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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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속에서 방황할 때 그가 가만가만 위로해준 시집. 예나 지금이나 기형도의 시들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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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남도여행을 하며 광주의 전남대 정문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평화로운 모습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바로 그 광주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돌아보았습니다.

광주에 계시는 이모에게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묻지는 못 했습니다. 어릴 때 문득 들었던 단편적인 말들만 기억납니다. 어른들끼리 하던 이야기. 잠을 자다 몽롱한 상태에서 듣던 이야기들.
가게 문을 닫았는데 문에 사람이 부딪히는 소리. 밀치고 때리는 소리. 곤봉 들고 쫓아와 때리는데 열어줄 수도 없는 상황. 공포와 불안에 떨던 이들을 도와줄 이들이 아무도 없었으며 누구도 몰랐다는 사실들.


올해 5.18 기념식은 대통령 불참으로 역대 가장 초라한 행사라는 기사도 떴으며(뉴스앤)
박 대통령은 2013년 기념식에만 참석했으며 작년에 이어 올해도 불참하여 총리가 대신 참석했다고.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거부되었다고. 이유는 종북 노래라는 주장을 보이기 때문이라고.(노컷뉴스)
여야 대표 참석 등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 보세요.(YTN 등)
과거야 우리가 몰랐다 쳐도 현재는 조금의 관심만 가져도 돌아가는 상황을 대략은 알 수 있으니까요.
물론 판단을 해야 하기는 합니다. 어떠한 조류에 휩쓸릴 것인가도 생각해야 하겠죠.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작은 일부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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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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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몽고반점 - 한강 




 오랜만에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손에 잡았다. 2004년 김훈의 <화장>때를 기점으로 더는 읽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후에도 사실 이상문학상 책을 사기는 했지만 읽지는 않은 것이다. 그나마도 2009년 김연수를 끝으로 말이다. 나는 단편을 좋아한다. 특히나 여러 편의 단편을 읽는 게 좋은데 한 작가의 책도 좋지만 이렇게 여러 작가의 작품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것도 매력 있다. 그래서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좋아한다. 우리와 동시대에 사는 작가들의 글을 만날 수 있으니 정겹기까지 하다. 친근하거나 혹은 색다르거나. 그네들은 늘 그랬다.


 전체적으로 보니 대상을 받은 한강의 <몽고반점>이 눈에 확 띄는 수작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전에 비해서 2005년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단편들이었다. 가벼운 게 나쁜 것은 아니다. 한국소설은 이미 너무도 진중하니 말이다. 더구나 발랄한 작가 박민규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역시 그의 단편도 들어있어서 반가웠다. 그러나 그래서 <몽고반점>이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읽어도 흑백의 먹향이 강렬한 한강의 글은 여기서도 빛이 났다.


 한강은 대체로 그렇다. 강렬한 이미지와 단단한 글로 흡입력이 강한 작가. 전문적인 평론가들은 예술 소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주목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의식을 풀어내는 모습이 한 편의 한풀이와 같다. 쏟아낼 수 있는 건 다 쏟아내고야 마는. 그것이 설혹 불편한 것이거나 일탈된 것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더구나 문학적 역량도 있으며 앞뒤가 딱딱 맞기까지 하다. <채식주의자>등과 이어지는 식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염두에 둔 거 같다.


  그렇다면 탐미주의일까? 육체와 영혼의 합일은 가능한 것인지 먼저 생각해본다. 구원을 향한 목마름과 욕망을 향한 목마름은 어떻게 다른지. 이들이 선명하게 나눠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면 애초에 이다지 혼란스럽지는 않겠지. 누군가는 어느 하나에 목숨을 건다. 그러나 결국 이 둘은 나눌 수도 없고 하나를 배제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 경계를 따라가며 서성이다 어느 순간 침잠하거나 돌아서는 것이겠다. 세계는 모든 대조되는 것들로 이루어지고 떠받들어지고 있지 않은지. 식물성과 동물성으로 대변한 작가의 이야기 앞에서 예술가의 고뇌도 느끼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여기서는 원초적인 무엇이라 했지 아마) 자아(정신)에 대해 깊이 짚어봐야겠다.


 그리고 다른 작품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먼저 이혜경의 <도시의 불빛>부터. 살면서 하는 고민 가운데 인간관계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외면할 수 없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라는 생각을 20대 초반에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인간관계가 힘든 사람들은 그에 대한 책도 읽고 고민하지만 사실 그것에 답이 있을까. 소통의 부재를 예를 드는 현대사회에서 누군가를 탓할 시간에 나부터 돌아봐야겠다 싶다. 지금은 이런 고민을 크게 하지 않지만 한때 사람에게 치여도 보고 고민도 해봐서 작가의 시선이 이해가 갔다.


 윤영수의 <내 여자친구의 귀여운 연애>는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하게 느껴졌다. 가벼울 수도 있는 단편이지만 제목처럼 아주 귀엽고 정겹다. 다시 위에서 이야기한 인간관계에 대해 연장해본다면 이런 식의 전개는 포근해서 슬며시 웃음 짓게 한다. 작가마다 개성이 다르니 이런 식으로 풀어내기도 하는구나를 새삼 느낀다.


 이만교의 <표정 관리 주식회사>를 읽으며 조작에 대해 생각한다. 조작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 그것은 가짜지만 진짜를 지향한다. 그러나 결국 진짜가 될 수 없는 처지이다. 비난보다는 아아, 슬픈 것이로구나 싶어진다.


 김경욱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는 우리네 삶이 드라마라는 것을 보여준다. 통속적인 드라마, 불륜 드라마, 명랑 드라마, 낭만 드라마 등 그 모든 드라마는 누군가의 삶이지만 이미 티브이는 극단적이어서 실제의 삶이 자극적이지 않게 느끼게까지 한다.


 천운영 <세 번째 유방>은 확실히 독특했다. 그런데 왜 '너'라는 지칭을 썼을까.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몰입을 방해했다. 그 지칭이 합당하기보다 이물감처럼 느껴져서 약간 아쉬웠다. 그러나 이런 단편도 자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하고 싶은 작가였다.


 마지막으로 박민규 <갑을고시원 체류기>. 역시 그의 방식은 늘 재미있는 가운데 잔잔한 감동선을 거느린다. 던져주는 생각은 좋으나 이번에는 약간 가볍다. 그러나 고시원 이야기를 읽으며 오래전 고시원에 있어봤던 때가 떠올랐다. 저자만큼의 경험은 아니었지만 그 공간의 느낌은 각자의 목적과는 다르게 너무도 사람을 옥죄었다. 그런데 길을 가다 보면 아직도 고시원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고시생이 더는 없는 고시원. 사회의 또 다른 측면이다.


 이밖에 한강의 <아기 부처>도 기억에 남고 그녀의 문학적 자서전인 <기억의 양지>를 읽으며 작가에게 더 다가갈 수 있어서 좋았다. 마지막으로 한강의 수상 소감과 문학적 자서전의 일부를 옮겨본다.


 어떤 다짐이나 각오의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부터 글쓰기는 나에게 밥 같은 것이었다. 자유와 위안, 충일로 몸을 덥혀주는 밥. 한동안 쓰지 못해 마음이 서늘하고 배고프던 때 수상 소식을 들었다.


-351쪽, 한강의 수상 소감 일부 발췌.

 흔히 말하기를 글쓰기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글쓰기란 고통보다는 자유와 몰입, 충일의 느낌으로 새겨져 있다. 때로 나에게 글쓰기가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아마 존재하는 일이 고통스럽기 때문이지, 글쓰기의 탓은 아니다.

 '나는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것 같아요'라는 뒤라스의 독백을 기억한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계속 으깨어지며 나아가고 싶다. 그 으깨어짐이 내 삶을 끝까지 관통해 주기를 빌고 있다. 생생하게, 절실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그렇게 온몸으로 던져내는 질문들이 곧 그 대답일 수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356쪽, 한강의 문학적 자서전 '기억의 양지' 일부 발췌.  

흔히 말하기를 글쓰기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글쓰기란 고통보다는 자유와 몰입, 충일의 느낌으로 새겨져 있다. 때로 나에게 글쓰기가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아마 존재하는 일이 고통스럽기 때문이지, 글쓰기의 탓은 아니다.

`나는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것 같아요`라는 뒤라스의 독백을 기억한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계속 으깨어지며 나아가고 싶다. 그 으깨어짐이 내 삶을 끝까지 관통해 주기를 빌고 있다. 생생하게, 절실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그렇게 온몸으로 던져내는 질문들이 곧 그 대답일 수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356쪽, 한강의 문학적 자서전 `기억의 양지`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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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살림지식총서 340
김용수 지음 / 살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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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 김용수, 살림(2008)

 

한국비평이론학회와 살림출판사가 함께 비평이론의 대중화를 위해 기획한

비평이론 시리즈 세 번째 권.

  내가 좋아하는 살림지식총서. 340번은 자크 라캉에 대한 이야기. 작고 얇아서 휴대하기 좋은 책이지만 가볍게 들고나가서 읽기보다는 집중해서 읽게 하는 마력의 살림지식총서 시리즈. 내가 라캉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책장에 두 권이 꽂혀있다. 둘 다 라캉 입문서 역할을 하는 책이라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듯한데 일단 살림책으로 라캉과 만나기로 선택했다.


>> 나는 이 책을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쉽고 충실한 입문서로 쓰고자 했다. 이론 전반을 두루 다루기보다는 '욕망의 윤리'라는 하나의 핵심 주제에 집중하여 독자들이 라캉의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특히 이 책에서 욕망과 쾌락이 지닌 정치적 가능성을 드러내고 싶었다. 욕망의 정치, 쾌락의 윤리가 자유로운 공동체를 향한 희망으로 독자에게 다가가길 기대한다.


>> 관심사와 연구계획은

주로 포크너의 문학과 정신분석을 연구해 왔다. 요즘 관심은 정신분석 영화이론에 있다. 그중에서도 정신분석 개념들과 영화기법을 연결하여 영화 작품을 세밀하게 해석하는 작업에 무한한 흥미를 느낀다. 앞으로 정신분석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문학과 영화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자 한다.

(책날개에서 발췌)

 입문서면서 하나의 주제인 '욕망의 윤리'에 집중해서 이야기하기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책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자크 라캉을 더 파고들고 싶어졌다. 그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사상가로 유명하다. 흔히 정신분석하면 프로이트를 생각하는데 이제 내게는 라캉의 자리가 더 커질 거 같은 느낌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책을 읽을 때도 흥미롭기는 했지만 라캉은 마음에 들기까지 했으니까. 물론 이 책은 라캉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 저자의 목소리를 통해 읽어서 제대로 라캉을 알려면 그의 책을 만나야겠다.


 그런데 독자인 내가 라캉에게 매력을 느꼈으니 저자의 의도는 성공이다. 살림책을 읽으면 대개 그렇게 된다는 게 함정이다. 거기서 확장하는 건 오로지 독자의 몫. 대개 거기서 그쳤다면 라캉은 꼭 파고들고 싶어졌다는 게 차이점이다. 예전에 미쉘 푸코도 이렇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라캉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그렇다면 라캉의 매력은 무엇일까.


 자크 라캉이 제시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는 한마디로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욕망에 대한 적극적이고 비타협적인 긍정을 요구하는 이러한 도덕원칙은 그 급진성으로 말미암아 당혹스러운 충격으로 다가오기 쉽다. (…중략…) 욕망은 흔히 윤리의 적으로 여겨진다. 성숙한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는 데 있어 욕망은 도덕적 성취를 위협하는 이물질이다.


(12쪽, 정신분석과 욕망 일부 발췌)

 지금 들으면 그다지 충격적인 말은 아니다.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은 당연한 말이 아닌가? 이것을 동물적 혹은 성적 욕망으로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지 못한다면? 그런 쪽으로 만 확대해석하는 게 문제다. 삐뚤어진 욕망이나 내면은 이렇듯 확장된 사고가 정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이 발언은 위험할 수 있다. 잘못 이해했을 경우의 파장이 클 테니 말이다. 그래서 또 다른 예를 아래 인용한다.


'욕망에 일치하여 행동'하는 것이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다. 우선 모든 종류의 욕망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자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가령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소비의 욕망들은 정신분석에서 윤리적인 긍정의 대상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욕망의 만족을 대체하는 환상이고, 진정한 쾌락으로의 접근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욕망은 또한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파괴적인 욕망과도 구분되어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타자를 소멸시키는 반윤리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17쪽, '보 에스 바(Wo es war)' 일부 발췌)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도 반윤리적인가? 이 물음에 대답 현명한 답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김영하 작가의 책이 떠올랐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각설하고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윤리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바로 위에 인용한 글에서 '보 에스 바(Wo es war)' 또한 We ar war로 잘못 보지 않기를. "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존재한다(We es war, soll ich werden)."라는 프로이트의 말에서 온 것. 욕망은 내가 아니라 그것일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는 순간. 어쩌면 사로잡힌 욕망에서 헤어 나오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어려운 이유가 책에 나오는 말처럼 또한 '그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핵심주체가 타인이 아닌 나이기 때문에.


라캉의 윤리가 긍정하는 욕망은 물론 이러한 환상에 사로잡힌 욕망이 아니라 환상을 가로지르는 욕망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대상이 아닌 부재의 대상을 향하여 움직임으로써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윤리적 행동과 관련된다.

(28쪽, 쾌락과 충동 일부 발췌)

 명쾌한 말이다. 이렇듯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사드와 칸트의 접점을 이야기할 때도 흥미롭다. 자신의 철학을 이해시키고자 다른 이들을 데려와 연결하는 공존 능력. 인정ㅂ다고 싶은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런 발상 자체가 재미있다. 게다가 칸트의 우화 이야기를 할 때 칸트가 놓친 것을 바로 찾았다. 다른 가능성도 있는 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음 문장에서 라캉 또한 그 점을 언급했다. 그래서 더욱 라캉에게 관심이 간다. 라캉의 책이니 그가 유리한 입장에 놓이는 건 당연하건만 그럼에도 흥미를 끄는 이유는 공감하기 때문이겠지. 그의 사상을 더 알아보고 싶다. 그때 공감의 폭이 더욱 커질지 아니면 그칠지 확인해야겠다. 가끔 나오는 지젝을 보며 아끼는 책 「삐딱하게 보기」를 꺼내 보려 했더니 못 찾았다. 오래도록 꺼내보지 않아서 어딘가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을듯하다.


 끝으로 다시 말하지만 라캉의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여러 가지 불순한 욕망이 아니라 '순수 욕망'이라 불러야 한다고 김용수 저자는 말한다. 깨부숴야만 나올 수 있는 것처럼 틀을 깨고 열린 사고와 열린 욕망을 기필코 추구해야 더욱 다양화된 그 무언가가 탄생할 것이다.


 

라캉의 윤리가 긍정하는 욕망은 물론 이러한 환상에 사로잡힌 욕망이 아니라 환상을 가로지르는 욕망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대상이 아닌 부재의 대상을 향하여 움직임으로써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윤리적 행동과 관련된다.



(28쪽, 쾌락과 충동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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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 세월호 추모시집
고은 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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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 고은 외, 실천문학사(2014)​

​세월호 추모시집

 세월호 참사 1주기. 아이들의 1주기로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 위로 캡사이신 비가 내렸다. 갈 수 없어서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추모의 자리는 또다시 아비규환을 떠올리게 했다. 유족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고 사는 모든 부모들은 이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들의 현재진행형인 끝나지 않는 싸움 앞에서 함께 울고 절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분노한다. 2014년과 2015년 분명히 해는 다르건만 나아진 게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런 역적 같은

이런 강도 같은 참변 앞에서

과연 이 나라가 나라 꼬라지인가 물었습니다

이런 무자비한 야만이 저지른 희생 앞에서

이 사회가

언제나 청정한 하루하루일 것인가를 따졌습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얼마나 인간이었던가를 뉘우쳤습니다

영혼이라는 말

양심이라는 말이

왜 있는지 몰라야 했습니다 알아야 했습니다

(24쪽, 고은 시인의 '이름 짓지 못한 시' 일부 발췌) ​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한다. 그러나 국민을 책임질 이 나라는 일련의 여러 사건 때처럼 잊히기를 기다린다. 보통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지 자문하게 된다. 국민의식은 높아져가지만 정치의식은 제자리걸음인지 오래이다. 진정한 진보란 무엇일까. 비단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전체적인 상황을 유추해보며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용감한 이들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보통의 사람. 추모만이 길이 아닌 분노와 관심이야말로 보통의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나와는 무관한 삶이 아니라 그들은 모두 우리네 아이였고 우리였다. 추모시집의 제목처럼 그렇게.

​뒤집어라, 뒤집힌 저 배를 뒤집어라

뒤집어라, 뒤집힌 세상을 뒤집어야 살린다

탐욕으로 뒤집힌 세상, 부패와 음모와 기만으로 뒤집힌 세상

이게 아닌데, 이럴 순 없어, 뒤집지 못한 우리들

가슴을 치며 지켜만 봐야 하다니, 회한의 눈물을 삼키며

우리가 너희들을 다 죽이는구나, 뒤집어라,

폭력과 약탈로 뒤집힌 세상을 뒤집어야 살린다

이렇게 내버려둘 순 없어 저 죽음을 뒤집어라

뒤집지 않고서는 살리지 못해 저 죽음의 세력을 뒤집어라

(85쪽, 백무산 시인의 '세월호 최후의 선장 박지영' 일부 발췌) ​

 이 책은 세월호 참사 100일을 앞두고 나온 추모시집이다. 그러니 작년 7월에 출판되었는데 지금 읽어도 가슴 먹먹하기는 여전하며 뭐하나 시원하게 해결된 것도 없어서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세월호 관련 책으로 아마도 가장 많이 읽은 책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이겠지만 나는 시인들의 추모시를 먼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 주에는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고 있을 것이다. 차마 못 읽어나갈 거 같아서 마주하지 않았던 책. 이제 얼굴을 맞대고 바로 읽어야만 하겠다. 

​돌려 말하지 마라

온 사회가 세월호였다

오늘 우리 모두의 삶이 세월호였다

자본과 권력은 이미 우리들의 모든 삶에서

평형수를 덜어냈다

(89쪽, 송경동 시인의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일부 발췌) ​

​ 시인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투명하지만 힘센 시를 지어올렸다. 누군가는 슬퍼하고, 분노하고, 미안해하고, 넋을 위로하고, 썩어빠진 권력 등을 비판했다. 그들의 자괴감이야말로 우리의 자괴감이었다. 그러나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이들은 여전히 그렇지 아니하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 이제는 잊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뿐 아니라 화물차 기사들, 20대 청년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까지. 또한 간접적인 영향으로 타격을 입은 진도 시민들의 정신적 타격, 살아남은 이들의 정신적 충격 등 우리는 그 모든 아픔을 잘 모른다.

​엄마 아빠

부탁이 있어요

우리 없다고 이 나라를 떠나지는 마세요

우린느 죽지 않았어요

검은 리본은 싫어요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우리는 지금

천년의 장미를 찾아 수학여행을 떠나는 길이에요

엄마 아빠도 아시잖아요

천녀의 장미를 찾아 돌아오는 날까지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몸은 여기 두고 250개의 물방울이 되어

홀가분하게 더나요

무사히 돌아오는 그날

엄마 아빠 안 계시면 우린 무척 슬플 거예요

(101쪽, 안상학 시인의 '엄마 아빠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일부 발췌) ​

  ​그들이 물방울 되어 홀가분하게 날아오르는 날은 과연 언제란 말인가. 살다 보면 누구나 억울한 날 있다지만 이건 그런 차원을 넘은 비교할 수 없는 인재, 수장이 아니던가. 전 국가적인 충격 앞에서 어찌 보면 국민 모두가 마음 어딘가에 구멍이 뚫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린 살아있지 않은가. 그러니 지나친 우울증에 빠지라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잘못 생각한 것이다. 우린 깨어나야 하고 이들을 지켜보고 응원해야 한다.

 교육부가 추모관 건립을 추진하는데 단원고 학생과 교사만 해당된다고 한다. 교육부가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진행했다면 학생과 교사가 아닌 다른 이들까지 평등하게 추모할 수 있었겠지. 게다가 우리도 안 하는 일을 외국인이 한단다. 배우 오드리 헵번의 아들 션 헵번 페리가 비정치성, 비이념성으로 세월호 기억의 숲(9일 착공식이 있었다)을 조성한다. 그가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에서 첫 영화 일을 시작한 인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게 30여 년 전 일이라는데 이 외국인은 나라와 민족을 떠나 세월호 유족을 위해 이 일을 추진한 것이다.

 고맙고 동시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유대인들은 학살 당시의 역사적 이야기와 상황을 철저하게 되새겨 배운다고 한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라 꼭 되짚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가슴에, 뼈에 넣어두는 거란다. 일련의 참사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숙고해볼 일이다.

 

■간단 서평: 세월호 관련 책 중 이 책은 시인들이 모여 쓴 추모시집.

유가족의 목소리 대신 시인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우리네 마음이 시집에 들어있다.

 

엄마 아빠

부탁이 있어요

우리 없다고 이 나라를 떠나지는 마세요

우린느 죽지 않았어요

검은 리본은 싫어요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우리는 지금

천년의 장미를 찾아 수학여행을 떠나는 길이에요

엄마 아빠도 아시잖아요

천녀의 장미를 찾아 돌아오는 날까지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몸은 여기 두고 250개의 물방울이 되어

홀가분하게 더나요

무사히 돌아오는 그날

엄마 아빠 안 계시면 우린 무척 슬플 거예요



(101쪽, 안상학 시인의 `엄마 아빠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일부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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