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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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무작정 끌리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대개 표지가 예쁘다거나, 작가가 매력적이라던가, 그도 아니면 그 책을 접했을 때의 내면상태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한동안 독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기에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없어 이 책 저 책 읽다가 던지기를 반복하던 차에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을 만났다. <자기 앞의 생>과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좋아했기에 로맹 가리야 전부터 전작을 읽어보고 싶은 작가였고, 진 세버그야 <네 멋대로 해라>로 워낙 유명한 여배우라 설명을 덧붙여봤자 사족이리라. 작가의 사생활과 작품을 유기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역시 작품은 작품만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작가의 사생활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지라 사실 이 둘이 부부였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스물한 살의 진 세버그와 마흔다섯 살의 로맹 가리. 서로 처음 눈을 마주친 몇 초 동안 "말 없이 포옹과 폭풍, 정념의 모든 계절을 서로에게 약속"한 두 사람,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선" 두 사람. 이 책은 이 두 사람의 "도무지 끝나지 않을 애정을 끝까지 이어갈 사랑 이야기"다. 


  나이차만큼이나 자라온 환경도, 살아온 시간도 다른 두 사람. 두 사람 모두 이미 기혼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 어떤 비난도 이들의 사랑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랑의 끝은 '그후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했습니다'가 아니다. "강이 나타나면 흘러내려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 세버그는 후자에 속했고, 로맹 가리 역시 그랬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었고 황금을 찾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휴식도 구원도 전혀 없다"라는 책 속의 말처럼 두 사람은 각자의 개성이 강했다. 그랬기에 서로를 상처줄 수밖에 없었고, 격정적인 사랑이 두 사람을 휩쓸고 간 뒤 폐허만 남았을 때도 서로를 떠나지 못했다. 서로 숱한 염문을 뿌리면서도 두 사람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것처럼 끝내 헤어지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가장 위대한 사람들조차 죽는 게 삶"이니 말이다. 


  "함께 산 8년, 갈라섰지만 결코 떨어지지 못한 채 필사적인 애정으로, 운명이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서로에게 묶인 채 지낸 12년"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이 두 사람이 현대사에서 겪은 일도 한 편의 소설(혹은 영화) 같아서 읽는 재미를 더했다. 두 사람의 성장과정에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굵직굵직한 사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흑인인권운동과 사회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FBI에게 감시를 당했던 진 세버그, "스물한 살에 이미 성공과 친근해"진 그녀가 마흔한 살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차에서 죽은 채 발견될 때까지 그녀는 성공한 여배우였고, 끊임없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삶의 빛이 강했던 만큼 그 그림자도 깊고 어두웠다. 로맹 가리의 삶도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유대계, 러시아 출생, 프랑스 이주 등으로 사회적 편견과 내내 맞서야 했다. 군인, 외교관, 작가 등 다양한 직업 속에서 경계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쓰고 또 썼다. 작가로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프랑스비평계의 호평을 제외하고)을 얻었지만 결국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 또한 녹록치는 않았다. 2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산, 두 사람을 삶을 담아내기에 너무 짧지 않나 싶다. 하지만 시적이고 함축적인 문장은 두 사람의 삶을 단순히 관조하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게끔 돕는다. 행간 속에서 독자는 그들과 교류하는 영광을 얻는다. 우연히 만나 시작된 운명. 그것이 누구나 꿈꾸는 행복한 결말이 아닐지라도, 아니 그렇지 않기에 두 사람의 삶은 매력적이다.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셨을 때 그 쓴맛에 고개를 절레절레 하면서도 입안 가득 퍼지는 커피의 향과 맛을 놓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책은 그들의 삶을 음미하느라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맛볼 만한, 멋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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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잇태리
박찬일 지음 / 난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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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에서 사먹는 음식 중에 불평의 대상으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이 (적어도 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탈리아 요리다. 대체 재료값도 얼마 안 들 것 같은 요리가 7~8천원이면 저렴한 축이고 1만 원을 훌쩍 넘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보석 같은 이태리요릿집이 있으니 바로 홍대에 위치한 ‘라꼼마’다. 『보통날의 파스타』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의 ‘글 쓰는 셰프’ 박찬일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파스타라면 까르보나라만 먹는 이들에게는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는 우리가 까르보나라라고 생각하는 그 까르보나라는 없다. (까르보나라는 원래 크림 파스타가 아니다. 일종의 한국식 파스타로 변형된 셈. 라꼼마에도 까르보나라는 있지만 여기에 크림은 들어가지 않는다.) 까르보나라 대신 신선한 해산물을 이용한 스파게티, 예를 들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인) 고등어 스파게티를 비롯해서 홍합 링귀네, 명란 스파게티, 굴 오일 스파게티 등을 알차게 맛볼 수 있다. 아차, 라꼼마 찬양을 하려던 것이 아니다. 라꼼마의 셰프 박찬일의 『어쨌든, 이태리』 얘기를 하려던 것이 돌고 돌았다.

 

  띠지에 쓰인 “까칠 셰프 박찬일의 심통맞은 이태리 가이드”라는 내용처럼 이 책을 ‘관광지 가이드’로 보면 정말 좀 많이 심통맞다. 로마, 소렌토, 피렌체, 베네치아 같은 한국인이 자주 찾는 이탈리아 명소에 대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고, 왜 우리나라 커피숍은 커피가 나올 때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인지, 이탈리아에서는 먹지도 않는 이탈리아 드레싱이 왜 우리나라 슈퍼에 버젓이 팔리는지, 왜 이탈리아 식당에만 오면 그렇게들 타바스코 소스를 찾는 것인지 등등 이탈리아의 모습을 통해 한국사회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이야기를 읽어가다보면 그 까칠함 속에서 따뜻한 정이 느껴지고, 어느샌가 목숨을 걸고 타야만 하는 이탈리아의 국적기도, 생각보다 짠 이탈리아 음식도,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도 점점 더 친숙해진다. 

 

  『어쨌든, 이태리』는 ‘관광지 가이드’와 거리가 멀지 몰라도, ‘이태리’에 관해서는 최고의 가이드다. (아, 정말 이탈리아 관광청에서는 상 줘야 한다.) 책에서 밝힌 것처럼 박찬일 셰프는 이탈리아를 관광객이 아닌, “학생이나 노동자로 살”았기에 “관광지에 대해서 알 턱이 없”어서 자연히 관광지에 대한 이야기가 빠졌을 수도 있겠지만, 독자 입장(그러니까 ‘관광객’이 아닌 ‘독자’)에서는 이탈리아와 관련한 책만 펴면 나오는 그런 빤한 이야기보다는 저자의 전문 분야인 음식에 대한 이야기나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더 신선하고 친근했다.

 

  이태리 하면 ‘소매치기’ ‘로마’ ‘쇼핑’ 등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박찬일 셰프는 츤데레 같이 툴툴거리면서도 은근히 다정하게 이탈리아의 다른 면모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동경했고 조금 알 때는 증오했으며, 제법 많이 알게 된 지금은 이해하게 된” 이의 관점에서 들려주는 이탈리아 이야기. 소매치기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도, 아슬아슬하게 운전하는 버스를 타도, 기차표 자동발매기가 돈을 먹어도, 화장실이 더럽기 짝이 없어도 그래도 한번쯤은 찾고 싶은 매력적인 이탈리아의 모습. 조금이라도 팔팔할 때 이태리를 먹어 치우러 떠나봐야겠다. 간만에 만난 매력적인 에세이. 여행서로도, 에세이로도 최고다.


덧) 책을 읽고 나니 이탈리아에 젤라또를 배우러 떠나고 싶어진다.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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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다섯 인생 -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홍윤(물만두)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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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인터넷 서점 중에 내가 알라딘에 둥지를 틀게 된 이유의 팔 할은 물만두님이었다. 멋 모르고 마구잡이로 리뷰를 올리던 시절(아, 그때의 리뷰는 내가 봐도 유치함에 손발이 오글거린다) 친절하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물만두님이었다. 나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녀의 따뜻한 환영에 서재 생활을 시작했으리라. 그녀의 댓글이 인연이 되어 그녀의 서재에 들락날락거리며 엄청난 추리소설 리뷰에 놀랐다. 단순히 국내에 출간된 추리소설의 소식뿐만 아니라 작가별로 연보를 정리해놓고, 막연하게 '좋은 추리소설 추천해주세요!'라는 말에 두루뭉술한 질문에도 친절하고 꼼꼼하게 답변해주는 모습에서 추리소설에 대한 그의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 애독자, 게다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지라 물만두님은 내게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을지 알려주는 지표였다.

  하지만 단순한 책이라는 공통점만 있었다면 그에 대해 인간적인 감정을 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엄청난 책을 읽어치우고 엄청난 리뷰를 써내려가는 그는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으니까. 하지만 페이퍼를 통해 만나는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와인 코르크 마개가 부서져서 체에 걸러 와인을 마셨다거나 동생이 나를 핑계로 먹을 걸 사와놓고 지가 다 먹었다는 식의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페이퍼로 전했다. 하지만 마냥 두 동생과 티격태격하면서 티 없이 살아가는 듯한 그녀에게도 그늘은 있었다. 그녀는 근육이 점점 없어지는 '봉입체근염'이라는 근육병을 앓고 있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그녀의 근육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녀가 지병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떠난 다음에야 병명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병명이 무어 중요할까. 그녀는 책을 무기로 누구보다 강하게 생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가족, 그리고 보이지 않는 알라딘이라는 인터넷 공간의 사람들이 채워주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따뜻하게 내밀어준 손을 잡은 사람들. <별 다섯 인생>은 바로 그 기록이다.

  책의 서두에 "우리가 태어날 때 조물주가 아홉 개의 건강한 공과 한 개의 병든 공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게 하셨는데, 나는 그중 병든 공 한 개를 골랐을 뿐이다.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불행하게 생각하지도 않으니 님들도 그런 걱정이랑 마시길……. 사람은 저마다 제멋에 겨워 사는 거니까"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인생을 사는 건 재미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자신을 "끈질기다"라고 표현하는 그녀의 글 속에서, 그리고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 나는 '생'의 소중함을 느꼈다. 마치 시트콤 같은 이들 가족의 이야기를 읽으며 깔깔거리다가도 삶에 대한, 책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엿보일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당신이 사는 오늘은 누군가가 그토록 살고 싶어한 내일이다" 같은 류의 식상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생을 사랑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관계에 충실했다. 나는 과연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남기고 간 씨앗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도 그녀가 기다려온 고전 추리소설들이 출간되고 있다. 그녀가 떠난 다음에 쓰여진 작품들도 많다. 누구보다 그 소식을 빠르게 전했을, 누구보다 즐겁게 그 책들을 읽었을 그녀. 그녀의 빈 자리는 앞으로도 다른 무엇을 채울 수 없으리라. 그녀가 세상을 떠난 날, 나는 한 명의 스승을, 한 명의 동료를, 그리고 한 명의 친구를 잃었다. 그녀는 떠났지만 이렇게나마 글로 다시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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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04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도,
리뷰도,
정말 멋져요.
물만두님 서평집에만 관심을 기울였었는데,
이 책 오면 즉시 읽어봐야겠어요.

이매지 2011-12-05 23:53   좋아요 0 | URL
저는 서평집은 아껴 읽으려고 일단 에세이부터 읽었어요.
소이진님도 만두님을 아셨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책으로라도 대신 만두님의 매력을 느껴보세요!

비로그인 2011-12-05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책으로나마 물만두님과 만날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열 개의 공 중 하나를 골랐을 뿐이라는 물만두님의 말씀과 이매지님의 리뷰까지, 모두 감동이에요 ㅠㅠ
책과 소통... 늘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분일 것 같아요...

이매지 2011-12-05 23:54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으며 새삼 제 삶을 돌아보게 되더군요.
말없는수다쟁이님도 만두님의 따뜻한 생을 만나보세요!

BRINY 2011-12-05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리뷰 읽고 알게 된 책들, 구매하게 된 책들이 얼마였던가 새삼스럽게 리뷰집을 보고 생각해봤습니다.

이매지 2011-12-05 23:55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이예요.
정말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품들도 어쩜 그렇게 꼼꼼히 소개해주셨던지...
저도 만두님 덕분에 참 많은 책을 알게 되었고, 많은 작가를 알게 된 것 같아요.

2011-12-05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5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1-12-06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에요!! 물만두님을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이매지 2011-12-07 14:45   좋아요 0 | URL
아, 뭔가 부끄럽습니다. ㅠ
 
법의관이 도끼에 맞아 죽을 뻔했디 - 대한민국 최초 법의학자 문국진이 들려주는 사건 현장과 진실 규명
문국진 지음, 강창래 인터뷰어 / 알마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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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대학 도서관에서 000번부터 900번대까지 한 서가에서 책 한 권 이상씩, 좀 다양한 책을 읽어보겠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택도 안 되는 목표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서가에서 <명화로 보는 사건>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명화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법의학을 더 가깝게 소개하는 책이었는데, 아무래도 저자가 미술학자가 아니라 각각의 작품에 대한 전문가의 소개가 아니라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법의학자의 자부심이랄까 열정이 느껴져 꽤 인상적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그 문국진 선생을 우연히 다시 만났으니, <법의관이 도끼에 맞아 죽을 뻔했디>라는 다소 익살스런 제목의 인터뷰집이 바로 그것. 국과수 최초의 법의관 문국진에 인터뷰어 강창래의 전작인 <빗물과 당신>도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두 사람이 이야기가 궁금해 기대를 안고 책을 펼쳐들었다. 

  <CSI>를 비롯한 미드 수사물과 최근 방영한 한드 <싸인> 등 일반 대중에게도 법의학은 이제 낯설지 않다. 하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 가미되어 있다고는 해도 허구는 허구. '사건' 뒤에 숨겨진 '법의학자'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라는 문국진의 말로 시작하는 이 책에는 50년 간 현장에서 뛴 그의 삶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고문과 자백으로 '만들어진' 범인이 비일비재했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한국 '최초'의 법의학자로서의 파란만장했던 삶, 그리고 은퇴 후 북 오톱시를 하며 법의학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열정을 다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가 마치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도 못한 채,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치른(혹을 치를 뻔한) 사람들. 수사관의 심증, 그리고 그것에 따른 강요(고문)에 의해 범인을 '만들어낸' 시대 속에서 문국진은 묵묵히 법의학을 알리고 후진을 양성함으로써 고문이라는 야만적인 관행을 깨는 숨은 공로자가 된다. 은사에게 "법의학은 학문도 아니야, 그런 거 하면 못 써"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택한 길이었고, 보수도 동료 의사와 비교할 때 턱없이 적었고, 부검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도끼에 맞아 죽을 뻔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에서 보람과 사명을 느꼈기에 법의학자의 길을 걸었노라며 지난날을 회상한다. 

  정액을 통해 아내를 페니실린 쇼크로 죽였다는 이야기나 윤 노파 사건 등 그가 직접 겪은 사건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가 시반이나 시랍 등 법의학적 증거에 대한 설명을 할 때는 마치 수업을 듣는 듯이 진지하게 읽었다. 단순히 교과서를 읽어내려가는 수업이 아니라 경험과 지식이 어우러진 좋은 강의를 듣고 나온 듯했다. 강의가 끝나고 나니 법의학, 특히 한국의 법의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는 "이번에 대한법의학회 모임에 가면 그런 이야기를 좀 할 작정이오. 법의학문화상을 하나 만들어보자고. 그래서 <싸인>과 같은 드라마를 만든 사람들에게 상을 주자고. 그렇게 격려해줘야 더 좋은 법의학 드라마를 만들 거 아니오. 그러면 자연히 일반인들도 법의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게 될 거고, 그래야 제도도 만들어지는 거디요. 언제나 제도가 먼저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세상이, 세상 사람들 인식이 바뀌어야 제도가 만들어지는 거요. 내가 왜 <새튼이>나 <지상아>를 썼겠어요.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디요"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에게 아직 법의학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 인식이 바뀌고는 있다 해도 제도가 바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지금도 누군가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뛰고 있을 그들을 응원하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나니 <지상아>와 <새튼이>가 궁금해졌다. 거의 30년이 다된 지금까지도 출간되고 있는 <지상아>야 비교적 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겠지만 중고로도 구하기 힘든 <새튼이>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탐이 났다. 내년이면 50번째 저서를 출간한다는 문국진. 한길을 우직하게 걸어온 그의 길. 그 길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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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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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라디오를 듣다가 사연 하나에 귀가 쫑긋했다. 실명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곳에 가봤다면 누구나 어딘지 알 법한 식당에 얽힌 사연이었다. 사연을 보낸 이는 첫 월급을 타고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거하게 대접해드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허름한 메밀국수집에 이끌고 가 맥이 빠졌다고 했다. 하지만 실망한 그에게 어머니는 그 식당이 아버지와 첫 데이트할 때 온 곳이라고, 아들과 한번 함께 오고 싶었노라고, 허름할지는 몰라도 우리 가족의 역사가 담긴 곳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사연을 들으며 문득 누구에게나 이렇게 사연이 담긴 식당이 한군데쯤은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문학동네 까페에서 오후 5시면 언제나 고픈 배를 더 꼬륵거리게 만드는 성석제의 <칼과 황홀>이 생각났다. 단순히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음식과 거기에 얽힌 사연. 내가 라디오에서 들은 것 같은 그런 이야기가 <칼과 황홀>에는 오미(五味)처럼 담겨 있었다. 

  "에미가 다섯시에 일어나서 해놓은 밥을 안 먹고 가는 아들놈이 공부는 해서 뭐할 것이며 학교는 뭐하러 다니느냐. 때려치워라, 그 망할 놈의 학교"라는 작가의 어머니의 말에 빵 터졌다가 달걀을 먹으며 밥값을 아껴 남동생 운동화를 사보냈노라는 여공의 이야기에 가슴이 짠해지기도 한다. 그것은 밥상, 술상, 찻상이라는 장의 구분을 넘어, 세대의 경계를 넘어 '공감'의 방식으로 독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일전에 <소풍>에서 작가는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먹는 것이 바로 자비이며 삶의 일부를 교환하고 서로 느낌을 공유하는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음식 철학'은 <칼과 황홀>에서도 유효하다. 단순히 '맛집'을 나열하는 책도, 자신의 요리비법을 전수해주는 책도 아니지만 우리가 특별하게, 혹은 별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찾아먹은 끼니 속에서 작가는 독자와 교감을 시도한다. 

  음식은 단순히 '맛'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맛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먹었느냐도, 어떤 분위기 속에서 먹었느냐도 중요하다. 책 속에 소개된 음식 중에 유독 먹고 싶어진 음식이 있었다. 바로 '배추전'이다. 작가는 배추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배추전의 밀가루옷이 얇으면 얇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주장해왔는데, 그래야만 배추의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배추전의 맛이라는 게 무엇일까. 배추전이 그렇게 맛있다면 왜 전국적, 세계적으로 배추전을 먹지 않을까. (중략) 수분이 많은 배추전은 지진다고 해서 바삭해지거나 맛이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배추전의 맛은 밀가루의 맛, 기름과 간장의 맛이다." 그의 말마따나 배추전은 대단한 요리는 아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갓 상경했을 때 주인집에 갖다줬다가 핀잔("이것도 먹는 음식이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어우러져 우리 집에서 배추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음식은 독자인 내게 배추전이 갖는 의미처럼 어떤 사연이 담겼느냐에 따라 재정의된다. 소시지, 해장국, 김밥, 동파육, 조기, 스파게티, 삶은 달걀 등등. 처음 접하는 음식이건, 평소 즐겨 먹던 음식이건, 심지어는 평소 질색을 하던 음식이건,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그의 구수한 입담에 놀아나다보면 어느샌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칼과 황홀 사이에 음식과 인간, 삶이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맛있는 음식이 있기에 우리 삶이 더 풍요롭게 채워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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