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잘 읽는 방법 - 폼나게 재미나게 티나게 읽기
김봉진 지음 / 북스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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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책이 안 잡히고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때가 있다. 몇 개월마다 찾아오는 독서권태기다. 이럴 때는 책을 놓고 전혀 다른 행위(영화, 게임)를 한다. 그래도 책은 읽어야겠다 싶을 때는 책과 독서에 관한 책(메타북)을 읽는다. 어렵지 않고 의욕을 다시 불태우기 때문이다.

<책 잘 읽는 방법>의 저자 김봉진은 우리가 익히 들어온 스타트업 ‘배달의 민족‘의 창업자다. 성공한 기업인은 보통 엘리트의 이미지를 가지기 일쑤지만 (미안하지만)김봉진은 그런 아우라는 없다. 공고-전문대의 학력은 물론이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책도 10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단다.

이런 저자가 <책 잘 읽는 방법>을 통해 책을 조금 더 쉽게 접하는 방법과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크게 책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가는 법부터 꾸준히 책을 읽고 어려운 책을 넓혀가는 훈련법, 혼자 읽기가 아닌 함께 읽기를 위한 응용 방법등을 이야기한다.

책은 크게 특별하지는 않다. 이미 비슷한 내용의 책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가장 근래에는 이동진과 북튜버 김겨울의 책이 있었고,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같은 주제의 책이 많다. 게다가 내용마저 유사하다. 책을 함부로 다뤄보기, 처음에는 질보다 양, 많이 사고 눈에 띄는 곳곳에 책 두기, 베스트셀러 말고 자신만의 책을 읽기, 한번에 여러 권의 책을 읽기, 재밌는 책도 좋지만 어려운 고전도 도전해보기... 수도 없이 들어본 내용이어서 저자가 중간에 소개한 목차와 머리말 놓치지 않기를 적극 활용해 목차만 읽어도 이 책의 절반, 아니 80%는 읽은 셈이다.

책도 인문서 쪽으로 편중되어 있다. 저자의 독서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은 편이고과학서적은 눈을 아무리 씻어봐도 없다. 문학은 아예 배제하지 않고 일부러 찾아 읽는다고말하는데, 저자를 포함한 인문서를 즐겨 읽는 이들이 과학 분야를 소홀히 다루는 태도는 매우 아쉽다. 독서 분야로 한정지어보면 이 책은 <독서천재가 된 홍대리>와 겹친다. 홍대리가 명확하게 자기계발서를 표방했다면 <책 잘 읽는 방법>은 인문서를 가장한 자기계발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로서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킨다. 독자는 자기계발서를 읽음으로서 자신의 현재를 돌아보면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다. (행동으로 바꾸지 못하는 것은 자기계발서의 단점이 절대 아니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독서법을 긍정한다. 대부분이 이미 생각해오던 방법이기 때문이다. 같은 생각을 가졌지만 저자와 나의 결과물이 이리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나의 문제로 귀결된다. 워낙 익숙한 내용이기 때문에 책의 깊이가 없다고 비판했지만 실상 생각을 행동으로 연결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자기비판이라 볼 수 있다.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마음은 작다. 3장을 제외하면 김봉진만의 노하우가 거의 없고 부록으로 붙은 ‘김동진의 도끼 같은 책‘도 내용이 조금 부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이 아직 낯설고 두려운 이에게는 다른 독서법 책보다 이 책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판형이 작고 책도 얇다. 결정적으로 한 쪽의 절반이 여백이어서 수월하게 책을 넘기기 수월하다. 저자가 말하듯이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으면 통쾌함과 자신감이 붙는다. 그 느낌을 가지고 더 좋은 책 더 재밌는 책을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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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1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로 독서 매너리즘에 빠질 때 책 읽기를 주제로 한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이런 책을 읽으면 독서 욕구가 다시 생길 수 있을 것 같아요. ^^

양손잡이 2018-03-19 00:13   좋아요 0 | URL
제가 능력과 끈기가 부족해 요런 책을 자주 읽는데, 너무 자주 읽어서인지 이제 그 내용이 그 내용인 것 같네요. 제 한계에 대한 푸념이었습니다 ㅠㅠ
 
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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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세계에서 인간은 더이상 성교를 통해 아이를 낳지 않는다. 오로지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볼 수 있다. 주인공 아마네는 이런 세계에서 부모의 ‘교미’를 통해 세상의 빛을 보았다. 왜 자신만 이상한 걸까? 그녀는 자신의 진짜 본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사랑과 섹스에 몰입한다.


성인이 된 아마네는 남편 아마미야와 함께 실험도시 지바로 들어간다. 지바에서는 아이를 낳기까지만 하고 키우는 것은 국가기관이 담당한다. 동시에 시민 모두가 ‘엄마’가 되어 공동육아를 한다. 아마네 부부는 아이를 낳아도 센터에 보내지 않고 몰래 키우자고 하지만, 인공자궁을 달고 아이를 품은 남편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자 위화감을 느낀다.



어쩌면, 유토피아.


<소멸세계> 의 세계는 유토피아의 면모를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여성이 간단한 시술만 받으면 생리 시 고통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피임시술도 쉬운 일이다.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으니 생리와 피임이라는 필요성이 희박해진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여성만이 가능했던 임신은 남성도 가능하다. 아직 개발 중이지만 인공자궁을 달면 남성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 여성만 느끼던 출산의 불편함을 남성도 분담함으로써 생리적인 면에서 남녀 차이는 거의 사라졌다. 출산에 따른 남녀격차도 분명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양육의 불편함도 사라진다. 국가에서 모든 양육을 책임지기 때문이다. 사회 공동의 ‘엄마’로서 아이를 볼 때도 있지만 우리 사회와 같은 크기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전통적인 가족관계도 해체되면서 고부갈등 따위는 옛말사전에 오를 것이다.



어쩌면, 디스토피아.


소설 속 세계는 고도의 합리성을 추구한다. 과학은 다소 비효율적이던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었다. 합리성으로만 가득한 세계에서 인간은 유전자 캐리어로 격하된다. 우리는 균일하고다루기 편한 ‘인간’을 제작하는 공장에서 일하게 되는 셈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을 후손을 위해 잠시 이 세상에 머무르는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그저 미래로 생명을 이어가는 매개체일 뿐이라니, 인간 진화의 긴 연대기 안에서는 맞는 말이겠지만 씁쓸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인간이 후손을 위한 매개체로 전락하면서 모두 개성을 잃는다. 지바 실험도시에서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두 비슷한 생김새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단발머리에 웃을 때 같은 근육을 쓴다. 아이들은 이름이 있을까? 개개인이 가진 특별한 능력도 특별히 발현되지 않을 것이다. 모두들 그저 후대를 위해 아이를 낳는 기계이자 소모품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


작가 무라타 사야카는 <편의점 세계>로 신선한 충격을 줬는데, <소멸세계>는 신선하다 못해 과하다 싶을 정도다. 재밌는 점은 두 작품 모두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지만 뒤로 갈수록 점차 작가에 설득당한다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흔들어 지금 우리가 부르는 상식에 의문을 들게 하는 점이 무라타 사야카가 작가로서 가진 힘이다. <소멸세계>에서는 우리가 사는 지금이 진화의 세계에서는 짤막한 한순간이라는 허무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정상, 비정상, 상식을 언급했는데 추가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극도의 합리와 이성이 만든 <소멸세계>에서 인간의 존재는 위태위태하다. 인간이 유전자 캐리어와 사회적 기능으로서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인간 종이라는 넓은 풀에 개인이 파묻힌다면 우리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은 가장 뛰어난 종도 아니고 이 세상에 한 때 사는 존재지만 자기 성찰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로서 동물과 다르다. 우리는 최고는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다. 아마네의 남편 아마미야는, 지금 시대에는 가족이라 명명한 존재가 남과 어떻게 다른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미래에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는 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마미야의 말에 반박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다소 보수적인 사고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사회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마지막에서 아마네는 어머니를 버림으로서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와 같은 구시대적 관습을 끊고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이와 육체적 성교를 하면서 다시 세상의 돌연변이가 된다. 아마네의 이런 행동은 정적으로 돌아가는 세계에 새로운 원동력이 될까? 아마네의 눈물겨운 발악이 이 세계에 어떤 파동을 일으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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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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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타 사야카. 일본의 떠오르는 작가. 한국에 출간된 작품으로는 <편의점 인간>과 <소멸세계>가 있는데, 둘 다 읽다보면 정신이 없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뒤흔드는 두 작품을 읽다보면 누구 말마따나 혼이 비정상이 되는 기분이다.

주인고 후루쿠라는 서른 여섯으로, 무려 18년째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편의점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능력이 좋은데 정직원이 아니라 아르바이트 자리에 만족한다.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공감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남들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모양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정상으로 진입하려는 인물이 하나 더 등장한다. 같은 서른 중반의 시라하다. 돈도, 능력도 없는 그는 결혼을 통해 다수의 무리에 끼려고 한다. 후루쿠라와 시라하는 남들이 보는 정상의 범주에 끼기 위해 동거를 시작한다. 자신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시라하의 궤변에 편의점을 가장 편하게 느끼는 후루쿠라는 아르바이트를 관둔다. 편의점 말고는 삶의 목적이 없었던 후루쿠라의 삶은 무료하게 흐른다.

시라하는 후루쿠라와 동류의 캐릭터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시라하의 능력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 30대 중반인데 왜 아직도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왜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가. 성행위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태연히 물어보면서 말이다. 시라하는 누구한테도 폐를 끼치고 있지 않은데 단지 소수파라는 이유로 다들 자신의 인생을 강간한다고 주장한다. (105쪽)

충분히 수긍가는 말이다. 후루쿠라와 시라하의 인생은 오롯이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든 남이 신경쓸 일이 아니다. 타인이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다수와 주류에 끼지 못하면 우리는 그를 비정상의 범주에 넣어버린다.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소수를 재단하고 비난한다. 진심이라고 생각한 충고는 고심해보면 스테레오타입의 지독한 폭력이 되는 때도 있다.

그런 면에서 시라하는 대척점에 서 있기도 하다.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으로 만들어진 정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그저 그곳을 동경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회사 면접을 포기하고 편의점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뻐하는 후루쿠라에게, 시라하는 말한다. 편의점 인간 따위는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다고. 무리의 규정에 어긋나 모든 사람에게 박해당하고 외로운 인생을 보낼 뿐이라고. (189쪽)

시라하는 정상을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반면 후루쿠라는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나는 나대로인 게 좋다며 마이웨이로 산다. 다수의 정상성에서 벗어나려면 후루쿠라처럼 감정을 느끼지 못해야 하는 걸까? 미쳐야만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후루쿠라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장애는 우리 세상에서 비정상으로 치부되지만 오히려 세상을 똑바로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나면 후루쿠라에 대한 답답함이 일 수밖에 없다. 능력이 그렇게 좋으면서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만족하는가? 왜 남들과 교류하지 않고 혼자 살려고 하는가? 더 나은 삶과 직장을 찾을 생각은 없는가? 이런 질문은 폭력적이다. 다들 이상한 사람한테는 흙발로 쳐들어와 그 원인을 규명할 권리가 있는 마냥 행동하기 때문이다. (70쪽) 대체 왜 그러고 살아, 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다수를 등에 업은 가해자로 전락한다.

정상 세계에서 이물질은 조용히 삭제된다. 정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처리된다. 고치지 않으면 정상인 사람들에게 삭제된다. (98쪽) 이런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된다. 같이 미쳐야 할까? ‘정상인‘들과 함께 범주 바깥에 있는 이에게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으면 될까? 서로를 가르는 선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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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 은희경 (문학동네, 1998)


한국 소설은 쉬이 손이 가지 않는다. 특유의 우울함 때문이다. 뭐만 하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인양 세상을 비관하기 일쑤다. 개중에 서사에 힘이 없는 작품은 정말 정이 가지 않는다. 한국 문단 특유의 순수문학을 향한 집념이 싫었다. 무슨무슨 문학상 수상작을 보면 이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덧붙여 문장이 좋다고 꼽히는 작가도 잘 읽지 않았는데, 문장의 정갈함을 가꾸는 데 너무 치중한 나머지 그것만이 장점으로 보이는 이가 여럿 있기 때문이었다.


은희경도 그런 이미지였다. 내 비루한 독서력을 가리고자 하는 변명 같지만 말이다. 전에 <소년을 위로해줘>를 얼마 읽지 못하고 바로 덮어버렸다. 그래서 이번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첫 페이지를 넘기기가 정말 힘들었다. 은.희.경. 작가 이름 세 글자가 주는 압박감이 너무 컸다. 게다가 20년 된 작품이라니, 너무 오래된 작품 아닌가.


그래도 읽어야겠지. 목욕재계를 하고 조용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여태까지 가졌던 은희경의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완벽한 오해였음을 깨달았다. ‘은희경 = 문장’이라는 등식이 머리에 가득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물론 어른의 사랑(…)이 소재가 흥미로워 더 잘 읽은 면도 있지만.


주인공 강진희는 애인을 여럿 둔다. 하나는 당연한 비극이 예정되어 있고, 둘은 그중 하나를 선택하면 그때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세 명의 애인을 선호한다. 애인이 셋 정도는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에게, 사랑은 상대에게 목매다는 일이 아니다.


그녀가 여러 명의 애인을 만나는 건 단순히 바람둥이인 까닭은 아니다. 외로워서도 아니다. 그녀에게 애인은 외로움의 해소와 아무 관계가 없다. 애인 관계란 미래에 대한 부담이 없고 언제라도 원할 때에 자기의 감정을 철회할 수 있는 매력적인 관계다. 일대 일로 맺는 사랑의 감정이 때로는, 아니 대개 서로에게 폭력이 되고는 한다. 상대를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순간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독차지하고픈 욕망으로 전락하고 만다.


진희와 관계를 맺는 세 명의 남자는 그녀가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뚜렷이 나타낸다. 상현은 과거에 결혼했지만 상처만 가득 준 인물이다. 그녀가 사랑에 대한 신뢰를 잃는 순간이었다. 진희가 가진 여러 명의 애인은 상현이 만든 상처를 덮기 위한 미봉책이다. 현석은 현재 진희가 가장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인물이다. 진희는 현석과 만날 때 가장 진지해진다. 하지만 현석이 청혼을 하자 그녀는 거절한다. 현석과의 관계를 무겁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종태와의 관계는 즐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한다. 여기에 진지함이란 없다. 가장 유희적인 관계라고 할까. 과거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 유희만이 가득한 가벼운 관계다. 종태가 사랑한다 말하는 것은 단 한순간도 진지하게 들리지 않는다.


서로와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지는 것은 사랑할 때 누구나 겪는 자기최면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진희는 어떤 사랑으로 그 끝을 맺을까. 후반부에 진희는 사랑을 얻기 위해 한숨짓고, 얻은 다음에는 믿지 못해 조바심을 내고, 결국에는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스스로 피폐해지는 과민한 기질을 가진 것 같다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진희가 불쌍한 인물인가? 글쎄, 행복과 불행은 타자의 위치에서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단순히 이야기를 들었다고 행불행을 가를 수 없다.


은희경은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가사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서로가 마지막 사랑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으니, 지금의 상대와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 추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그 순간을 즐기면 언젠가 빛나리라. 보편적인 문장이면서도 진희의 과거와 사랑 방식이 엮이면서 복합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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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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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한 병원에서 시작한다. 경찰인 뤄샤오밍은 한 살인 사건의 용의자 다섯을 병실에 불러모은다. 병실에는 뤄샤오밍의 스승이자 간암 말기 환자인 관전둬가 혼수상태로 누워 있다. 뤄샤오밍은 관전둬의 머리에 머리띠를 씌운다. 머리띠는 관전둬의 뇌파를 읽어 Yes와 No의 간단한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만든다. 뤄샤오밍은 살인 사건에 대해 말하고 관전둬에게 질문하면서 범인을 찾는다.


명색이 추리소설인데 사건을 해결하는 관전둬는 혼수상태고 뤄샤오밍은 지위에 맞지 않게 사건에서 많은 것을 놓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무고개하듯 질문을 던지고 뇌파를 읽으면서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는, 기존 추리소설에서 보여주지 않은 새로운 양상이라기보다는 다소 뜬금없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예상 외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독자의 뒷통수를 여러번 친다. 뤄샤오밍의 이야기에 홀리는 순간, 우리는 작가 찬호께이에게 말려든다.


<1367>은 여섯 편의 이야기로 이뤄진 소설이다. 각 이야기마다 독립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집으로 생각해도 좋겠다. 모두 기승전결이 탄탄해 완성도가 높고 (반전이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강력한 스포일러지만) 반전 또한 기가막히다.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단점 - 작가와 독자가 증거를 100%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은 피하지 못하지만, 작가는 이야기에서 서술한 모든 소재를 철저히 이용해 독자를 납득시킨다. 범인을 찾는 과정의 즐거움과 뒤로 갈수록 점점 다른 사건으로 변모하는 점이 매력적이다. 사건을 파헤치고 생각치도 못한 뒷처리까지 완벽하게 하는 관전둬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구성 또한 특이하다. 소설집이라 하면 각각의 이야기는 완전히 독립적이거나 순차적인 시간대를 갖기 마련이다. <1367>은 2013년부터 1967년의 사건까지 시간의 역순으로 전개된다.(1367은 처음과 마지막 장의 년도에서 따왔다) 역행하는 시간대는 뒤로 갈수록 관전둬의 과거와 뤄샤오밍의 성장을 보여준다. 거기에 각 시간대는 저마다 의미를 가진다. 60년대의 좌파혁명, 70년대의 염정공서(당시 경찰 내부의 부패를 조사하던 기관), 90년대의 홍콩 주권 반환까지, 작가는 홍콩의 역사를 이야기의 배경과 디테일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데 사용한다. 이런 면에서 <1367>은 사회파 추리소설의 면모를 띈다.


마지막 6장은 다른 장과 달리 1인치의 화자가 등장한다. 전체 이야기 중 전개의 힘은 다소 느슨한 편이다. 하지만 이조차 작가가 노린 점이리라. 화자인 ‘나’가 누구인지 밝혀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고 다시 책의 맨 앞을 펼칠 수밖에 없다. 6장은 독립적인 여섯 편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역행하는 시간대 구성은 단순히 흥미를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라 소설 전체에 숨을 불어넣기 위한 작가의 철저한 계산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한 지점은 관전둬(와 그의 수제자 뤄샤오밍)의 다크 히어로적인 면모다. 그들은 범인을 잡기 위해 어떤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거짓말과 협박은 기본이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건을 ‘일부러’ 만들기도 한다. 함정수사는 불법이 아닌가 싶다가도 시민을 지키고 더 큰 악을 처단하기키기 위해서 저 정도 거짓말은 눈감고 완벽하게 선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는 불온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 장은 큰 의미를 가진다. 관전둬가 불법적인 행동까지 하면서 시민을 보호하려고 하는 계기를 보여준다. 단순히 말을 잘 듣는 조직원으로 살 것인가, 더욱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살 것인가. 관전둬는 이 사건을 통해 한층 성장한다. 동시에 작가는 선과 악은 한끗 차이라고 말한다. ‘나’의 이름이 밝혀지는 순간, 하나의 단순한 선택이 인생의 무한한 가지를 만들어 전혀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몸소 체험할 것이다.


아주 기막힌 소설이다. 650여 쪽임에도 아주 재밌게 읽힌다. 각 시간대를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문장을 꽤나 할애했지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다. 인물, 사건, 구성, 사건, 메세지까지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감히 올해의 추리소설로 칭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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