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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속죄'(이언 매큐언)를 읽고
1. 사람들은 불확실성과 불분명함을 못견뎌한다.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특히 그것들이 논쟁거리인 경우에 '이 문제에서 이 관점이 옳다'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일갈형 '애정남(애매한 것 정해주는 남자'은 뭔가 똑부러지고 신뢰감을 준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리 단순한 게 아니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2. '속죄'는 '단정'과 '속단'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한다.
탈리스 가의 1남 2녀 중 막내인 열 서너살 '브리오니'는 정리정돈을 잘하고 상상을 통해 소설쓰는 일에 푹 빠져 있다. 소설쓰기는 자신만을 비밀을 간직하는 작업이자 세상을 축소하여 손 안에 넣는 즐거움을 준다. 브리오니의 언니 '세실리아'와 탈리스 가의 파출부의 아들인 '로비'는 소꿉친구이자 대학동창이지만 왠지 모르게 서로 거리감을 두며 자랐고, 세실리아는 로비에 대해 이유를 모르는 반감마저 있었다. 브리오니의 이모는 가출해서 파리에 살고 있고 이모의 딸 '롤라'와 쌍둥이 형제는 브리오니의 집에 잠시 거처하게 된다.
오랜만에 세실리아의 오빠 '레온'과 레온의 친구 부호의 아들 '마셜'도 모이고 문제의 사건이 벌어진다.
3. '분수 사건'은 전쟁에서 전사한 브리오니의 삼촌의 유품인 꽃병에 꽃을 꽂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세실리아는 삼촌의 꽃병에 꽃을 꽂고 물을 담기 위해 분수쪽으로 가는데, 불편한 로비와 마주친다. 몇 마디 나누다가 꽃병이 깨지면서 몇 조각이 분수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각을 잃어버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지체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분수 속으로 뛰어들고 로비는 분수 앞에서 그 광경을 바라본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로비와 세실리아 사이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세실리아는 집으로 들어간다.
4. '분수 사건'을 겪은 후 세실리아는 그동안 자신이 느꼈던 로비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짐작하게 되고 극적으로 로비와 세실리아는 서재 한 구석에서 사랑을 나누려는 순간, 창밖으로 '분수사건'을 목격한 '브리오니'는 로비가 언니를 덥치는 것으로 오해하고 '서재사건'을 보고는 로비의 폭력성을 단정해버린다. 브리오니는 소설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이종사촌인 쌍둥이 형제가 사라지고, 그들을 찾는 와중 브리오니는 사촌 롤라가 한 남자에 의해 강간당하는 찰나를 목격하는데, 둘 모두 범인이 누군지 확실히 보지 못했다. 브리오니는 '로비'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경찰조사를 통해 로비는 감옥에 갇힌다.
- 그녀는 이미 로비의 편지를 읽은 후였고, 언니를 보호하겠다고 결심했으며, 사촌으로부터 로비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것들은 이미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나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바에 따라 그 형태가 일부 수정되어야 했다. (177쪽)
- "아무 말도. 숨쉬는 거랑 신음소리만 들었어. 그렇지만 보지는 못했어. 그래서 확실히 말할 수가 없는 거야."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할 거야."
이렇게 해서 각자의 입장이, 앞으로 몇 주, 아니 몇 달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드러나고, 개인적으로는 그후로도 오랜 세월을 악몽처럼 쫓아다니며 그들을 괴롭히게 될 각자의 입장이 호숫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바로 이 순간에 결정되었다.(241쪽)
5. 소설의 구성은
1부는 탈리스 가에서 분수사건, 서재사건과 로비가 누명쓰는 장면을
2부는 로비가 입대조건 석방 후 2차 대전에 참전해서 전쟁터에서 후퇴하는 과정을
3부는 뒤늦게 속죄의 심정으로 런던에서 수련간호사로 일하는 브리오니를
4부는 1999년 런던에서 77세의 생일을 즈음한 브리오니를 그린다. 그리고 반전
6. '서재사건'의 묘사는 숨죽이게 만든다. 경찰에 체포되는 과정을 브리오니의 시점과 실제현실에서 로비와 세실리아가 나누는 장면으로 대비시키는 묘사는 탁월하다. 2부에서 방대한 자료를 통해 세밀하게 그리는 전쟁의 참상과 병원에서 일어나는 환자들의 치료과정은 단번에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브리오니는 수련 간호사 시절 잡지사에 '분수대 옆 두사람'을 투고하지만 거절당한다. 잡지사의 회신에는 '귀하의 작품에는 이야기라는 척추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다. 브리오니는 속죄로 쓴 작품 속에는 묘사만 있을 뿐 진실과 서사는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용기가 필요한지 보여준다.
전쟁 중에도 세실리아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살고자하는 로비의 의지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가족과 의절하고 간호사로 살면서 진실을 밝히려 했던 세실리아의 사랑은 숭고하다.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던 브리오니는 공상을 즐겼던 어린 소녀였고, 이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커플, 로비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 밖에 없었던 탈리스가의 사람들과 경찰. 그들 각각의 입장은 달랐고, 각 인물들에 감정이입을 해보면 누구하나 증오할 수 없는 인물이다. 사건은 일어났고, 어떻게든 결론지어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척추'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 활자화된 악마가 모호하고 암시적인 철자 바꾸기 놀이를 하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엉클(uncle), 넛(nut), '다음'을 뜻하는 라틴어 퉁크(tunc), 파도의 흐름을 바꾸려 했다는 옛 영국의 왕 크누트(Cnut).
동화책에서 읽은 압운이 맞는 단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장 작은 돼지 런트(runt), 사냥개가 여우를 쫓는 것((hunt), r그란체스터 목초지 옆 케임브리지 강가에 떠 있는 바닥이 편평한 배 펀트(punt)
각주) 브리우니는 cunt를 본 후 ... 164쪽
처음 세 철자의 부드럽게 파인 구멍 같은 모습은 마치 해부도를 보는 듯 선명한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십자가 발치에 모인 세 사람(세 철자가 십자가 모양을 닮은 철자 t의 발치에 모여 있다고 상상) 165쪽
그녀는 이미 로비의 편지를 읽은 후였고, 언니를 보호하겠다고 결심했으며, 사촌으로부터 로비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것들은 이미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나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바에 따라 그 형태가 일부 수정되어야 했다. (177쪽)
"아무 말도. 숨쉬는 거랑 신음소리만 들었어. 그렇지만 보지는 못했어. 그래서 확실히 말할 수가 없는 거야."
"괜찮아.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할 거야."
이렇게 해서 각자의 입장이, 앞으로 몇 주, 아니 몇 달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드러나고, 개인적으로는 그후로도 오랜 세월을 악몽처럼 쫓아다니며 그들을 괴롭히게 될 각자의 입장이 호숫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바로 이 순간에 결정되었다.(241쪽)
서재의 조용한 구석이란 말은 성적 황홀경을 의미하는 암호였다.(289쪽)
서재에서 함께했던 몇 분과 화이트홀 버스 정류장에서의 키스(320쪽)
- 로비터너가 1940년 6월 1일 브레이 듄스에서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혹은 세실리아가 같은 해 9월 밸엄 지하철역 폭격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해에 내가 그들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런던을 가로지르는 나의 도보여행은 클래펌 커몬의 그 교회에서 끝이 났다는 사실을, 겁쟁이 브리오니는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언니를 마주 대할 용기가 없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병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연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지금 모두 전쟁박물관 문서보관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520쪽)
- 지난 오습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솔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살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5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