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도 너무 길다 - 하이쿠 시 모음집
류시화 옮겨엮음 / 이레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와 만나지 몇 년이 지났다. 가끔 기분전환이 필요한 때면 이 책을 꺼내
들고 주저 없이 넘긴다.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짧은 글은 내게 긴ㅡ아니 기나긴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ㅡ 물음을 주고 마음을 다독인다.

일본의 하이쿠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애송 되며 쓰인다. 심지어 자국이 아닌 서양에서도 사랑받
아 쓰일 정도이니 말이다. 그리고 몇 년 전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두줄시가 있다
는 사실이다. 아직 하이쿠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두줄시를 알리고자 노력하며 쓰는 두줄시인들
이 있다. 하이쿠나 두줄시나 맥락은 같다. 짧은 글이지만 그 안에 핵심이 들었으며 때론 유쾌하며 또 때
로는 감동을 준다. 장황한 글보다 어쩌면 더 쓰기 어려운 글이 짧은 글일 텐데 그 표현의 한계는 무한하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바쇼>


-> 이 하이쿠는 가끔 떠올릴 만큼 아낀다.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파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 <이싸>


-> 살아온 날이 많아질수록 절감하는 바이다. 꽃에 벌이 모이듯 똥에는 파리가 들끓게 마련이다.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바쇼>


-> 여름이면 시끄럽게 울어 되는 매미가 싫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며 그
순간을 힘껏 살다 간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어 알았다. 그래서 이젠 여름의 매미 소리가 좋아졌다. 나도
텅빌 만큼 실컷 울며 살아가야지...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때는
무척 떫었다는 걸 <소세키>


-> 속담에 그런 말이 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
나이가 들면서 좋아진 것은 여유가 늘어간다는 사실이다. 여물어가며 감당하지 못할 일은 어쩌면 주어
지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참 편안하게 살아온 느낌이다. 글쎄...



생선가게 좌판에 놓인
도미 잇몸이
시려 보인다 <바쇼>


-> 예전에는 지나쳤는데 이번에 가장 인상적인 하이쿠. 내 잇몸이 더 시렸던 하이쿠.
바쇼 저 양반도 그렇게 잇몸이, 인생이 시렸었구나. 그랬어...



옮기고 보니 바쇼의 하이쿠가 많지만 사실 대부분이 마음에 든다.
길에서 만난 모든 것을 지나치지 않고 관심을 보이고 관찰했는데, 남루한 방 한칸에서 같이 기거하는
미물까지도 벗처럼 느낀 그들의 삶이 참으로 값져 보인다. 벼룩, 뻐꾸기, 허수아비를 비롯한 자연을 돌
아보는 시선에 하이쿠 시인의 마음이 오롯하게 들어 있어 내게 전이되는 느낌. 가난함을 초라하게 생각
하지않고 오히려 그 상황을 절절하게 마주하여 포착한 글은 한 편의 생생한 사진과 닮았다. 만약 나였
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그래서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진정 행복한 것이라 말하는 것이겠지. 어느덧 이
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절로 내 영혼도 풍요해진다.

이 책을 위해 수천 편의 하이쿠를 읽고 그 속에서 추려낸 류시화의 말이 와 닿았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시인이 할 일은 그 이야기를 대변하는 것이 아
니라 그것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류시화 본인의 하이쿠로 끝을 맺는다.

봄이 피는 꽃들은
겨울 눈꽃의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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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4-19 08:59   좋아요 0 | URL
<가을에 우는 매미 / 그 목소리에 / 죽기 싫은 기색이 역력하다 > - 소세키-
<너무 울어 / 텅 비어 버렸는가, / 이 매미 허물은 > - 바쇼-
<여름 매미 / 나무를 꼭 껴안으며 / 마지막 울음을 운다 > - 이싸 -
<올해의 첫 매미 울음 / 인생은 / 쓰라려,쓰라려,쓰라려 > - 이싸 -

---> 하이쿠의 많은 소재중 유독 매미가 많더군요. 저도 이책 읽었는데 느낌까지 곁들여 읽으니 또 새롭네요. 참, 알라딘에 두줄시 협회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아이디가 <진주> 이신 분입니다.

은비뫼 2007-04-23 00:57   좋아요 0 | URL
적어주신 매미 관련 하이쿠 기억에 남습니다. ^^
두줄시 협회 활동하시는 분이 알라딘에 계시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꼭 찾아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