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 파라다이스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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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에서 우리들의 천국으로

 


1. 나는 법원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다. 현재는 개인회생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채무자가 재산과 소득을 감안한 변제계획안을 내면 법원이 심사해서 인가결정을 한다. 채무자가 계획대로 3년을 성실하게 수행하면 면책을 받는다. 투 파라다이스 1(원제: To Paradise, 이하『파라다이스』, 이후 페이지만 표시)을 읽고 수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채무자들의 목소리와 보이지 않는 얼굴을 생각했다. 주식이나 코인 투자 실패, 카드 빚 등 회생신청 사유도 제각각인데, 돈을 갚아나가는 과정에서 실직하거나 건강이 나빠져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폐지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들도 지난한 삶을 견디며 면책 이후의 낙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2. 제목에서 시작하자. 낙원, 천국으로 번역하는 paradise는 정원(garden)을 뜻하는 원시 이란어 paridayjah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에덴동산이 연상된다. ‘낙원을 향하여’ 걸음을 내딛는 사람에게 지금 발 디딘 여기는 무엇일까. 지옥인가, 지옥은 아니라도 꿈꾸던 이상향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파라다이스』에는 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1부(워싱턴 스퀘어)는 1893-94년의 자유주 뉴욕을 배경으로, 제2부(리포-와오-나헬레)는 1993년-94년 뉴욕과 하와이가 무대다. 개별적인 두 작품이지만 이란성 쌍둥이처럼 같은 이름이 여럿 등장하고(데이비드, 찰스, 에드워드 등) 주제 의식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제1부「워싱턴 스퀘어」를 보자. 19세기 말 북 아메리카는 자유주, 식민주, 미국, 서부 등으로 나뉘었다. 데이비드 빙엄은 동성애가 허용되는 자유주 뉴욕에 사는 1866년생 남성이다. 빙엄 가(家)의 장남으로 조부 너대니얼 빙엄과 함께 워싱턴 스퀘어라는 저택에 사는데 다섯 살 때 부모가 죽어 조부 손에서 줄곧 자랐다. 고아원의 미술담당 교사로 일하다가 알게 된 음악교사 에드워드 비숍에게 반한 호모 섹슈얼이다. 데이비드가 성인이 된 후 사랑과 결혼의 문제로 관계 맺은 결정적 인물은 에드워드 외에 찰스 그리피스가 있다. 찰스 쪽이 중매결혼, 이성, 아폴론, “빙엄 브러더스의 문장(紋章), 세르바투르 프로미숨(Servatur Promissum), 지킨 약속이라는 문구”(28쪽)라면 에드워드는 자유연애, 정열, 디오니소스, 불확실한 미래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에드워드는 데이비드의 유일한 뮤즈다. 스물셋 에드워드는 식민지 출신으로 “다른 곳, 다른 존재에서 왔고”(103쪽) 신분 계급 차이도 분명하다. 에드워드는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핑계로 휴가를 내고 잠적해 버리고 데이비드는 노심초사하며 그를 기다린다.

 

- 1894년 3월 17일 보고서 중

쿡 남매는 함께 두둑한 돈을 모았습니다. 그 돈에다가 추정컨대 에드워드가 외대고모에게 훔친 돈과 가엾은 D씨 부모로부터 받은 돈을 합쳐서, 그들은 서부에서 실크 직물 사업을 시작할 작정입니다. (중략) 필요한 것은 농장을 시작해서 처음 몇 년을 버틸 수 있게 해 줄 마지막 한탕이었죠. 바로 그때인 올해 1월, 에드워드 비숍이 빙엄 씨의 손자를 만난 겁니다. (231쪽)

 

조부에게 도착한 에드워드에 실체에 관한 보고서. 에드워드는 데이비드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듯하다. 동성애가 처벌받는 서부에서 사업을 벌일 작정이다. 다시 돌아온 에드워드의 변명은 “알고 보니 거짓은 아니었다, 적어도 완전히는.” (91쪽) 데이비드는 자유주를 떠나 에드워드와 함께 서부의 낙원을 향하여 떠난다.

 

에드워드는 데이비드의 연인이자 사기꾼으로 의심되는 인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탈출할 수 없는 억압과 권태로 가득 찬 현실에서 데이비드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이자 그림자라고 생각한다. 가부장(patriarchy)의 지붕 아래서 조부의 바람대로 찰스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면 외적으로는 안정적인 삶을 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현실에 대한 영원한 굴복이다. 벽에 있는 얼룩을 종일 망연히 바라보며 죽을 때까지 가부장적 남성성의 기준에 이르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억압된 분노와 무기력은 두려움을 완벽하게 감추는 은신처이기 때문이다. 퀴어 소설의 외피를 취하지만 어쩌면 이 소설은 가부장적 남성성의 억압이라는 보편적 주제에 중심을 둔 것 같다. 데이비드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워하는 대상을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찰스 그리피스를 선택할 수 없다. 손톱을 바짝 깎고 신발 끈을 질끈 묶고 문을 열어야 한다. 도드라진 현실의 요철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을 지라도 달려 나가야 한다. 나는 데이비드의 선택을 지지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333쪽)이므로, 설사 실패하더라도 꿈에라도 그에게 사랑이 놀러오길 바라며.

 


3. 제2부 「리포-와오-나헬레」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1993년 경 뉴욕이 배경이다. 흥미롭게 제1부에 나왔던 데이비드 빙엄, 찰스 그리피스, 에드워드 비숍 등이 다시 등장한다. 물론 이름만 같고 다른 캐릭터다. 찰스는 오십대 중반 파트너 변호사로, 데이비드는 스물다섯의 법률 보조원으로 둘은 연인관계다. 데이비드는 하와이 오아후 섬의 호놀룰루 출신으로 ‘카위카’로 불린다. 하와이에는 할머니와 아버지 ‘위카’가 여전히 산다. 제2부는 다시 #1과 #2로 나뉘는데, #1에서는 찰스와 데이비드의 관계를 중심으로 #2에서는 아버지 ‘위카’가 아들 ‘카위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1부의 가부장이 너데니얼 빙엄이라면 2부에서는 그 역할을 데이비드의 할머니가 맡았다. 다만 낙원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이는 데이비드(‘카위카’)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위카’다. 발작증세, 시력 감퇴 등을 앓는 ‘위카’는 요양원에서 유폐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2에서 하와이 왕족인 ‘위카 빙엄’이 동성 연인 에드워드와 “자신의 쓸모라는 판타지”(488쪽)인 ‘리포-와오-나헬레’(Lipo wao nahele)라는 사실상 버려진 땅에서 낙원을 건설하려는 노력이 묘사된다. 또한 ‘위카’와 데이비드의 생모인 앨리스와의 만남과 이별과정, 그로 인한 ‘위카’의 발작, 데이비드가 유년기를 지나 결국 아버지 ‘위카’를 떠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2부가 제1부와 다른 점은 죽음의 그림자가 훨씬 짙다는 것이다. 찰스는 죽음이 예정된 병이 있고(아마도 에이즈), 그의 옛 애인 피터는 다발성 골수증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다. 찰스의 친구들도 상당수 병을 앓거나 죽음에 이르렀다. 요양소에 있는 ‘위카’ 또한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고 착란 증세도 보인다. 또한 하와이의 독립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국가와 개인의 관계 설정을 암시하는 정치적 사안들이 소설 속에 짙게 녹아 있다.

 

데이비드(‘카위카’)는 장애가 있는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혼돈스러운 현실의 벽에 저항하거나 부딪혀보지 않고 침묵을 택한 것에 대해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낙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온 이성이 가슴에서 발까지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분노를 대면하는 대신 거기서 숨으려고 했다. 하지만 숨는다고 일어나는 일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숨어서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결국 발견되는 것뿐이다.” (334쪽) 나는 ‘카위카’의 심정을 이해한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마음을 부끄러워하면, 결국 부끄러움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는가.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부끄러운 자가 아니다.

 

 

4. 당신들의 천국에서 우리들의 천국으로

 

- 하지만 그가 떠나온 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건 다른 사람의 천국이지, 그의 천국은 아니었다. 그의 천국은 다른 곳에 있지만, 그의 눈앞에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은 그가 찾아야 한다. 사실 그게 바로 그가 평생 배웠던 바, 희망하라고 배운 바 아닌가? 이제 찾을 때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무거운 가방을 손에 든 채 이곳에 잠시 서 있다가 심호흡을 한 뒤 첫발을 내디딜 것이다. 그의 첫 발걸음을. 새로운 인생을 향하여- 낙원을 향하여. (267쪽, 밑줄은 인용자)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어, 늦지 않았어, 결국 늦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걷기 시작할 거야-어머니 집이 아니라, 리포-와오-나헬레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네가 가 있길 바라는 그곳을 향해서. 난 멈추지 않을 테고, 쉴 필요도 없을 거야. 거기, 네가 있는 곳에 다다를 때까지, 낙원을 향하여. (530쪽)

 

제1부, 제2부의 끝부분이다. 데이비드와 ‘위카’의 낙원을 향한 다짐으로 마무리되는 장면이다. 이청준의 소설『당신들의 천국』이 생각났다. 소록도 원생들을 동원해 바다 간척사업을 해서 나병 환자들의 낙토를 만들어주겠다는 조백헌 원장의 약속에는 원생들의 자유의지와 선택이 빠져있다. “선택과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필생의 천국이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지옥일 뿐”이다. 그 목적이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그건 ‘당신들의 천국’이지 ‘우리들의 천국’은 아니다.

 

그렇다면 데이비드와 ‘위카’는 낙원에 도착할 수 있을까. 에드워드의 사기적인 유혹과 정신병을 앓는 ‘위카’의 신체적 능력을 볼 때 성공을 장담하기는 힘들다. 무모하고 무용한 결정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한다. 스스로 선택하고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낙원도 마찬가지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의 바람과 욕구대로 행동하고 만족을 얻는 삶이다. 결론적으로 옳지 않았다고 해도, 애초에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결과에 관계없이 바람직한 것이다.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누리는 삶만이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무덤을 열고 우리들의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족) 제2부의 시간적 배경인 1994년에는 장동건 주연의『마지막 승부』,『우리들의 천국』과 이병헌 주연의 『내일은 사랑』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마지막 승부』의 OST였던 장현철의「걸어서 하늘까지」를 흥얼거리며 이 글을 썼다.

 

“어둔 미로 속을 헤매던 과거에는/ 내가 살아가는 그 이유 몰랐지만/ 하루를 살 수 있었던 건/ 네가 있다는 그것/ 너에게 모두 주고 싶어/ 너를 위하여/ 마지막 그 하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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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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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벽 통과하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하도시와 벽, 이후 페이지만 표시)을 다 읽고 나니 백석의 시가 생각났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중략)//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백석,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현실 세계에서 열일곱 살 소년인 는 열여섯 살 소녀인 가 말하는 것을 받아 적는다. “네가 도시의 큰 틀을 말해주면 내가 그에 대해 실제적인 질문을 하고 네가 대답해서 보충하는 식”(21)이다. 둘의 이야기로 만든 비밀 도시에서 와 재회하지만 를 기억하지 못한다. 도시의 진짜라면 실제 세계의 는 본체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도서관에서 꿈 읽는 이로서 의 도움을 받아 서고에 보관된 오래된 꿈을 읽어나간다. “나 말고 도서관을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도서관은 언제나 나와 너만의 것이다.”(74)

 

  나는 이 소설의 같은 그녀를 생각한다.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지만 학교가 엇갈리면서 그녀와 멀어졌다. 전해오는 소식으로 그녀가 국립 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듣긴 했었다.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몇 가지 말했다. 구글링에 능숙한 한 친구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 대형서점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때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그 서점에 전화를 걸어 그녀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서점 직원은 그녀의 동의 없이 함부로 개인정보를 알려줄 수가 없으므로 그녀의 의사를 먼저 물어보겠다고 말했다. 결국 그녀와 연락이 닿지 못했다. 거기까지가 그녀와의 인연인가보다 생각했다.도시와 벽에도 ’, ‘카페 여주인의 로맨스가 등장한다.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가 공기처럼 퍼져 있고 중력같이 작용한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통속적인 연애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도시 주변에는 백석의 시에 등장할 것 같은 짐승들이 산다. “날카로운 외뿔이 달린 과묵한 황금색 짐승들은 아침이면 정연히 줄지어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가 밤이 되면 벽 바깥의 서식지에서 몸을 맞대고 잠든다.” (130) 도시 안팎으로 출입이 가능한 유일한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뿔피리를 불면 짐승들은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가 저녁에는 바깥으로 돌아간다. 먹이를 찾아 헤매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은 짐승의 사체 위에 한없이 쌓이는 눈, 유채기름을 뿌리고 사체를 태우는 연기가 잔상으로 남았다. “겨울밤이 밝으면 그들 중 몇 마리가 서식지 바닥에 하얀 눈옷을 덮어쓰고 드러누워 있었다. 누군가의 죄를 떠안고 대신 죽어간 이들처럼.” (426)

 

  소설의 머릿돌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시작하자.

  높이가 8미터에 이르는 은 빈틈없이 견고하고 완벽하다. 그러나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벽의 특성과는 별개로 벽의 실존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꿈, 본체와 그림자, 삶과 죽음, 의식과 마음 같은 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 나가는 과정이 이 소설을 읽는 기쁨 중 하나다.

 

  나는 이 작품이 구조적, 내용적으로 이인삼각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이인삼각(二人三脚) 사전적 의미는 두 사람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맞닿은 쪽의 발목을 묶고 세 발처럼 하여 함께 뛰는 경기. (육달 월)(물리칠 각)이 합쳐진 글자인데, ()(가다)와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을 본뜬 병부 절()이 합쳐진 글자로 의지하다는 뜻도 파생된다.

 

  구조적으로 소설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현실 세계와 가상의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 챕터씩 번갈아 가며 동시 진행한다. 2부는 실제 세계의 산골 마을 도서관을 중심으로, 3부에서는 실제와 가상이 오고간다. ‘, 도시와 도시 바깥이, 현실과 비현실이, 현실과 꿈이, 삶과 죽음이, 의식과 마음이 각각 한 발 씩 내밀어 발목을 묶고 어깨를 겯은 채 달린다. 묶인 발목 같은 은 통제, 억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인삼각의 중심축으로서 스토리에 숨을 불어넣고 이야기를 추동하는 힘이다.

 

  벽은 무엇일까. 절대적 타자로서 아버지같은 존재일까.

  2부의 현실 세계에서 산골 마을 도서관장으로 일하는 는 한 소년을 알게 된다. 전임 관장이자 그림자 없는 인간(유령)고다쓰의 무덤가에서 내뱉는 의 독백을 소년이 엿듣는다. 소년은 비범한 능력을 발휘해 가 묘사한 도시를 지도에 재현해낸다. 늘 옐로 서브마린이 그려진 파카를 입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소년은 에게 도시의 벽은 역병을 막기 위해지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역병은 아니고 비유로서의 역병”, “영혼이 앓는 역병”, “끝나지 않는 역병”(527, 528)을 뜻한다는 것이다. 한편 도시로 증발해 버린 소년을 찾는 그의 형이 말하듯 벽은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의식”(651), 빙산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 가라앉아 감춰져있는 독자적인 의지와 생명력을 지닌 마음의 상태로 보는 해석도 있다. 이렇게 다층적인 의미를 가진 벽이 존재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684)

 

  나는 비유로서의 역병이라는 문구를 실제의 역병이라는 의미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으로 받아들였다. 하루키는 동명(同名)의 중편(1985)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95)세계의 끝부분을 확장해도시와 벽을 완성했다. 변화무쌍한 코로나19라는 벽에 둘러싸인 2021, 저자는 집필 중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느낀 내면의 불안과 고뇌가 이 소설에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자를 떼어내고 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코로나19 이전의 삶을 한동안 잊었던 우리처럼 집합적 기억을 상실한 것 같다. “지리에 대한 수평적 호기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수직적 호기심도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격리되었다. 페스트, 메르스, 코로나와의 전쟁은 인간의 육체 뿐 아니라 마음도 찢어발긴다. 일본의 전쟁 역사인 노몬한 사건(1939년 일본 만주국과 몽골의 영토전쟁)’에 대해 다룬태엽감은 새 연대기이래 하루키는 집합적 기억인 역사에 대한 언급을 꾸준히 해왔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일본정부와 일본 국민의 자기책임회피, 역사왜곡을 일삼는 일본 우익, 중국의 홍콩 민주화 요구 탄압, 유럽의 배타적인 난민정책 등을 강도 높게 비판해왔다. 하루키는 대중문학 작가일 뿐이고 노벨상을 의식하고 작품을 쓴다는 비난은 지나치다.

 

  그렇다면 변화무쌍한 벽 앞에 선 우리는 어떡해야 하나. 1) 젤리처럼 물렁물렁한 벽이라고 믿고 벽을 정면 돌파하기 2) 토끼처럼 굴을 파서 벽 밑으로 지나가기 3) 새처럼 날아올라 벽을 뛰어넘기. 어느 것도 만만치 않다. 의식의 벽에 부딪쳤을 때 이인삼각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 핸디캡이 있을 때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벽이 우리를 통과하게 하면 된다. 벽을 옮기자. 궁극적으로 우리가 벽이 되자. 술래를 피해 옷장에 숨은 아이처럼 벽속에서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짜잔, 하고 벽에 문을 내자.

 

  ‘과 더불어 내게 흥미로운 소재는 그림자도서관이었다.

그림자는 본체의 부속물인데, 인간이 가진 부정적인 감정, 어두운 생각과 마음을 상징하한다고 생각한다. “머리 위에 접시를 얹고 있을 땐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편이 좋다는 문지기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림자를 데리고 도시에 살 수 없으므로 그림자를 떼어내야 한다는 취지인데, 접시는 그림자고 하늘은 도시를 뜻하는 것일까. 아델베르트 폰 사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떠오른다. 그림자를 팔고 금화가 쏟아지는 자루를 넘겨받은 남자 페터 슐레밀은 그림자가 없으면 빛도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그림자를 팔고 빛을 잃었다. 그림자가 없으면 빛도 없다. 그림자는 빛의 존재증거이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혹은 국가)는 늘 그림자를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를 마주볼 수 있는 용기와 인지적 공감능력을 길러야 본체를 잃지 않는다.

 

  도시 속 짐승과 사물들은 그림자가 있는데 오직 인간만 그림자가 없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그림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도시 속에 갇힘으로써 잃어버린 인간 고유한 특성일까. 이를테면 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이죠.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 연민······ 그리고 꿈, 사랑”(178)같은.

 

  그림자는 도시와 바깥의 중간지점에 산다. 도시 안이 상상계라면 그 바깥 세계는 실재계이고 그림자는 꿈처럼 반무의식의 상징계를 의미한다. ‘의 그림자는 죽어가는 생명처럼 말한다. “여기 있는 그녀가 그림자고 벽 바깥에 있던 그녀가 본체였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중략) 실은 이곳이 그림자의 나라가 아닐까. 그림자들이 모여 이 고립된 도시 안에서 서로 도와가며 숨죽이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176)

 

  그림자를 버린 자만 이 도시에 거주할 수 있다는 원칙을 부정하는 문장들이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지금 여기의 가 실은 그림자이고, 거기의 가 진짜 일수도 있다는 것. 육체와 영혼, 몸과 마음, 껍데기와 알맹이, 현실과 꿈, 고유의 역할과 사회적 역할 등이 대립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본체와 그림자는 손등과 손바닥처럼 표리일체다. 손이 나의 자아라면 상황에 따라 상대방에게 손을 펴고 악수를 청할 수 있고, 주먹을 쥐고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그 둘 다 손이 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도서관을 보자. 현실과 가상 세계에 모두 등장하는 공간이다. 실제 세계에서 중년의 는 산골 마을의 도서관장으로 부임한다. 전임 관장인 고야쓰는 트럭 사고로 아들을 잃고, 사랑하는 부인도 강에 몸을 던졌다. 본인 또한 산책 도중에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하지만 그림자가 없는 인간이자 유령으로 앞에 나타나 도서관 안쪽 장작 난로가 있는 정사각형 방에서 대화를 한다. 한편 도시에도 도서관이 있다. 나는 눈에 상처를 낸 꿈 읽는 이의 자격으로 오래된 책상에 앉아 달걀 모양의 오래된 꿈을 읽는다.

 

  도서관의 서고에는 책 대신 오래된 꿈이 수납되어 있다. ‘오래된 꿈이 그림자의 말처럼 이 도시가 성립하기 위해 벽 바깥으로 추방당한 본체가 남겨놓은 마음의 잔향”(177)긁어내어져 밀폐 보존된 사람들 마음의 잔재”(186)이라면 도서관은 마음의 눈으로 마음의 경전을 읽는 신전이다. 보르헤스의 도서관처럼 각각의 마음은 하나의 소우주이고 궁극의 개인 도서관”(557)이다. 도서관은 한 점에서 시작해 알 수 없는 끝을 향해 팽창하는 드넓은 마음들의 총체다. 도서관에서 읽는 대상은 책이나 오래된 꿈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도서관에서 자신의 내면을 읽는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고요하고 고독한 작업이다.

 

  ‘는 고야쓰를 대신해 도서관장이 되었고 비범한 소년은 나의 후임자로서 도시의 도서관에서 꿈 읽는 일을 계속한다. 고야쓰, ‘’, 소년의 순서로 계승의 바통이 현실의 도서관 안쪽 정사각형 방과 의식의 깊은 밑바닥에 있는 작은 정사각형 방”(747)으로 건네지는 구조다. 하루키의 아버지가 난징 대학살(1937) 무렵 중국에서 종군했고 그 때의 참상을 전해들은 하루키도 유사 체험과 트라우마를 겪었을 것이다. 이 소설을 비롯한 하루키의 작품에 군인 장교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아버지의 경험의 계승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그 높고 견고한 도시의 벽으로 돌아가자.

  20091월 이스라엘의 최고 문학상인 예루살렘상수상자로 선정되었다. 2023년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처럼 그해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하루키는 시상식장에서 벽과 계란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조주희, 하루키의 삶과 작품세계(북스타, 2021) 189-191쪽에서 발췌)

 

  “만약 여기에 단단하고 커다란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혀 깨지는 계란이 있다고 하면, 저는 언제나 계란 쪽에 서겠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많든 적든 각각 하나의 계란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는 하나의 혼과 그것을 둘러싼 약한 껍질을 가진 계란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많든 적든 각자에게 있어 단단하고 커다란 벽에 직면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벽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스템이라고 불립니다.”

 

  ‘이라는 공고하고 강력한 시스템을 통과하기 위해 달걀 모양의 오래된 꿈을 읽는 이가 필요하며, 그 사실을 이야기로서 전달하는 존재가 소설가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하루키는도시와 벽을 쓴 것이 아닐까.

 

  나는 백석의 시 중에흰 바람벽이 있어를 가장 좋아한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중략)/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중략)/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후략)

 

  흰 바람벽이라는 스크린에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나와 내 그림자와 도서관이 나오는 영화. 영화가 끝나도, 끝나지 않는 지난날의 기억이 엔딩 크레딧처럼 올라가는 극장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는 고독한 인간. 가끔은 한 편의 소설이나 영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극장을 나온 나는 변한 게 없는데 모든 것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 누군가 나직이 내 귀에 속삭이는 것 같다. “마음으로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습니다. 높은 벽도 당신 마음의 날갯짓을 막을 수 없습니다. (중략) 당신의 분신이 그 용감한 낙하를 바깥세계에서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으면 됩니다.” (754)

 

  이인삼각으로 결승선에 도착한 나는 너에게 용기 내어 물었다. 이름을 알려 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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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란 무엇입니까 시인동네 시인선 199
김대호 지음 / 시인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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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으며 단상을 적은 메모를 확인하니 '계산, 곡선, 당신(그대), 위악, 불안(고요), 회의' 같은 단어가 적혀 있다. 서정시의 전통을 따를 생각이 없고 형이상학적 명제에서 출발해 집요하게 꼬리를 물고 벽을 타고 넘어가는 진술의 향연. 소설을 읽듯 읽으면 자칫 추상적, 사변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눈에 밟히는 구절을 속으로 소리를 내어 읽으면 깊은 맛이 느껴진다. 김대호의 시에 나는 '건설적 회의론자의 시'라고 명명하고 싶다.



* 곡선 13쪽


* 누진세 22쪽


* 피곤은 이제 피곤하다 28-29쪽


* 실천이란 무엇입니까 72-73쪽


* 나비 글씨체 104-106쪽


고요 속에도 소란은 있다/ 꽃의 소란은 향기이다 (중략) / 문장을 만드는 일의 고통은 문장 이전에 있다/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은 즉시 꽃의 소란이 된다//(중략)// 서정은 어리석다/ 오늘의 날씨는 서정의 무늬를 매만진다/ 내가 입고 있는 셔츠는 죽은 사람의 옷을 물려받은 것이고 내 미래는 아직 과거를 청산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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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 창비시선 486
이동우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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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서정을 포기하지 않는 견고한 이미지로 완성한 건축물. 상괭이, 표제작, 이유와 이후, 먼지 차별, 매미 소리에 오래 눈이 머물렀다. 전태일 문학상, 대산창작기금 수혜의 경력에서 보듯 태작이 없다. 부분의 합을 넘어, 시집 한 권이 창발성을 지닌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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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서 - 이석기 옥중수상록
이석기 지음 / 민중의소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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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에서 주최한 '좋은 책 읽고 독후감 쓰기 행사'에 제출한 원고다. 운좋게 상까지 탔다(자주상, 1명, 50만원 상당). 상보다는 마흔의 문턱에서 내 인생의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었던 점에서 나에게는 뜻깊은 책이다.  


★ 목차

 

■ 들어가며 (3쪽)

 

■ 내가 생각하는 행복 (5쪽)

 

■ 양심적 음주거부권 (7쪽)

 

■ 능력주의에 관하여 – 개천은 더 이상 용의 홈타운이 아닙니다 (9쪽)

 

■ 자녀교육과 학력주의 - 스킨십(skinship)을 타고 희망의 대학으로 (11쪽)

 

경제적 불평등에 관하여 - 사회는 발전하는데 왜 가난한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을까 (14쪽)

 

■ 평화를 향한 발걸음 – 남·북·미·중·러·일의 큐브 맞추기 (17쪽)

 

■ 산을 넘고 내를 건너 – 면벽서점에서 (19쪽)

 

■ 참고문헌 (21쪽)



■ 들어가며

 

나는 198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갓난이 때 마산으로 이사했고 창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변성기가 지난 성가 대원처럼 대학진학을 위해 서울로 와서 2021년 만 나이로 마흔을 맞이했다. 내 인생의 허리를 뚝 자르면 하체에 해당되는 198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 현재의 우리나라 사회를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87년 체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야권 분열로 탄생한 노태우 정권, 1991년 독일통일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1990년 3당 합당의 결과로 선출된 문민정부, 1996년 OECD가입, 1997년 말 IMF 위기와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탄생한 국민의 정부까지. 물론 내가 그 당시 역사적 사건을 세세히 기억하거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사후 추체험과 미디어를 통해 재구성된 기억이 대부분이다. 다만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은 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날 학교 정문에 펄럭이던 만국기.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뿐 아니라 갓 수교관계를 맺은 중국과 러시아 국기도 있었을 것이다. 가끔 하굣길에 최루탄 냄새 때문에 코와 입을 틀어막고 집으로 뛰어 들어가던 기억도 난다. 상체에 해당되는 스물 살 이후는 비교적 또렷이 생각난다. 2002년 월드컵과 참여정부의 출범,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산 쇠고기 촛불 집회, 2009년 용산참사, 2011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 2012년 박근혜 정부의 출범과 2014년 세월호 참사,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구의역 스크린 도어 정비업체 직원 사망사고, 2016년 말부터 2017년의 대통령 탄핵과 촛불혁명의 문재인 정부, 2017년 이후의 미투 운동, 2018년 버닝썬 사건, 2018년 태안 화력 발전소 사건(‘김용균 사건’), 2019년 n번방 사건, 스쿨 존 교통사고(‘민식이 사건’), 2020년 입양아 학대 사건(‘정인이 사건’).

 

전 통합진보당 국회위원인 저자가 쓴 이 책의 부제는 ‘이석기 옥중수상록(이하 옥중수상록)’이다. 수형생활이나 출소 이후 옥중생활에 관해 글을 쓴 작가나 그 작품은 많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 투옥생활을 한 故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우선 떠오른다. 저자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위헌정당해산결정과 그 소속위원의 자격상실,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유죄로 확정되는 일련의 과정을 겪었다. 개인적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당시 정권과 권력자에 대한 강한 비판을 예상했는데 전체적인 글의 어조는 차분하다. 햇빛 속에서 차분히 먼지가 내려앉듯 오랜 수감생활 가운데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을 다듬었을 것이다. 이 책은 옥중에세이가 아니라 한 권의 사상서다.

 

► 이 책은 그동안 내가 해 오던 생각들을 나름대로 자르고 붙이고 하여 새로 쓴 것입니다. 크게 보면 네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내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 살아온 이야기들이 있고, 수년간 옥에서 생활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이 있고, 또 감옥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우리나라의 안과 바깥으로 나누어 적은 것이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옥중수상록, 13쪽 서문 중에서)

 

이 책은 거울 같다. 거울 속의 내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과연 잘 살고 있는 걸까. 나는 가끔 내가 기계처럼 느껴진다. 기상, 출근, 직장 업무, 퇴근, 육아로 이어지는 일상의 감옥에 갇혀 사는 요즘, 물리적으로 나는 감옥 밖에 있지만 감옥 안에 있는 저자와 무엇이 다를까. 위 서문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바꿔 보았다.

 

► 이 글은 내가 해 오던 생각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크게 보면 네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내가 직장에 들어오기 전(대학과 수험생활)에 살아온 이야기들이 있고, 수년간 직업인으로 생활하면서 겪은 이야기들(법원공무원, 결혼과 육아)이 있고, 또 감옥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우리나라의 안과 바깥으로 나누어 적은 것이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어가며 틈틈이 메모했다. 그것을 구름판 삼아 나만의 ‘짧은 옥외수상록’을 쓴다. “인간은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 내가 생각하는 행복

 

법원공무원시험을 합격하고 발령 대기기간에 어학원을 다녔었다. 한 과목을 들으면 프로모션으로 원어민이 번갈아가면서 수업을 했는데, 선생님들의 국적이 미국,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나이지리아 등 다양했다. 그 수업에서 공통적으로 한 번 씩은 접하는 질문이 있었다.

 

Are you happy now? What do you think happiness is?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 당신은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시 서른이 넘었는데 한 번도 진지하게 행복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에 질문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행복은 객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간단히 정의하기 어렵다. 아무리 부유하고 권력을 가졌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우선 나의 기준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이란, '스스로 선택하고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삶'이다. 즉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누리는 삶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의 바람과 욕구대로 행동하고 만족을 얻는 삶이다. 자기를 아끼고 남이 아닌, 나를 비교 대상으로 살고 싶다. “누구든지 웬만한 정도의 상식과 경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방식대로(his own mode)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나도 주체적으로 싶은데 현실은 정말 팍팍해. 취업도 안 되고, 취업을 해도 하루하루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결혼하려면 돈도 모으고, 결혼해도 자식 키우려면 다른 것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생활을 포기하라거나 이기적으로 살자는 말이 아니다. 하루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잘하지는 못하지만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것, 열정적으로 할 수 없더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면 좋겠다.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찾으면 더 좋다.

 

► 불교에서는 ‘수처작주(隨處作主)’란 말이 있습니다. 어느 곳이건 가는 곳마다에서 주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감옥에 있든, 그렇지 않든 내 삶의 주인은 나입니다. (옥중수상록, 18쪽)

 

2016년 우연한 계기로 부천문화재단에서 개설한 시 창작 교실을 등록해서 매주 화요일 저녁에 빠지지 않고 꼬박 일 년을 다녔다. 처음에는 내가 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매주 나를 들여다보고 시적인 이미지를 찾고 감정을 상상력으로 발전시키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모은 원고를 문예지에 투고 했는데 운 좋게 당선되었고 그 이후 2019년에 부천신인문학상을 탈 수 있었다. 시를 쓰고 발표하는 일은 경제적 관념으로 접근하면 쓸모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 생각과 감정을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고 남들과 나눌 수 있다는 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쓸모다. 누구에게나 찾아보면 ‘쓸모없음의 쓸모’가 하나는 있지 않을까. 임제선사의 말씀으로 알려진 수처작주 뒤엔 입처개진(立處皆眞)이 따라온다. 어느 곳에서든 그 곳에서 스스로 주인이 된다면 그 모든 것이 참될 것이라는 말이다.

 

 

■ 양심적 음주거부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바람에 술자리 같은 모임이 드물다. 이전만 해도 정기인사 이동 후에는 으레 회식일정이 잡혔고 초면이거나 잘 모르던 사람들과 대화하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다보면 주제가 술로 자연스레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술 좋아하세요?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대답은 제각각이다.

1. 술은 잘 못하는데, 술자리 분위기는 좋아해요.

2. 그냥 소주 1병정도. 분위기 맞추는 정도에요.

3. 저는 술 먹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졸려요.

 

나는 술을 거의 못 마신다. 유전적으로 알코올에서 나오는 아세트알데히드를 분해하는 효소가 거의 없다. 음주량을 조절해가며 술자리에 끝까지 남아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을 때도 있는데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새빨개지고 졸음이 몰려온다. 술자리 다음날 “어제 잘 들어가셨죠? 점심때 해장 하셔야죠!” 이런 대화는 나와 거리가 멀다. 나를 처음 보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열에 아홉은 제가 술 잘 먹게 생겼다고 말한다.

“술 잘 먹게 생긴 게 어떻게 생긴 거죠?” “너처럼 생긴 거!”

잘 모르는 사람과 술자리를 하거나 한참 연배가 높은 분들이 주시는 술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순간 ‘저는 술 못하는 사람입니다’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되서 과장님이 주시는 술을 받아 마셨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과장님 앞에서 잠이 들었다. 부원들이 다음부터 술을 억지로 권하지는 않았다. 요즘은 술자리에서 술을 억지로 권하는 장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양심적 음주거부자’에게도 물과 사이다 같은 대체복무제도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다.

 

► 사람의 행동반경을 규정하고 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 이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는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민중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 그것이 양심입니다. 이런 양심이 사상이나 이론이라는 무기를 활용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닐 것입니다. 34쪽

 

‘양심적 음주거부자’라고 주장할 때 나의 양심은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양심이나 ‘민중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과 다르다.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을 때 마시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행복추구권에서 파생된 일반적 행동의 자유 중, 의사에 반해 행동을 하지 않을 ‘부작위의 자유’ 문제일 것이다.

 

 

■ 능력주의에 관하여 – 개천은 더 이상 용의 홈타운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준비했던 사법시험을 낙방하고 방황할 때였다. 같은 시험을 준비하다가 공무원 시험으로 방향을 튼 여동생이 법원공무원 9급 공채시험을 응시해보라고 했다. 사법시험과 과목이 중복되고 한국사와 소송법 객관식만 단기간에 준비하면 합격가능성이 있다는 취지였다. 학원을 다닐 엄두가 안 나서 동생이 주는 자료를 중심으로 사법시험과 공무원시험을 병행해서 준비했다. 결과적으로 사법시험은 떨어졌고, 법원공무원 시험은 합격했다. 한국사와 소송법 점수가 예상대로 낮았지만 상대적으로 법학과목이 어렵게 출제된 덕분에 가까스로 합격한 것이다. 합격소식도 동생이 문자로 전해 주었으니 입구부터 출구까지 동생의 손에 이끌려 미로를 탈출한 셈이다.

 

►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더 많은 몫을 차지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능력주의(Meritocracy)라고 부릅니다. (중략) 하지만 이건 두 가지의 전제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는 정말로 같은 출발선에서 뛰어야 한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단 한 번의 달리기로 모두를 줄 세우는 건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옥중수상록, 154쪽)

 

법원공무원 합격이 오로지 내 능력 덕분이었을까. 동생이 당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의자 없는 공장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하루 열 시간 넘게 운전대를 잡으며 서른 넘은 아들을 뒷바라지 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가족의 도움과 친구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나는 주거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합격의 중심에서 멀어졌을 것이다. 결혼과 출산도 훨씬 나중으로 미루었을 것이 틀림없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정말 옛말이 되었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 아니다. 1970년대, 1980년대 우리나라의 고도 성장기를 지나 1997년 말 IMF 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의 고비를 넘기면서 40대 이하의 청년들은 건국 이래 최초로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다. 공동체의 가치보다 ‘우선은 내가 살고 보자’는 각자도생의 관념이 사람들의 의식에 자리 잡았다. 돈 많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능력주의’라는 간판을 이마에 붙이고 모든 결과는 자신이 노력한 결과이므로 그 열매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 반면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나쁜 결과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굴욕감을 내재화한다. 문제는 이렇게 쌓인 사람들의 울분이 포퓰리즘의 바람과 만나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비대졸 백인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당선되었고 영국에서는 가난한 노동자 계층이 브렉시트 찬성에 몰표를 던졌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된 중국 우한 지방을 비롯한 외국인에 대한 혐오, 의과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같은 과 여학생을 성폭행 했을 때 일부 사람들이 의대생은 앞으로 사회에서 공익을 담당할 주체이므로 사회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보라. 능력주의는 이미 몸속 곳곳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 말했다. 아무리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해도 결과가 인간의 존엄과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수 없는 형태라면 이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능력주의는 분배와는 다른 평면의 문제다. 능력주의는 오히려 불평등을 전제한다. 누구에게나 보장된 기회를 이용해 열심히 노력하면 사회적 이동가능성(social mobility)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천장까지 닿을 수 있다는 믿음은 허상이다. 능력주의가 몰고 가는 재앙의 터널을 어떻게 뚫고 지나갈 수 있을까. 형식적인 기회의 평등을 넘어 어울림, 사회적 연대에 바탕을 둔 실질적 평등과 실질적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사회가 고민해야 한다. 물론 저항을 각오하고 혁명 수준의 개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암흑의 터널이라도 나와 함께할 곁이 있고, 터널 끝에 빛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사회는 진보할 수 있다.



■ 자녀교육과 학력주의 - 스킨십(skinship)을 타고 희망의 대학으로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의 일이다. 몸살을 앓았던 그녀를 모처럼 만나 단골 양꼬치 가게에 갔다. 뭉근한 화로에서 갈빗살이 노을처럼 익어갔고 꼬치를 하나씩 뒤집으며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옆쪽을 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주인아주머니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딸이 문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딸은 엄마에게 부둥켜 안겨 볼을 부비고 뺨과 입술에 뽀뽀 세례를 했다.

 

“우리 집은 스킨십이 많이 없는 편이라 저런 모습을 보면 막 오그라들어. 언제더라, 엄마가 1남 3녀를 기르면서 다른 집 아이들처럼 딸을 보듬고 듬뿍 안아주며 키우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고 말했었어. 오빠 집은 어땠어?”

“글쎄, 비슷했는데. 그래도 난 엄마한텐 스킨십을 곧잘 하는 편이었어.”

“난 담에 아이 낳으면 스킨십을 많이 하면서 키워보고 싶어. 우리 집은 딸, 딸, 딸, ‘아들’ 1남 3녀라 정말 치열했거든”

 

나는 어릴 때 엄마의 팔을 베개처럼 좋아했다. 엄마의 어깨와 팔꿈치 사이를 흐르는 보드라운 살결을 손등으로 부비면서 잠을 자는 것을 좋아했다. 여동생은 “저건 분명 애정결핍이야.” 놀려댔지만 난 몸에 열이 많아서 적당히 차가운 그 부분이 좋은 거라고 우겼다.결혼 후 우리는 딸과 아들을 낳았고 아내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거듭하다가 둘째를 가지게 되면서 퇴사했다. 하루하루 보름달처럼 차오르며 무거워지는 배와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첫째를 돌보느라 씨름하는 아내에게 늘 미안했다.

 

요즘 육아에 있어 가장 힘이 드는 일은 아이들을 재우는 일이다. 첫째가 내 당번인데 고민하다가 최근에 시도한 방식이 있다. 이른바 ‘침대놀이’. 패러글라이딩을 하듯 내가 바닥에 눕고 아이가 등을 대고 내 위에 몸을 포갠다. 물침대가 된 내 몸 위에서 아이는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배를 살살 문질러주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가 맨바닥이나 침대보다 체온이 느껴지는 살결을 좋아하는 것 같았고 이전보다 빨리 잠들었다. 다만 알고 있는 동화나 우화를 총동원해도 이야깃거리가 부족해 걱정이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고민이 늘어간다.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최대한 학업 부담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전공이나 직업과 관련 없는 책을 던져버리지 말고 아는 것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현실 세계에 나오면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은 비전형적인 상황이 많다. 그런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 방안을 찾아나갈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 궁극적인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능력주의의 타락을 회복하자면 앞서 말한 것처럼 외부적 충격이 필요합니다. 혁명이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움직임도 그런 충격 가운데 하나일 것이고, 비교적 간단해 보이는 개혁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과거 군사정부가 시행했던 과외 금지나 고교 평준화가 그렇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 차별을 금지하거나 비정규직의 경우 오히려 정규직보다 더 많은 임금을 주도록 제도화 할 수도 있겠지요. 원하청 사이의 불공정 거래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연한 학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대학을 평준화하는 것은 어떨까요? 언뜻 생각하면 지나친 공상처럼 보이지만 프랑스나 독일처럼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하고 상상하고 행동하는 것이지요. (옥중수상록, 175-176쪽)

 

능력주의의 사촌인 학벌(학력)주의는 대학입시제도의 문제로 수렴된다. 저자가 말하는 ‘대학 평준화’는 충분히 실현가능한 방안이다. 우리나라는 고교입시과열과 대학 서열화를 막기 위해 3불 정책(고교평준화, 본고사폐지, 기여입학금지)을 도입하여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 강남에 위치한 일부 명문 고등학교를 향한 불길은 과학고, 외국어고, 자립형사립고로 번졌고 여전히 명문대학 졸업장은 취업 시장에서 힘이 세다. 따라서 보다 파격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우선 국공립대학만이라도 추첨에 의한 학생선발을 실시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내신이나 수학능력시험의 몇 과목(영역) 일정 등급이상의 성적을 지원 자격으로 정하고, 응시조건을 충족한 수험생 중에 추첨으로 학생을 뽑는 것이다. 스무 살도 안 된 아이들을 성적으로만 줄 세우고 그들의 잠재력을 단 한 번에 판별하는 것은 가혹하고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추첨으로 선발된 학생은 대학 입학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만 이루어 진 것이라는 오만에 빠지지 않고 일정 부분 행운이 따라준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한편 떨어진 학생도 불합격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단지 운지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대학에 재도전 할 수 있다. 이는 능력주의를 완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일정한 수학능력을 갖추는 것을 조건으로 뽑는 것이므로 기회의 평등과 더불어 교육에 있어서 실체적 정의도 구현할 수 있는 방안이다. 이렇게 되면 중고등학교에서 명문대 진학을 위한 입시과열현상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어 공교육 정상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 경제적 불평등에 관하여 - 사회는 발전하는데 왜 가난한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을까

 

취업, 결혼, 출산, 육아를 포기하는 사람이 늘어간다. 장래희망 무엇이냐는 질문에 건물주와 연예인이 꿈이란다. 점심식사와 이어지는 잠깐의 대화에서 화제는 단연 부동산과 주식이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정보혁명의 시대를 지나 AI와 사물인터넷, 3D프린터로 대표되는 제4차 산업혁명의 물소리가 들려온다. 물결치는 저것이 서핑을 즐길 수 있는 적당한 파도인지 인간을 삼키는 쓰나미가 될지는 현재로선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렇게 사회는 계속 발전하는데 왜 가난한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을까.

 

► 경제적 불평등을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봅시다. 소득, 교육, 자산(재산)이 그것입니다. 소득이 쌓이면 자산이 되고, 자산은 이자나 지대를 통해 소득으로 바뀝니다. 교육은 소득의 중요한 원천 중의 하나이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자면 자산의 뒷받침이 필요하지요. 세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자식의 자산이 됩니다. 흔히 ‘부모 찬스’라고 부르는 현상을 보면 자산이 어떻게 소득과 학력으로 바뀌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옥중수상록, 164쪽)

 

► 문재인 정부는 집값 폭등을 막겠다는 목적으로 여러 차례 부동산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렇다 할 것이 없지요. (···) 나는 이렇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을 문재인 정부의 의지 부족에서 찾지 않습니다. (···) 주거 문제를 해결하자면 지금과 같은 집값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이들이 근본적인 전환을 주도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토지와 주택을 개인의 소유로 하고 재테크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중단시키고, 토지공개념에 기초해 주거가 국민 모두의 권리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진보정당이 자리해야 할 곳이 이런 곳이지요. (옥중수상록, 68쪽)

 

헨리 조지의《진보와 빈곤》을 들춘다.

생산량 = 지대 + 임금 + 이자

생산량 – 지대 = 임금 + 이자

 

생산량은 임금(노동), 지대(토지), 이자(자본)의 합이다. “임금과 이자는 지대를 공제하고 난 후의 잔여에 의해, 즉 무지대 토지에서의 생산물 또는 사용 토지 중 가장 열등한 토지에서의 생산물에 의해 정해진다. 그러므로 생산력이 아무리 높아지더라도 지대가 같은 정도로 높아진다면 임금과 이자는 상승할 수 없다. (중략) 토지가치가 같이 상승하면 생산력은 지대로 흡수되어 버리고 임금과 이자는 전과 달라지지 않는다.”

 

총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지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가치는 토지에 집중된다. 사회적 열매가 토지 소유자에게 모두 돌아가는 상황에서 물질적 진보가 고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은 상승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을 면치 못한다. 따라서 헨리 조지는 토지의 독점을 막기 위해 토지를 공동소유로 할 것과 근로소득이나 자본소득(이자)에 대해 과세하지 말고 토지에 대해서만 세금을 매기자는 토지단일세(single tax)를 주장한다.

“형식상 토지 소유권은 지금처럼 개인의 수중에 그대로 있다. 아무도 토지소유권을 박탈당하지 않으며 토지 소유량에 대한 제한도 없다. 그러나 국가가 지대를 조세로 걷기 때문에 토지 소유가 누구의 명의로 되어 있건 토지 소유량이 얼마가 되건 간에 토지는 실질적으로 공동재산이 되며,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토지 소유의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

 

임차인이 일정지역에서 상권을 형성하고 가치를 드높여 놓으면 임대인이 임대료를 대폭적으로 올린다. 임차인은 높은 차임을 견디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임료 부담이 적은 지역으로 이동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생각하면 현상의 문제점이 잘 이해된다. 물론 헨리 조지의 토지단일세 주장은 지금의 조세체계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토지공개념의 정신은 이어받을 만하다. 애초에 토지는 누가 발명한 것이 아니다. 자연에 원래 그대로 존재했던 것이며 근본적으로 어느 누구의 배타적 소유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토지소유로 인해 생긴 이익은 불로소득이며 소유자가 투입한 노력을 제한 초과이익의 대부분을 환수해서 이를 사회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 종합부동산세 입법조치를 하였으나 헌법재판소에 의해 일부 위헌을 받음으로써 개혁의 동력을 잃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문제를 인식하고 수십 차례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부동산 가격이 너무 오르지 않게, 한편으로 너무 낮아져 가계 부채문제가 폭발하지 않는 차원에서 부동산을 관리대상으로 생각하고 근본적인 해법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부동산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진보를 불문하고 입법과 집행에 있어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고의적인 방해와 방조, 방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토지공개념에 기초한 입법은 진보적 정부만 시도했던 것은 아니다. 1987년 이후 내 집 마련에 대한 욕구 때문에 전월세 대란이 일어나고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을 때 당시 정권을 잡은 노태우 대통령이 개발이익환수제,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의 토지공개념 3법을 제정했었다.

 

부동산 시장의 과열에 따른 사회적 폐해는 진보, 보수의 가치문제가 아니라 부의 배분에 관한 정의와 부정의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금융위기, 부동산 거품이 꺼져 가계부채 폭탄이 터지는 등 - 폭탄이란 말은 보유세에 붙일 것이 아니다 - 외부적 영향에 따른 비자발적인 급격한 변화보다는 선제적으로 토지공개념에 기초한 근원적인 개혁조치를 취해야 한다. 실수요자에 대한 공급확대와 더불어 다수 부동산소유자에 대한 보유세를 중과하고 실효세율을 주요 국가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마침 2021년 4월 7일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고가 치러졌다. 두 곳 모두 야당인 국민의힘 후보가 압승을 거두었다. 선거의 민심에 대해서는 차후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서울의 경우 부동산 가격상승과 LH직원들의 내부정보를 통한 부동산 투기가 내 집 마련에 민감한 젊은 층의 심리를 자극했을 것이다. 부동산 자산에 대한 시민들의 욕망이 검증과정에서 야당 후보들에 대해 제기된 여러 논란보다 표심을 더 자극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부동산 문제는 대부분 대단지 아파트와 관련되므로 건설업자와 부동산 중개업자, 투기세력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주식시장처럼 시장교란 행위를 처벌하고 감독하는 감시기관도 설치해야한다. 향후 이루어질 헌법 개정에서 토지공개념을 재산권 제한의 근거로 명시해 위헌시비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도 입법자가 해야 할 일이다.

 

 

 

■ 평화를 향한 발걸음 – 남·북·미·중·러·일의 큐브 맞추기

 

세계는 코로나19 이전(Before Corona)과 코로나19 이후(AC, After Corona)로 나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지구가 이렇게 평화로운 적은 없었다. 핵전쟁과 제3차 세계대전의 잠재적 위험성을 경고하는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기우에 불과했다. 전쟁이 아닌 전염병에 의해 세계는 출렁이고 있다. 운동회 날 펄럭이는 만국기처럼 남·북·미·중·러·일의 빨강, 파랑, 검정, 하양, 노랑의 파도의 물결 속에서 우리나라는 어디에 위치에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냉전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의 패권국가로서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현한 듯 했다. 그러나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를 전후로 해서 중국이 미국을 빠르게 추격하는 양상이다. 머지않아 중국이 미국을 경제적으로 추월할 것이다. 미중간의 패권경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한반도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만나는 접점이다. 코로나19 이후 세계 질서 재편을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지정학적, 지경학적으로 우리나라는 미중과 긴밀히 협력하며 군사안보, 경제 영역에서 외교적 실익을 추구해야 한다. 각국의 외교적 욕망이 총집결하는 각축장인 한반도에서 남·북·미·중·러·일의 다채로운 고차방정식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 나는 우리의 지정학, 지경학이 터키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미동맹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이른바 방기의 위험은 그저 낡은 시대가 만들어 낸 상상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동맹에서 벗어나 ‘탈동맹’, ‘중립’의 위치에 서는 것은 우리의 가치를 크게 높여줄 것입니다. 미국이나 중국 모두 우리를 결코 포기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옥중수상록, 118-119쪽)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연이은 북한의 핵실험과 도발에 대해 ‘전략적 인내’의 방식으로 접근했다.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국제사회에 문을 열 때까지 사실상 무대응으로 일관하겠다는 태도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과 경쟁에서 우리나라는 어느 한편을 선택하라는 요구를 직간접적으로 끊임없이 받을 것이다. 특히 동맹관계에 있는 미국으로부터 중국 봉쇄를 위해 미국이 추구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할 것과 한·미·일을 사실상 군사공동체로 묶어 중국의 해양진출을 막기 위한 제안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철저히 우리나라 국익의 관점에서 최대한의 외교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고유의 ‘전략적 인내’를 해야 한다. 교착상태인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진행을 위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사업을 복구하고, 남북 철도 연결사업, 대북제재의 예외에 해당되는 식량지원과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의료지원 사업을 나름대로 진행시켜야 한다. 한미동맹과 한중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국제협력을 통해 양국, 특히 미국의 의존성에서 벗어나 ‘탈동맹, 남북협력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코로나19가 창궐한 상황에서 생긴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중견국 외교의 가능성도 고려할 만하다. 중견국이란 “국제사회에서 대국과 소국 사이에 위치하며 행태적인 측면에서 국제협력을 중재하고 촉진할 수 있는 국가”를 말한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했던 ‘동북아 균형자론’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균형자는 강력한 군사력과 물리적 힘에 의한 경성 균형자(hard balancer)가 아니라 중견국을 포함한 다자체제에서 협력을 주도해 나가는 연성 균형자(soft balancer)다. 20년 전에는 우리의 국격과 역량이 균형자 역할을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코로나19에 대응하는 방역의 성공과 경제적 지위를 바탕으로 우리나라가 추격자가 아닌 리딩 국가로서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 같은 평화와 인권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을 하고,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pment Aid) 같은 국제적 지원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다자협력 체제 안에서 일관된 목소리를 통해 우리나라의 입지를 다져나가는 것이 해법이다. 또한 외국인의 법적 지위를 현실적으로 보장하는 법령을 정비해 적용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망명권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

 

■ 산을 넘고 내를 건너 – 면벽서점에서

 

이석기 옥중수상록을 디딤돌 삼아 나의 짧은 옥외수상록을 써 보았다. 나로부터 내 가족과 이웃, 우리나라, 나아가 세계로 시야를 넓혀보려고 시도했지만 턱 없이 부족한 시도였음을 잘 안다. 하지만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나를 읽어나가는 삼독(三讀)의 자세로 읽어가려고 노력했다. ‘옥중수상록’을 읽으면서 독방의 비좁은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볕을 껴안고 책을 읽는 남자의 이미지가 떠올라 시(「면벽서점」)를 썼다. 신영복 선생은 관계의 최고 형태를 ‘입장의 동일함’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장 그를 옥 밖으로 꺼내 줄 수 없지만 그의 어깨 위에 손바닥만 한 위로의 빛을 보낸다. 지금 내가 여기에서 보내는 최대한의 마음을 담아.

 

★ 면벽서점

 

빛의 농담이 넘치는 날에는 개처럼 산책을 한다 미로를 걸으며 만나는 앙다문 철문들, 법원 옆은 검찰청 그 정강이엔 구치소와 보호관찰소가 있다

 

마약류 투약자 특별자수기간

자수자 최대한 선처 및 재활치료 기회 부여

담벼락에는 은유가 물결치는 현수막과 미아 찾기, 현상수배전단이 평등하다 법 없이 못사는 피의자의 콧날과 아이들의 살짝 찡그린 표정 극도의 빛과 어둠이 동시에 눈을 찌른다 나는 이 매끈한 무지의 원인을 알 수 없다 호두알 같은 생각을 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문지를수록 죄도 조약돌처럼 반반해질까 이차선 좁은 도로를 따라 가로수가 바람의 평균대에서 균형을 잡을 때 버스에서 내린 몇몇이 슬쩍 주머니를 엿보다가 손금처럼 퍼진 골목 너머로 흩어진다 미로에서 쫓긴다 내 발자국을 덮으며 내가 나를 뒤쫓는다 멈추라고 거기 서라고 나를 고발한다 무고한 나는 벤치에 앉아 가을 매미처럼 생각한다 안락의자에 앉은 권력자들의 빌딩을 빠져나와 먹자골목을 지나면 마침내 서점이 나온다 네모반듯한 창틀을 부수고 휘어지는 봄볕이 하얗게 질린 통유리 문을 두드린다 빛의 살점들이 쏟아진다 서점주인은 책상에서 백합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책을 읽고 있다 늘 같은 자세 같은 표정, 눈길을 주지 않는다 침묵 또 침묵, 면회소 간유리 사이로 들려오는 간절한 말처럼 내면이 가려운 나와 면벽하는 독방, 서점 앞 횡단보도에서 굉음이 들린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지만 주인은 별 일 아니라는 듯 힐끗 돌아보고는 책속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 참고문헌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책세상, 2018

 

- 마이클 샌델, 《공정함이라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개역판), 2016

 

- 문정인,《문정인의 미래 시나리오》,청림출판, 2021

 

- 이남주, 「미중 전략경쟁, 어디로 가는가」, 『창작과 비평』,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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