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찬이 텅빈이 철학하는 아이 18
크리스티나 벨레모 지음, 리우나 비라르디 그림, 엄혜숙 옮김 / 이마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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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일러스트의 그림책이다. 이마주 출판사의 '철학하는 아이' 시리즈의 한 권인 이 책은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물음에 대한 답을 명사와 함께 찾아가는 그림동화' 라고 설명되어 있다. 책의 뒷부분에 명사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는 형식이다. 이 책은 번역가이자 아동문학가인 엄혜숙씨가 해설을 맡았다. 

 



꽉찬이 텅빈이 
PIENO VUOTO 
크리스티나 벨레모 글, 리우나 비라르디 그림
철학하는 아이 - 18
이마주 

 

꽉찬이와 텅빈이는 서로 마주보고 있다. 흰 배경을 뒤로 한 검은 실루엣의 꽉찬이와, 검은 배경을 뒤로 한 흰 실루엣의 텅빈이가 서로가 누군지 묻고 인사를 나눈 뒤, 서로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에 꽉찬이와 텅빈이가 함께 나오는 어떤 장면들은, 책의 제본선을 사이에 두고 데칼코마니처럼 서로의 실루엣이 겹쳐진다. 배경에서 누군가를 오려낸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모든 걸 가졌다'고 자랑하는 꽉찬이에게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며 응수하는 텅빈이. '외롭지 않다'는 꽉찬이에게 '언제나 자유롭다'고 대답하는 텅빈이. 대화를 나누다보니 둘은 꽉 찬 게 어떤 것인지, 텅빈 게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진다. 

 

서로 너무나 다른, 어찌보면 양면적인 두 사람은 서로 합쳐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꽉찬이가 텅빈이를 채우면 텅빈이는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장면에서는 슬쩍 쉘 실버스타인의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제 짝을 찾아 완전해진 동그라미가 되었지만 너무 빠르게 구르다가 꽃을 만나도 향기조차 맡지 못하고, 나비를 만났지만 무동도 태워 주지 못하고, 노래도 부르지 못하던 그 장면. 무조건 합친다고 온전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말이다.

 

결국 꽉찬이와 텅빈이는 자신의 조각을 서로에게 나눠주기로 한다. '텅빈이 조각을 지닌 꽉찬이'와 '꽉찬이 조각을 지닌 텅빈이'는 "네 자신과 지금은 네가 된 내 작은 조각을 잘 돌보아 주렴" 이라고 말하며 작별인사를 나눈다. 어떻게 조각을 나눴는지, 조각을 나눈 뒤 꽉찬이와 텅빈이가 느낀 것들은 어떤 것인지는 책 속에서 확인해보시길.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났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지.

 

작가는 '전쟁과 평화',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인', '행복과 불행' 등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세상에 살아오면서, 양면적인 두 존재는 정말 완전한 반대일까 궁금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이마주의 '철학하는 아이' 시리즈에는 좋은 책들이 많은데, 문고형 판본으로 쉽게 펼쳐지지 않는 무선제본( 혹은 떡제본? ) 형식이다보니 그림을 온전히 즐기기 어려운 책들이 좀 있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원서처럼 하드커버로 사철제본양식 버전도 나오면 펼쳐서 감상하기에도 참 좋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든다. ( 개인적인 호불호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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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도 집이 필요해! I LOVE 그림책
트로이 커밍스 지음, 이지수 옮김 / 보물창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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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제목 글자 '고양이' 중 '양' 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원제가 'I Found a Kitty!' 인 걸 생각해보면 국내 북디자이너의 센스인가보다. 귀와 꼬리가 앙증맞다. 지난 이야기에서 여러 집에 편지를 보냈던 강아지 아피는 다시 편지를 쓴다. 이번에는 자신을 위한 편지가 아닌, 길에서 만난 아기고양이 스캠퍼를 위해서다. 아피의 반려인인 집배원 누나는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 함께 살지 못하는 터라 주위의 이웃에게 스캠퍼를 매력을 대신 알리기 시작한다.  

 



길고양이도 집이 필요해 
I Found a kitty! 
트로이 커밍스 글, 그림 
40쪽 | 424g | 260*260*7mm | 2021년 05월 
보물창고 

 

지난 이야기 『날 좀 입양해주실래요?』와 구성은 비슷하다. 편지를 받을 이에게 최대한 어필할 수 있는 장점을 써놓는다. 음악선생에게는 노래하는 것도 좋아하는 점을, 이웃집 아기들에게는 아기들과 비슷하다는 점을, 정비소 누나에게는 정비소의 쥐를 잘 잡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식이다. 

 

주위의 이웃들은 스캠퍼를 지켜보지만 편지에 써있는 장점은 아피에게만 장점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박자에 맞춰 꼬리를 흔들 줄은 알지만 고음이 지붕을 뚫고 나갈 정도라 음악선생은 편히 쉴 수가 없었고, 생쥐를 잡기는 커녕 함께 노는 스캠퍼는 정비소 누나와 함께 할 수 없었다. 

 


 


편지글 형식인 본문은 다양하다. 아피가 보낸 편지를 받은 이들을 답장을 보내오는데, 그 답장들은 등장인물들의 특성을 담고 있어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연예 기획사 대표는 텔레그램으로 답신을 보낸다. 우리 나라로 치면 카**톡 쯤 되는 모바일 메신저다. 최근의 편지글의 형식에는 여러가지가 있다는 것을 슬쩍 보여주고 있다. 


 

슬퍼하는 아피를 위로하며 스캠퍼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집을 찾아 주려 애써 줘서 고마워! 덕분에 노래도 하고, 사람들 품에도 안겨 보고, 신나게 놀고, 털도 정리했어!! 


하지만 ... 야옹, 실은 말이야.

그들 중 아무도 내게 딱 맞지 않았어. 난 그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해.


도대체 그런 집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긴장한 스캠퍼의 모습과 뒤에서 지켜보는 아피의 모습. 스캠퍼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곳은 어떤 곳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편지 형식의 본문이라 그럴까. 작가 소개의 작가 그림이 우표모양인 것도 눈에 띈다. 이 뒷면지에는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집 없는 고양이와 개를 도울 수 있는 방법' 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읽어보며 아이들과 유기되는 동물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존중 등에 대해 이야기해보기에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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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자전거 여행 - 2022 어린이도서연구회 추천도서, 2022 학교도서관사서협의회 추천도서, 2021 학교도서관저널 추천도서 에프 그래픽 컬렉션
라이언 앤드루스 지음, 조고은 옮김 / F(에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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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추분이 되면 수백 개의 종이 등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축제가 열린다. 아이들은 다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강물에 떠내려가는 등불을 따라가곤 했다. 그러다가 세월에 깎인 바위 근처에 도달하면 되돌아서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그 등불들이 실제로 어디로 가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밤으로의 자전거 여행 
This Was Our Pact
라이언 앤드루스 지음 
에프 

 

늘 어울리던 네 명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하자, 너새니얼이 따라온다. 아이들은 너새니얼을 좋아하지 않았다. 화자인 주인공 벤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함께 놀림을 당할까봐 무시한다. 아이들은 서로 규칙을 정해놓았다. 

 

규칙1. 아무도 집에 돌아가지 말 것
규칙2. 아무도 뒤돌아보지 말 것

 

그러나 신나게 달리던 아이들은 서로 약속한 규칙을 어기고 한 명씩 돌아가기 시작한다. 부모님들이 절대 건너가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던 토드 캐니언 다리에 도착하자 너새니얼을 제외하고는 모두 돌아가버린다. 벤은 매우 실망했지만 너새니얼의 권유로 둘이서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그 길에서 그를 만난다. 화려한 목도리에 커다란 바구니를 메고 있는 '곰'을. 곰은 강물을 따라 흘러가고 있는 것이 등불이 아니라 물고기라고 주장한다. 그 물고기는 계속 헤엄치다가 별이 된다고 말하며, 자신은 물고기들이 하늘의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물고기들을 잡는 낚시곰이라고 소개한다. 

 

별은 모든 생명체의 집이야. 우리 모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설마 너희 인간들은 이 사실을 전부 잊어버린 거야?

 

곰과 함께 길을 나선 아이들은 길을 잃는다. 두려운 상황에 의기소침해진 주인공과 달리 너새니얼은 기운이 꺾이지 않는다. 호기심이 풍부하고 낙천적인 너새니얼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모험들을 생각해봐! '라며 즐거워 한다. 이윽고 높은 절벽을 만나고, 이를 올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곰과 헤어진다. 

 

낯선 마을에 도착한 아이들은 키 작은 할머니 마법사를 만나게 되고, 지도를 얻기 위해 낡은 창고를 치우는 일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창고를 치우다가 둘은 다투고야 만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길 위의 밤은 주로 푸른 톤이고, 길을 헤맬 때는 채도가 낮은 청회색톤으로 그려진다.  낯선 마을에 도착하여 마법사의 집 안에서는 붉은 톤이다. 창고 안에서는 노란 톤으로 그려진다. 주인공들이 속한 장소의 배경이자 빛의 색감이기도 하다. 이런 색감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푸른 톤은 가장 신비롭고 몽환적이다. 어떤 마법같은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벤과 너새니얼은 다투기도 하고 화해도 하며 서로를 이해해간다. 그들은 이번 여행에서의 진정한 한 팀이 된다. 

 

 

다시 강으로 돌아가 등불을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한 팀이 되어 힘을 모으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거든. 

 

동굴의 출구는 바다로 이어져 있고, 그 바다는 다시 강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며 나아가던 이들의 앞에 다시 곰이 나타난다. 셋은 다시 함께 모험을 한다. 그들의 여정에는 별의 이야기가 담기고, 인생의 이야기 또한 담긴다. 마법 같은 이야기들 속에서 두 아이의 우정은 더욱 빛이 나는 것은 물론이다.  

 


 

 

벤 :  다른 애들이 다 너를 놀릴 때, 내가 네 편을 들어줬어야 하는데, 그럴 용기가 없었어

너새니얼 :  걱정 마, 나도 이해해. 우리가 친구인 줄 알면 걔네들이 너도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할까 봐 무서웠던 거잖아.. 그러면 걔네가 너도 마구 놀릴 테니까. 

벤 :   걔네들하고 친해지고 싶지 않은데 왜 우릴 따라왔어?

너새니얼 :  네가 걔들하고 있었으니까. 다른 애들은 다 돌아갔는데도 너만 끝까지 남았잖아. 나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킬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어. 그리고 결국 내 짐작이 맞았지!

 

여정의 끝에 그들은 등불이 물고기로 변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물고기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 긴 시간을 기다려왔던 곰도 드디어 물고기를 잡는다.

 


 

내가 꿈에 그리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경험이었어

맞아 나도 그래

 

두 아이들을 둘러싼 판타지 배경들은 매혹적이며, 그들의 모험 또한 경이롭다. 그 여정 가운데 피어난 우정은 빠질 수 없는 소재다. 가족과 함께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작가는 첫 장편 그래픽노블인 이 책, 『밤으로의 자전거 여행』으로 ‘아이스너 상’ 최종후보작에 올랐다. 출판사의 소개에 따르면,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으로 ‘골든 글로브 TV 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피터 딘클리지(Peter Dinklage)에 의해 애니메이션 영화화 될 예정이라고 최근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다고 한다. 애니메이션도 더욱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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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 파워 1 - 진짜 비둘기의 탄생 샘터어린이문고 64
앤드루 맥도널드 지음, 벤 우드 그림, 이재원 옮김 / 샘터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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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비둘기' 하면 모 윌렘스 그림책의 캐릭터가 제일 먼저 떠올랐는데, 이제 변장을 즐기는 '록' 이라는 이 책 속 주인공( 그리고 그 친구들 )도 함께 떠오를 듯 하다. 유쾌발랄한 비둘기가 또 나타났다! 

 



구구 파워, 1. 진짜 비둘기의 탄생 
앤드루 맥도널드, 벤 우드 지음 
샘터 

 

변장의 귀재인 비둘기 '록' 은 수수께끼 사건의 해결을 좋아하는 친구다. 2019년 호주출판업상(ABIA) ‘올해의 어린이 책’ 수상작인 이 책의 원제는 「Real Pigeons Fight Crime」. 


평화의 상징이었다가 이제는 '닭둘기'(닭+비둘기)라고 불리며 도시에서 무시를 받는 이 비둘기들이 사실은 도시를 구하는 비밀 수사단이라는 설정은 매우 유쾌하다. 책 날개에 소개된 작가들의 사진도 또한 그렇다. 이번 첫번째 권에서는 '빵 부스러기 실종사건', '박쥐 사냥군의 등장', '위험한 푸드 트럭축제'. 이렇게 세가지의 에피소드를 풀어놓는다. 

 


 


농장에서 한가롭게 지내던 록 앞에 수사단의 대장 그랜파우터가 나타나 변장의 귀재인 록을 멤버로 영입한다. 록이 함께 하는 범죄 수사단의 멤버들은 생김새부터 그들의 구구파워를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만화풍의 일러스트는 물론, 일러스트 속의 대사들은 이야기를 이끄는 본문과 어우러져 책에 금방 빠져들게 한다. 

 


 


어디에나 있고, 빠르며, 공격도 할 줄 아는 비둘기는 범죄를 해결하기에 완벽한 동물이라며 자랑스러워 하는 이들은 자신만의 특별한 구구파워를 이용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공원에서 빵 부스러기가 사라진 이유부터, 박쥐들을 납치한 범인이 누군지 밝히기도 하고, 푸드 축제를 망칠 뻔한 냄새 폭탄을 처리한다. 그 과정들은 엉뚱한 방법들 투성이라 저절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록이 비록 변장의 귀재이기는 하지만 사람으로 변장하는 것은 꽤 어려운 과제였던 모양인지 실패하기도 한다. 결국 엉덩이의 깃털을 모두 뽑은 후 얼굴을 그려넣어 아기로 변장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이 변장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궁금하시면 책 속에서 확인해보시길.

 


 

마지막 페이지에는 다음 편 에피소드를 예고하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온다. 버터도둑이 등장할 모양인데 그 정체가 벌써부터 궁금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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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롤라 라퐁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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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74년 2월 4일, 당시 미국 언론을 좌우했던 언론 재벌로, 영화 <시민 케인>의 모델이기도 했던 윌리엄 허스트의 손녀가 SLA에 납치된다. 


SLA는 Symbionese Liberation Army 약자로 ‘공생(共生)해방군’으로 불린다. SLA의 심바니어즈 Symbionese는 서로 다른 종이 함께 존재한다는 공생의 의미인 심바이오시스 Symbiosis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조직의 리더인 도널드 데프리즈는 무장 강도로 복역하던 중에 급진 정치범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각성하였고, 결국 탈옥한 후에 조직을 결성하였다. 경쟁과 사적 소유에 반대하고, 인종주의와 성차별 노인차별 파시즘 개인주의에 맞선다는 것을 표방하며, 자본주의 국가 타도를 외치던 '흑인해방, 여성해방 극좌파 통일전선'으로 시작했지만, 사회와 체제에 대한 증오심으로 무장한 소규모(조직원 12명) 집단은 살인과 강도 짓을 일삼았던 터라 '극좌 모험주의 테러집단'이라는 평도 받았다. 

 


jtbc 뉴스룸

 


jtbc 뉴스룸

 

SLA의 멤버들은 본명을 버리고 영어권과는 거리가 먼 이름으로 바꾸었다. 패트리샤 허스트도 SLA에 가입한 후에 '타니아'라는 이름을 자칭하였다. '타니아'는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 내전에서 죽은 독일과 아르헨티나의 혼혈 여성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동료가 되어 함께 은행강도를 하다 체포가 된다. FBI 리스트에 기재된 퍼트리샤(패티) 캠벨 허스트(Patricia Campbell Hearst, 1954~) 의 직업은 ‘도시 게릴라’ 였다.

퍼트리샤 허스트가 납치된 후 납치범들과 동조한 행위에 대해 '스톡홀름 신드롬'에 의한 피해자라는 의견과 자발적인 참여였다는 의견이 대립한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한 저자의 궁금증은 이 소설 「17일」 을 낳았다. 과연 퍼트리샤의 전향은 SLA에 의한 세뇌였을까, 자유의지의 결과물이었을까. 

 



17일 
롤라 라퐁 지음  
문예출판사 


소설은 퍼트리샤의 범죄 행위가 SLA에 의해 세뇌당한 결과물이라며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인단에 고용돼 그들의 논리를 뒷받침할 보고서를 만드는 미국 교수 진 네베바를 가상 인물로 내세우고 있다. 당시 프랑스에 있던 진 네베바는 자신을 도와줄 비올렌이라는 여학생을 고용한다. 화자인 '나'는 유년시절부터 비올렌을 지켜보며 그녀의 영향 아래 성장한 인물로, 이 두 명의 과거를 한 걸음 너머에서 다시 쫓아가며 그들이 진행했던 작업에 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전하고 있다. 즉, 이야기는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의 진 네베바와 비올렌의 조사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 묘사된 퍼트리샤 허스트 사건에 대한 분석을 담으면서, 시간이 지난 후 그 과정을 들여다 본 화자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진행된다.

 

퍼트리샤 허스트가 누구인지, 즉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는 테러리스트인지, 아니면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대학생인지, 아니면 진정한 혁명가인지, 아니면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겠지만 삶의 의미를 못 찾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불쌍한 여성인지, 아니면 그 좌파의 신념을 신봉하게 된 평범하다 못해 어딘가 좀 모자란 인물인지, 그것도 아니면 조종당한 좀비인지, 혹은 분노하여 미국이라는 나라를 공격하는 젊은 여성인지를 2주일 안에 밝혀내야 했던 것입니다. 
- p26

 

진 네베바와 비올렌은 퍼트리샤가 남긴 음성 메시지와 사진, 당시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해 퍼트리샤의 변화 뒤에 숨은 힘을 추적한다. 언급된 사진, 언론보도 등은 실화에 기반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문장이 묘사하는 실제 사진이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이 모습 뒤에 누군가가 있나요? 타니아에게 경직된 미소를 짓게 한 그 누군가가? 그 누군가가 그녀에게 두 다리를 벌린 채 언제 어느 때라도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고 사방을 경계하는 총잡이의 포즈를 취하라고 가르쳐준 것일까요? 그 누군가가 그녀의 손가락 위치를 하나하나 가르쳐준 것일까요? '이거, 금방 배울 수 있어. 이 세상에 스스로 깨우칠 수 없는 건 없어. 자, 오른손으로는 개머리판을 잡고 손가락은 방아쇠 위에 올려놔. 그리고 왼손으로는 탄창을 꽉 움켜잡아.' 그 누군가가 가운뎃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그녀에게 주었을 겁니다. 그 누군가가 제대로 다려지지 않은 카키색 군복 상의의 첫 번째 단추를 풀라고 시켰을 겁니다. '여기는 수녀원이 아니니까 맨살이 좀 드러나도 상관없어' 

<중략>

그 누군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에게 지시하거나 그녀 대신 결정을 내린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타니아 자신이 그 붉은 색 천을 골라서 직접 벽에 고정시킨 다음 SLA 상징인 일곱 개의 코브라 머리 깃발 앞에 서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여러 가지의 포즈를 취해봤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포즈도 취해보고 저런 포즈도 취해보던 그녀는 결국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몸무게를 두 다리 사이에 분산시켜 넓적다리를 살짝 벌리고 외전근을 팽팽하게 당긴 다음 배를 꽉 죄고 거기에 개머리판을 고정시키는 자세를 취한 뒤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셔터를 누르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사진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 p180-181

 


패티 허스트가 LA 방송국에 배포한 자신의 사진

 

타니아 즉 퍼트리샤 허스트는 자신이 SLA의 일원이며 대의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성명을 담은 녹음 테이프와 사진을 LA 방송국에 배포했다고 한다. 이 사진은 포스터로 만들어져 수천장이 팔리고, '프루트 오브 더 룸' 티셔츠에 복사되어 1976년 가장 많이 팔린 사진이 되었다고. 그리고 책 속의 진 네베바는 이 사진을 '죽음에 대한 팝아트' 로 규정한다. 즉 손쉬운 유혹의 힘에 대한 투쟁을 보여주는 타니아의 섹시한 사진을 미국 자본주의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했다는 것. 

 

퍼트리샤 허스트의 이야기는 곧 혁명가 신케와 그녀의 약혼자, 그녀의 아버지 등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던 남자들 사이에 끼어 꼼짝 못 하고 발버둥친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p297

 

그들이 퍼트리샤의 선택이 세뇌도 악마화도 아닌 그녀의 자유의지라는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는 다른 많은 이야기들이 언급되고 있다. 1704년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인질로 잡혔던 백인 여성들 중 일부가 “제발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지 말아 달라”며 인질로 남길 원했던 사례가 그 한 가지다. 이들은 원주민과 지내는 동안 ‘가정과 성경에 얽매여 살고 아무도 의견을 묻지 않았던 피조물’에서 벗어나 야영지에서 불침번을 서고 숲에서 나무를 주우며 자유와 책임을 경험했기에 자신의 의지로 인질이 되길 택했다고 한다.

 

진 네베바는 한 여성잡지에 유망한 여성 50인으로 실렸으며, 박학다식한 괴짜이자 독설가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또한 1970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시위에 참가해 체포된 이력에, 스미스칼리지에서 최초로 학위를 받았다가 이후 정치적 선전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학위를 박탈 당하기도 했다. 그런 진 네베바가 사건을 조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당시 곧 19살이 되어가는 조수, 비올렌에게 미친 영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비올렌이 진 네베바를 잊지 못한 것에 비해 진 네베바는 자신의 조수를 기억하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서른 일곱살 무렵의 화자는 미국으로 가 일흔 두살의 진 네베바 교수를 만나 질문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자신의 미래를 담고 있을까요? 만남이란 결정적인 것일까요? 선생님은 수많은 여성들을 만났지요. 선생님은 자신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요? 선생님은 그들 중 일부가 선생님께 지난칠 정도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반대로 그 일부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걸로 보아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들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 
- p308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사건을 다뤘다' 라는 정보만으로, 실제로 일어났던 자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는 추리소설물이거나 서스펜스 소설이라고 생각했었다. 혹은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의 「나의 살인자에게」 /(다산책방) 처럼 실화를 재 구성한 책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후 해당 사건은 소재였을 뿐, 내가 책 속에서 건져낸 단상들은 '여성이 돌봄의 주체나 유순한 자녀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 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을 헤쳐와야 했는지와,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사실이다.  

 

퍼트리샤 허스트의 사연은 스톡홀름 증후군의 대표적인 사례로도 인용되지만, 유전무죄의 사례로도 언급되고는 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그 점을 살짝 언급하고 있다. 이런 여러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잠시라도 '타니아' 로 대표될 수 있는 어떤 목소리와 행동이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퍼트리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차고 넘치지요. 하지만 그녀는 부자였기 때문에 이번 재판에서 무거운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거예요. 허스트가는 퍼트리샤가 석방되도록 애썼고 1979년에는 캠페인까지 해서 성공을 거두었어요. 카터가 그녀를 특별 사면해주고, 클린턴이 복권시켰지요.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미국에서 이런 특혜를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많은 미국인들은 이보다 훨씬 더 가벼운 죄를 짓고도 감방에서 몇 년씩 썩어야 하는데 말예요... 하지만 허스트가는 현실을 자기네 독자들의 욕망에 맞추는 그런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어요. 그 반대의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죠. 퍼트리샤가 감옥에서 나오던 날 100여 명의 기자들이 몰려와서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의 미소와 '용서해주세요' 라고 쓰인 티셔츠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겼지요. 말하자면 퍼트리샤는 타니아를 땅에 묻는 동의한 거예요. 그렇지만 타니아가 존재했던 건 사실이죠. 잠깐 동안이기는 했지만...
- p307, 진 네베바 교수의 말 중에서

 


 

한 사건에 대해 퍼트리샤 허스트, 진 네베바( 그리고 비올렌), 그리고 화자에 이어지는 세 여성의 시선을 바라보며,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찬찬히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으로서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책 모임의 사람들과 독서토론을 해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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