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가 돌아왔다 1
방동규.조우석 지음 / 다산책방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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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경위는 이렇다. 어느 때와 같이 근무 시간을 쪼개 하릴없이 직장 선배와 잡담을 하던 중 선배가 12년 만기 적금을 들었다는 말을 꺼냈다.
 
"이야, 선배. 12년 뒤에 애 대학 등록금 마련했네(참고로 내년에 결혼 예정. 잘 풀리면...정말 잘 풀리면)."

"아, 뭔 소리야. 내가 이제 서른 하나인데. 내년에 결혼해서 내후년에 애를 낳으면 서른 셋인데. 보통 스무살 때 대학을 가니까 쉰 넘어서네."

"중요한 건 일단 선배네 애가 대학을 갈 실력이 되느냐지."

"뭐야! 그건 그렇고 그러고 보면 인생 참 별 거 없어."

"왜요?"

"생각해봐. 애 대학 마칠 때까지만 돈을 벌어도 거짐 육십 다 되서까지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어느새 황혼이잖아."

"정말 인생 별 것 없네요."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늘 그냥 그런 하루들의 연속.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 가정을 일궈 다음 세대를 지탱할 자녀를 낳고 기르며 소박하게 사는 것도 근사한 인생의 한 목적이리라. 그러나 못내 아쉬움이 남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을 터.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며 한 세상 호방하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요즘 이런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배추가 돌아왔다>의 그 '배추' 방동규 선생의 인터뷰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한 세트를 구입했다.

 

책을 읽는 내내 깔깔거리고,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며, 때로는 눈물도 흘리며 단숨에 상하권을 덮고 말았다. 시대의 풍운아이자 천하의 걸물인 방배추 선생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왜 배추냐고? 학교 다닐 때 옷차림새가 추례해 여학생들이 배추장수 같다고 놀렸는데, 네 자는 길다 해서 두 자 배추로 팍 줄였던 것이다. 개성 최고의 부호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왕처럼 자란 유년기를 거쳐, 6.25 전쟁통에 돼지고기 장사로 짭짤한 맛도 보고, 싸움과 말썽으로 고등학교를 5번 퇴학 당하지만 역도 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대를 다니다 당대의 학생 주먹으로 명성을 날린 것이 배추 인생의 서막이다(1950년대 당시에는 학생 주먹이 무척 많았다. 대학을 나와도 할 일이 없었을 정도로 나라가 가난했기 때문에. 한창 혈기방장할 때 할 일이 없으니 주먹밖에 더 쓰겠는가).

 

그러다 백기완 선생을 만나면서 치기에서 벗어나 사회와 국가, 민족을 보는 나름의 시각을 세우고, 파독 광부로 3년간 일하며 죽을 고비 넘기기를 수 차례, 독일에서 파리로 건너가 집시처럼 방랑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패션 양품점을 차려 직접 디자인한 옷으로 지금 앙드레 김 못지않은 명성을 날리기도 하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공동생산, 공동분배 원칙의 '노느메기 농장'을 만들어 농사일로 땀을 흘리지만 이내 반공법 위반으로 형무소 생활을 하고...그 외에 중동 건설 현장에 파견 근무, 3000명 규모의 회사 CEO, 칠순이 넘은 최근엔 최근엔 경복궁 문화재 안내위원까지 쉴틈없이 멀리도 달려왔다. 하지만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최근엔 미스터코리아 우승을 목표로 운동 중이니까.

 

보는 내내 아, 이런 인생도 있구나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칠 줄 모르는 배추 선생의 열정과 자유로운 영혼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야말로 공동 저자인 조우석 씨 말처럼 나이드신 분들에게는 추억의 이름이요, 젊은 세대에게는 무엇에든 부딪쳐본다는 도전 정신을 몸으로 직접 가르쳐주는 짱 멋진 할아버지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배추 선생같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배추 선생의 흥미진진한 인생 역정을 곁에서 슬쩍 들여다보기만 해도 흐뭇한 대리만족이 되며,어떤 시련에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는 당찬 마음가짐까지 덤으로 배울 수 있는 책이다.

 

배추 선생의 눈물나는 군대 탈출기는 기가 막히게 우습고, 파독 광부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이 위로차 찾아와 수천 명의 파독 광부들이 이국땅에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운 풍경이나 배추 선생과 친분이 있는 정치인 이부영 씨 어머님의 누구나 못 살던 그 시절 안타까운 사연들에서는 결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웃다가 울다가 감탄했다가 기가 막혔다가 결국에는 배추 선생에게 '내가 졌습니다' 절할 수밖에 없게 되는 놀라운 책이다. 내 올해 소원은 배추 할아버지와 술 한 잔 나누는 것이다. 배추 선생의 놀라운 '구라'를 직접 듣는다면 3일 꼬박 마셔도 문제없다. 여기 인생이 심심하신 분들, 꼭 한 번 읽어보시길...

 

p.s/ 배추 선생은 백기완 씨의 부친인 당대의 풍류객 백홍열 선생과 나이를 떠난 지기였다. 이 백홍열 선생의 기가 막힌 멘트 하나. "돈과 권력과 여자는 먼저 빼앗는 놈이 임자. 그러나 세 가지 모두 동냥하거나 구걸해서 얻을 순 없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정말 맞는 말이다.

 

p.s의 p.s/ 오탈자가 많은 편이다. 무슨 책이나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지은이가 살아 계신데, 책 만드는 사람들이 누를 끼쳐서야 되겠는가.     

 

 

  



 

                                                         <실제 배추 할아버지 사진. 저 근육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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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1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1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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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의 수도라고 할 만큼 유서깊은 보스턴 시를 차갑게 얼릴 만한 강력 사건이 발발한다. 미모의 독신녀들이 연이어 피살당하는 것인데, 이 정도라면 그다지 사람들을 떨게 만들지 못 하겠지. 그러나 피해자들의 배가 날카로운 메스로 잘리고, 자궁이 도려내져 밖으로 끄집어져 있다면 어떨까? 그야말로 엽기의 끝을 달리는, 피가 얼어붙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그런 사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을 맡은 것은 강력반의 토마스 무어와 제인 리졸리 형사다. 토마스 무어는 '성 토마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형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사내고, 제인 리졸리는 테스토스테론으로 얼룩진 경찰계에서 여자의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쌈닭 같은 존재다. 두 사람은 비슷한 사건이 다른 주에서 발생했던 것을 발견하고는 당시 사건을 조사해 나간다. 3년 전, 앤드루 캐프라라는 외과 인턴이 4명의 여성을 무참히 살해하고 자궁을 꺼내 자신만의 변태적인 성욕을 만족시켰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앤드루 캐프라의 비밀스런 범죄 행각은 마지막 희생양이 될 뻔한 외과의 캐서린 코델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간신히 탈출해 그를 쏘아 죽임으로써 종결되고 만다. 앤드루 카프라는 이미 죽었는데 거의 비슷한 방식의 범죄라니 모방범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유령? 두 형사는 캐서린 코델이 보스턴으로 이주한 시점에서 사건이 재개된 걸 깨닫고, 사건의 핵심에는 캐서린 코델이 있다고 생각한다. 메스에 능숙하고, 무리없이 자궁을 꺼내는 등 의학 지식을 갖춘 얼굴 없는 범인을 두고 언론에서는 '외과의사'란 별명을 붙이는데, 외과의사의 범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대담해진다. 연쇄살인이 진행될수록 더욱 노골적으로 캐서린 코델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외과의사의 정체는 과연 누구일까?

 

중국계 미국인 작가로 알려진 테스 게리첸의 스릴러 '제인 리졸리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이 시리즈는 현재 총 6권이 나와 있다). 내용 설명을 봐서 알겠지만 사건의 배경은 주로 병원이고, 등장인물도 대부분 의사다. 이는 작가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은데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의사로 일했던 적이 있단다. 그래서 책에 등장하는 병원 풍경과 수술 묘사는 굉장히 정교하고 이보다 더 사실적일 수가 없다. 이렇게 의사로 잘나가던 테스 게리첸은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출산휴가를 이용해 어린 시절의 꿈에 도전한 그녀는 로맨스 소설로 등단에 성공하지만 작풍을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릴러로 바꾼 후에는 글만 써도 먹고 살 만큼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현재는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책을 가장 잘 파악하려면 역시 작가이력을 눈여겨보는 수밖에 없다. 책을 이해할 수 있는 대부분의 열쇠가 거기 숨어 있다. 당연하겠지만 소설은 작가가 쓰는 거니까 소설가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를 잘 살펴보면 소설가의 작품도 보이게 마련이다. 왜 검도한 사람은 싸울 때 몽둥이부터 찾고, 태권도 한 사람은 다리부터 뻗는 것처럼 본인이 의사였으니 가장 잘 아는 세계인 병원을 소재로 메디컬 스릴러를 쓰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그렇지만 의학 쪽으로 깊이 들어가 원인 불명의 병원체의 공포를 그린다거나 하는 하드하고 본격적인 메디컬 스릴러는 아니다. 그녀에게 병원과 의사는 흥미로운 스릴러의 소품과 배경일 뿐이다).

 

한때 로맨스 소설로 이름을 날렸던 작가답게 <외과의사>는 로맨스의 맛도 충분히 살아 있다. 아내를 잃고 절망한 토마스 무어 형사와 과거의 악몽에서 간신히 벗어나자마자 새로운 유령과 맞닥뜨린 캐서린 코델은 강렬하게 이끌리며, 이 둘을 여성적인 매력이 없는 제인 리졸리가 질투하면서 작품이 거의 삼각관계 드라마처럼 나가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잔인하게 죽어나가는 스릴러의 팍팍함을 조금 부드럽게 만들어주기 위한 양념이다. 하지만 본말전도라고 이 로맨스 때문에도 그녀의 책을 잡는 여성 독자가 꽤 있을 듯하다.  

 

토머스 해리스의 등장 이후 미국의 스릴러는 대부분 사이코 범죄자가 엽기적인 범행을 저지르며 경찰과 대결하는 구도가 많으며, 퍼트리샤 콘웰이 히트를 치고 난 후에는 법의학이나 의학에 관련된 전문 지식으로 독자들을 홀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결말의 반전 한두 차례는 필수 요소가 되었고. 어떻게 보면 천편일률적이지만 읽는 동안은 그렇게 정신없이 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미국의 현대 스릴러라는 장르는 이미 독자의 입맛에 딱 맞도록 고도로 특화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테스 게리첸의 작품은 스릴러 장르의 규칙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여러모로 완성도가 뛰어나다. 범인의 정체를 범인의 독백을 통해 독자에게 뜬금없이 그냥 밝혀버리는 것은 아쉽지만, 독자들만큼 결정적인 단서를 받지 못한 토마스 무어와 제인 리졸리가 어떻게 범인의 흔적을 뒤쫓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가는지를 시종일관 치밀하고 긴장감 넘치게 묘사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 마지막으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형사 제인 리졸리가 겪는 고통이나 무수한 성폭행 피해여성들의 아픔을 공감가게 그리는 것도 <외과의사>만의 장점이라 아니 할 수 없겠다.   

 

     

   

"사후 피검사를 받으러 다시 왔어요. 정확한 AIDS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노출된 지 6주 후에 검사를 해야 하거든요. 그거야말로 정말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죠. 성폭행을 당한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가해자가 치명적인 질병을 전염시키지 않았는지 확인까지 해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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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3-1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목중입니다^^

jedai2000 2007-03-16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얼른 <견습의사>도 읽어야겠어요 ^^

2007-03-21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7-03-2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오, 너무 헐리우드 영화 같은 맛 때문에 보는 책인데요 ^^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 - 인간실격.제로자키 히토시키, Faust Novel 헛소리꾼 시리즈 2
니시오 이신 지음, 현정수 옮김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는 미스터리 요소를 가미한 라이트노벨 '헛소리 시리즈'로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니시오 이신의 소설로 헛소리 시리즈 제1작 <잘린머리 사이클>에 이은 두번째 작품이다. 헛소리 시리즈가 뭔가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텐데, 주인공 이짱(헛소리꾼)이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떠올리는 온갖 현학(적으로 보이려 애쓰는)과 철학, 상념, 망상, 요설 등 한 마디로 헛소리를 1인칭으로 담아내고 있기에 헛소리 시리즈다.

 

이 작품은 전작 <잘린머리 사이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데, 전작에서 '젖은 까마귀 섬'에 초청된 이짱과 친구이자 세계 최고의 해커인 쿠나기사 토모가 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을 해결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다(앞으로의 시리즈에서도 매번 한 달 간격으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다. 주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수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간다니 김전일도 울고 가겠다).  알고 보니 이짱은 로쿠메이칸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이란다. 대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헛소리만 하다니 혼 좀 나야할 듯.

 

아무튼 평소 쿠나기사 말고는 변변한 친구도 없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이짱에게 귀여운 동기 여대생 아오이이 미코코가 찾아온다. 자신의 친구인 에모토 토모에의 생일 파티에 같이 가자고. 미코코는 웬지 이짱을 좋아하는 눈치인데, 그래 뵈도 거절은 잘 못하는 이짱은 못 이기는 척 생일 파티에 따라간다. 두 사람 말고도 몇 명의 친구가 더 와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이짱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토모에의 전화를 받는다. 토모에와 이짱은 묘한 정신세계가 은근히 통했던 것이다. 그러곤 한 잠 푹 자고 깨보니 토모에가 그녀 집에서 목이 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자신(이짱)을 포함해 그날 같이 있었던 친구들은 모두 알리바이가 있는 상황에 현장에는 기묘한 다잉메시지가. 과연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요즘이야 세일즈 시대라 자신의 장점이든 단점이든 뭐든지 팔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하필 책 콘셉트를 다소 부정적인 느낌도 주는 헛소리 시리즈로 정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일 간단하고 절박한 이유는 말꼬리 잡고 끝없이 반복되는 헛소리를 늘어놓다 보면 어느새 책 분량이 늘어나 원고료 상승이라는 흐뭇한 결과가 도출되기 때문이리라. 그 다음은 위에 언급한 대로 그럴싸한 현학(으로 보이려 애쓰는)의 느낌을 주는 헛소리들을 보고 주독자층인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니시오 이신 오빠, 형아는 정말 아는 것도 많구나'하며 감탄할 수 있기 때문이니 작가의 허영심마저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니시오 이신 특유의 헛소리가 작품의 트릭을 완성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인류 최강의 청부업자'니 '살인귀 제로자키'니 하는 만화 같은 인물들이 연이어 튀어 나오고, 헛소리가 쉬지 않고 반복되기에 나중에는 어느 정도 몽환적인 느낌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니시오 이신 미스터리의 특징은 등장인물의 특징과 심리, 헛소리는 비현실적이라도 사용된 트릭은 비교적 현실적이라는데 있다. 주지한 대로 작품이 주는 몽환적인 느낌 때문에 논리적인 해결을 포기하고 읽게 되는데, 사실은 단서도 공정하게 주어지는 편이며, 이번 작품에서는 트릭도 충분히 실현 가능하면서 기발해 결말을 보고 나면 제대로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 든다(개인적으로는 <잘린머리 사이클>에 사용된 트릭보다 한층 간단하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이번 작품의 트릭이 훨씬 좋았다). 게다가 중요한 단서가 제시되는 순간도 헛소리로 눙치고 넘어갈 수 있으니 '헛소리'는 니시오 이신의 비장의 무기인 셈이다.

 

세상 천지의 누구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 고독하기만 한 이짱의 심리와 헛소리는 비슷한 생각을 품고 사는 십대에겐 공감가는 부분이 많을 거다. 그러나 이미 질풍노도의 시기는 지난 본인 같은 독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나는 철저하게 미스터리의 관점에서만 이 작품을 보았고, 사용된 트릭에 충분히 만족했다. 사실은 만화 같은 인물들이나 헛소리를 아예 빼고, 250페이지 내외의 콤팩트한 추리소설로 만들어졌으면 더욱 열광하겠지만 이 정도도 충분히 즐길 만은 하다.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 정도의 트릭과 해답이라면 앞으로도 나는 언제든 니시오 이신의 '헛소리 시리즈'를 잡을 것이다.

 

p.s/ 이 작품에서 사용된 알리바이 제조 트릭은 단순하면서도 아주 신선하고 기발했지만, 다잉메시지는 완전히 독자 우롱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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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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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방범>은 530 페이지 내외의 두툼한 책 3권으로 이뤄진 분량이 어마어마한 책이다. 실제로 보면 거의 벽돌 같은 두께라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져 사실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1권의 첫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고, 어느새 1권의 마지막에 도달해 있었다. 1권을 덮자마자 2권을 찾기 위해 호들갑을 떨었고...3권까지 완전히 다 읽고 든 생각은 '더 길어도 좋을 뻔했다'는 거였다. 이 놀랍도록 재미있는 책을 여기서 끝내야 한다는 것이 몹시 서글퍼졌으니까. 이 정도의 재미를 주는 책이라면 독자 입장에서 3권이 아니라 30권도 문제 없으렷다.

  

<모방범>의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1960년에 도쿄에서 태어났다. <대답은 필요없어>라는 그녀의 단편집의 해설을 쓴 이에 따르면 지독하게 가난한 집이었다고 한다. 생계 때문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속기 전문학교에서 속기사 시험을 준비하며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등 문필과는 무관한 일을 했다. 그러다 1987년에 <우리들 이웃의 범죄>가 추리소설 신인상을 타면서 등단에 성공했고, 그 뒤로 현재까지는 다들 알고 계시다시피 초인기작가로 군림하고 있다. <화차>로 야마모토 슈고로상, <이유>로 나오키상, 최신작인 <이름없는 독>으로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등 일본내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문학상을 휩쓸었으며 독자 인기 투표에서는 언제나 부동의 1위를 달린다. 아마도 특유의 완벽한 스토리텔링과 미스터리, SF, 시대소설 등을 넘나드는 다양한 소재, 세상과 사람을 보는 따뜻한 시선, 여운이 남는 좋은 결말이 그 인기 요인이 아닐까 한다.

  

<모방범>은 그 방대한 양에 걸맞는 완성도의 대작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개인적으로는 <화차>와 <모방범> 사이에서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일본에서 5년간 연재한 원고지 6,000매(일본은 원고지 한 장에 400자가 들어간다)의 작품을 단행본으로는 2권, 문고본으로는 5권으로 묶어서 냈으며 누적 280만부 판매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영화화도 되었다고 하나 2시간 남짓한 상영시간 안에 <모방범>을 전부 담는 건 불가능했는지 평은 그닥 좋지 않다.

 

도쿄 오가와 공원에서 여인의 토막난 팔 하나와 핸드백이 발견되면서 전 일본을 경악시킨 연쇄살인은 스타트를 알린다. 팔의 원래 주인을 둘러싸고 조사가 이뤄지던 중 방송국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음성 변조기로 달라진 목소리는 자신이 팔이 잘린 여자를 죽였으며, 핸드백의 주인은 자신의 손에 아직 살아 있다고 밝힌다. 핸드백의 주인은 후루카와 마리코라는 사회 초년생. 범인은 마리코의 외할아버지 아리마 요시오에게 전화를 걸어 손녀를 살리고 싶으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종용한다. 범인의 명령에 따라 온갖 굴욕을 겪으며 농락당하는 아리마 할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리코는 시체로 발견되며 수사본부는 총력을 기울여 수사에 나선다. 그러나 계속해서 젊은 여성들의 시체는 늘어만 가고. 범인은 연이어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일으키는 사건의 반향이 커져가는 것을 즐기는 양상을 보인다. 수사는 여전히 난항이지만, 아리마 할아버지는 범인과의 통화 도중 느꼈던 어떤 직감을 떠올리며 결정적인 추측을 한다. 목소리의 느낌이 달랐던 걸로 봐서 범인은 혹시 두 명이 아닐까 하는...

 

방송을 통한 '극장형 범죄'를 소재로 한 <모방범>은 전체 3부로 이뤄져 있다. 1부는 연쇄살인의 진행과정과 경찰의 수사를  다양한 시선에서 다큐멘터리처럼 그리며, 2부는 범인 혹은 범인들의 시점에서 그들이 왜,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가를 세밀하게 그린다. 마지막 3부는 절묘한 행운으로 수사망을 벗어난 악의 화신 '피스(범인의 별명이다)'가 마침내 검거되는 장면이 나오고, 평생 슬픔을 않고 살아야 하는 희생자 가족들의 후일담으로 아프게 끝을 맺는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여러모로 다종다양해서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각각 다른 느낌을 받곤 한다. 어떤 작품은 만화처럼 유쾌하고, 다른 작품은 쓸쓸한 풍경화같고, 또 다른 건 투명한 수채화같고. 그런 면에서 <모방범>을 보면 이건 정말 완벽한 한 폭의 벽화다. 거대한 도쿄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악의가 낳은 범죄에 맞닥뜨린 수많은 사람들의 온갖 사연들이 다채롭게 펼쳐지는 이 작품은 벽화처럼 압도적이고 장중하다. 또한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등장인물이라 할지라도 작가는 세심한 관찰과 묘사로 생생한 현실감을 주고 있으니, 중요한 등장인물들-쓰카다 신이치, 아리마 요시오, 구리하라 히로시, 다카이 가즈아키, 유미코 남매 그리고 '피스!'-은 더 말해 무엇하랴.

 

아무래도 미스터리로서는 과도하게 많은 분량이다 보니 중요한 단서가 우연에 의해 발견되는 등 결말에서 약간 힘이 빠지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방송으로 흥한 피스를 방송에서 무너뜨리는 클라이막스의 긴장감은 정말 대단했다. 진짜 남자가 느껴졌던 72세의 아리마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사건 현장의 건축물만 보고 명추리를 전개하는 '건축가(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나오면 아주 좋겠다)'까지 매력있는 인물들이 흥미로운 줄거리 안에서 격돌한다. 정말이지 놀라운 작품으로 작가 미야베 미유키가 신공으로 썼구나 하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정도 작품은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작가의 야심과 물오른 필력, 여러 운과 때가 맞아야나오는 법이다. <모방범>을 볼 수 있었던 걸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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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7-03-0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 님 답지 않게 모방범 월드 가입이 늦었습니다. ^^

jedai2000 2007-03-09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분량이 너무 많아 차일피일 미루는 우를 저질렀습니다. 이 작품은 무조건 추천입니다!
 
살육에 이르는 병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대개 책뒤표지에 실려 있는 문구들은 실제 이상으로 과장된 경우가 많아 그 문구에 혹해 책을 집었다가 기대보다는 실망한 채로 책을 덮은 적이 종종 있다. <살육에 이르는 병>에 제일 크게 써 있는 뒤표지 문구는 '충격적인 결말을 확인한 순간,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이다. 이번에는 어땠을까? 무엇 하나 더하고 뺄 것이 없는 진실이다. 정말이지 마지막 장을 넘기자마자 제일 첫 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꼼꼼이 다시 읽어봐야만 했다. 차근차근 복기하면서 여기가 힌트였구나, 저기가 수상했구나, 확인하면서 빨려들 듯이 내리 두 번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입가에는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소문이 무성했던 신본격 미스터리의 걸작 <살육에 이르는 병>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여러모로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절대로 속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밝혀진 진실에 완전히 무장해제당하고 말았다. 간단히 말해 서술트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장르 안에서는 현재까지 국내에 나온 작품에서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독자들이 필연적으로 오독을 할 수밖에 없게끔 작가가 공들여 만든 상황들과 영리한 미스디렉션이 돋보이며, 단 하나의 실마리도 놓치지 않으려 작정하고 읽는 주의 깊은 독자들마저 한 방에 넉아웃시킬 충격적인 반전은 정말 놀랍다. 단서가 약간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범인의 정체와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때는 그야말로 세계가 붕괴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혼란에 빠져버렸다.

 

작품은 세 사람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독특하게도 연쇄살인범이 검거되는 에필로그가 먼저 나온다. 이 연쇄살인범이 범행 대상을 물색하고, 구체적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 그리고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연쇄살인범의 비정상적인 내면 심리 묘사가 한 축이다. 또한 그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전직 형사의 시선이 두번째 축이고, 연쇄살인범과 굉장히 가까운 관계인 여인이 의혹을 품고 나름의 조사를 벌이는 것이 마지막 축이다. 이 세 시선은 클라이막스가 다가올수록 빠르게 교차되며, 독자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강한 몰입감을 전한다. 그러다 마지막 한 페이지, 아니 마지막 한 문단이 공개되면 누구나 당황하고 말 것이다. 아마도 그 다음에는 맨 첫 페이지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될 테고.

 

워낙에 반전이 핵심인 작품이라 최대한 정보 없이 읽는 게 가장 재미있을 것이니 내용 소개는 이만 줄인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분들은 꼭 저명한 추리소설가 가사이 기요시 씨의 해설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살육에 이르는 병>이 단순한 오락으로서의 추리소설이 아닌 일본 사회에 잠복한 사회 병리 현상을 심도깊게 그리려는 패기 넘치는 작품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트릭과 범인이 그렇게 설정된 데는 뜻깊은 이유가 있다. 작품 전체의 구조가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와 긴밀하게 호응하는, 신본격에서는 보기 드문 투철한 작가 의식으로 씌어진 수작이다.

 

19세 미만 구독 불가 딱지가 붙은 작품이므로 걱정하는 독자들이 제법 있는 것으로 아는데, 잔인성이나 엽기성, 선정성이 조금 과한 부분은 분명히 있다. 솔직히 심약한 독자라면 구토할지도 모르고, 여성 독자들이 불쾌할 구석도 많다. 그러나 단순히 화제를 낳기 위해 그런 식으로 붓이 간 건 아니라고 믿으며, 작가는 이 정도로 '세게' 쓸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이 작품의 핵심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수위가 적절했다는 말이다.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는 바로 얼마 전 <미륵의 손바닥>으로 국내에 첫 선을 보인,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로 <시계관의 살인>의 아야츠지 유키토의 직속 후배다. 트릭 지상주의인 신본격군에서 트릭도 만족스러우면서 주제 의식까지 잘 살려낸 <살육에 이르는 병>은 분명 손꼽히는 작품으로, 신본격 작가들이 우리 세력에서도 이 정도 작품을 내놓았다, 하고 자랑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일까, 최근 쏟아져 나오는 추리소설 가운데 옛날 것들 만큼 결말에서 화들짝 놀라본 예가 별로 없다. 슬슬 물려가고 있던 참인데, 오래간만에 완전히 홀딱 속아 넘어간 반전을 선보인 이 작품을 읽으며 정말 즐거웠다. 세상 천지에 사기당하면서도(속으면서도) 이렇게 즐거운 것이 추리소설 말고 또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며, 추리소설에서 멋들어지게 속아버리는 그 짜릿한 한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이 진미를 알고 있는 모든 멋진 추리소설 애독자 여러분들께 이 작품을 추천한다.

 

<살육에 이르는 병>은 <관 시리즈>의 아야츠지 유키토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본격 1세대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의 최고작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연쇄 살인범의 심리, 사회 병폐의 고발 그리고 최강의 반전이라는 세 요소를 단번에 만족시킨 걸작으로, 독자에게 진정한 추리소설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 <살육에 이르는 병> 뒤표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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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7-03-14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서재에 갔다가 이리로 넘어와 보니 여기도 역시 엄청남 뽐뿌네요.너무들 하세요.정말...ㅎㅎ

jedai2000 2007-03-1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죄송합니다. 이 책 평이 정말 좋죠? 제가 발간 전에 운좋게 좀 먼저 읽을 수 있었는데, 넘 오버하지 않았나 싶어 조마조마했어요. 그런데 읽어보신 분들이 모두 하나같이 최고의 찬사를 보내주시니 허튼 소린 안 했구나 싶어 마음이 놓이는 중입니다. ^^

nemuko 2007-03-14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 읽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장 읽은 다음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서 다시 확인했지요 ㅎㅎㅎ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점성술 살인사건>이랑 더불어 젤 재밌었던 것 같아요.

jedai2000 2007-03-15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한 번 더 보면 놓쳤던 복선들이 속속 튀어나오니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실실 웃으며 다시 봤어요 ^^ <점성술 살인사건>이 물리적인 트릭 면에서 한 정점이라면 <살육에 이르는 병>은 서술 트릭의 정점인 것 같습니다. 두 작품만큼 아니 보다 더 재미있는 작품을 빨리 만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