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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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몽고반점 - 한강 




 오랜만에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손에 잡았다. 2004년 김훈의 <화장>때를 기점으로 더는 읽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후에도 사실 이상문학상 책을 사기는 했지만 읽지는 않은 것이다. 그나마도 2009년 김연수를 끝으로 말이다. 나는 단편을 좋아한다. 특히나 여러 편의 단편을 읽는 게 좋은데 한 작가의 책도 좋지만 이렇게 여러 작가의 작품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것도 매력 있다. 그래서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좋아한다. 우리와 동시대에 사는 작가들의 글을 만날 수 있으니 정겹기까지 하다. 친근하거나 혹은 색다르거나. 그네들은 늘 그랬다.


 전체적으로 보니 대상을 받은 한강의 <몽고반점>이 눈에 확 띄는 수작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전에 비해서 2005년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단편들이었다. 가벼운 게 나쁜 것은 아니다. 한국소설은 이미 너무도 진중하니 말이다. 더구나 발랄한 작가 박민규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역시 그의 단편도 들어있어서 반가웠다. 그러나 그래서 <몽고반점>이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읽어도 흑백의 먹향이 강렬한 한강의 글은 여기서도 빛이 났다.


 한강은 대체로 그렇다. 강렬한 이미지와 단단한 글로 흡입력이 강한 작가. 전문적인 평론가들은 예술 소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주목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의식을 풀어내는 모습이 한 편의 한풀이와 같다. 쏟아낼 수 있는 건 다 쏟아내고야 마는. 그것이 설혹 불편한 것이거나 일탈된 것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더구나 문학적 역량도 있으며 앞뒤가 딱딱 맞기까지 하다. <채식주의자>등과 이어지는 식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염두에 둔 거 같다.


  그렇다면 탐미주의일까? 육체와 영혼의 합일은 가능한 것인지 먼저 생각해본다. 구원을 향한 목마름과 욕망을 향한 목마름은 어떻게 다른지. 이들이 선명하게 나눠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면 애초에 이다지 혼란스럽지는 않겠지. 누군가는 어느 하나에 목숨을 건다. 그러나 결국 이 둘은 나눌 수도 없고 하나를 배제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 경계를 따라가며 서성이다 어느 순간 침잠하거나 돌아서는 것이겠다. 세계는 모든 대조되는 것들로 이루어지고 떠받들어지고 있지 않은지. 식물성과 동물성으로 대변한 작가의 이야기 앞에서 예술가의 고뇌도 느끼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여기서는 원초적인 무엇이라 했지 아마) 자아(정신)에 대해 깊이 짚어봐야겠다.


 그리고 다른 작품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먼저 이혜경의 <도시의 불빛>부터. 살면서 하는 고민 가운데 인간관계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외면할 수 없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라는 생각을 20대 초반에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인간관계가 힘든 사람들은 그에 대한 책도 읽고 고민하지만 사실 그것에 답이 있을까. 소통의 부재를 예를 드는 현대사회에서 누군가를 탓할 시간에 나부터 돌아봐야겠다 싶다. 지금은 이런 고민을 크게 하지 않지만 한때 사람에게 치여도 보고 고민도 해봐서 작가의 시선이 이해가 갔다.


 윤영수의 <내 여자친구의 귀여운 연애>는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하게 느껴졌다. 가벼울 수도 있는 단편이지만 제목처럼 아주 귀엽고 정겹다. 다시 위에서 이야기한 인간관계에 대해 연장해본다면 이런 식의 전개는 포근해서 슬며시 웃음 짓게 한다. 작가마다 개성이 다르니 이런 식으로 풀어내기도 하는구나를 새삼 느낀다.


 이만교의 <표정 관리 주식회사>를 읽으며 조작에 대해 생각한다. 조작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 그것은 가짜지만 진짜를 지향한다. 그러나 결국 진짜가 될 수 없는 처지이다. 비난보다는 아아, 슬픈 것이로구나 싶어진다.


 김경욱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는 우리네 삶이 드라마라는 것을 보여준다. 통속적인 드라마, 불륜 드라마, 명랑 드라마, 낭만 드라마 등 그 모든 드라마는 누군가의 삶이지만 이미 티브이는 극단적이어서 실제의 삶이 자극적이지 않게 느끼게까지 한다.


 천운영 <세 번째 유방>은 확실히 독특했다. 그런데 왜 '너'라는 지칭을 썼을까.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몰입을 방해했다. 그 지칭이 합당하기보다 이물감처럼 느껴져서 약간 아쉬웠다. 그러나 이런 단편도 자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하고 싶은 작가였다.


 마지막으로 박민규 <갑을고시원 체류기>. 역시 그의 방식은 늘 재미있는 가운데 잔잔한 감동선을 거느린다. 던져주는 생각은 좋으나 이번에는 약간 가볍다. 그러나 고시원 이야기를 읽으며 오래전 고시원에 있어봤던 때가 떠올랐다. 저자만큼의 경험은 아니었지만 그 공간의 느낌은 각자의 목적과는 다르게 너무도 사람을 옥죄었다. 그런데 길을 가다 보면 아직도 고시원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고시생이 더는 없는 고시원. 사회의 또 다른 측면이다.


 이밖에 한강의 <아기 부처>도 기억에 남고 그녀의 문학적 자서전인 <기억의 양지>를 읽으며 작가에게 더 다가갈 수 있어서 좋았다. 마지막으로 한강의 수상 소감과 문학적 자서전의 일부를 옮겨본다.


 어떤 다짐이나 각오의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부터 글쓰기는 나에게 밥 같은 것이었다. 자유와 위안, 충일로 몸을 덥혀주는 밥. 한동안 쓰지 못해 마음이 서늘하고 배고프던 때 수상 소식을 들었다.


-351쪽, 한강의 수상 소감 일부 발췌.

 흔히 말하기를 글쓰기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글쓰기란 고통보다는 자유와 몰입, 충일의 느낌으로 새겨져 있다. 때로 나에게 글쓰기가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아마 존재하는 일이 고통스럽기 때문이지, 글쓰기의 탓은 아니다.

 '나는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것 같아요'라는 뒤라스의 독백을 기억한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계속 으깨어지며 나아가고 싶다. 그 으깨어짐이 내 삶을 끝까지 관통해 주기를 빌고 있다. 생생하게, 절실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그렇게 온몸으로 던져내는 질문들이 곧 그 대답일 수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356쪽, 한강의 문학적 자서전 '기억의 양지' 일부 발췌.  

흔히 말하기를 글쓰기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글쓰기란 고통보다는 자유와 몰입, 충일의 느낌으로 새겨져 있다. 때로 나에게 글쓰기가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아마 존재하는 일이 고통스럽기 때문이지, 글쓰기의 탓은 아니다.

`나는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것 같아요`라는 뒤라스의 독백을 기억한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계속 으깨어지며 나아가고 싶다. 그 으깨어짐이 내 삶을 끝까지 관통해 주기를 빌고 있다. 생생하게, 절실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그렇게 온몸으로 던져내는 질문들이 곧 그 대답일 수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356쪽, 한강의 문학적 자서전 `기억의 양지`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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