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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
디파 아나파라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평점 :
빈민가의 아홉 살 소년 자이는 뿌연 스모그 너머로 신도시의 화려한 고층 건물들이 반짝이는 불빛을 보지만, 부자들의 도시는 그저 머나먼 별세계일 뿐이다. 어느 날, 빈민가 아이들이 연달아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경찰 순찰대'나 '범죄의 도시' 같은 TV 드라마에 빠져있던 자이는 친구들과 실종사건을 해결해보기로 마음 먹는다. 평소에는 탈 수 없었던 보라선 열차를 타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다.
미국 추리 작가협회가 에드거 앨런 포를 기념하여 제정한 에드거 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한 해 최고의 추리작품이라는 인정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작품의 맛보기 정도인 처음 50페이지만 가지고도 루시케번디시 소설상, 데버라로저스 재단 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국의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인도 출신의 여성 작가가 낸 데뷔작이 장르문학은 물론 순수문학에서도 인정을 받았다니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지 더욱 궁금해지지 않는가.
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
DJINN Patrol on the Purple Line
디파 아나파라 지음
북로드
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가난한 환경이지만 천진하고 유쾌한 에너지를 가득 발산한다. '책을 많이 읽고 머릿속에 이야기가 가득해서 그런지 거짓말도 금방 잘 지어'낸다는 파리라는 이름의 친구와 함께 탐문수사를 나선 자이. 아이의 시선으로 묘사하는 풍경들은 어른이 보는 현실의 느낌과는 다르게 온화하고 서정적인 표현들이 가득하다. 실종된 아이의 집에서 사진을 받아오며 '그 집 안에 있으려니 더운 여름날 땀에 젖은 셔츠처럼 슬픔이 내 마음에 달라붙었기 때문'(p99) 에 빨리 집 밖으로 뛰어 나왔다는 등의 표현들처럼.
자이는 엄마의 비상금을 훔쳐 보라선 전철을 타고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나섰지만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탐문수사를 한다.
그날은 우리가 신나는 모험을 한 최고의 날이었지만, 빨리 200루피를 벌지 않으면 내가 엄마의 비상금을 몰래 가져갔다는 걸 엄마가 알아차릴 것이다. 계산해보니 찻집에서 다섯 번만 일하면 그 돈을 벌 수 있었다. (...)
찻집 종업원 일은 탐정에겐 환상적인 잠복근무다. 소문과 증거를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를 마시면서 세상 살기 힘들다고 불평을 해댄다.
-p161
실종된 아이들의 가족들은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경찰은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종보다는 단순 가출로 여기는 눈치다. 그러나 사라지는 아이들은 계속 늘어가고, 자이의 누나마저도 사라진다. "이건 꿈이야. 아니야. 이건 현실이야. 신은 내 가슴에 나사를 박아 넣고 스크루드라이버로 계속 돌려 죄고 있다. 잠시도 쉬지 않고"(p326) 누나가 사라지기 전 누나와 다투면서 끔찍한 말을 하고, 못된 정령이 누나를 잡아가기를 바랬던 자이는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슬퍼한다. 차라리 자신이 납치를 당했어야 했다며 후회한다. 이제야 표지의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자이의 누나였던 것일까. 사건은 결국 방송에 보도가 되지만 취재를 나온 기자들은 빈민가 사람들의 모습을 흥미거리를 위해 찍을 뿐이다. 사건의 진상은 조금씩 밝혀지지만 사라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경찰이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민원을 무시한 이유가 뭔지 말해주던가요? (...)
사람들이 어쩜 그리 몰인정해? 당신들은 우리가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면서 엉엉 울기를 바라지? 그런 모습을 찍어서 뭘 얻는데? (...)
그래, 가. 당신들은 그렇게 가버리면 그만이지.
하지만 우린 오늘도, 내일도, 또 내일모레도 여기서 살아야 해. 당신들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말들을 하는데, 이건 우리한테 삶이 걸린 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
- p389
소설 초반, 밝고 명랑한 주인공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이 탐정으로 나오는 추리소설이자 나름의 성장소설일 줄 알았다. 에드거상 수상소식이 더욱 그런 인상을 부추긴 점도 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소설이면서도 르포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빈민가에서 벌어지는 어린이 실종 사건을 배경으로, 빈부격차와 성차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무슬림)의 갈등, 부정부패 등의 인도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홉 살 어린아이의 천진한 시각으로 묘사하는 사회 문제들은 더욱 슬프고 안타깝다.
97년부터 08년까지 인도에서 기자로 일했던 저자는 교육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넝마주이로 일하거나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 종교적 폭력에 희생되어 학교를 떠나야했던 아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그 아이들 대다수에게서 피해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까불거릴 정도로 유쾌했고,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몸을 들썩거렸다고 했다. 마침 전국의 빈곤 가정 어린이들이 실종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을 조사 중 알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소설로 내면서, 기사에서 담지 못했던 아이들의 회복력, 유쾌함과 당당함을 이 소설의 아이들을 통해 그려내려고 노력했다고.
자이는 누나의 목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있지만, 누나가 옆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 스모그가 아주 엷은 망사 커튼처럼 드리운 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찾는다. 그 별은 누나가 자이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두꺼운 구름과 스모그와 심지어 엄마의 신들이 이 세계를 다음 세계와 분리하기 위해 쌓아놓은 장벽까지 꿰뚫을 만큼 강력한(p410)' 신호라고 믿어보는 자이의 모습은 더욱 애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