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탁환의 소설을 좋아한다. 2002년에 <나, 황진이>를 처음 만난 후부터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방각본 살인사건><불멸의 이순신>에 이르는 전작 장편들을 나오자 마자 읽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출간을 기다리는 유일한 작가가 바로 김탁환이구나. 

 

단편은 몰라도 장편은 박경리나 황석영같은 강골의 작가가 써야 제맛이다. 라면은 양은냄비가 좋고, 사골국물은 무쇠솥에서 고아야 제격인 것 처럼 말이다. 각자 의견이 다르겠지만 나는 최인호씨의 <상도>와 <해신>을 그다지 감명깊게 읽지 못했다.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다는 느낌이다. 마치 힙합 리듬으로 춘향가를 부르는 듯한 어색함. 물론 그런 인상은 작가가 평생을 소소한 사랑얘기 또는 가족소설 등속으로 입신했다는 이력에서 유추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허구적 상황에 몰입하여 리얼리티로 끌어올리는 힘이 딸린다. 장편을 끌고가기엔 역부족이란 뜻이다.

 

이에 비해 김탁환은 마치 소설 속 그 시대에서 튀어나온 이야기꾼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오랜 학습과 습작을 통해 역사적 상황을 묘사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캐릭터 설정이 부담스럽지 않다. 말 잘하는 재담꾼이 옆 동네 얘기 하는 것 같다. 작가가 나서 비분강개하는 오버액션도 없다. 등장인물들의 동선이 빈틈없기 때문에 작가가 굳이 드러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을 김훈의 <칼의 노래>와 굳이 비교하자면, 전자의 미이라 버전이 후자인 듯 싶다. 김탁환의 살을 떼내고 신경과 골수를 말리면 김훈이 될 것 같다. 그래서 탁환은 감성이 살아있고, 훈은 메시지만 남아있다. 김훈이 <현의 노래>에서 풀썩 주저앉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칼은 몰라도 음악(현)까지 바짝 말릴 수는 없는 노릇. 그 결과 주인공 우륵보다 칼 든 이사부가 소설의 흐름을 끌고 가는 기현상이 마침내 벌어지게 됐다.   

 

엊그제 산 김탁환의 <부여현감 귀신 체포기>1,2권을 내리 읽으면서 "이 친구가 왜 이런 책을 썼을까?" 궁금했다. 옆길로 빠진 것은 분명한데 하필이면 왜 이쪽일까? 작가 후기를 보니 김탁환은 이런 귀신 얘기를 쓰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게다. 습작시절부터 꿈꿔온 이른바 된장 판타지를 어쩌지 못하고 여태 움켜쥐고 있다가 이제사 풀어놓았다. "노동이 아닌 유희로, 저는 귀신들과 만나 춤추고 노래하며 신나게 뒹굴었습니다."  한술 더 떠 <저는 이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 시리즈물로 바뀌기를 희망합니다.>라고 강력한 전파의 의지까지 드러낸다. 그의 말대로 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덜 억울하지 않겠느냐>고 작가는 반문한다.  

 

딴은 그럴 법도 하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와 같은 서양 판타지를 들여다 보면 영 숭해서 못견디겠다. 몇몇 영웅 미색들을 빼놓고는 끔직한 흉물들을 끝도 없이 봐넘겨야 한다. 케이블TV에서 노상 틀어주는 바람에 하릴없이 보게 되면서도 시간 아깝다는 생각 말고는 남는게 도통 없다. 그 이유는 푸는 맛이 없기 때문이다. 도깨비들은 장난을 좋아하고 귀신들이 난리치는 것은 원한 때문이다. 그걸 풀어주면 곱게 큰 절하고 물러나는게 조선 귀신들의 예의법도. 해원을 그 동네 사또가 하든, 전우치가 하든, 지나가는 탁발승이 하든 그건 문제가 안된다. 귀신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백성들도 애틋한 사연 들으면 측은지심이 발동하고 극락왕생하라고 제사까지 치러주지 않나. 이것이 다 풀어줌의 미학이다.

 

우리 때만 해도 할머니들이 일제시대에 나서, 한국전쟁과 격동의 현대사를 맨몸으로 겪어내느라 자기 아들은 물론이고, 손주 새끼들에게 한가롭게 옛날 얘기를 해줄 처지가 못됐다. 결국 우리들은 동화책이나 이야기책을 빌려 대리만족을 해야했는데 마침 그 때 이야기 할머니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것이 바로 KBS 의 <전설의 고향> 이었다.

 

삼천리 방방곡곡 웬만한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아니 다룬 것이 없다. 게다가 여름에는 납량특집을 통해 에어컨이 어떻게 생긴 지도 몰랐던 개도국 아이들의 등줄기를 씨언하게 훑어내리는 청량제 구실도 톡톡히 해냈다. 그때 본 <설녀><구미호> 등은 지금도 눈에 선하며, 특히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던 한혜숙이 분했던 설녀의 아리따운 자태와 팜므파탈 적 섹스 어필은 한 소년의 가슴을 벌렁거리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68년생인 김탁환은 그 때 형 누나들 가운데 끼어앉아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TV를 보며 저 멀리 판타지의 세계로 훨훨 날아갔던게 틀림없다.

 

한가지 흠이라면 서두에 불필요한 서양 흡혈귀 얘기를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는 점. 무슨 복선인지는 대충 눈치는 채겠으나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설마 어린 친구들까지 귀하의 이 신토불이 귀신 얘기책을 사보리라 기대하진 않으시겠지.

그나저나 다음에도 이런 쪽으로 나오면 재미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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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1-2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좋은 글은 마이 리뷰로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이 주의 마이리뷰 당선될 확률이 아주 높은데...당선되면 상금이 5만원이예요. 책값 버는 건데...!

로드무비 2005-01-26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은 몰라도 음악(현)까지 바짝 말릴 수는 없는 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