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사요코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년 전 흥행에 크게 성공해 4편까지 나온 <여고괴담>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학교라는 공간은 참으로 괴담이 나올 만한 여지가 많은 곳이다. 그놈의 성적이 뭔지, 그것 때문에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고, 선생들은 학생들을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하며 쥐 잡듯이 잡고...모든 학교마다 나름의 괴담이 존재하는 것도 학교 생활 자체가 이미 충분히 공포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섯 번째 사요코>는 지방의 한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무대로 한다. 그 학교에는 '사요코 전설'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좀 복잡하다. 학교 3학년생 중 한 명이 사요코가 된다. 사요코는 일 년 동안 남몰래 활동(?)하다가 졸업식 때 다음 사요코를 지명하므로, 사요코는 대를 이어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사요코가 무엇을 하느냐. 매 3년마다 학교 축제 때 연극을 공연해야 한다. 그러니까 1년,2년째의 사요코는 다음 사요코가 누가 될지 전달만 해야 하는 역할이고, 3년째 사요코가 무사히 연극을 마치면(즉 남들에게 적발되지 않고), 그 해의 대학입학률이 대풍년이라 이거다.
 
사요코 전설이 처음 시작된 지, 18년째 되는 해. 그러니까 여섯 번째 사요코가 연극을 해야 하는 해에 한 여학생이 전학을 온다. 그녀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쓰무라 사요코. 더욱더 공교로운 것은 불의의 사고로 죽어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세 번째 사요코와 이름이 같은 것이다. 역할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세 번째 사요코가 한이 남아 다시 돌아온 것일까? 과연 엄청난 미소녀인 쓰무라 사요코 주변에서는 기이한 일들이 연속해서 벌어지고, 총명하고 잘 생긴 전형적인 온다 리쿠표 남자 주인공인 슈는 학교에 감도는 사요코 전설의 실체와 쓰무라 사요코의 정체를 파악해나간다.
 
최근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온다 리쿠의 데뷔작이다. 그녀 작품의 원형이 될 만한 것들, 이를테면 학교라는 독특한 공간과 사려 깊은 미소년과 미소녀들, 묘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와 자연현상이나 학창시절 등에 대한 그녀만의 신선하고 섬세한 고찰 등이 모두 들어 있다. 온다 리쿠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독자들의 '공감'을 잘 얻어내서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한 후배와 대화를 하다가 본인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요일까지 학교에 나와 자율학습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너무 심한 거 아니냐며 어이없어 하는 후배에게 사실 그 자율학습이 좋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일요일날 집에 있으면 뭐하겠는가.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시덥잖은 농담따먹기를 하고, 선생님 시선을 피해 만화책을 읽고, 쉬는 시간마다 달려가 과자를 사 먹는 그런 일상들이 너무 좋았는걸. 온다 리쿠는 <여섯 번째 사요코>에서 학창 시절 친구들과 함께 하는 소중한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따금 이대로 영원히 자신의 내면에 각인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장면들이 있다. 지금이 그렇다. 언젠가 분명 이런 시간을, 이렇게 옆에서 멋대가리 없는 교복을 입고 무방비 상태의 얼굴로 이야기를 걸어오는 유키오의 목소리를 그리운 마음으로 떠올릴 순간이 올 것이다(...) 그보다 넷이서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그는 마음 한구석으로 알고 있었다. 설사 네 명이 대학생이 되어 다시 만난다 해도 두 번 다시 이런 일체감, 네 명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다는 편안함, 세상 질서의 일부가 된 듯한 충족감을 맛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누구든 학창시절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므로 작가가 담담히 털어놓는 학창시절의 이 우정에 대해 깊이 공감하게 된다. 작가와 독자와의 끈은 여기서 단단히 이어진다. 이 공감을 바탕으로 온다 리쿠는 우리 모두가 통과해왔던 지난 날의 상큼한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과연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답다. 그러나 <여섯 번째 사요코>는 고등학교 시절의 우정에 대한 찬가만은 아니다. 학교괴담을 소재로 한 작품답게 분명히 섬뜩한 공포의 순간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절정 부분인 여섯 번째 사요코의 연극 장면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전교생이 모인 강당에서 불을 끄고 펼쳐지는 연극은 개인이 아닌 집단이 조성하는 무의식적인 공포감을 자극하며, 실제로 무서운 것이 아님에도 한 명이 무서워하면 그 무서움이 전염되는 '공포의 전염'을 아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사실상의 클라이맥스로 손색이 없으며, 그동안 보아온 온다 리쿠의 작품을 통틀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데뷔작이라 그런지 약간 갈팡질팡하는 흔적이 보인다는 점인데, 아니 어쩌면 이 작가만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네버랜드>라는 작품에서도 애초 구상과 달리 쓰다보니 주제와 내용이 바뀌웠다고 하더니, <여섯 번째 사요코>에서도 그런 흔적이 보인다. <여섯 번째 사요코>에서는 사요코가 한바탕 독자들을 떨게 만드는 호러소설(연극 장면에서 이 부분은 성취된다)의 요소와 4명의 남녀 학생들이 소박한 애정과 우정을 나누는 모습, 심지어 사요코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함을 암시하는 공포스런 장면과 등장인물들의 유머러스한 말장난까지 정신없이 섞여있어 조금 혼란스럽다. 물론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모든 일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그간의 모든 의문이 시원하게 해소되지는 못한다. 이것(호러소설)도 저것(청춘소설)도 놓치기 싫어 이것저것을 모두 담으려 시도한 작가의 마음은 알겠다만, 각각 이것과 저것의 매력을 일정 부분 잃은 사실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질적인 두 요소의 간극이 제법 느껴져, 데뷔작다운 부족함도 약간은 눈에 띈다는 결론을 내린다.
 
 
p.s/ 그간 온다 리쿠의 작품을 거쳐간 리쿠걸(?) 중에서 쓰무라 사요코가 최강의 미소녀가 아닐까?
등장인물 중 한 명의 독백이다.
"정말 예쁘구나. 앞으로 해가 갈수록 더 예뻐지겠지만 지금은 지금대로 최고로 예뻐.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나 혼자 친구로 독점하다니 왠지 벌이라도 받을 것 같아."
도대체 예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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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7-01-04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 님이 p.s.로 남기신 내용, 과도한 미소녀, 미소년 들의 등장이 아마도 제게 온다 리쿠를 영 '가까이 하기엔 너무먼 당신'으로 남게 하는 이유인것 같아요. 이건 뭐 순정 만화도 아니고... 닭살 돋는 느낌이라 제겐 좀 버거워요 하하. 12월달에 나온 다섯 작품 중 제가 읽기에 제일 재밌는게 뭘까요?

jedai2000 2007-01-04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소녀가 전혀 안 나오는 <네버랜드>가 있겠네요 ^^ 남자 4명이 합숙하는 거라서요. 미스터리 심리 드라마로 나가다가 감동 청춘소설로 바뀌는 게 좀 아쉽지만 재미있고 좋은 소설입니다. 과도한 미소년, 미소녀들의 등장 때문에 소설이 좀 가벼워 보이기도 하는데, 워낙 작가가 그런 걸 즐기는 듯 해요 ^^
 
미륵의 손바닥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윤덕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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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아비코 다케마루의 작품이다. 올해 그렇게 많이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흥분되는 걸 보면 나를 비롯한 미스터리 마니아의 호기심은 대단한 것 같다. 우리(미스터리 마니아)는 배고픈 포식동물이다. 우린 만족을 모른다. 아무리 쏟아져도 전부 먹어치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미륵의 손바닥>을 먹어치울 텐데,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는 신본격 작가군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야쓰지 유키토의 대학 후배로 같은 교토대 미스터리 연구 동호회의 멤버라 신본격 1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작 <살육에 이르는 병> 외에도 사운드노벨의 효시가 된 <카마이타치의 밤>의 시나리오 작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미륵의 손바닥>을 낸 한스미디어 출판사는 같은 신본격 작품 중에서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로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이 매우 비슷하다. <벚꽃 지는..>이 판단력이 흐려진 노인에게 상품을 강매하는 '호라이 클럽'에 잠입해 조사하는 것처럼, <미륵의 손바닥>에서는 신흥 종교 교단 '구원의 손길'에 잠입하는 두 주인공이 나온다. <벚꽃 지는..>처럼 결말의 반전이 핵심이며, 그 반전이 독자에게 익숙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 나온다는 것도 매우 비슷하다.

 

아내가 행방불명된 교사 교이치, 그는 원조교제를 하다 적발되어 아내와의 사이가 소원해졌고 어느 날 집에 들어와보니 아내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우연히 아내가 '미륵'이라는 생불을 섬기는 구원의 손길이라는 종교 단체에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 교이치. 한편 형사 에비하라는 재혼한 아내가 러브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되자 경악한다. 복수심에 불타는 그는 살인범을 직접 처치할 생각으로 단독 수사에 나서다 아내의 방에서 30만엔 짜리 미륵상을 발견하고 그것이 구원의 손길 교단에서 신도들에게 판매한 것임을 알게 된다.

 

작품은 '교사'와 '형사'라는 이름으로 한 꼭지씩 병행되며 화자도 꼭지마다 교사와 형사로 바뀐다. 공통의 목적을 가진 두 남자는 필연적으로 만나서 공동 행동을 하게 되고 최종장 '미륵'에서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게 된다. 짧은 분량에 술술 읽히는 문장(문장력에는 재주가 별로 없는 작가다)이라 금세 끝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 가장 기대되는 최후의 반전을 굉장히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독자의 상식과 고정관념의 뒷통수를 때리는 기발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독자에게 모든 단서, 등장인물들의 모든 행적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어쩔 수 없는 반칙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결말이 느닷없고, 약간 허무하다. 한마디로 미스터리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인 독자와의 '공정한' 두뇌싸움을 포기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미륵의 정체도 너무 평범한 느낌이고 수사소설로서도 그쪽 분야에 뛰어난 다카무라 가오루나 요코야마 히데오 등의 치밀함이 결여되어 있어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플롯이 나쁘지 않고, 반전도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훨씬 좋아졌을 작품이라 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대표작이라는 <살육에 이르는 병>을 보기 전까지는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에 대한 평가는 어쩔 수 없이 박해질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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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1
이시다 이라 지음, 김성기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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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어언 이십여 년 전, '가요톱텐'을 김완선과 소방차가 지배하던 80년대, 공전의 히트 소설이 있었으니 그 이름 바로 [인간시장]이다. 워낙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아직까지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작가 김홍신에게 부와 명예, 그리고 한나라당 국회의원 자리까지 안겨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지금도 뭐 크게 달라진 건 없겠지만, 80년대 사회가 좀 암울했는가. 각종 사기에 연쇄살인에 범죄조직에 인신매매에 아유, 말도 마라(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꼭 격동의 80년대를 온몸으로 헤쳐나온 사람 같다. 참고로 본인은 86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음).

 

이렇게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배경으로 은거한 고수에게 무술을 배워 약자를 괴롭히는 철면피들을 두 주먹으로 응징하는 '장총찬'이라는 인물의 활극이 바로 [인간시장]이다. 이 오지랖 넓은 친구가 보여주는 신기의 무술 실력과 다양한 취재를 바탕으로 그려낸 생생한 범죄의 현장, 한 거친 젊은이의 입을 빌어 작가가 푸는 전방위적인 '썰'이 인기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독자들이 가장 좋아한 부분은 장총찬의 연애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영웅은 호색이라고 숱한 여자가 장총찬을 따른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일편단심 다혜뿐. 젊음의 열기로 어떻게든 다혜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은 장총찬과 순결주의자 다혜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연애질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실 바로 위에서 장총찬이 일편단심이라고 했지만 굳이 다른 여자와의 잠자리를 피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과 독자의 성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몸바쳐서 복무했던 것이다(이 시절에는 호기심 넘쳐나는 가련한 남학생들이 볼 만한 시청각 자료가 별로 없었다우).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이야기를 하면서 웬 [인간시장]이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텐데, 두 작품이 매우 비슷한 느낌이라 옛 추억을 잠깐 더듬어보았다. 이 작품의 주인공 마시마 마코토도 장총찬처럼 주먹도 좀 쓰고, 팽팽 돌아가는 머리로 작전을 짜서 악당들의 뒷통수를 치기도 하며, 분방한 성경험을 자랑하는 인물이라 이거다. 물론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마코토는 '쿨'하다는 것이다. 불의한 일들을 보면 완전 마징가처럼 흥분하는 장총찬과는 달리 이케부쿠로의 해결사 마코토는 거리에서 일어나는 온갖 환락과 폭력에 초연하다. 그가 나서는 경우는 단지 이 거리에 야쿠자의 입김이 개입할 때나 연쇄성폭행범이 활개를 칠 때 등이다. 마코토의 생각은 짐작컨대 이런 것 같다. 물론 꼬맹이 시절의 패싸움질이나 술과 신나 등으로 정신 못 차리는 것은 나쁘다. 하지만 어릴 때는 누구나 잘못을 하면서 크는 것이 아닌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한다면 되는 것이다. 다만 그런 거리의 자정작용을 방해하는 불온한 세력(돈과 이권에 개입해 꼬맹이들의 싸움질을 부추기는 야쿠자 등)들은 용서치 못하겠다는 거다.

 

이 작품에는 총 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마코토와 친구들이 활약하는 이케부쿠로 서구 공원(그래서 웨스트 게이트 파크)의 풍경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선명하게 느껴진다. 나오키상 수상작가 이시다 이라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으로 현재 여러 편의 후속작이 출간된 상태이며 드라마화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만화책으로도 출간됐다. 쿨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의 마코토를 제외하고도 조직원 수백 명을 자랑하는 서클 G 보이스의 리더 '얼음황제' 안도 다카시를 비롯해 그를 위협하는 R 에인절스의 '카리스마 댄서' 교이치, 은둔형 외톨이지만 고등학교 동창인 마코토를 돕는 감시 전문가 가즈노리 등 개성적인 인물이 다수 나온다. 엄밀히 말해 미스터리라고는 할 수 없고, 범죄소설로도 그닥 진지함은 없다. 마코토와 조력자들이 힘을 합쳐 이케부쿠로 거리를 지키는 활기차고 역동적인 청춘소설로 보는 게 가장 적당할 듯 싶다. 

 

아마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좋아할 확률이 높은데, 특히 마지막 단편인 <선샤인 거리의 내전>에서 전면전으로 치닫는 두 거대 서클의 일촉즉발의 분위기와 결국 전설적인 두 리더가 맞대결로 승부를 보기까지의 과정은 아마 피끓는 남성들을 혼절 직전으로 몰아갈 것이다. 왜 학교 다닐 때도 누구와 누구가 학교의 패권을 둘러싸고 대결한다, 는 소리만 들리면 우르르 몰려가서 구경가지 않았는가. 남자에게는 아직도 주먹다짐에 목숨을 거는 짐승 같은 면이 남아 있으니까. 이 소설에는 바로 이런 원초적이고 들끓는 열기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김을 빼서 미안한데, 두 리더들은 대결하지 않는다. 거리의 평화를 지키려고 분투하는 마코토의 노력에 감동받고, 계속되는 폭력에 염증을 느낀 두 리더들이 손을 맞잡고 전쟁을 끝내버렸기 때문이다. 대책없이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한 뼘쯤은 자란 아이들의 모습에 흐뭇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거리 아이들의 성장담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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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모중석 스릴러 클럽 6
딘 쿤츠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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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을 보면 등장인물 중 반드시 한 명 이상은 이혼남녀이다. 그 나라에 살지도 않으면서 이런 말 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미국에서 이혼은 흠 잡힐 일이 아닌, 어떻게 보면 잠깐 살아보고 아니면 바로 갈라서는 그런 편의주의적인 발상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 사회에서 이런 이혼 선호(?) 사상을 약간 달라지게 만든 건 역시 2000년의 9.11테러 사건 이후가 아닐런지. 지금도 기억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당시 희생자 중 남편들이 아내에게 남기는 마지막 사랑의 말이 기사화되어 진정한 결혼과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우리 딸 에미도 정말 사랑해. 우리 딸 에미 잘 돌봐 줘. 당신이 남은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하든 꼭 행복해야 돼. 나는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그 결정을 존중할꺼야. 그리고 그 결정이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할꺼야.
(NBC 보도:유나이티드 에어라인 93기에 타고 있던 승객 제르미 글릭이 추락 직전 부인 리즈베스에게 마지막으로 한 전화내용)


 죽을 걸 알면서도, 또는 죽어 가면서도 한 번 두 번 쉴새없이 불러보고 싶은 아내의 이름. 이런 걸 보면 역시 피는 안 통해도 사랑과 정이 통하는 살붙이가 최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딘 쿤츠의 <남편>은 9.11 이후 누구도 함부로 믿지 못하게 된 미국 사회의 불안증을 가장 작고 소박하지만, 한편으로는 단단하고 소중한 부부 관계로의 회귀를 통해 극복해나갈 것을 역설하는 소설로, 아내를 납치당한 평범한 정원사 밋치가 온갖 어려움과 생명의 위기를 겪어가면서도 아내 홀리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비교적 단선적인 플롯임에도 불구하고 밋치 부부의 사랑과 믿음이 제법 가슴을 울려 모름지기 남편이라면 이 정도는 되야지, 혹은 부부 간의 사랑은 이래야 해 하면서 크게 몰입하며 읽었다. 이 이야기에 이렇게 몰입이 되는 걸 보니 본인도 장가갈 때가 된 모양이긴 한데...

 

딘 쿤츠는 우리에게 낯 익으면서도 낯선 이름이다. 미국에서는 <왓처스> 등의 호러소설을 통해 80-90년대를 통틀어 스티븐 킹의 라이벌로 이름을 떨쳤고, 우리나라에도 제법 많은 수의 작품들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유독 국내에서는 별다른 이유없이 스티븐 킹의 아류 정도의 대접을 받은 것이 사실인데, 조악한 표지에 싸 보이는 모양새로 멋없이 책을 낸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남편>을 포함해 3편 정도의 딘 쿤츠 작품을 읽었는데, 여기서 누구의 우열을 말하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고 간단히 말해 킹은 킹이고 쿤츠는 쿤츠다. 둘 다 훌륭한 작가고 확실한 페이지 터너들이다. 다만 스티븐 킹의 작품은 세부 묘사나 심리 묘사에서 좀더 문학적인 취향이 있고, 딘 쿤츠는 추격이나 모험, 반전 등 정통적인 서스펜스 스릴러의 요소에 더 충실한 것 같다는 이야기만 해둔다.

 

<남편>은 정공법으로 스릴과 서스펜스를 취한다. 사건의 전모는 비교적 초반부에 전부 밝혀지고, 그 뒤로는 밋치가 처한 여러 가지 위기들을 하나씩 타개해나가는 모험담으로 진행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사악한 자의 정체가 밝혀질 때가 제일 놀랍고, 작가 딘 쿤츠가 가장 공들여 묘사한 두 명의 프로 킬러와 사막에서 총 한 자루로 대결하는 장면의 긴장감은 그야말로 훌륭하다. 또한 아내 홀리에게 접근하는 납치범의 사이코적인 행태에도 소름이 끼친다(그 사이코는 어떤 물리적 위해도 가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말로 아내 홀리와 독자를 질리게 만든다). 이런 일에 경험이 전혀 없는 밋치는 계속 꼬여가기만 하는 상황이 거의 악몽처럼 느껴진다. 밋치가 이 악몽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아내의 손을 잡을 수 있을지 끝까지 관심을 잃지 말고 지켜보기 바란다.

 

약간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품에서 끊임없이 남편과 아내, 즉 부부의 사랑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환기시키는 바람에 속도감이 약간 느려진 것과 결말이 약간 시시하다는 것 정도랄까. 유행처럼 번진 반전강박증이나 요동치고 널뛰는 플롯을 배제한 요즘 보기 드문 정통 스릴러라는 것에 주목하면서 책을 읽으면 훨씬 재미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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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9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구입했어요..;;

oldhand 2006-12-2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가갈 때가 된 모양이긴 한데" --> 이것만 눈에 확 들어옵니다. 핫핫.

jedai2000 2006-12-2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군님...재미나게 보시기 바랍니다 ^^

올드핸드님...그러게요 ^^ 좀 있으면 서른인데 슬슬 준비를 해야할 것 같아요 ^^

아영엄마 2006-12-30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제다이님은 아직 서른이 안되셨군요~. - 음음.. 저는 아직 마흔이 안 됐어요. (-.-)>

jedai2000 2006-12-30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스물아홉이 됩니다. ^^ 어이쿠 완전 큰 누님이신걸요 ^^
 
네버랜드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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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유서 깊은 남자 고등학교의 기숙사. 겨울방학을 맞아 북적대던 학생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 적막만이 감돈다. 집에 갈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네 명의 남학생만이 남아 무덤같이 고요한 기숙사를 지킨다. 남고생 네 명이 선생님과 부모님의 감시가 없는 공간에 있으니 탈선의 온상이 될 것은 당연지사. 네 학생은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의 일주일간을 정종과 맥주, 위스키, 담배로 화려하게 불사른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년이 넘었건만 이 친구들처럼 대놓고 술, 담배를 하지 못하는 본인 같은 사람에게는 그들의 일주일이 정말 꿈과 희망과 환상의 나라가 아닐까. 부러운 녀석들 같으니라구.

 

아무튼 이 네 명은 매일 밤마다 한 명씩 감춰두었던 비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일종의 '칠일야화'라고 봐도 괜찮을 것이다. 텅 빈 기숙사에서는 병으로 죽은 남학생의 유령도 출몰하고, 네 명 중 한 명은 죽은 엄마의 환영에 고통받기도 하며, 다른 한 소년은 빨간 손톱의 여인의 기억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렇듯 작품의 시작은 아주 오싹하다. 어떤 공포소설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음산하다. 비바람이 몹시 치던 날,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와 바람소리, 이리저리 비틀대는 나무들, 검은 하늘을 뚫고 로비에서는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깬다. 서른 번도 넘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온다 리쿠가 공들여 조성한 음산한 분위기에 빨려들어가듯 책장을 넘기고 말았다. 호러에도 일가견이 있는 작가라고 하더니 과연 특출나다.

 

그런데 작가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처음에는 긴박감 넘치는 심리 드라마를 쓰고 싶었는데, 자신의 엉터리 같은 성격으로 인하여 결국 훈훈한 이야기로 매조지되고 말았다고 하더니 정말로 뒤로 갈수록 네 친구의 우정과 마음씀씀이에 깊은 감동을 받고 만다. 도입부의 음산하고 긴박감 넘치는 분위기가 아쉽긴 하지만 역시 <네버랜드>에는 이게 맞는 것 같다. 보석같이 반짝이는 청춘의 떨림과 함께라면 무엇도 해나갈 수 있는 마법 같은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작가 온다 리쿠는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니 혹은 '노스탤지어의 전령사'니 하는 멋부린 칭찬을 듣고 있는데 그녀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문장에 담겨진 아련한 지난 날의 한순간을 보노라면 정말 가슴이 먹먹해져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대청소를 하는 친구들. 그중의 한 명이 회상에 잠긴다. 부모님과 더불어 대청소를 했던 순간을. 청소 도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잊고 있었던 장난감을 만지고 노느라 청소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을 때의 엄마의 불호령. 다시 갈 수도 없고, 다시 느껴볼 수 없는 순간이다. 작가는 도처에서 이런 향수어린 옛 풍경을 꺼내들어 옛날을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독자들의 가슴을 온통 흔들어놓는다. 책장을 덮고 바로 담배 한대를 꺼내물었을 정도로 감정의 진폭이 컸다. 아름답지만 이미 잊고 있었던, 기억할 만한 순간을 속속 우리의 기억에서 불러내는 그녀의 능력은 과연 마법사에 손색이 없겠다.

 

몇 명의 소년소녀(주로 미소녀들이지만)가 합숙을 하며 지난 날의 비밀을 캐는 이야기인 <굽이치는 강가에서>와 네 명의 남자친구들이 같은 과정을 통해 비밀을 털어놓는 <네버랜드>는 상당히 비슷한 느낌이다. 미스터리적인 맛이나 달음질쳐가는 긴박감, 모든 진상이 밝혀질 때의 강렬한 에너지는 <굽이치는 강가에서>가 한 수 위지만, 훈훈하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감동 면에선 <네버랜드>가 더 나은 것 같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읽고 나면 쉬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이미지들을 제공하고 있고, 뛰어난 이야기꾼인 온다 리쿠가 적절히 안배한 이야기들이 촘촘히 묶여져 있다. 온다 리쿠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있고, 무슨 이야기든 미스터리적인 취향을 가미시키는 걸 잊지 않는다. 기억할 만한 이야기꾼이며 현재 가장 돋보이는 일본작가 중 한 사람이다. 반드시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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