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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한상연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1년 12월
평점 :
다양한 영역이 맞물린 인문학 도서를 읽는 것도 내 취향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는 요즘이다. 예술, 철학, 과학 이렇게 한 가지만 깊게 파는 도서들도 좋지만 음악과 미술이라던가, 미술과 역사라던가, 과학과 역사 등 다양한 분야가 맞물려있는 인문서들 또한 특유의 매력이 있다. 이번에 읽은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는 예술(특히 미술)과 철학의 만남이다. 앙리 루소, 구스타프 클림프, 에곤 실레,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파블로 피카소, 피터르 브뤼헐,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으로 하이데거의 철학에 접근하는 책이다. 모든 철학과 예술, 문학의 근원은 역시 하나인 것일까.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한상연
세창출판사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는 미학과는 무관한 책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이 이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한 그림들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읽어나가다보면 자연스럽게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게 되면서, 예술을 감상하는 또 다른 방법을 또한 경험하게 된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철학도 예술도 실은 체험적 현실을 표현하는 상이한 방식들일 뿐'(p4) 이라고 하면서 '그림을 감상하는 자는 그림과의 만남이 자신의 삶에 불러 일으킨 체험적 현실을 음미하는 자이며, 그 체험적 현실 속에서 화가가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겪은 어떤 체험적 변화를 함께 발견하는 자' 라고 표현한다. 또한 '그림을 감상하면서 우리는 감각이란, 감각하는 자의 존재에서 일어나는 변화로서만 가능하다는 단순하고도 자명한 존재론적 진실과 만나게 되는 것' 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고 읽지 않아도 좋은 책이다. 그래도 하이데거가 누구인지는 알고 시작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이데거의 철학은 예술, 미학, 정치학, 역사학, 신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인문학을 깊게 만나보려는 사람은 언젠가는 한번쯤 하이데거와 마주하게 된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마르틴 하이데거(독일어: Martin Heidegger, 1889년/9월 ~ 1976년/5월)는 메스키르히에서 출생한 독일의 철학자이다.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를 지냈다. 일반적으로 그의 철학은 《존재와 시간》을 중심으로 하는 전기 철학과 1930년~35년 사이의 소위 전회 이후의 후기 철학으로 나뉜다. 그의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은 후설의 현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딜타이의 생의 철학 등의 영향하에 독자적인 철학을 개척하여 현존재의 존재의미를 탐구하는 실존론적 철학을 수립하였다.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은 방법론적으로는 해석학적 현상학이며 그 대상으로 보자면 현존재, 즉 인간실존에 대한 존재론이다. 한편 현존재로부터 존재 자체로 핵심적 주제가 옮겨간 후기 철학은 역사적으로 존재 자체가 인간 현존재에게 어떻게 스스로를 현시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독일의 히틀러 집권시기 나치 독일을 지지하는 발언을 공공연히 자주하였으나 나치 독일 패전후 독일 비(非)나치스화 청문회에서 유태인 한나 아렌트의 증언 등으로 처벌을 피했고 이후 5년 동안 학문 활동을 금지당했다. 이렇게 나치에 협력한 전적으로 공격당하기도 하지만 많은 철학자들로부터 철학의 천재라고 불린다. 대부분의 유명한 20세기 유럽 철학자들은 하이데거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사르트르, 푸코, 아도르노, 하버마스 등의 철학자들은 모두 하이데거의 철학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에서는 앙리 루소, 구스타프 클림프, 에곤 실레,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파블로 피카소, 피터르 브뤼헐, 빈센트 반 고흐, 이렇게 일곱 명의 화가의 그림을 소환한다. 초현실주의, 아르누보 회화, 표현주의 회화, 인상주의 회화 등 다양한 화풍의 그림들이다. 철학 이야기 뿐만 아니라 화가의 생애, 일화,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도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기에 예술에 관한 관심 또한 제대로 충족된다. 각 장의 화가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네이버 지식 사전의 「501 위대한 화가」(마로니에 북스) 링크로 연결되는 QR코드도 제공되고 있어 책에 나온 그림들 외의 작품들도 감상해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주저는 「존재와 시간」 이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이 책의 중심 개념 중 하나는 탈은폐와 은폐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론적으로 진리는 존재 자체의 드러남이고, 존재 자체의 드러남인 진리는 동시에 존재 자체를 감춘다. 한마디로 진리는 존재 자체의 탈은폐이기도 하고 은폐이기도 하다. 이 수수께끼 같은 개념은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여러 장에서 계속 반복되어 서술되는데, 나는 특히 1장. 앙리 루소의 회화와 7장. 빈센트 반 고흐의 회화와 함께 하니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는 듯 했다.
하이데거의 어법을 차용하자면, 루소의 회화가 내보여 주는 초현실성은 우리가 사실적이라고 믿고 있는 현상적 세계 이면에 감추고 있던 존재론적 진실의 드러남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현상적 세계의 이면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이미지로 표상될 존재의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는 식의 생각은 잘 하지 못한다. 현상적 세계와 다른 이미지는 모두 비현실과 초현실이라는 두 개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그러나 현상이 존재 자체의 탈은폐이자 은폐라는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면 현상적 세계의 이미지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 p24, 앙리 루소의 초현실주의 회화와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은 빈센트 반 고흐의 1886년 작 <한 켤레의 구두> 에서도 다시 언급되며 알레테이아 개념으로 부연설명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기원」 에서 고흐의 이 작품에 관한 유명한 에세이를 남긴다. '난해하고 복잡한 이 에세이의 핵심적인 전언은 예술 작품이란 결국 존재 자체의 드러남이라는 의미의 진리, 즉 알레테이아라는 것이다.'(p281)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따르면, 진리란 본래 어떤 객관적 사태에 대한 논리적 명제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탈은폐, 즉 알레테이아를 뜻하는 말이다. 알레테이아로서의 진리는 물론 인간 현존재의 존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 일반 같은 것은 없다. 정신이 멀쩡한 자에게는 정신이 멀쩡한 자의 존재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존재 자체가 탈은폐가 될 것이고, 고흐처럼 미친 자에게는 미친 자의 존재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존재 자체가 탈은폐될 것이다.
- p273, 빈센트 반 고흐의 인상주의 회화와 하이데거의 알레테이아 개념
우리는 모두 일상세계에서 일상적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며, 그러는 가운데 나의 일상적인 자아가 형성된다. 이러한 자아를 하이데거는 비본래적인 자기라고 부른다. 일상세계는 도구적 의미 연관에 의해 지배되고, 비본래적 자기는 존재의 의미를 그 도구성 가운데서 발견하는 존재자이다. 예술가에게 도구는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저자는 '도구의 도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근원적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화가로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예로 든다.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 에서 부유한 상류층의 허영심을 드러냈던 진주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는 도구적 일상세계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근원적 성스러움의 상징이 된 이유를 찬찬히 풀어내고 있다.
그 어느 것도 그저 똑같은 사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의미를 이해하는 현존재의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 현상이다. 그렇기에 공허한 정신을 지닌 인간 현존재가 발견하는 진주는 허영심의 상징이 되고, 자유분방한 정신을 지닌 인간 현존재가 발견하는 진주는 근원적으로 자유로운 삶과 존재의 성스러운 상징이 된다.
- p153,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장르화와 하이데거의 도구 개념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한 권으로 하이데거의 철학을 다 이해할 수 있으랴. 그래도 어렵게만 다가오는 철학을 다양하게 접근해보다보면 분명 관심이 커지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은 머리로만 이해하려했던 철학을 가슴으로 느껴보는 경험을 해보게 한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느껴지는 어떤 것이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