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2

‪#‎화해‬ ‪#‎돌‬


철조망 사이로 돌이 떨어졌다 
내가 돌을 피한 것이 아니라 돌이 나를 피했다


돌이 멈춰 선 자리로 걸어가 발바닥으로 밟았다
이리저리 굴려도 성한 곳 하나 없는 몸
이리저리 채였을 그것을 손바닥으로 쥐었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람과 파도를 만났다면 매끈했을 몸
산에서 태어나 여기까지 굴러 온 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갈고 닦고 품고 깎았던 

삼키고 씹고 숨겼던 


불에 달궈진 돌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를 보며
웃었다



같은 곳에 묻히기로 했다


던졌다
몇 발자국 못가고 멈췄다


걸었다
멈춘 그 지점을 향해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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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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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삼시세끼와 자산어보(한창훈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읽고)


‪#‎삼시세끼‬ ‪#‎자산어보‬

삼시세끼 어촌편을 즐겨 본다. 정선편을 몇 번 보다가 흥미를 잃었는데 어촌편은 시간가는줄 모르고 본다. 농촌과 어촌의 환경차이였을까. 이서진,김광규,택연의 케미와 유해진,차승원,손호준의 케미 차이 때문인것 같다.


유해진이 만재도 바다에서 고기를 낚아오면 차승원은 뚝딱 요리를 한다. 호준이는 맛있게 먹고 설거지를 한다. 놀래미,베오라치,거북손 뭐든 차줌마의 손을 거치면 맛깔난 요리가 된다. 같이 시청하던 아내의 감탄사가 쏟아지고 나면 눈빛은 나를 향한다. 무슨말을 하는지 안들어도 안다.


만재도에 삼시세끼가 있다면 거문도에는 저자 한창훈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십 수년 유배생활을 하면서 집필한 '자산어보'를 저자의 에피소드를 곁들여 감칠나게 풀어낸다. 낚싯대 몇 번 던져 본 적 없는 문외한인 나도 읽는데 전혀 부담이 없다. 풍부한 사진자료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부제가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다. 삼시세끼에서 유해진이 그토록 낚고 싶어하는 삼대장(참돔 감성돔 문어)도 나온다.


통영에서 먹은 성게 비빔밥이 생각난다. 날치처럼 물살을 가르며 뛰어 놀고 싶다.



**메모

- 확률에 대해서 생각하다 110쪽

4킬로그램 정도 되는 방어를 한마리 낚아왔다. 4물, 만조를 삽십 분 앞둔 오후 5시경, 작은 삼부도와 거문도 중간쯤에서 낚았다. 수심 35미터, 전갱이를 산 채로 꿰어 쓰는 방법을 썼다. 이 녀석은 3년 전 제주도 남서쪽 20킬로미터 지점에서 태어났다. 새끼 때는 수면에 뜬 모자반 줄기 아래에서 숨죽이며 살았다. 삼치한테 몇 번 먹힐 뻔한 경우가 있었으나 용케 살아남았다. 조금 더 커서는 저 북쪽 웅진반도 너머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으며 제법 방어 모양이 잡히고부터는 제주도를 수백 바퀴나 돌았고, 이어도 기지도 다섯 번이나 다녀왔으며 추자도, 여서도, 거문도를 여러 번 지나다녔다. 오늘도 백도 인근에서 멸치 떼를 따라 삼부도 쪽으로 왔으며 모두 다섯 마리의 멸치를 잡아먹고 벼랑처럼 생긴 여 근처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전갱이가 문득 저 위에서 내려왔다. 배는 그다지 고프지 않았지만 전갱이가 어디 가지도 않고 앞에서 빙빙 돌고 있기에 그만 콱 물었다.


- 홍합전 또한 별미이다. 시장에 가면 까놓은 홍합살이 있다. 씻고 물을 빼놓는다. 밀가루 입힌 다음 계란 옷 입힌다. 그 위에 튀김가루나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다. 튀긴다기보다는 지져낸다. 굴전 하는 것과 같다. 단 굴전은 조금 덜 익혀도 되지만 홍합전은 다 익혀야 한다. 홍합은 날로 먹으면 입이 아리다. 어차피 요리는 배합과 타이밍, 몇 번 하다보면 타이밍을 맞출 수 있다. 뜨거울 때 먹는 게 좋다. 잘되었다면, 어느 전보다도 맛이 뛰어나다. 말린 홍합으로는 맛이 떨어진다. 123쪽


- 날치
"새가 바다에서 나왔어요."
이녀석들은 툭하면 수면을 박차고 비상을 하는 버릇 탓에 예전 서양에서는 아죽 못된 놈으로 여겼다 한다. 어린 주제에 턱 밑에 수염이 달려 있어서, 태어남과 동시에 몹시도 버르장머리 없어지기 때문인데 그러기 때문에 적이 많아 늘 도망을 친다는 것이다. 물론 날치가 나는 이유는 무엇에 놀랐거나 포식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가장 멀리 갈 때는 3~400미터까지 날기도 한다. 멀리 날기 위해 소화 잘 되는 플랑크톤을 먹고 빨리 소화하고 빨리 싸는 형태로 진화되었다. 그래서 장이 매우 짧다.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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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읽기 공부법 - 책 한 권이 머릿속에 통째로 복사되는
야마구찌 마유 지음, 류두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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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읽은 공부법, ‘7번 읽기 공부법’(야마구치 마유)를 읽고






‘야마구치 마유’라는 일본 변호사의 책입니다. 동경대 입학에 일본 사법시험 합격, 일본 재무성 근무 등 그야말로 잘나가는 엘리트가 쓴 책이죠. 공부법, 독서법, 돈 버는 법과 관련된 책은 기본적으로 잘 팔립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지식 욕구와 부에 대한 욕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이 책을 살 마음은 없었고, 몇 번 서점 갈 때마다 술술 넘겨가며 보게 되었는데 어느새 다 읽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지 않은 것이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도움이 될 만한 내용도 있었지만 소장가치에 관한 제 나름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읽기를 통해 대부분의 지식을 빠른 시간 내에 흡수할 수 있었다고 밝힙니다. 자신이 출력형 인간이 아니라 입력형 인간에 가깝다며 7번 읽기를 통해 텍스트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책 전체에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말고 통독, 즉 훑어 읽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총 7번을 읽는 동안 1회독의 속도는 빠를수록 좋고 궁극적으로 하루에 7회독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럼 도대체 7번을 어떻게 읽어야 한다는 것인지 대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책의 표제 위주로 제목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훑어 읽기, 두 번째는 목차 외에 세밀한 항목까지 읽는데 이 단계서 줄거리가 들어옴, 세 번째 읽으면서 줄거리를 더욱 자세히 알게 됨, 네 번째는 책 속 키워드를 의식하며 읽기, 다섯 번째는 키워드 사이 설명문도 의식하면서 요지를 읽기, 여섯 번째는 아주 디테일한 것까지 읽기, 일곱 번째는 책이 머릿속에 정착되어 있으므로 골라 읽어도 무방하고 일곱 번째 이후로는 능동적, 비판적 읽으면 좋다고 합니다. 5회독 이후에는 핵심개념이나 문장을 써 나가면 읽으면 머릿속에 각인효과가 있어 병행을 추천합니다.







7번 읽는 방법에 대한 글을 읽은 후 제 나름의 실습을 해 보았습니다. 당시 읽고 있었던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권용섭)을 훑어 읽기로 한번 내용파악을 위해 한 번 읽었습니다. 느낀 점은 이 방법이 절대 모든 독서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대학입시와 고시공부처럼 많은 텍스트를 단기간에 암기, 이해하고 문제를 풀이하는 과정에서 7번 읽기법을 체득하고 단련했습니다. 사법시험 민사소송법 과목의 경우 교수 또는 강사의 두툼한 한 권의 기본서(이론, 기본사례포함)와 한 권의 사례집을 정리해서 학원의 커리큘럼을 따라가다 보면 약 7, 8회독을 하게 됩니다. 합격권에 있는 수험생이라면 갖추는 기본적인 공부량이 과목당 7회독 정도입니다. 





그러나 ‘엘런 튜링의 이미테이션 게임’이나 토마피게티의 ‘21세기 자본’ 저자가 쓴 ‘7번 읽기 공부법’ 같은 책을 꼭 7회독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오히려 단기간 7회독은 비효율적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학, 경제학, 문학, 철학에는 대학입시나 사법시험처럼 정답과 계량화된 점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처음에 정독하고 시간이 지나 독자의 지식과 경험이 쌓이고 가치관이 정립된 후 똑같은 텍스트를 읽는 것이 훨씬 깊은 독서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중고등학교때 읽은 삼국지와 30대에 읽은 삼국지의 한 줄 한줄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처럼요.







그래도 유용한 팁은 있어 모아보았습니다. 주로 입시에 관한 방법론입니다.


현대문학은 교과서 보다 수업시간 강의필기노트 반복읽기가 더 효과적이다

영어수험준비(토플, 토익)은 한 권 다독보다 은 다양한 문제 풀이가 효과적이다.

입시영어 단어공부는 100개에서 150개 영단어로 구성된 지문 읽으면서 중요 단어를 띄엄띄엄 적어가는 7번 쓰기가 효과적이다.

영어문법은 문제집 7회독을 추천한다. 문법시험은 디테일을 요구하는데 문제집을 풀면 정교해진다.

문제집풀이의 경우 다섯 번째까진 오답 표시하지말고 해설의 옳은 부분만 읽어라. 오답표시는 5회독 이후해도 늦지 않다.

수학도 7번 풀기를 권한다. 틀려도 옳은 풀이만 계속 읽어라.








이 책을 읽다가 얻은 소득도 있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누가 아는 척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예전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후배였습니다. 얼마 전 제가 근무하는 법원 앞의 한 법무법인 분사무소에서 근무하게 되어 인천에서 부천으로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몇 년 만에 만났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이 책이 아니었다면 다시 만나지 못했을 인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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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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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야 하나? ‘칼의 노래(김훈)를 읽고’






칼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한국일보 신문기자 출신 김 훈 작가의 대표작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참고가 된 소설이기도 합니다. 2001년 동인문학상 수상작 선정의 말처럼 ‘오랫동안 반복의 늪 속을 부유하고 있는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입니다. 숨이 넘어갈 듯 책장을 넘겼습니다.





 이순신이 정유재란 이후 백의종군 할 때부터 노량해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립니다. ‘칼의 노래’도 영화 ‘명량’도 이순신의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합니다. 수군이 비록 외롭다 하나 신에게는 열두 척의 전선이 있다는 장수의 말은 칼의 노래의 도입부였습니다.





 이순신의 상대는 선조입니다. 임금이 보낸 면사첩은 항상 이순신의 방에 걸려 있습니다.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임금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에 대해 겨우 죽음을 면해주겠다는 것.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사면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이라는 링에서 둘은 칼을 들고 싸웁니다. 선조의 칼은 공격용이지만 이순신의 칼은 방어용입니다.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면 그를 살릴 수 없기에 그를 풀어줍니다. 





이순신은 적을 죽이지만 적은 이순신을 살립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적이 아닌 선조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선조와 문신출신 권율의 명이 이순신을 죽였습니다.





 이순신은 분명 고민했을 것입니다. 장수에게, 한 인간에게 왕이란 무엇이며 국가란 무엇인가. 권력자의 독단적 결정과 명령이 내려졌고,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때 개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비단 이순신만의 고민은 아닐 것입니다. 다수의 가치와 나의 양심이 충돌했을 때 집단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가 소신대로 행동해야 하는가. 내 가치관에 따라 행동했을 때 부하와 가족이 해를 입을 때도 마찬가지인가. 지나간 모든 끼니는 어김없이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일 경우에는 어떡해야 하는가.






 영화 ‘명량’에서 볼 수 없었던 인간 이순신의 모습이 좋았습니다. 아들 면이 죽었을 때 남몰래 소금창고 안에서 숨죽여 울고, 하룻밤을 보낸 여인 여진의 주검을 보고 슬퍼하는 애끓는 심정이 좋았습니다. 관객 1800만명을 동원한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보려고 할수록 이순신은 보이지 않았는데, 소설에서는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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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마음
함민복 지음, 추덕영 그림 / 대상미디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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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도 희망이다 (함민복의 산문집, '미안한 마음'을 읽고)

‪#‎함민복‬ ‪#‎미안한마음‬ ‪#‎통증‬

1. 강화도에 사는 함민복 시인의 산문집 '미안한 마음'의 한 장(章)의 제목이자, 그 안에 수록된 에피소드에 나오는 말을 메모해 두었다.


- 1998년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고 문학담당 기자와 술을 먹었다. IMF 시대라 상금이 없어졌고 하여 동으로 된 조각품을 부상으로 주었는데, '쌀로 한 서 말 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내가 중얼거린 말이 기사화되었었다. 그 기사를 보고 쌀 세 가마니 살 수 있는 돈을 보내주셨던 신농백초한의원 님들 덕분에 보일러에 기름 두 드럼 넣고 한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던 일이 떠오른다. 
세상에 고마워할 일이 이렇게 많구나. 갑자기 찾아온 통증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을 되새겨주며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마저 일깨워주니 통증도 희망이다. 78쪽



'통증도 희망이다'라는 말에서 애달프고 미안한 마음은 '도'라는 조사에 숨어 있다. '통증은 희망이다'라고 했다면 단정적으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꼰대의 말처럼 들리겠지만, '은'대신 '도'라는 조사는 맘을 애잔하게 녹였다. 통증은 피할 수 없기에 받아들여야 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통증에서라도 희망을 보고픈 마음, 너무 아프면 통증조차 없으니까 난 아직 덜 아파 다행이라는 자조와 안심이 조금은 베여 있다.



2. 통증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한다. 아픈데도 안아픈척 웃어도 사람들은 다 안다. 아프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다가와 진심이든 겉치레든 위로의 말을 건네기라도 하지만 웃는 사람에게는 지켜보는 사람도 어찌할바를 모른다.

친한 동기가 내년 4월 16일에 안동에서 결혼을 한다고 말했다.

"어, 그날 세월호 침몰한 날인데?"
"뭐야~, 왜 그런말을 해, 어쩐지 나도 날짜가 익숙하더라."
"결혼식엔 꼭 갈게 그래두"

농담으로 한 말인데, 괜한 말을 했나 맘에 걸린다. 통증없는 양심보다는 불치병에 걸린 양심을 가지고 흰 눈 덮인 산길의 발자국 따라 발맘발맘 걸어가고 싶다.




*** 흔들린다(12-13쪽, 전문) 


집에 그늘이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는

익선이 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이직하는 일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 뱃길은 아무리 다녀도 다져지지 않습니다. 굳은살 하나 없는 말랑말랑한 생살로 된 길입니다. 먼지가 나지 않는 길입니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물고기가 다니는 길을 쫓아다니는 길이니 물고기가 만들어준 길이기도 합니다. 39쪽



- 1998년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고 문학담당 기자와 술을 먹었다. IMF 시대라 상금이 없어졌고 하여 동으로 된 조각품을 부상으로 주었는데, '쌀로 한 서 말 주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내가 중얼거린 말이 기사화되었었다. 그 기사를 보고 쌀 세 가마니 살 수 있는 돈을 보내주셨던 신농백초한의원 님들 덕분에 보일러에 기름 두 드럼 넣고 한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던 일이 떠오른다. 

 세상에 고마워할 일이 이렇게 많구나. 갑자기 찾아온 통증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을 되새겨주며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마저 일깨워주니 통증도 희망이다. 78쪽


- 소스라치다(91쪽, 전문)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 생명들



- 전원마을, 푸른마을, 강변마을...... 아파트 단지 이름들은 대부분 예쁘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이름들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알 수 있다. 전원마을은 전원을, 푸른마을은 푸름을, 강변마을은 강변의 풍경을 해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해안도로를 지나며 만나는 간판들도 폭력적이기는 매한가지다. 노을횟집은 노을을, 갯벌펜션은 갯벌을, 등대편의점은 등대를 대개 가리고 있다. 풍경에 폭력을 가하면서 그 폭력성을 당당히 내세우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간판의 폭력성은 자연과 맞닿아 있는 곳에서 더 확연히 드러나지만 도회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도회지의 간판들은 폭력서을 넘어 잔인함까지 드러낸다. 생오리 철판구이, 돼지 애기집고, 새싹 비빔밥, 불타는 닭갈비... 등,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너무 잔인한 음식점 이름이 우리 주위에는 수두룩하다. (115쪽)


- 김포평야(122-123쪽, 전문)


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


논과 밭을 일군다는 일은

가능한 한 땅에 수평을 잡는 일

바다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수평에서의 삶

수천 년 걸쳐 만들어진 농토에


수직의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농촌을 모방하는 도시의 문명

엘리베이터와 계단 통로, 그 수직의 골목


잊었는가 바벨탑

보라 한 건물을 쌓아 올린 언어의 벽돌


만리장성, 파리크라상, 던킨 도너츠

차이코프스키, 노바다야끼...

기와 불사하듯 세계 도처에서 쌓아 올리고 있는

이진법 언어로 이룩된

컴퓨터 데스크


이제 농촌이 도시를 베끼리라

아파트 논이 생겨

엘리베이터 타고 고층 논을 오르내리게 되리라

바다가 층층이 나누어지리라

그렇게 수평이 수직을 다 모방하게 되는 날

온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고 말리라


- 꽃은 거울이다. 들여다보는 이를 비춰주지 않는 거울이다. 들여다보는 이가 다 꽃으로 보이는 이상한 거울이다. 꽃향기는 끌어당긴다. 꽃향기에 밀쳐진 경험 한 번도 없다. 꽃은 주위를 가볍게 들어 올려 준다. 꽃 앞에 서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마음은 꽃에 여닫히는 자동문이다. 꽃잎을 만져보며 사람들은 말한다. '아. 빛깔도 참 곱다.' 빛깔을 만질 수 있다니, 빛깔을 만질 수도 있게 해주다니. 사람들을 다 시인으로  만들어주는 꽃은 봄의 심지다. 157쪽


- (n형에게 편지글 중) 173-174쪽


 지난 번 어때 다친 일 때문에 고향을 못 가신 것은 아닌지요. 형도 저처럼 혼자 살아 파스 붙이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텐데. 어깨가 결릴 때 파스를 방바닥에 놓고 손거울 보며 낙법하지 마세요. 한 장 남은 파스 엉뚱한 데 붙어버리면 슬퍼지니까요. 파스를 양면테이프로 벽에 붙여놓고 등짝을 조정해서 붙여보세요. 좀 나을 겁니다. 빨리 찾아뵙고 파스라도 한 장 붙여 드려야 하는데, 사는 게 이리 맘과 다릅니다. (중략)


 날씨가 추우니 곧 봄이 오겠지요. 정릉 계곡에 벚꽃 흩날리던 봄이 생각나는군요. 형 루이 봄에 한번 만나요. 제가 술 한잔 살게요. 병술년이라고 병술 먹지 말고 기분 좋게 꽃술 몇 잔 들어요. 이곳 섬에서 숭어회도 좀 떠갈게요. 형도 열심히 살라고 제 등짝 한번 탁, 쳐주세요. 형의 '손 파스'만 한 힘이 어디 또 있겠어요.


꽃피는 봄을 기다리며 동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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