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 사막에 가다 젊은 시인들 3
김상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동시대를 살며 비판하고 고뇌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많은 공감을 했다.

책에서 만나는 많은 시인들의 시에서 한 편을 올려본다.


눈물이 웃는다
풍화되는 뼈가 여름밤에 시려
겨드랑이로 나는 카랑, 웃는다
쓰레기장 속에서 솔솔 피어나는
빠진 눈을 흔들어
흰 달을 불러 카라랑, 웃는다

탈골에 말라가는
꼬리털이 떠올라, 올라
노을의 프리즘에 한 올씩 걸리는 동안

달맞이꽃 피는 보름
가슴을 꿀처럼 빨아먹은 구더기들아, 안녕
달맞이꽃 지던 그믐은
파리도 돌보지 않는 미라의 몸

내 살아난 거름 위에
아이가 누고 간 고운 똥에서 돋은
파란 줄기가 어둠 속으로 뻗어
노란 수박꽃이 함박 피었다

자줏빛 발톱이 다시 자라
수박 한 덩어리 안고
나는 나를 한 입 베어 문다
검은 줄무늬 속 붉은 웃음이
샛강 물소리를 따라 둥둥 흘러갔다


 

『 피터팬, 사막에 가다(2007) 』中  < 쓰레기 고양이, 최동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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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소리 -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매순간 깨어있기를 갈망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에서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해도 어느
순간 연기처럼 흩어지는 제 모양을 유쾌하게 들여다볼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래서 밖에서라도 나를
눈뜨게 하는 번쩍이는 순간은 참으로 소중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 매개체를 찾았다면 옆에 두고 손에
서 놓치 않음은 당연할 터. <죽비소리>는 바로 그런 책이다.

 작가가 선인들의 글에서 가려뽑은 주옥같은 우리문장 120편은 1년 열두 달의 의미를 따라 열두 장으로
나뉘어 있다. 더불어 정민이 풀어놓은 글에서 또 한 번 마음에 공명을 일으킴은 두말할 것도 없다. 처음
에는 하루 하나씩만 읽자고 마음먹었건만 어느새 여러 장을 또 되풀이해 읽는 나를 발견한다. 그만큼
마음을 다독이고 한편으로는 정신이 번쩍 나게 일침을 가하기 때문이다. 한겨울의 냉수마찰처럼 등줄
기를 시원하게 적시는 가르침을 얻어가며 날마다 고마웠다. 이 책의 모든 페이지가 진귀한 보물이었다.
하나도 지나칠 수 없는 문장 속에서 딱 한문장만 올려본다.


정신은 쉬 소모되고, 세월은 금세 지나가버린다. 천지간에 가장 애석한 일은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精神易耗, 歲月易邁, 天地間最可惜, 惟此二者而已. 정신역모, 세월역매, 천지간최가석, 유차이자이이.


ㅡ 가석(可惜) 이덕무, 「 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 」


총명하던 정신은 금세 흐리멍덩해지고, 세월은 귓가게 쌩 하는 소리를 남기고 지나가버린다.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연못가 봄풀의 꿈이 깨지도 않았는데 섬돌 앞에는 어느새 오동잎이 진
다. 잠깐 왔다 가는 세상. 그나마 멍청히 넋 놓다 지나쳐 버린다면 애석하지 않으랴. 오늘 놀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문득 내 자신을 바른 눈으로 보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나이 들어 정신
의 긴장이 풀어지면 지겹도록 더디 가는 시간이지만, 젊은 날의 시간은 고밀도로 농축된 시간이다.
젊은 날의 시간이 아깝고, 쏜살같은 세월이 아쉽다.


ㅡ 224-225쪽.




-4340.11.06.불의 날.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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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시집 범우문고 57
피천득 지음 / 범우사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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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강물에
띄웠어요

쓰기는 했건만
부칠 곳 없어

흐르는 물 위에
던졌어요



<편지>라는 시의 일부분이 아닌 전부이다. 올해 타계한 피천득 시인의 시를 읽으면 운율을 살려 낭독
하고 싶어진다. 군더더기 없는 말끔함 그리고 아이처럼 맑은 순수함. 그래서 그의 시에는 불편함이 없
으며 자연스럽게 정감을 자아낸다.

시인보다 수필가(대표작, 인연)로 더 유명하지만 영문학자로도 활동했으며 샘터출판사에서 나온 <셰익
스피어 소네트 詩集>
도 그의 손길을 거쳤다. 금아라는 그의 호도 잊을 수 없으며 자그마한 체구와 옆집
할아버지 같던 얼굴도 생생하다. 물론 직접 뵌 적은 없이 글로써 마음으로만 만났지만 올해 5월 타계했
을 때 몹시도 마음이 저렸다.

새삼 그의 시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보다 직접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시 계간지 <시와 시학>에서는
2007 가을호에 [피천득 특집]이 들어 있으니 그것도 참고하면 좋겠다. 끝으로 그의 시에 찬사를 보내며
<찬사>를 적어 본다.


그대의 詩는
온실이나 화원에서 자라나지 않았다
그대의 시는
거친 광야의 비애를 겪고
삭풍에 피어나는 강렬한 꽃

솔로몬의 영화보다 화려한
야생 백합
그대의 시는
펑펑 솟아 넘쳐흐르는 샘물
뛰며 떨어지는 걷잡을 수 없는 폭포
푸른 산 기슭으로 굽이치는 시내
때로는 바다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내 그대의 시를 읽고
무지개 쳐다보며 소리치는 아이와 같이
높이 이른 아침 긴 나팔을 들어
공주의 탄생을 알리는 늙은 전령과 같이
이 나라의 복음을 전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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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도 너무 길다 - 하이쿠 시 모음집
류시화 옮겨엮음 / 이레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와 만나지 몇 년이 지났다. 가끔 기분전환이 필요한 때면 이 책을 꺼내
들고 주저 없이 넘긴다.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짧은 글은 내게 긴ㅡ아니 기나긴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ㅡ 물음을 주고 마음을 다독인다.

일본의 하이쿠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애송 되며 쓰인다. 심지어 자국이 아닌 서양에서도 사랑받
아 쓰일 정도이니 말이다. 그리고 몇 년 전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두줄시가 있다
는 사실이다. 아직 하이쿠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두줄시를 알리고자 노력하며 쓰는 두줄시인들
이 있다. 하이쿠나 두줄시나 맥락은 같다. 짧은 글이지만 그 안에 핵심이 들었으며 때론 유쾌하며 또 때
로는 감동을 준다. 장황한 글보다 어쩌면 더 쓰기 어려운 글이 짧은 글일 텐데 그 표현의 한계는 무한하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바쇼>


-> 이 하이쿠는 가끔 떠올릴 만큼 아낀다.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파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 <이싸>


-> 살아온 날이 많아질수록 절감하는 바이다. 꽃에 벌이 모이듯 똥에는 파리가 들끓게 마련이다.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바쇼>


-> 여름이면 시끄럽게 울어 되는 매미가 싫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며 그
순간을 힘껏 살다 간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어 알았다. 그래서 이젠 여름의 매미 소리가 좋아졌다. 나도
텅빌 만큼 실컷 울며 살아가야지...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때는
무척 떫었다는 걸 <소세키>


-> 속담에 그런 말이 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
나이가 들면서 좋아진 것은 여유가 늘어간다는 사실이다. 여물어가며 감당하지 못할 일은 어쩌면 주어
지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참 편안하게 살아온 느낌이다. 글쎄...



생선가게 좌판에 놓인
도미 잇몸이
시려 보인다 <바쇼>


-> 예전에는 지나쳤는데 이번에 가장 인상적인 하이쿠. 내 잇몸이 더 시렸던 하이쿠.
바쇼 저 양반도 그렇게 잇몸이, 인생이 시렸었구나. 그랬어...



옮기고 보니 바쇼의 하이쿠가 많지만 사실 대부분이 마음에 든다.
길에서 만난 모든 것을 지나치지 않고 관심을 보이고 관찰했는데, 남루한 방 한칸에서 같이 기거하는
미물까지도 벗처럼 느낀 그들의 삶이 참으로 값져 보인다. 벼룩, 뻐꾸기, 허수아비를 비롯한 자연을 돌
아보는 시선에 하이쿠 시인의 마음이 오롯하게 들어 있어 내게 전이되는 느낌. 가난함을 초라하게 생각
하지않고 오히려 그 상황을 절절하게 마주하여 포착한 글은 한 편의 생생한 사진과 닮았다. 만약 나였
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그래서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진정 행복한 것이라 말하는 것이겠지. 어느덧 이
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절로 내 영혼도 풍요해진다.

이 책을 위해 수천 편의 하이쿠를 읽고 그 속에서 추려낸 류시화의 말이 와 닿았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시인이 할 일은 그 이야기를 대변하는 것이 아
니라 그것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류시화 본인의 하이쿠로 끝을 맺는다.

봄이 피는 꽃들은
겨울 눈꽃의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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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4-19 08:59   좋아요 0 | URL
<가을에 우는 매미 / 그 목소리에 / 죽기 싫은 기색이 역력하다 > - 소세키-
<너무 울어 / 텅 비어 버렸는가, / 이 매미 허물은 > - 바쇼-
<여름 매미 / 나무를 꼭 껴안으며 / 마지막 울음을 운다 > - 이싸 -
<올해의 첫 매미 울음 / 인생은 / 쓰라려,쓰라려,쓰라려 > - 이싸 -

---> 하이쿠의 많은 소재중 유독 매미가 많더군요. 저도 이책 읽었는데 느낌까지 곁들여 읽으니 또 새롭네요. 참, 알라딘에 두줄시 협회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아이디가 <진주> 이신 분입니다.

은비뫼 2007-04-23 00:57   좋아요 0 | URL
적어주신 매미 관련 하이쿠 기억에 남습니다. ^^
두줄시 협회 활동하시는 분이 알라딘에 계시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꼭 찾아가보겠습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 열림원 / 199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의 많은 시를 얼마나 오래도록 암송하고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랑과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도 친숙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잊지 않고 따뜻한 위로까지 건네주었으니까...
또한 자연친화적인 마음에 교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시가 노래로 불렸듯 나도 노래하고 싶게 만드는 시인.

'사람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다 시가 들어 있다.
그 시를 내가 대신해서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었다.' ㅡ 시인의 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 '수선화에게', '나무들의 결혼식', '마음의 똥', '아버지들' 등을 비롯해 무심코
펼쳐드는 페이지마다 그가 말한 달팽이가 천천히 돌아다닌다. 동화적인 감성과 작은 것에서도 이입
해서 느끼는 연민의 정이 겨울밤을 훈훈하게 한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는 시인이 말처럼 마음은 이미 나만의 바닷가로 달려간다.

나무들의 결혼식

내 한평생 버리고 싶지 않은 소원이 있다면
나무들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낭랑하게
축시 한번 낭송해보는 일이다

내 한평생 끝끝내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우수가 지난 나무들의 결혼식 날
몰래 보름달로 떠올라
밤새도록 나무들의 첫날밤을 엿보는 일이다

그리하여 내 죽기 전에 다시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은은히 산사의 종소리가 울리는 봄날 새벽
눈이 맑은 큰스님을 모시고
나무들과 결혼 한번 해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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