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보다 크리스마스 이브

#크리스마스




입학식보다 입학식 전날에
졸업생보다 재학생이
토요일 오후보다 금요일 저녁이
먹을 때보다 찍을 때가
내용보다 책표지가 맘에 들어
책을 읽을 때보다 살 때가
안아줄때보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
죽어서 가는 곳보다 죽기 전 이곳이
오늘보다 어제가
민주주의보다 독재가




좋았다?




크리스마스보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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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시선 303
강성은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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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헤라자데, 강성은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중에서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천년 동안 짠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툭 끊어
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야기 지난밤에 본 영화
같고 어제 꿈에서 본 장면 같고 어제 낮에 걸었던 바람 부
는 길 같은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당신 피부처럼 맑고 당
신 눈동자처럼 검고 당신 입술처럼 붉고 당신처럼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야기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
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
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
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당신이 마지막으
로 했던 이야기 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
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끝이 없는 이야기 흔
들리는 구름처럼 불안하고 물고기의 피처럼 뜨겁고 애인
의 수염처럼 아름답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정신도 없고 실험이란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
험적인 이야기 어느날 문득 무언가 떠올린 당신이 노트에
적어내려가는 이야기 어젯밤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인 줄
도 모르고 내일 밤 내가 당신 귀에 속삭일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 시집 첫 번째에 수록된 시다. 책으로 말하면 서문에 해당하는데, 강성은의 첫 시집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형식적으로는 연갈이, 행갈이 없이 한 덩어리로 쭉 써내려가는 시들이 많다. 내용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어둠과 슬픔인데 그것을 동화적 모티프를 차용하여 풀어내고 있다.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정신도 없고 실험이란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험적인 이야기” 같은 표현은 역설적 언어유희임과 동시에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면서 빚어내는 우리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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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시선 357
함민복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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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자 (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중)

#줄자 #함민복

줄자는 감겨 제 몸을 재고 있다
자신을 확신해야 무엇을 계측할 수 있다는 듯
얇은 몸 규칙적인 무늬
줄자의 중심엔 끝이 감겨 있다
줄자는 끝을 태아처럼 품고 있다



수도자의 뇌를 스스륵 당겨본다



: 시집 한 권을 읽으면 기억에 남는 시 한 두 편이 있다. 사물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화려한 수사(修辭)를 보면 기가 질려 ‘이래서 시인은 다르구나’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반대로 저녁상에 밥 한 공기와 김치 하나만 있어도 따뜻한 저녁처럼 느껴지는 시도 있다. 함민복의 시는 가난하다. 가난에 울고 가난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개천에서 용나는’ 스토리가 아니다. 함민복은 ‘가난팔이’시인이 아니다. 가난은 일상이고 사물이고 현실이고 실존이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라는 어느 시집 제목처럼 가난은 고향이다.


사람을 가방끈의 길이, 돈의 높이, 나이테의 둘레로 판단하며 줄자를 들이대는 세상에서 줄자를 ‘태아를 품은’ 어머니, “수도자의 뇌”라고 환대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발견의 차원을 넘어 발명이라 부르고 싶다. 뇌 속의 해마 같은 “얇은 몸”을 칭칭 감고 고뇌하는 수도자의 삶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그런 가난이라면 가난하고 싶다. 가난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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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 시인선 437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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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말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 중)

#수학자의아침 #김소연 #반대말



「반대말」





  컵처럼 사는 법에 골몰한다

  컵에게는 반대말이 없다 설거지를 하고서

  잠시 엎어 놓을 뿐






  모자의 반대말은 알 필요가 없다

  모자를 쓰고 외출을 할 뿐이다

  모자를 쓰고 집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게 가끔 궁금해지긴 하겠지만






  눈동자 손길 입술, 너를 표현하는 너의 것에도 반

대말은 없다

  마침내 끝끝내 비로소, 이다지 애처로운 부사들에

도 반대말은 없다






  나를 어른이라고 부를 때

  나를 여자라고 부를 때

  반대말이 시소처럼 한쪽에서 솟구치려는 걸

  지그시 눌러주어야만 한다

  나를 시인이라고 부를 때에

  나의 반대말들은 무용해진다





  도시에서 

  변두리의 반대쪽을 알아채기 시작했을 때

  지구에서 변두리가 어딘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뱅글뱅글 지구의를 돌리며







  

  이제 컵처럼 사는 법이 

  거의 완성되어 간다







  우편함이 반대말을 떨어뜨린다

  나는 컵을 떨어뜨린다

  완성의 반대말이 깨어진다








  시집『수학자의 아침』지배하는 정서는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슬픈 현실에 체념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의 인식을 멈추지 않는다. 반대말이 없는 “컵처럼, 모자처럼, 눈동자 손길 입술”처럼 완성된 삶을 꿈꾼다. “어른, 여자, 변두리”라는 상극하는 개념을 초월해 독자적인 자존감을 유지하고자 한다. 컵을 떨어뜨려 완성의 반대말을 산산히 깨버린다. 나는 거의 ‘완생(完生)’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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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발바닥 되던 날, 보라카이(3)

‪#‎보라카이‬ ‪#‎여행‬

1. 바닷물이 몸을 맡기면 파도와 물의 흐름에 따라 몸이 떠내려 간다. 자연 물침대이자 무료마사지숍이다. 어제는 무료마사지를 충분히 받았기에 D-MALL 초입에 있는 마사지숍을 갔다. FOOT SPA를 예약했는데, 1인당 650페소(한화 12,000원 정도)를 지불했다. 기댈 수 있는 의자에 앉았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가 거품나는 기계로 발을 씻겨 준다. 어릴 때 엄마나 아빠가 목욕탕에서 내 발바닥을 씻겨 주었겠지만 성인이 되어 내 발을 남에 맡긴 건 처음이었다. 
처음치곤 기분이 묘하면서도 괜찮았다 아직까진.


2. 아저씨가 입을 꽉 다물고 구두솔 같은 도구를 내 발에 갖다대었다. 정말 열심히 내 발을 긁었다. 책상 위 연필 낙서를 지운 후에 나온 지우개똥이 수북이 쌓이듯 몇 년 묵은 각질이 쌓였다. 이 아저씨는 분명 한국에서 군대생활을 했다면 군화를 잘 닦았을 것 같다. 나중에 물어보니 이 가게에서만 10년을 일했다고 한다. 남자라 그런지 힘도 좋고 연륜이 느껴졌다. 간지럽기도, 아프기도, 짜릿하기도, 오그라들기도 하는 묘한 기분, 엄마가 애기도 빨간 '다라이'(다라이라고 해야 그 느낌이 산다)에 물 받아서 내 발을 씻겨주었던 그 때의 모습의 재현이라고 할까. 내 발바닥은 아기 발바닥이 되었다. 스크럽이 끝나고 추가비용을 내고 발사지를 받았다. 아픈데 좋았다. 마사지 하는 부분이 몸 어디인지 물었다. '신장' '눈' '방광' 한국말로 또렷이 답해주는 친절한 아저씨 덕분에 1시간 반동안 즐거웠다.


3. 오후에는 바다로 '호핑투어'를 나갔다. 스쿠버 다이빙보다는 간소하게 물안경에 호스만 달린 장비를 착용하고 물 속에서 열대어를 보는 체험, 호스가 연결된 부분을 잘못 문 탓인지 바닷물을 왈칵 들어와 삼켰다. 내 식도가 소금에 절여지는 건 아닌지.....


4. 저녁엔 또 한국인이 운영하는 마사지, 해변가 펍에서 맥주 한잔. 보라카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아침 5시에 일어나 서둘러 섬을 나왔다. 섬에 오던날 어둠이 감추었던 시골 풍경들과 7시를 갓 넘긴 시각에 등교를 시작하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보며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여행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여행갈 준비를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일상에서 여행을 꿈꾸며 다시 여행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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