. 경품추첨과 매직쇼등 피날레 행사를 진행해야 한다. 이제까지의 점잖은 행사 진행과는 분위기가 확 달라져야 한다. 단상에 수십명이 들락날락하며 상품을 주고받았다. CTT에서 배운대로 뽑힌 사람들이 그 다음사람들을 뽑고, 또 그들이 다음을 뽑는 형태로 진행했다. 모두 즐거워했다. 처음엔 불안불안했던 마술쇼도 막판에 태극기를 흔들며 멋있게 마무리되었다. 이제 폐회사만 끝나면 된다. 심호흡을 하고 <코칭이 위대한 산업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을 때 수많은 후배들과 고객들이 오늘 첫 대회, 그리고 여기 참여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수많은 사람들과 인사하고 악수하고 서로 칭찬과 격려를 나누며 작별했다.

코엑스 밖으로 나오니까 벌써 어둑어둑하다. 코발트색 하늘엔 반달까지 떠있다. 그제서야 홑양복 사이로 찬 바람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제법 춥다. 몸은 젖은 솜처럼 무거운데 머리는 저 밤하늘 처럼 맑고 푸르다. 오늘 일을 뒤돌아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밀려든다.  모종의 계시같은 게 아닐까? 아무 결정도 없이 그저 방황으로 시간을 보냈던 내게 오늘은 과분한 성과임에 분명하다. 그동안 몇가지 시도했던 일들이 내가 미쳐 손쓰기도 전에 물거품이 된 반면 이 일만큼은 유독 내 노력보다 훨씬 넘치는 과실을 안겨 주는 까닭이 무엇일까? 나는 어제 저녁까지도 마음에 걸려 있던 말들을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앞에서 신 들린 듯 외쳤던 것일까? 나를 믿고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 나를 격려하고 축하해주었던 사람들, 나를 믿어주고 함께 하려는 사람들. 이제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걸까? 오늘의 이런 생각들이 그동안의 내 고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뒷풀이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입으로 무슨 술이 들어가는지, 무슨 얘기를 하는건지 의식하지 못했다. 문득 교회를 한번 나가볼까 싶었다. 여러 종류의 술을 마셨더니 머리도 무겁고 속이 불편하다. 모든 걸 내일 맑은 정신에 생각하기로 하고 모처럼 편한 잠자리에 들었다. 긴 하루였다. 지난 일년만큼이나 아주 길었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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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1 1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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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1 2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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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4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stella.K > [펌] I LOVE YOU의 뜻

I - Inspir warmth 따뜻함을 불어 넣어 주고

 

L - Listen to each other 상대방의 말을 들어 주고

 

O - Open your heart 당신의 마음을 열어 주고

 

V - Value your umionn 당신을 가치 있게 평가 하고

 

E - Express your trust 당신의 신뢰를 표현 하고

 


Y - Yield to good sense 좋은 말로 충고해 주고

 

O - Overlook mistake 실수를 덮어 주고

 

U - Understand difference 서로 다른 것을 이해해 주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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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효자 2004-03-21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류의 테스트는 어디 맞나 틀리나 보자고 달려들면 민망해진다. 마치 초콜렛을 두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모처럼의 단맛이 궁금하거나, 그 안에 섞인 약간의 내용물이 내는 맛을 가려보고 싶어 침을 꼴깍 삼키는 호사가 할머니의 마음이면 족하다. 예상대로 너트가 씹히든, 뜻밖에 향긋한 브랜디를 맛보게 되든, 사소하지만 이만한 혼자만의 즐거움이 어디 흔한 일이던가.
 

이런 조각 정보들은 필요없을 땐 파리처럼 눈앞에서 웽웽거리다가 약에 쓸라치면 좀처럼 찾기 어려운 것들이다. JS밀이던가, 헤딩이던가 골똘히 생각했던 인물이 찾고보니 토마스 카알라일이었다. 덕분에 밀과 헤딩에 대한 정보도 훑어보게 되긴 했지만, 시간없을 땐 그런 여유작작한 지적 소요가 즐겁지 만은 않다.

실패한 사람들의 에피소드는 이렇게 몇줄로 줄여놓으면 그저 호사가들의 입담 정도로 다가올 뿐이다. 햐 그 양반 고생 좀 했겠는걸. 나같으면 훽 돌아버렸을텐데. 스물여섯번 떨어졌다구. 인간승리이전에 저 사람은 바보임에 분명해. 등등. 아마 여기 소개된  (한때)불운했던 사람들의 모진 경험을 십분의 일만 겪게 된다면 그런 웃음섞인 코멘트들은 쏙 들어가게 될 것이다. 웬만한 지인의 죽음은 한시간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은 의식이 존재할 때까지 이 세상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언젠가 시간이 나면 이들의 인생을 깊이 파볼 생각이다. 그 현대판 시지프스들의 기약없는 도전은 고시 13수생처럼 달리 선택할 것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위인전에서 칭송해마지 않는 백절불굴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아보고 싶다. 그들에게도 시간말고는 달리 가진 것이 많지 않았을 테고, 그런 만큼 인생은 소중했을 것이며, 버려진 시간들은 아까왔을 것이고, 좌절할 때마다 참혹한 유혹이 있었을게다. 

사회생활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는 눈도 깊어져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더 분명한 것들을 지울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육안은 침침하고 시어져 눈물과 눈꼽으로 퇴화될 지언정, 심안은 더욱 형형하고 순해야 한다. 서서히 사람을 대할 때 육안을 감고, 심안을 뜨게 된다. 그 사람의 이목구비를 살피던 눈은 간추린 정보를 심안에게 넘겨주고 피곤한 꺼풀을 닫는다. 심안은 그 정보를 분석해 참과 거짓을 구분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전까지 좋은 감정을 잃지 않되 믿거나 맡기지 않는다. 때론 심안조차 감아버린다.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알만큼 알았으되 더 보이지 않으면 내 눈은 무리하지 않는다.

비단 눈뿐인가. 코도 그렇고, 입도 그렇고, 귀도 그리해야 한다. 늙어가면 감각기관은 점차 퇴화하고 그 기관들이 평생 고생하며 남겨준 데이터와 정보를 통해 다른 인지기관이 승하고 밝아진다. 그 마저도 쇠하면 죽는 것이다.

뜬금없는 글조각들을 모아놓고 발문도 없이 붙일 수 없어 한마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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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추 교정 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의사 이그나티우스 피아자는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몬테레이 만 지역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싶었다. 피아자는 그 지역의 척추 교정 의사들로부터 그곳에는 이미 척추 교정사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병원을 하나 더 먹여 살릴 만큼 환자가 많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그로부터 4개월 동안 피아자는 날마다 열 시간씩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이 마을에 온 새로운 척추 교정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1만 2천5백가구의 문을 두드리고 6천 5백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들에게 자신이 곧 문을 열게 될 치료 시설을 방문해 달라고 일일이 부탁했다. 그러한 끈기와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로, 치료 시설이 문을 연 첫 달 그는 233명의 새로운 환자를 받았고,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7만 2천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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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시작한 첫 해에 코카콜라 사는 400캔의 콜라밖에 팔지 못했다.

농구계의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은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 농구 팀에서 제명되었다.

셰일라 훌즈워스는 열 살밖에 안 됐을 때 시력을 잃었다. 치아 교정기의 덮개가 부러져 튀어나오면서 두 눈을 깊게 찌른 것이다. 시력을 잃었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고, 결국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포츠 우먼이 되었다. 그녀가 해낸 일 중에는 1981년 얼음으로 뒤덮인 레니어 산 정상을 등반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10종 경기 우승자 레이퍼 존슨은 내반족을 갖고 태어났다.(내반족:발이 안쪽으로 휘는 병)

세우스 박사가 쓴 첫번째 아동 서적 <나는 멜베리 거리에서 그것을 보았다>는 27개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다. 그리고 28번째 출판사 밴가드 프레스는 그 책을 600만 권 이상이나 팔았다.

리처드 바크는 대학을 1년 만에 중퇴하고, 공군에 입대해 제트기 비행사 훈련을 받았다. 공군 조종사가 된 지 20개월만에 그는 그 일도 그만 두었다. 그러고 나서 비행 잡지의 편집자가 되었는데 그 잡지사는 얼마 안 가 부도가 났다. 삶은 끝없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갈매기의 꿈>을 쓸 때도 그는 결말을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 원고는 그가 결말을 생각해 낼 때까지 무려 8년의 세월을 잠들어 있었다. 막상 원고가 완성되고도 18개의 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했다. 그러나 일단 책이 출판되자 그 책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700만 부 이상 팔려 나갔으며, 리처드 바크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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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를 썼을 때, 이 책은 헬스 커뮤니케이션 사가 출판에 동의하기 전까지 33곳의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다. 뉴욕의 모든 중요한 출판사들은 이렇게 말했다.“이 책에는 너무 좋은 이야기들만 가득하군요. 이렇게 짧고 간단한 이야기들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는 아무도 없어요.”
그 이후로 우리가 낸 이 <101가지 이야기> 시리즈는 20개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서 천만 부 이상이나 읽혔다.

1935년에 <뉴욕 헬러드 트리뷴>지는 조지 거슈윈의 대표곡 <포기와 베스>에 대한 비평기사에서 그것을 ‘형편없는 졸작’이라고 평가했다.

1902년에 월간 <애틀랜틱>의 시 담당 편집자는 다음의 메모와 함께 스물여덟 살 청년 시인의 시들을 돌려보냈다. ‘미안하지만 우리 잡지에는 당신의 박력 넘치는 시를 실어 줄 지면이 없습니다.’ 그 시인은 바로 로버트 프로스트였다.

1889년 루디야드 키플링은 <샌프란시스코 이그제미너>지로부터 다음과 같은 거절 편지를 받았다. ‘미안합니다. 키플링 씨. 하지만 당신은 영어를 구사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군요." -키플링: 정글북’의 작가인 영국의 시인 겸 소설가

알렉스 헤일리는 신인 작가로 4년을 보내는 동안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출판 거절 편지를 받았다. 결국 알레스는 자신이 쓰고 있는 <뿌리>라는 작품과 자기 자신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 작품에 9년을 매달렸지만 결국 능력이 없다고 느낀 헤일리는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화물선에서 뛰어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화물선 후미에 서서 배가 지나간 자국을 바라보며 바다에 뛰어내리려는 순간, 그의 선조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우리 모두가 이 위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가서 네가 할 일을 해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넌 할 수 있다. 우리는 너를 굳게 믿고 있다!”
그로부터 몇 주 동안 <뿌리>의 마지막 원고가 그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존 번연은 자신의 종교적 관점 때문에 베드포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감옥에서 그는 대표작 <천로역정>을 썼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탐험가인 월터 랄리 경은 13년 동안 투옥되어 있으면서 <세계사>를 썼다. 그리고 독일의 종교 개혁자이자 마틴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갇혀 있는 동안 성경을 번역했다.

토머스 칼라일이 <프랑스 혁명>의 원고를 한 친구에게 빌려 주었는데, 그 집 하인이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을 불쏘시개로 태워버렸다. 칼라일은 포기하지 않고 펜을 들고 그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1962년에 네 명의 여성이 가수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공연을 하고, 작은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음반을 만들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나중에 그들은 또 한 장의 음반을 제작했다. 역시 전혀 팔리지 않았다.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그리고 아홉번째 음반까지 모조리 실패였다. 1964년 초, 그들은 유명한 딕 클락 쇼에 출연했다. 방송국은 그들이 쓴 비용 정도의 출연료만 주었으며, 이처럼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얼굴을 드러냈지만 어떤 굉장한 계약도 맺을 수 없었다.
그해 여름 그들은 <우리의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곡을 녹음했다. 이 곡은 순식간에 여러 차트에서 1위로 뛰어올랐다. 그 이후 다이애나 로스와 슈프림스는 미국 전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그 탁월한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성공의 비결 중 하나는 잠깐의 후퇴를 패배로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메리 케이)

윈스턴 처칠은 유명한 옥스포도와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고전 문학에 약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휘슬러는 미국이 낳은 위대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화학 과목에서 낙제를 했고, 미국 육군 사관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05년에 베른 대학은 어떤 박사 학위 논문을 부적절하고 공상적이라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그 논문을 쓴 젊은 물리학도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는 물론 실망했지만 좌절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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