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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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이언 매큐언)를 읽고




1. 사람들은 불확실성과 불분명함을 못견뎌한다.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특히 그것들이 논쟁거리인 경우에 '이 문제에서 이 관점이 옳다'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일갈형 '애정남(애매한 것 정해주는 남자'은 뭔가 똑부러지고 신뢰감을 준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리 단순한 게 아니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2. '속죄'는 '단정'과 '속단'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한다.


탈리스 가의 1남 2녀 중 막내인 열 서너살 '브리오니'는 정리정돈을 잘하고 상상을 통해 소설쓰는 일에 푹 빠져 있다. 소설쓰기는 자신만을 비밀을 간직하는 작업이자 세상을 축소하여 손 안에 넣는 즐거움을 준다. 브리오니의 언니 '세실리아'와 탈리스 가의 파출부의 아들인 '로비'는 소꿉친구이자 대학동창이지만 왠지 모르게 서로 거리감을 두며 자랐고, 세실리아는 로비에 대해 이유를 모르는 반감마저 있었다. 브리오니의 이모는 가출해서 파리에 살고 있고 이모의 딸 '롤라'와 쌍둥이 형제는 브리오니의 집에 잠시 거처하게 된다. 

오랜만에 세실리아의 오빠 '레온'과 레온의 친구 부호의 아들 '마셜'도 모이고 문제의 사건이 벌어진다.




3. '분수 사건'은 전쟁에서 전사한 브리오니의 삼촌의 유품인 꽃병에 꽃을 꽂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세실리아는 삼촌의 꽃병에 꽃을 꽂고 물을 담기 위해 분수쪽으로 가는데, 불편한 로비와 마주친다. 몇 마디 나누다가 꽃병이 깨지면서 몇 조각이 분수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각을 잃어버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지체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분수 속으로 뛰어들고 로비는 분수 앞에서 그 광경을 바라본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로비와 세실리아 사이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세실리아는 집으로 들어간다.





4. '분수 사건'을 겪은 후 세실리아는 그동안 자신이 느꼈던 로비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짐작하게 되고 극적으로 로비와 세실리아는 서재 한 구석에서 사랑을 나누려는 순간, 창밖으로 '분수사건'을 목격한 '브리오니'는 로비가 언니를 덥치는 것으로 오해하고 '서재사건'을 보고는 로비의 폭력성을 단정해버린다. 브리오니는 소설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이종사촌인 쌍둥이 형제가 사라지고, 그들을 찾는 와중 브리오니는 사촌 롤라가 한 남자에 의해 강간당하는 찰나를 목격하는데, 둘 모두 범인이 누군지 확실히 보지 못했다. 브리오니는 '로비'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경찰조사를 통해 로비는 감옥에 갇힌다.




- 그녀는 이미 로비의 편지를 읽은 후였고, 언니를 보호하겠다고 결심했으며, 사촌으로부터 로비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것들은 이미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나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바에 따라 그 형태가 일부 수정되어야 했다. (177쪽)



- "아무 말도. 숨쉬는 거랑 신음소리만 들었어. 그렇지만 보지는 못했어. 그래서 확실히 말할 수가 없는 거야."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할 거야."

이렇게 해서 각자의 입장이, 앞으로 몇 주, 아니 몇 달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드러나고, 개인적으로는 그후로도 오랜 세월을 악몽처럼 쫓아다니며 그들을 괴롭히게 될 각자의 입장이 호숫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바로 이 순간에 결정되었다.(241쪽)




5. 소설의 구성은 

1부는 탈리스 가에서 분수사건, 서재사건과 로비가 누명쓰는 장면을

2부는 로비가 입대조건 석방 후 2차 대전에 참전해서 전쟁터에서 후퇴하는 과정을 

3부는 뒤늦게 속죄의 심정으로 런던에서 수련간호사로 일하는 브리오니를

4부는 1999년 런던에서 77세의 생일을 즈음한 브리오니를 그린다. 그리고 반전





6. '서재사건'의 묘사는 숨죽이게 만든다. 경찰에 체포되는 과정을 브리오니의 시점과 실제현실에서 로비와 세실리아가 나누는 장면으로 대비시키는 묘사는 탁월하다. 2부에서 방대한 자료를 통해 세밀하게 그리는 전쟁의 참상과 병원에서 일어나는 환자들의 치료과정은 단번에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브리오니는 수련 간호사 시절 잡지사에 '분수대 옆 두사람'을 투고하지만 거절당한다. 잡지사의 회신에는 '귀하의 작품에는 이야기라는 척추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다. 브리오니는 속죄로 쓴 작품 속에는 묘사만 있을 뿐 진실과 서사는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용기가 필요한지 보여준다.




전쟁 중에도 세실리아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살고자하는 로비의 의지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가족과 의절하고 간호사로 살면서 진실을 밝히려 했던 세실리아의 사랑은 숭고하다.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던 브리오니는 공상을 즐겼던 어린 소녀였고, 이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커플, 로비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 밖에 없었던 탈리스가의 사람들과 경찰. 그들 각각의 입장은 달랐고, 각 인물들에 감정이입을 해보면 누구하나 증오할 수 없는 인물이다. 사건은 일어났고, 어떻게든 결론지어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척추'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 활자화된 악마가 모호하고 암시적인 철자 바꾸기 놀이를 하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엉클(uncle), 넛(nut), '다음'을 뜻하는 라틴어 퉁크(tunc), 파도의 흐름을 바꾸려 했다는 옛 영국의 왕 크누트(Cnut).

동화책에서 읽은 압운이 맞는 단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장 작은 돼지 런트(runt), 사냥개가 여우를 쫓는 것((hunt), r그란체스터 목초지 옆 케임브리지 강가에 떠 있는 바닥이 편평한 배 펀트(punt)

각주) 브리우니는 cunt를 본 후 ... 164쪽



처음 세 철자의 부드럽게 파인 구멍 같은 모습은 마치 해부도를 보는 듯 선명한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십자가 발치에 모인 세 사람(세 철자가 십자가 모양을 닮은 철자 t의 발치에 모여 있다고 상상) 165쪽



그녀는 이미 로비의 편지를 읽은 후였고, 언니를 보호하겠다고 결심했으며, 사촌으로부터 로비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것들은 이미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나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바에 따라 그 형태가 일부 수정되어야 했다. (177쪽)



"아무 말도. 숨쉬는 거랑 신음소리만 들었어. 그렇지만 보지는 못했어. 그래서 확실히 말할 수가 없는 거야."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할 거야."

이렇게 해서 각자의 입장이, 앞으로 몇 주, 아니 몇 달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드러나고, 개인적으로는 그후로도 오랜 세월을 악몽처럼 쫓아다니며 그들을 괴롭히게 될 각자의 입장이 호숫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바로 이 순간에 결정되었다.(241쪽)


서재의 조용한 구석이란 말은 성적 황홀경을 의미하는 암호였다.(289쪽)

서재에서 함께했던 몇 분과 화이트홀 버스 정류장에서의 키스(320쪽)


- 로비터너가 1940년 6월 1일 브레이 듄스에서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혹은 세실리아가 같은 해 9월 밸엄 지하철역 폭격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해에 내가 그들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런던을 가로지르는 나의 도보여행은 클래펌 커몬의 그 교회에서 끝이 났다는 사실을, 겁쟁이 브리오니는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언니를 마주 대할 용기가 없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병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연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지금 모두 전쟁박물관 문서보관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520쪽)


- 지난 오습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솔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살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5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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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한글판) 온스토리 세계문학 9
알베르 카뮈 지음, 이수진 옮김 / 온스토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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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의 대화법, 카뮈의 '이방인'(출판사 온스토리)을 읽고



1. 영화 '친구'에 선생님(김광규)이 성적표를 나눠주면서 학생들을 한 명씩 호명하면서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장의삽니다"
"그래 느그 아버지는 밤낮으로 시체닦아 니 학비 대는데 성적이 이따위가? 엎드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건달입니다"
"뭐라고 이기 장난치나? (뺨을 갈기며) 그~래~! 니는 건달 아들이라서 좋~겠다!!"

선생님은 '건달입니다'라는 대답에 학생이 자기를 무시하는 줄 알고 뚜껑이 얼렸다. 정말 아버지가 건달이었는데 말이다. 때로는 진실이 상대를 화나게 한다.



2.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 뫼르소가 애인 마리, 변호사, 판사에게 말하는 방식을 보자. 영화 '친구'는 별거 아니다. 한국에서 이랬으면 난리난다.


그날 저녁에 마리가 나에게 와서 자기와 결혼하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별 차이는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결혼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마리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지난번과 똑같이,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지만 아마도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럼 왜 나랑 결혼해요?"하고 마리가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 그녀가 원한다면 결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55쪽)

변호사는 나에게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나에게 엄마의 장례식 날에 슬펐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질문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만약 내가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면 나라도 난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한동안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나는 엄마를 사랑했겠지만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도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변호사는 내 말을 잘랐는데, 굉장히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81쪽)

판사는 내 말을 가로막으며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신을 믿느냐고 물으며 설득했다. 나는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화가 나서 의자에 앉았다. 판사는 신을 믿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린 사람일지라도 신을 모두 믿는다고 말했다. 86쪽



심지어 범죄의 동기를 묻는 판사의 질문에 

"음 그건 햇빛 때문인것 같다'는 밑도 끝도 없는 대답을 해서 판사를 화나게 한다. 어머니의 죽음, 살인, 사형선고 같은 일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일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한 일이다. 뫼르소는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한 것 뿐인데, 왜 홍시맛이 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이해가지 않을 것이다. 



3. '이방인'의 압권은 단연 판사와 뫼르소가 주고 받는 법정 신이다. 판사의 물음에 특유의 덤덤한 말투로 툭툭 내던지되 심오함이 묻어 나는 말의 힘과 뫼르소의 상념을 서술하는 부분은 흥미진진했다. 

카뮈의 작품을 부조리 문학이라고 칭하지만 읽다보면 현실이 팍팍할 수록 더 악착같이 살아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는 묘한 작품이다.

‪#‎이방인‬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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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 - 정조실록, 개정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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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와 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권, 정조실록을 읽고)



1. 케이블에서 영화 '신세계'를 방영하길래 중간부분부터 시청했다. 골드문 그룹의 2인자인 정청(황정민)은 보스가 죽은 뒤 후계를 둘러싼 암투를 벌이는 와중에 오랜 기간 조직에서 동고동락했던 오른팔 이자성(이정재)가 경찰의 끄나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죽는 순간까지 보복대신 비밀을 안고 죽음을 택한다.

"브라더, 이제 고만 선택을 해라"

정청은 왜 이자성을 살려두었을까?
1) 오랜 기간 함께 한 정 때문에?
2) 보스가 죽은 마당에 든든한 오른팔 이자성을 내치기는 무리였고, 이자성이 그룹을 접수하는 것이 조직을 위해서도 좋다?

반대파의 습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기 이전에 이자성의 존재를 알았다는 점에서 2)는 설득력이 낮아 보였고, 굳이 따지자면 1)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암투속에도 꽃은 핀다. 그리고 진다.



2. 할아버지 영조가 펼쳤던 탕평을 제대로 구현하고 싶었던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목표는 탕평과 사도세자의 신원, 문풍의 부활이었다. 시파와 벽파로 나뉘기도 했지만 중기까지는 인사는 대체로 공명정대 했고, 학문의 정진에 힘써 신하들을 압도했다. 그러나 이슬을 한껏 머금은 꽃잎은 초심을 유지하기 어렵고,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떨어졌다. 207쪽

정조는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내려가기 위해 화성행궁과 성곽을 세웠고, 자신과 어린 왕을 보위하고 자신의 서울 행차와 아들의 화성 행차를 경호하기 위해 장용영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상이 현실화되기 이전에 몸이 쇠약해지면서 김조순(조선 최고의 명문가인 안동 김씨 사람, 김상헌-김수항-김창집---김조순)을 세자의 후견인으로 끌어들였다.

정에 이끌려 판단력을 흐려지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정청은 조직과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자성을 제거해야 했고, 정조는 사도세자의 신원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고 말해야겠지만 정청과 정조는 또다시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아마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맞다. 그런데 우물 속에서 태어난 생명이 간신히 우물을 기어올라와 쐬는 한 움큼의 햇볕에는 짠맛이 난다. 

‪#‎정조‬ ‪#‎조선왕조실록‬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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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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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사프로진행자, 작가, 정치인에서 다시 작가로 돌아온 유시민이 2009년에 쓴 책이다. '청춘의 독서'를 완독하니 책 제목을 '청춘을 향한 독서'로 하는 것도 괜찮았겠다 싶었다. 부끄럽게도 30대 중반에 다다른 시점에서도 이 책에서 소개한 고전 중 하나도 완독하지 못했다. '죄와 벌'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공산당 선언' '인구론' '대위의 딸'(푸쉬킨) '맹자' '광장' '사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종의 기원' '유한계급론'(소스타인 베블런) '진보와 빈곤'(헨리 조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하인리히 뵐) '역사란 무엇인가'. 지금이라도 책을 읽을 수 있겠지만 10대와 20대의 내가 위의 책을 읽었을 때와 지금 읽을 때 감흥은 분명 다르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지 못하지만 5년 뒤 10년 뒤 또 하나의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고전을 읽어나가야 겠다고 다짐한다.



작가 유시민의 장점은 많은 텍스트를 잘 요약해서 읽기 좋게 내놓는다는 점이다. 돌이켜보니 유시민의 책을 몇 권 읽었다. '유시민의 경제학 까페' '나의 한국현대사' '국가란 무엇인가'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논리정연하되 잘 풀어낸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국가란 무엇인가'와 '나의 한국현대사'는 완독은 했지만 흡입력은 적었다. '국가란 무엇인가'는 관념적인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어려웠고, 반대로 '나의 한국현대사'는 역사적인 사실을 나열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청춘의 독서'는 작가 유시민의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책이다. 고전의 줄거리를 짤막하게 소개하고 학생운동시절의 경험과 청년 유시민의 고뇌를 적절하게 섞었다. 한 챕터를 펼치면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전 속에 인물의 삶이 있고, 그 속에 투영된 청년 유시민의 모습도 볼 수 있어 흥미진진하다. 



2.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 계급론'에서는 사람들이 돈을 버는 목적을 돈으로 다른 사람을 이기려고 하는 경쟁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아무리 폭넓게 평등하게 또는 공정하게 부가 나누어지고 공동체의 부가 일반적으로 아무리 증가한다고 해도 재화를 축적하는 일에서 다른 모든 사람을 능가하려고 하는 만인의 욕망에 근거를 둔, 그러한 욕구를 충족하는 데 이르지는 못한다'(225쪽에서 유한계급론, 정수영 옮김 58쪽 재인용)

 


 돈을 생계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고, 그 밖에 기본적인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수단이라고 한다. 어디까지나 이론상 그렇다. 의식주에 대한 기본적 욕구가 충족된 상태에서도 사람은 부를 축적하고 싶어한다. 전세를 사면 내 집을 갖고 싶고, 한 채를 가지면 자식에게 물려줄 집 한 채를 더 갖고 싶어한다. 노후대비를 위해 제테크를 한다. 돈은 이미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적이다.  



아내가 회사에서 힘들 때마다 장난스레 '취미로 하라'고 한다. 취미가 있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내는 '절대 그만두라는 말은 안하네'라며 눈을 흘긴다. 물론 장난이 섞여있다. 전세금 용도로 대출한 빚도 갚아야 하고 공무원인 내 봉급으로 둘은 어떻게 살겠지만 아이가 태어난다면 턱없이 부족하다. 2년 마다 전세금은 오를 것이고, 현재 우리나라의 주거정책의 틀 안에서 집을 사기위해 더욱 허리띠를 졸라메야 한다. 

 앞으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한 심정은 정말 회사일이 힘들면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 내 봉급으로 충분치 않겠지만 기본적인 생활욕구를 채울 수는 있고, 외식을 줄이고, 읽고 싶은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유명 메이커의 옷과 신발 대신 저렴하고 품질좋은 제품을 찾는 수고를 감수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루하루 직장생활에서 월급날을 기다리고 대출금을 갚아나가고 집을 장만하고 자식 교육을 시키다 보면 십수년이 훌쩍 지나갈 것이다. 남들이 몇 평 아파트에 살고, 좋은 자동차를 사는데 내가, 아내가 영향을 받지 않고 산다면 굳이 돈을 벌기 위해 살지 않고 다른 가치와 삶의 욕망을 만족시켜나가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너무 현실감각없고 뜬구름 같은 소리를 하는 걸까?



'저학력 저소득 고령층 유권자들이 유한계급의 속물주의와 물신숭배 문화를 충실히 대변하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준평화적 야만 문화 단계에 있는 모든 나라에서 불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243쪽)




3.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에 관한 몇 구절을 읽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발견했다.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260쪽)



'토지 사유는 커다란 맷돌의 아랫돌이다. 물질적 진보는 맷돌의 윗돌이다. 노동계층은 증가하는 압력을 받으면서 둘 사이이에서 갈리고 있다'(263쪽)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 '사기'에 관한 글이 눈에 잘 들어오는 걸 보니 2015년 대한민국에 사는 나의 뇌구조가 조금 보이는 듯 하다.






- 메모들


종의 기원: 자연에는 다양한 종이 있다. 모든 종은 생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개체를 만들어내며, 개체는 생존을 위해 서로 경쟁한다.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 사이에는 변이가 있다. 개체의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변이는 보존되고 유전되며 불리한 변이는 소멸된다. 이러한 자연선택을 통해 생물의 진화가 일어난다. 모든 생물 종은 따로따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공통의 조상에서 유리했으며, 이러한 자연선택과정을 통해 수없이 다양한 종이 진화해온 것(208쪽,209쪽)



-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니콜라이 네크라소프, 시인)


- 멜서스, 인구론,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

지구행성의 위기, 1인당 에너지 사용량, 폐기물 배출량은 기하급수, 지구의 온실가스처리능력 생태계재생능력은 일정유지 또는 감소


- 피고의 범죄부인이 그의 무죄의 증거가 될 수 없다면 그의 자백은 더욱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위의 딸 중)



-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둘 모두를 가질 수 없다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 것.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삶보다 더 절실히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구차하게 삶을 얻으려 하지 않으며, 죽음도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환란을 피할 수 있어도 피하지 않는 것이다(맹자, '고자 상'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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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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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深淵)속의 모스부호, '짧게 네번, 길게 세번, 짧고 길고 길고 짮게, 짧게 한번'('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김연수))



1. 심연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1) 깊은 못
2) 좀처럼 빠져 나오기 힘든 구렁(비유)
3)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간격(비유)



이 소설은 심연이다. 표면은 잔잔해 보이지만 그 속엔 수많은 이야기 모래가 침전되어 있기 때문이고, 모래와 자갈들은 뒤엉켜 물 속 생태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물간의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있다.



2. '카밀라(정희재)'는 미국의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양모는 죽는 순간에 한국에 있는 친오빠로부터 연락이 왔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카밀라에게 말한다. 양부가 보낸 박스 속에 담긴 한장의 사진 '이 세계가 우리 생각보다는 좀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진(1988년경)'은 카밀라가 쓴 책 '너무나 사소한 기억들: 여섯상자 분량의 입양된 삶'에 수록되고 그게 한 출판사의 눈에 띄였다.


오직 동백꽃(Camelia)만이 나의 생물학적 엄마를 안다(57쪽)


사진에는 나무아래에 어린 희재를 안고 있는 진남여고 학생이 있다. 카밀라는 엄마의 체취를 좆아 시청으로, 진남여고로, 신문사로, 학교뒤 '바람의 말 아카이브'로 변한 '양관'이라는 벽돌건물로 분주히 움직인다.



3. 소설은 1부에서는 카밀라의 시선으로, 2부는 희재의 엄마 '정지은'의 시선으로 3부는 정지은의 고교동창의 시선으로 4부는 '양관'의 주인이자 '정지은'의 아버지가 다닌 회사의 사주의 아들인 '이희재'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정지은(엄마)과 정희재(카밀라, 딸), 정지은과 최성식(진남여고 선생), 최성식과 신혜숙(최성식의 부인, 당시 진남여고 교사, 현 진남여고 교장),


정지은과 이희재, 고공 크레인에서 농성하다가 자살한 정지은의 아버지와 그의 사주인 이희재의 아버지, 정지은과 고교동창생들,



진남이라는 가상의 공간(배경은 통영, 남해 등)에서 펼쳐지는 사람 간의 심연은 깊다.




4.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정희재의 엄마, 자살한 정지은이 2부에서 딸에게 하는 말이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고등학생에게는 너무나 깊은 상흔이었고, 강제로 딸을 입양 당해야 했던 더 큰 상처로 고통은 깊어졌다.


파도는 지구와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의 인력에 의해 생긴다는데, 바다로 상징되는 엄마에게 딸은 파도였구나. 딸은 엄마의 부름을 받고 진남에 이끌려 온 것이다.




5. '짧게 네번, 길게 세번, 짧고 길고 길고 짮게, 짧게 한번'

모스부호로 HOPE을 뜻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과 이상이 쌓아올린 고공크레인 위에 서 있다. 크레인의 높이는 다르지만 나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다.

정지은이 크레인 위의 아버지에게 보낸 모스부호를 잊지 말자.



'모든 것은 두번 진행 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 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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