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산책 - 내 마음 같지 않은 산티아고 순례
장 크리스토프 뤼팽 지음, 신성림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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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전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내가 그랬듯 우거진 풀숲 사이로 이어지는 오래된 길과 그 위로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고독한 순례자들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 엄청난 착각은 순례자들이 알베르게에 묵는 데 꼭 필요한 서류인 그 유명한 ‘크레덴시알‘을 찾으러 가는 순간 바로 깨어진다. (9쪽)

카미노가 특별한 점은 산타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이 처벌이 아니라 자발적인 시련이라는 데 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이 생각은 실제 경험이 시작되면 바로 반박된다. 카미노를 걷는 사람이라면 언제가 되었든 결국 자신이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카미노 그 자체가 무엇이냐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4쪽)

카미노를 걸으면 세월 저 밑바닥에 숨어 있던 감정들이 되살아 날 거라는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사실 그곳에선 오히려 세상에 대한 환멸이 한층 깊어진다. (중략) 간단히 말해서, 꿈과 환상의 영역을 떠나면서 카미노는 불현듯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근육통에 붙이는 파스, 평범한 세상의 단면, 육체와 정신의 시련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기에 약간이라도 경이로움을 보태려면 무척 힘겹게 분투해야 할 것이다. (42쪽)

일주일간의 행군은 아직 산책에 불과하다. 확실히 길고 고통스럽고 평소와 달랐지만, 일주일은 한 번의 휴가 일정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중략) 다 그만두고 싶다는 유혹이 굴뚝같았다. 무엇보다 볼 만큼 다 보지 않았는가. 순례라는 게 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기간을 연장하는 것은 똑같은 나날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 다른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88쪽)

길을 걷는 행복은 바로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저기 위쪽 차도 위에서 현재라는 장애물 없이 전속력으로 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그런 순간들 말이다. (99쪽)

카미노를 걷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한다. 알고 있던 모든 지표는 사라지고, 너무 멀어서 접근이 불가능해 보이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주변을 둘러싼 공간의 광막함 때문에 마치 자신이 벌거벗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 모든 상황은 오직 야외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형태의 자기 성찰에 적합하다. 그럴 때 우리는 홀로 자신을 대면한다. 친숙한 것이라고는 생각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대화를 재현하고 추억을 되살려주며,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떤 반가운 존재와 가까워짐을 느낀다. (중략) 걷기는 생각을 자극해 생각을 시작하게 하지만, 거꾸로 생각에서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중략) 걷는 사람은 몇 시간 지나면 또다른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바로 그의 육체다. (중략) 평소에 무시하고 지냈던 기관들, 생리적 욕구, 불쾌감은 육체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 결국에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145-147쪽)

순례는 영광스러운 기독교 왕국이라는 사라진 세상의 유물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과거에 그것이 어떠했을지 경험할 특별한 기회를 준다. 성소와 에르미타에서, 수도원과 작은 예배당에서, 도보 여행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환상을 품을 수 있다. (중략) 기독교가 억압의 수단으로 변하기 전에는 원래 놀랄 정도로 해방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다. (중략) 그 수 인류는 새로이 탐험하는 장소마다 그리스도가 보초를 설 수 있도록 잊지 않고 신성한 안식처를 추가하면서 한없이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도보 여행자는 이 기독교의 그물이 골수까지 이교도로 남아 있었던 사람들을 얼마나 통발 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는지도 직접 확인하게 된다. 발데디오스 수도원을 떠나면서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 (162-164쪽)

산티아고 순례자는 더 혼합주의적이고 더 유동적이고 교회의 테두리를 훨씬 벗어난 이 시대의 영성과 잘 어울린다. 산티아고 길에 뛰어들었던 많은 이들이 절제, 자연과의 합일, 자아의 성숙 같은 가치에 이끌렸다. 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가 처음 시작된 시대에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가치들이다. 이런 순례자들의 행보는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포스트모던하다. 따라서 아마 다른 종교가(아시아나 중동의 순례지 같은 이미지로) 산티아고를 내세웠더라도 그들은 똑같이 그곳을 찾았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184쪽)

카미노를 걷는 동안 산티아고에 대해 상상할 시간이 많았다. 상상 속의 산티아고는 대성당과 그 앞에 있는 오브라도이로 관장으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진짜 산티아고에 가까운 곳에 도착해 한 걸음씩 도시 안으로 ㄷ르어가면서, 순례자는 제일 먼저 폭스바겐 전시장과 슈퍼마켓, 중국 식당들을 마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거리에서 마추치는 현지인들은 사도 야고보에 대해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일에만 전념한다. (263쪽)

마침내 도착한 오브라도이로 광장은 여행의 끝이자 순례자 표지가 처음 시작되는 지점이다. (중략) 카미노는 오만이 아닌 긍지로만 가득 차 있으며, 요구하지 않고 기억하기만 한다. 카미노는 인생처럼 좁고 구불거리며 끈질기다. (270-271쪽)

순례자들의 대미사는 진정한 의미에서 화합의 순간이다. 그것은 서로 다른 점들, 다른 여정들, 각자 그 길을 걷기 위해 겪었던 시련들을 몽땅 집어넣고 녹이는 도가니이자, 기도의 시간이자, 단순음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결합이다. 미사 의식은 사람들이 꽉 들어찬 대성당에서 진행된다. (273쪽)

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여행이 그저 여행에 불과해서 잊어버릴 수 있다고, 혹은 상자 속에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편리한 착각이다. 나는 카미노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지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행 전체를 들려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물론 그렇게 해도 핵심은 빠져 있다. 나도 알고 있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나는 머지않아 다시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아마 당신도 그렇지 않을까.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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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기행 2 - 뉴욕, 한낮의 우울 시화기행 2
김병종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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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 거리 건너마다 위치한 박물관과 미술관뿐 아니라 브로드웨이와 소호, 첼시, 웨스트사이드와 브롱크스, 할렘을 거느린 뉴욕, 그야말로 다양하고 거대한 세트장이라 할 만하다. 그 위에 시나리오 작가가 스토리의 얼개로 지붕만 덮으면 영화로 완성될 정도다.
영화가 인생이고 인생이 곧 영화라는 말이 맞는다면 뉴욕은 대체로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도시다. 영화 같은 인생, 인생 같은 영화 그 자체이기 때문에. (18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드넓은 초원 같은 야채밭을 차로 두 시간쯤만 지나면 검은 숲 사이 군데군데 하얀 모래톱이 드러나고, 거기 수줍은 듯 돌아앉은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한없이 부드러운 모래밭과 고요히 흐르는 물과 숲속의 길, 캐멀비치에서 스페니시베이라고 부르는 해안까지 따라가노라면 사슴이 한가하게 풀을 띁는 연둣빛 풀밭과 햇살이 반사하는 하얀 조약돌에 부리를 씻는 물새가 보인다. (140쪽)
캐멀비치와 페블비치를 지나 스페니시비치까지 이어지는 ‘17마일 드라이브‘ 코스는 미국 서부의 대표적 경관 여행지로 꼽힌다. (142쪽)

그랜드캐니언, 유타주를 가로지르며 멀리 애리조나주까지 뻗어나간 대협곡. 억겁의 세월 동안 바람과 물롸 공기가 만나고 틀어지며 만들어낸 장엄한 풍경.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며 단아한 유럽 도시 문명의 전통을 여지없이 깨트린 미국에서 그랜드캐니언은 반전도 그런 반전이 없다. 황토와 괴석 그리고 바위산을 돌아 흘러가는 콜로라도강의 천년 물길은 사람이 지어올린 빌딩과 비교될 수 없다. (중략)
그랜드캐니언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밤에 별빛을 모아 스스로의 내면을 비추어볼 일이다. 덧없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잘못 알고 한사코 붙잡으려 했던 마음. 강박적 쾌락과 가짜 기쁨에 몰말라 했던 나날......
그랜드캐니언에서는 시작과 끝이 없다. 심지어 죽음도 삶의 한 형태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엄습하는 알 수 없는 충만과 평온, 도시로 돌아가서도 제발 이 느낌만은 지속될 수 있기를. (169-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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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같은 글쓰기 -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와의 대담
아니 에르노.프레데리크 이브 자네 지음, 최애영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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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글쓰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그녀는 실존의 고통과 즐거움과 복잡함을 적나라하게, 뼛속까지 파헤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6쪽)

내게 하나의 텍스트는 생각과 욕망의 미끄러짐과 겹치기를 통해서 조직되는 무엇입니다. 내가 글을 쓰던 순간에는 모호하고 형태가 뚜렷하지 않던 것을 차후에 해명하고 그 맥락을 잇기를 원한다면, 바로 그러한 미끄러짐과 겹침을 설명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 텍스트를 정성들여 조탁하는 과정에 투여되는 삶의 작용, 즉 현재의 작용을 무시하도록 내게 강요하는 셈이될 겁니다. (20쪽)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 싶은 욕망의 다른 이유가 생각나는군요. 이것들은 내가 내 출신 사회계층을 배반하고 있다는 감정에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나는 ‘사치스러운‘활동을 하고 있어요. 비록 역시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글쓰기에 바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사치가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이러한 삶을 ‘속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어떤 안락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 글쓰기를 하는 것, 내가 손으로 한 번도 노동해보지 않은 만큼 나 자신의 존재 전체로써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속죄의 다른 방법은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들을 전복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68-69쪽)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내 모든 지식뿐 아니라 교양, 기억 등이 모두 연루된 어떤 작업을 통해, 외양을 넘어서 나 자신을 세상에 투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작업은 하나의 텍스트로, 따라서 타인들에게로 귀착되지요. (중략)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작업, 즉 하나의 텍스트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적업을 의미합니다. 타인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상관없습니다. (79쪽)

내 생각에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활동입니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세상의 베일을 벗기고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기존의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다지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활동입니다. (97쪽)

내게 글쓰기란 철저하게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삶의 즐거움보다 우월한 어떤 즐거움을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아름답고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은 곧 ‘멀리‘ 있는 것, 바로 나 자신의 것이었던 그 현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것과 동일시되었죠. (중략) 갑자기 정치적 행위를 위해 글을 쓰겠다는 욕망을 갖게 된 것도 아닙니다. 아니, 나는 삶과 인식의 차원에서 험난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도정을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이 명백한 사실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어요. (중략) 이러한 삶의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글쓰기에 관한 나의 관념 혹은 직관을 전복시켜버린, 문학과 현실 사이의 일종의 정면 대질이라고 할 과정을 겪었습니다. (98-99쪽)

바르크는 어디선과 말한 바 있습니다. "글쓰기는 작가가 자기 언어의 본질적 성격을 어느 사회 영역에 위치시킬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영역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선택을 명료하게 인식했고, 그 인식은 나를 ‘거리 두고 글쓰기‘로 이끌었습니다. (중략) 지배자들의 언어도구, 그 중에서도 특히 고전적인 문장구조를 채택하고 있는데, 내가 선택한 글쓰기는 그러한 언어도구를 사용하여 피지배자들의 관점을 문학 속으로 침입 혹은 난입시키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102-103쪽)

말, 여행, 광경 등, 그 어떤 수단으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쓰면서 발견하는 것, 숙고 똔ㄴ 홀로는 그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글쓰기 이전에는 현장에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글쓰기의 희열이 있습니다. 글쓰기는 무엇을 다가오게 하고 도래하게 하는지는 결코 미리 알 수 없어요. 그러니 글쓰기에는 공포 또한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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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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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사람은 없다. 리더십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단점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수도없이 갈등하게 된다. 옷으로 비유하면 리더십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외출복이고 인품은 평상복이다. 물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27쪽)

온 가족이 타원형 식탁에 둘러앉았다. 부모님, 레나 부부, 자식들과 손녀까지 4대가 함께 모인 자리였다. 전통을 중시하며 예의를 갖추고 말이다. 모두가 서로를 사랑했고, 그래서 괴로워했다. 노인들은 늙고 병든 몸 때문에 힘들어했다. 젊은 부부는 부모님의 간섭과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불안해했다. 레나와 니콜라이는 애정 결핍으로 힘들어했다. 두 사람 모두가 사랑을 원했다. 그들의 옛사랑은 닳고 닳아서 구멍이 났는데, 새로운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언제 또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62쪽)

"얼굴 표정이 달라. 얼굴 표정이라는 건 가정교육으로 결정되는 거야. 다시 말하면 책을 얼마나 읽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이지." "그런 거라면 노력해서 얻을 수 있겠네요." 안젤라가 지적했다. (64쪽)

니콜라이는 문든 ‘존재하다‘와 ‘존재하지 않는다‘를 구별하는 경계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깨달았고, ‘해야 한다‘와 ‘하면 안 된다‘라는 관습에 얽매일 필요가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누구도 뭔가를 해야 할 의무를 갖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쓰나미가 그를 쓸어가 버릴 수도 있었고, 비행기와 함께 추락할 수도 있었고, 병에 걸릴 수도 있었고, 죽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 남자는 수명이 짧다. (88쪽)

물론 지조와 성공 두 가지를 다 갖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96쪽)

우리는 자기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염탐한다. 물론 가상의 삶이었다.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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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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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야.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무서운 거지." 엄마는 바닥을 기어가면서 생각했다고 한다. 넘어가야 하는 순간이 온 거라고. (19쪽)

엄마가 자신의 몸을 드러내 보이는 걸 태평스럽게 승낙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더 불쾌하게 했다. 엄마가 평생 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금지 사항이나 지시 사항을 벗어던졌다는 점에 있어서는 엄마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벗어던진 결과 엄마의 몸은 한낱 몸뚱이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해 버렸고, 그 결과 시체와 다를 바 없어져 버린 셈이었다. 마구 만지고 마음대로 다루는 전문가들의 손길에 내맡겨진, 의지할 데라곤 하나 없는 가련한 몸뚱이. 거기에서 생명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관성적인 상태로만 연장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엄마를 살아있는 존재로 여겨 왔던 나는 언젠가, 그것도 얼마 안 가서 곧 엄마가 죽는 걸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 (26쪽)

내게는 권리가 있다. 우리를 짜증나게 했던 이 말은 사실 엄마에게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걸 증명해 보이는 말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엄마의 욕망이 그 자체로는 인정받지 못해 왔다는 걸 보여 주는 말인 셈이었다. (53쪽)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58쪽)

평소 같았으면 자기가 없을 때 남이 집에 들어오는 걸 참지 못했을 것이다. 병으로 인해 엄마를 둘러싸고 있던 편견과 오만의 껍질이 깨어져 버린 것이었다. 아마도 이제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리라. 체념이나 희생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회복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일에 전적으로 몰두하면서 마침내 엄마는 원망의 감정에서 벗어났다. (83쪽)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부모는 자식을 이해 못 하는 법이지. 하지만 자식도 부모를 이해 못 하기는 매한가지란다......" (97-98쪽)

죽음을 삶과 통합하려는 건, 그리고 합리적인 영역에 속하지 않은 일에 직면해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려는 건 모두 소용없는 짓이다. 각자가 나름대로 혼란스러운 감정을 풀어 나가야 한다. 나는 유언을 남기고자 하는 모든 이의 심정을 이해한다. 또한 그 어떤 유언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심정 역시 이해한다. (142-143쪽)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는, 잊힌 여인에 불과했던 엄마가 한 명의 주체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146쪽)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거죠." 이 말은 노인들을 슬프게 하고, 또 그들을 유배된 것과 다를바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자기가 죽을 나이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략) 사람이 죽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도, 살 만큼 살았기 때문도, 또 늙었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은 무언가로 인해 죽는다. (중략)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152-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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