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
디파 아나파라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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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가의 아홉 살 소년 자이는 뿌연 스모그 너머로 신도시의 화려한 고층 건물들이 반짝이는 불빛을 보지만, 부자들의 도시는 그저 머나먼 별세계일 뿐이다. 어느 날, 빈민가 아이들이 연달아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경찰 순찰대'나 '범죄의 도시' 같은 TV 드라마에 빠져있던 자이는 친구들과 실종사건을 해결해보기로 마음 먹는다. 평소에는 탈 수 없었던 보라선 열차를 타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다. 


미국 추리 작가협회가 에드거 앨런 포를 기념하여 제정한 에드거 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한 해 최고의 추리작품이라는 인정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작품의 맛보기 정도인 처음 50페이지만 가지고도 루시케번디시 소설상, 데버라로저스 재단 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국의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인도 출신의 여성 작가가 낸 데뷔작이 장르문학은 물론 순수문학에서도 인정을 받았다니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지 더욱 궁금해지지 않는가.




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

DJINN Patrol on the Purple Line

디파 아나파라 지음

북로드



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가난한 환경이지만 천진하고 유쾌한 에너지를 가득 발산한다. '책을 많이 읽고 머릿속에 이야기가 가득해서 그런지 거짓말도 금방 잘 지어'낸다는 파리라는 이름의 친구와 함께 탐문수사를 나선 자이. 아이의 시선으로 묘사하는 풍경들은 어른이 보는 현실의 느낌과는 다르게 온화하고 서정적인 표현들이 가득하다. 실종된 아이의 집에서 사진을 받아오며 '그 집 안에 있으려니 더운 여름날 땀에 젖은 셔츠처럼 슬픔이 내 마음에 달라붙었기 때문'(p99) 에 빨리 집 밖으로 뛰어 나왔다는 등의 표현들처럼.


자이는 엄마의 비상금을 훔쳐 보라선 전철을 타고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나섰지만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탐문수사를 한다. 


그날은 우리가 신나는 모험을 한 최고의 날이었지만, 빨리 200루피를 벌지 않으면 내가 엄마의 비상금을 몰래 가져갔다는 걸 엄마가 알아차릴 것이다. 계산해보니 찻집에서 다섯 번만 일하면 그 돈을 벌 수 있었다. (...)


찻집 종업원 일은 탐정에겐 환상적인 잠복근무다. 소문과 증거를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를 마시면서 세상 살기 힘들다고 불평을 해댄다. 


-p161



실종된 아이들의 가족들은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경찰은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종보다는 단순 가출로 여기는 눈치다. 그러나 사라지는 아이들은 계속 늘어가고, 자이의 누나마저도 사라진다. "이건 꿈이야. 아니야. 이건 현실이야. 신은 내 가슴에 나사를 박아 넣고 스크루드라이버로 계속 돌려 죄고 있다. 잠시도 쉬지 않고"(p326) 누나가 사라지기 전 누나와 다투면서 끔찍한 말을 하고, 못된 정령이 누나를 잡아가기를 바랬던 자이는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슬퍼한다. 차라리 자신이 납치를 당했어야 했다며 후회한다. 이제야 표지의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자이의 누나였던 것일까. 사건은 결국 방송에 보도가 되지만 취재를 나온 기자들은 빈민가 사람들의 모습을 흥미거리를 위해 찍을 뿐이다. 사건의 진상은 조금씩 밝혀지지만 사라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경찰이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민원을 무시한 이유가 뭔지 말해주던가요? (...)


사람들이 어쩜 그리 몰인정해? 당신들은 우리가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면서 엉엉 울기를 바라지? 그런 모습을 찍어서 뭘 얻는데? (...)


그래, 가. 당신들은 그렇게 가버리면 그만이지. 


하지만 우린 오늘도, 내일도, 또 내일모레도 여기서 살아야 해. 당신들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말들을 하는데, 이건 우리한테 삶이 걸린 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


- p389



소설 초반, 밝고 명랑한 주인공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이 탐정으로 나오는 추리소설이자 나름의 성장소설일 줄 알았다. 에드거상 수상소식이 더욱 그런 인상을 부추긴 점도 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소설이면서도 르포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빈민가에서 벌어지는 어린이 실종 사건을 배경으로, 빈부격차와 성차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무슬림)의 갈등, 부정부패 등의 인도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홉 살 어린아이의 천진한 시각으로 묘사하는 사회 문제들은 더욱 슬프고 안타깝다.


97년부터 08년까지 인도에서 기자로 일했던 저자는 교육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넝마주이로 일하거나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 종교적 폭력에 희생되어 학교를 떠나야했던 아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그 아이들 대다수에게서 피해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까불거릴 정도로 유쾌했고,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몸을 들썩거렸다고 했다. 마침 전국의 빈곤 가정 어린이들이 실종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을 조사 중 알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소설로 내면서, 기사에서 담지 못했던 아이들의 회복력, 유쾌함과 당당함을 이 소설의 아이들을 통해 그려내려고 노력했다고. 


자이는 누나의 목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있지만, 누나가 옆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 스모그가 아주 엷은 망사 커튼처럼 드리운 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찾는다. 그 별은 누나가 자이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두꺼운 구름과 스모그와 심지어 엄마의 신들이 이 세계를 다음 세계와 분리하기 위해 쌓아놓은 장벽까지 꿰뚫을 만큼 강력한(p410)' 신호라고 믿어보는 자이의 모습은 더욱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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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3 : 송 과장 편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3
송희구 지음 / 서삼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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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꼭 한 명 이상은 존재하고 있을( 어쩌면 그것이 나일 수도 있는 )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친숙함으로 무장한 이른바 ‘하이퍼리얼리즘’ 책이다. 대한민국 직장생활과 부동산에 관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책으로 어느새 세번째 책이 나오면서 시리즈가 되었다.


이직과 전직, 결혼과 출산, 퇴사와 은퇴 등 직장인들의 라이프 사이클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런 흐름을 겪다보면 누구나 진정한 ‘경제적 자유’ 를 꿈꾼다. 책 속의 인물들을 통해 보게 되는 부동산에 대한 관심 또한 책 속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처럼.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3. 송과장 편

송희구 지음

서삼독


제목을 보면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가. ‘서울 자가’ 와 ‘대기업’, 그리고 ‘부장’ 이라는 제목의 단어들이 주는 어떤 안정감과 믿음? 사회적 지위? 같은 것? 그런데 그런 것을 걷어내고 나면 그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김 부장 편(1권), 정대리.권사원 편(2권)에 이어 이번 세번째 권에서는 송과장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을 읽었던 이들은 이야기의 배경과 직장 에피소드 등에서 <미생>을 떠올리기도 한다. 나는 멘토 격인 박 사장과의 대화를 읽으면서, 이야기의 진행에 있어 호아킴 데 포사다의 <마시멜로 이야기> 나 <바보 빅터> 류의 책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냥 경험이 쌓이다 보니까 자네보다 조금 더 아는 것뿐이지. 나도 처음에는 아주 얄팍했는데 그 얄팍한 것들이 층층이 쌓이니까 두툼해진 것뿐이야. 이건 학벌이나 아이큐나 배경 같은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야. 내가 왜 일을 하는지,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 왜 그런 목표를 정했는지, 혹시 목표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계속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지. 결국 파고들다 보면 두 가지 질문으로 귀결되더라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자네는 이런 생각 해봤나? 

- p174


내용은 부동산을 비롯한, 여러 경제적 투자에 대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져있지만, 그것들이 향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보다 나은, 행복한, 혹은 충만한 인생을 위한 투자라는 것. 덕분에 이 책이 자기계발서이자 인생’투자서’ 처럼 읽히게 된다. ‘재능이란 게 특별히 뛰어난 게 아니라 꾸준함’( p345) 이라던가,  ‘더 중요한 건 시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p346) 라는 조언들만 봐도 그렇다. 

기차를 타려면 목적지를 정하고, 표를 사고, 역에 가서 플랫폼이 어딘지 확인하고 타야 하잖아. 그리고 기차표를 지불할 돈이 있어야 뭔가 할 수 있겠지? 그 돈을 모으면서 어느 목적지로 갈지 어떤 기차를 탈지 미리미리 알아보는 거야. 그 기차표 값이 흔히 말하는 종잣돈인데 돈을 모으는 과정은 진부하고 지루하고 때로는 처절하기까지 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어. 그런데 그 종잣돈을 빨리 모으기 위해서 또 주식 사고 코인 사고 그러는 건 절대 안돼

- p348


이 책에 대해 ‘좌충우돌 본격 인생 투자서’ 라고 평한 다른 이의 한줄평에 공감을 눌러본다. 그리고 패기와 열정으로, 좌충우돌 끝에 어느 정도 주변에서 경제적 자유를 찾았다고 여겨지는 송과장은 가장 큰 자산은 자기 자신이라고 이야기한다. 


경제적 자유라…(…)


단순히 재정적으로 자립했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 만약에 내가 돈이 많아서 회사를 그만두면 남는 시간에 뭘 할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더라고. 회사가 있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고 그 압박감으로 생활 패턴이 유지되고 있거든. 그런데 매일매일이 주말 같다면 나는 분명 게을러질거야. (…)


결국 시간이 많은 게 자유로운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쓸 수 있어야 자유로운 거더라고.

-p356


‘인생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주도권이 나에게 있어야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정말 중요한 진리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향기라고 해야 하나, 무언가를 찾기 위해 삶의 시간을 전부 써버리잖아. 그런데 그 향기를 결국에는 찾지 못하는 것 같아. (…)


그 향기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나고 있는데 그걸 몰라.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르고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해. 타인에게서 찾으려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과거나 미래에서 찾으려고 하거든. 현재 자기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잖아. 

-p361


송 사원에서 시작한 송 과장의 마무리 편이라서 그럴까. 술술 읽히면서도 밑줄이 빼곡해진다. 이 시리즈는 곧 웹툰으로도 나오고, 드라마화될 예정이라고 한다. 다른 매체로 이 이야기가 어떻게 다가올지 더욱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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캑터스
사라 헤이우드 지음, 김나연 옮김 / 시월이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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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이라는 큰 도시에 살며 나는 혼자만의 이상적인 삶을 꾸렸다. 내게 딱 알맞은 집과 능력을 꽃피울 수 있는 직장, 그리고 문화생활에 접근성까지. 회사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내 모든 걸 통제할 수 있었다. -p35"


​자신의 세계는 난공불락과 같다고 표현하는 주인공은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하고 타인에게로 향하는 문을 굳게 걸어 잠근 40대 싱글여성이다. 주인공이 애정을 쏟는 유일한 대상은 사무실과 집에 있는 선인장 뿐이라니. 주인공의 첫 인상은 내게 까칠하게 다가왔다.  




캑터스

The Cactus

사라 헤이우드 지음, 김나연 옮김

시월이일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동생에게만 유산을 물려준 것을 알게 된 주인공 수잔. 정당한 유산 배분을 주장하기 위해 사이가 안좋은 남동생과 맞서기로 한다. 그런데 싸워야 할 상대가 또 있었으니. '마흔 다섯의 나이에 독신이며 한정적인 수입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은 임신 초기였던 것. '오래전부터 내 인생엔 남편도, 아이도 없을 것이라고 결정했고, 나 혼자만의 삶을 완벽하게 꾸려야겠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그녀는 이 새로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 지 고심할 수 밖에 없다. 


서로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깔끔한 데이트 상대로 만났던, 아기의 생물학적 아빠인 리처드는 아기에 책임을 지고 싶어한다. 수잔은 '그는 똑똑하고, 아주 예의 바르고, 유별나게 유쾌했으며 잘생겼고, 취향도 좋고, 돈벌이도 꾸준하고, 나와 같은 관심사를 공유' 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내가 누군가와 내 삶을 나누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내가 리처드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 라고 생각한다. 


의도치 않았던 임신 기간의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의 개그코드는 문득 영화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편을 떠올리게도 한다. 주인공끼리 주고 받는 대화들 또한 위트 넘치는 유머가 종종 담겨있어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캑터스」 도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도 영국이 배경인 터라( 원작소설이 영국작가이기도 하고 ) 비슷한 느낌인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주인공의 성격은 매우 다르지만. 


소설의 이야기는 어느 8월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이듬해 3월로 맺는다. 그 기간 동안 수잔은 자신의 임신으로 인한 새로운 삶을 찾아야하고, 어머니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한 싸움에서 이겨야하는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한다. 그 가운데 동생 에드워드와의 갈등을 통해 수잔이 까칠해질 수 밖에 없던 어린 시절의 일화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결국 숨겨졌던 비밀이 밝혀진다. 


캑터스(Cactus), 즉 선인장이라는 제목. 수잔이 키우는 선인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뾰족한 가시를 세운채 주위의 접근을 거부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의미하는 듯 하다. 이야기 전개 속에서 그녀가 가시를 세우게 된 사정들을 알게 되면서 소설 초반 까칠하게 느꼈던 그녀에 대한 인상이 바뀌어갔다. 수잔 주변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세웠던 가시를 내려놓은 수잔은 더없이 사랑스럽고 따뜻하다. 동생을 비롯하여, 남편이라는 존재까지 거부했던 그녀가 가족이란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읽는 이들을 따뜻한 감동에 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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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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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로 읽었던 이 소설을 오랫만에 다시 펼치는 감회가 새롭다. 일본 출장 중에 일본어 공부를 해보겠다며 문고판으로 샀던 원서는 상권의 중간까지 읽다가 포기했었으니 거의 20년만인듯 하다. (겉모양만) 나름 하루키스트라며 하루키의 책을 모아뒀던 터라, 99년의 2판 75쇄본이 책장에 내내 꽂혀있었음에도 다시 읽어볼 생각은 왜 못했던 걸까. 



책의 표지는 일본 초판본의 색을 가져왔다. 민음사의 번역본은 상, 하권의 합본이므로 두 색이 한 권에 함께 있다. 유광인 원래의 표지와 달리 종이의 질감이 느껴지는 무광의 좀 더 세련된 표지를 입고서, 초판본의 느낌을 살린 디자인 컨셉트로 제작되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비틀즈의 곡인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에서 따온 제목이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일본 소설 1위를 차지하는 등, 하루키 붐을 일으킨 소설이기도 하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팬이었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책에서 개츠비를 언급했던 터라,  「위대한 개츠비」도 덩달아 찾아 읽었던 추억도 떠오른다.  또한 역시 책 속에서 언급되었던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도. 


1970~80년대의 일본이 배경이 소설로, 2차 세계 대전 이후 급속한 발전을 이룬 일본이 버블의 붕괴로 인해 경제가 불안해지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무기력에 빠졌던 시절이 무대다. 화자인 주인공 와타나베는 유일한 친구 기즈키의 자살로 죽음을 마주한다. 아픈 기억을 지워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죽음이란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런 숨 막히는 배반 속에서 나는 끝도 없이 제자리를 맴돌았다. (...) 삶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p56) 



이 책을 읽었던 나의 젊은 날은 아래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었다. 문장 속에서 비슷한 시간을 발견하며 공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와타나베처럼 죽음에 마주하지는 않았으나 청춘의 방황은 동일했다. '어디로든 가지 않을 수 없으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수 밖에 없던' 시간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신발이 쑥 빠져 버릴 것만 같은 깊고 무겁고 끈적이는 수렁. 그 진흙탕 속을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걸어갔다. 앞에도 뒤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끝도 없이 시커먼 진흙탕 길이 이어질 뿐이었다. 


시간조차 나의 발걸음에 맞춰 느릿느릿 흘러갔다. 주위 사람들은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와 내 시간만이 수렁에 빠져 질퍽질퍽 제자리를 맴돌듯이 걸어갔다. (...)


나는 거의 얼굴도 들지 않고 하루하루를 흘려보낼 따름이었다. 내 눈에 비친 것은 무한히 이어지는 수렁뿐이었다. 오른발을 내딛고 왼발을 들어 올리고 다시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확신도 없었다. 다만 어디로든 가지 않을 수 없으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따름이었다. 


- p461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는 '사랑' 보다는 '방황' 에 방점을 찍으며 읽었던 듯 싶다. 오랫만에 다시 읽는 지금은 '사랑'에 관한 것들을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미도리와 방황하고 헤매며 아파하는 나오코 사이에서의 와타나베를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젊은 날의 상실이 가져왔던 고독과 의미없는 육체적 관계들이 다시 불러오는 허기의 반복 또한 생각거리를 남긴다. 


와타나베가 마주했던 여러 죽음들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p529) 라고 했던 것을,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p530) 는 것을 이제는 마음으로 공감하게 되는 삶의 경험도 쌓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10년 뒤에 다시 읽어봐야지. 그 때는 어떻게 다가오려나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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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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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홀레 시리즈' 가 아닌 요 네스뵈의 소설을 오랫만에 읽는다. 요 네스뵈의 이야기 전개를 좋아해서 그가 썼던 아이를 위한 동화까지 찾아 읽었던 터라 이번 소설에 대한 기대감 또한 충만했다. 750여페이지에 이르는 벽돌책이지만 몰입, 순식간에 다 읽었다. 그의 플롯 구성과 전개는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킹덤

Kingdom

요 네스뵈 ( Jo Nesbø )

비채



우린 가족이다. 우리가 믿을 건 가족뿐이야. 친구, 애인, 이웃, 이 지방 사람들, 국가 그건 모두 환상이야. 정말로 중요한 때가 오면 양초 한 자루 값어치도 안 된다. 그때는 그들을 상대로 우리가 뭉쳐야 해. 로위. 다른 모든 사람 앞에서 가족이 뭉쳐야 한다고. 알았지?


- p13, 프롤로그


프롤로그에서 주인공 아버지가 강조하는 '가족'. 책을 덮고나면 떠오르는 단어 또한  '가족' 이란 단어다. 형인 로위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은 그가 느끼는 가족에 대한 애증, 책임감, 죄책감 등의 다양한 감정들들 담고 있다. 특히 그가 동생인 칼에 대해 느끼는 과도해 보이는 책임감의 이유가 책을 읽어가는 내내 궁금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덕분에 화자가 사건의 중심이 되는 사건의 범인이 아닌가 내내 의심하면서 이야기 속의 복선을 찾아보기도 하고,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확대 해석해보게 되기도 한다. 


<뉴욕저널오브북스> 의 한줄평인 '요 네스뵈가 그리는 세상은 황폐하거나 곧 황폐해진다. 그는 자비라곤 없는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라는 문장에 절절히 공감한다. 재미있으면서도 정신이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긴장하다가 읽어내려가다 안심하려고 들면, 갑자기 또 다른 사건이 휘몰아친다. 그 사건을 수습하면 또 다른 일이 벌어진다. 피투성이의 파국이다. 그 가운데 생각지 못했던 작은 반전들이 엮이고 어두운 비밀들이 하나둘씩 밝혀지며 '아니, 그런거였어?' 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예상이 몇 번이나 뒤집히던지.. 이렇게 독자를 휘몰아치다니 작가의 구성력과 필력에 다시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모임에서 함께 읽고 독서토론을 해보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결은 다르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나오미와 가나코」를 읽을 때의 느낌이 떠오르기도 했다. 


오프가르 농장, 작은 집, 헛간 하나, 외곽의 벌판 몇 군데, 저게 도대체 뭐람? 네 글자로 된 이름, 식구 중 두명이 살아남은 집안의 성(姓). 다른 걸 모두 떼어냈을 때, 가족이란 무엇인가? (...)

단순히 실용적인 이유 외에 또 다른 것이 있는가? 부모, 형제, 자매를 하나로 묶어주는 뭔가가 핏속에 있는 건가? 

- p734


어쩌면 요 네스뵈는 가족을 위해, 사랑을 위해 "당신은 무엇까지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읽는 이의 도덕적 가치관을 시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표지의 손과 손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가족이란 울타리, 그들만의 '킹덤' 은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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