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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아파트먼트 - 팬데믹을 추억하며
마시모 그라멜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시월이일 / 2022년 2월
평점 :
지금의 이른바 '코시국'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지금을 어떻게 추억하게 될까. '팬데믹을 추억하며' 라는 부제의 소설「이태리 아파트먼트」 는 2080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노년에 접어든 주인공이 손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홉 살때의 기억을 글로 남긴다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록다운과 거리두기가 일상이었던 팬데믹 속의 날들을.
이태리 아파트먼트
마시모 그라멜리니 지음
시월이일
이탈리아 북부도시 밀라노의 5층짜리 아파트. 그 곳에는 주인공인 마티아의 가족, 항상 덧문이 내려져 있어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2층의 테아네 가족, 3층 줄리오 마우로 가족, 4층 젬마 할머니, 그리고 도나티 할아버지네 부부, 꼭대기층에 사는 측량사 고티 씨, 관리사무실의 카를로 할아버지가 이웃하여 살고 있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 아파트에 사는 이들의 삶이 주인공 아이의 시선을 통해 엮인다. 팬데믹이라는 위기 속에서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들이 드러난다. 그 가운데 아이의 가족 이야기 또한 소설의 주된 서사를 이룬다.
엄마와 오랜 기간 별거 중이었던 아버지가 이혼 수속을 위해 밀라노로 오지만 호텔들이 문을 닫아 이들의 집으로 온다. 아버지에 대해 기대가 없던 아이는 이것을 '또 다른 바이러스가 왔다'라고 표현한다. '이름과 성이 있는 몹시 짜증나는 바이러스. 게다가 안타깝게도 나와 성이 똑같았다.'(p033) 라고도 생각한다. 아이는 이미 아버지에 대해 많은 실망을 쌓아왔던 것이다. 소설 초반, 아버지에 대한 아이의 시선은 혹독하다.
아홉 살인 내게는 필사적일 정도로 슈퍼 히어로가 필요했지만, 아버지는 내가 생각하는 슈퍼 히어로와는 거리가 멀고 또 멀었다. - p017
아버지는 변호사였지만 영화에서처럼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변호해주는 그런 변호사가 아니었다. 안드레이는 자신이 위기에 빠지는 그런 변호사였다. - p100
아이의 시선으로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팬데믹의 모습은 천진난만한 서술로, 어른들의 모습이 한 편의 코미디처럼 보이게 되기도 하고, 때론 더 마음이 아린 장면이 되기도 한다.
나는 닫힌 창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해보려 애썼다. 어린 내 생각으로는 비스킷을 마구 먹어대던 바이러스가 샌드맨으로 변한 듯했다. 길을 가다 무엇을 만나느냐에 따라 확장되거나 수축되는 스파이더맨의 적수 말이다. 그리고 바이러스가 세상을 삼켜버리기 위해 입을 딱 벌릴 때 그 소리가 나온다. 앰블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 p094
엄마로 말하자면 이제는 나와도 거리두기를 할 정도로 바이러스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 집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기만 해도 어찌나 불안해하는지, 그냥 목에 걸린 거라고 급히 말해야만 그제야 진정이 되었다. - p103
봉쇄 조치, 발코니에서의 박수와 연주, 온라인 수업 등 우리가 경험한 시간들이 오롯이 배경으로 녹아져 있고, 그 시간들은 머리로 이해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끄덕이게 되는 문장들로 서술된다. 「이태리 아파트먼트」 속 인물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기에.
탈출하고 싶다는 모두의 욕망은 점점 기약이 없어지는 기대 때문에 더 커져만 갔다. 자유로워질 시간은 기약이 없는 반면 움직일 공간은 확실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각자가 죄수처럼 자신의 공간 안에서만 움직였고 옆집 사람의 모습만 비쳐도 뒤로 한 발 물러나야 했다. - p126
봉쇄 조치는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이었으나 어른들은 그것이 길게 지속되지는 않으리라는 가정 하에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인 감정들을 소화시키는 법을 배웠다. 그러한 긴장감이 그들에게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불분명했다.
인간들은 마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 마음은 현재에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래에 대한 불안 사이를 오간다.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살아있는 그 순간을 사는 사람은 어린이, 사랑에 빠진 이들, 예술가들 뿐이다. -p127
마치 우리 모두가 실험 대상이 된 기분이었다. 몇 시간 동안 공기를 마시지 못하고 극한의 하루를 보내야 하는 생존 실험. 사람들은 집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으며 어떤 사람은 그마저도 못하고 거울속의 자신의 눈을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현자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잃어버린 가치를 재발견하라고 설교했지만 대부분은 그 설교에 공감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죄책감을 견뎌야 했으므로 서로 간의 피로만 더해졌다. - p155
전염병과 위기의 시기에 부모의 일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마스크 위에 가면을 쓰고, 자식들에게 불안을 드러내지 않고 미소를 짓는 게 부모의 할 일이다. 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번지는 두려움과 미사여구가 넘치는 희망으로부터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두려움을, 때로는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모순적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 p189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이의 시선은 조금씩 변해간다. 그 과정에는 주인공도, 주인공의 아버지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팬데믹으로 힘들었던 시기지만 오히려 서로의 민낯을 드러내고 이해할 수 있던 시간이 되었다. 잃은 것이 많지만 반면 얻은 것들도 있지 않냐는, 그런 것들을 소중하게 여겨보자는 작가의 메시지가 전해오는 듯 하다.
어느새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장애물로 느끼는 게 아니라 붙잡을 난간으로 생각했다. 내가 낭떠러지 같은 곳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이제 아버지가 내 곁에 머무는 진짜 이유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 p242
팬데믹과 싸운 상징적인 인물이라며 의료진에게 감사함을 표하면서도 막상 같은 공간에 머물자 '매일 병원에서 바이러스를 가져다줘서 고맙다' 라고 비야냥대는 이, 생활비를 벌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굶고 있던 이웃을 발견하고 돕는 이웃, 병상부족으로 기저질환을 제때에 치료받지 못하고 사망해야했던 이 등 「이태리 아파트먼트」 라는 공간에는 다양한 이들이 삶이 담긴다. 그곳에는 사랑이, 연민이, 배신이 모두 펼쳐진다.
영웅은 지옥에 떨어진다. 괴물들과 싸웠지만 돌아오는 길로 들어섰을 때 남은 이는 자신 뿐이다. 겉으로 보면 영웅은 전부 다 잃었다. 가족, 친구, 미래, 모험을 시작하기 전에 가졌던 것과 모험을 하며 얻은 것 모두. 그래서 우리는 영웅을 더욱 사랑한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끝난 게 아니라고, 혼자가 아니라고 그에게 속삭인다. 우리가 있다고, 우리는 여기까지 오면서 그가 배운 그 모든 것이라고. - p267
결국 소설 속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적응했다. '세상은 '현재' 안에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현재를 사는 동안 그 현재는 언제나 이전의 모든 현재들보다 훨씬 나빠보였다. 그렇지만 몇 년 뒤 사람들은 왜곡된 기억들을 떠올리며 그 시간을 그리워했다. ' (p299)
우리 또한 그럴 것이다. 책의 원제는 'C'era una volta adesso' 다. 구글번역을 돌려보면 '아주 오래전 그때는' 이다. 먼 이후의 날에 나는 지금의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힘든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렇기에 더욱 소중했던 어떤 날들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두련다. 책 속 마티아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