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랄한 라라
마광수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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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권의 책이 도착했다. 투명한 비닐로 싸여진 책, 그리고 19세 이상만 구입 가능하다는 빨간색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난 왜 이렇게 뒷북만 치는지 모르겠다. 그 경고(!) 문구를 그제서야 본 것이다. 책을 고를 때 봤더라면, 그 선택이 달라졌을까?

   사실 지금까지 많은 책들을 읽어왔지만, 19세 이상만 볼 수 있다는 책은 딱 한 권 뿐이었다. 바로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멋진 제목 때문에 도전한 책이었지만, 그 후 누군가 내게 하루키를 이야기하면 난 류를 이야기했다.

   첫번째 만남이 기대 이상이었기 때문에 진작에 알았더라도 난 이 책을 선택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동안 명성만 들어왔던 마광수 교수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 아닌가. '즐거운 사라'는 모르지만, '발랄한 라라'는 알고 싶었다.

   『발랄한 라라』는 마광수 교수가 1966년부터 2006년까지 쓴 서른편의 단편들을 엮은 것이다. 어떻게 서른편의 단편들을 한권으로 묶을 수 있지? 이런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의 단편은 원고지 20매 내외의 아주 짧은 이야기도 있고, 100매 분량의 긴 이야기도 있기 때문이다.

   이 서른편의 짧고 긴 단편들을 읽으면서 한가지를 발견했다. 그의 작품들이 금기시 될만큼 야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이야기는 연애 소설에서도 읽을 수 있고,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문제는 표현, 그러니까 단어 선택에 있다. 여느 작가들은 우리가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들어하는 단어들을 영어로 표현하며 고상을 떤다. 그런데 그는 그 단어들을 스스럼없이 내뿜는다. 아마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자에 속할 것이다. 솔직히 읽으면서 거북스러웠던 부분이 여럿 있었으니까.

   그가 서른편의 단편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다. 성(姓)적 자유 혹은 그것을 표현하는 자유다. 재밌고 즐거운 이야기라면, 한가지 주제로 통일한 것도 괜찮으리라. 일단 이야기는 재미가 생명이니까. 그런데 이 작품들은 재밌지도, 즐겁지도 않다. 오히려 거북스러운 점이 더 많았다고나 할까.

   그는 왜 이토록 한가지 주제를 반복해서 쓰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비난이리라. 나처럼 고상 떠는 독자 혹은 작가들을 향한 비난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쓴다고. 사실은 궁금하면서, 말하고 싶으면서도 주위를 의식해 책 한권 읽는 것도 눈치보는 우리와는 다르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게 아닐까.

   그래도 거북한 건 여전하다. 그 거북함을 무릅쓰고 읽을 수 있을만큼 주제면에서 좀 더 발전한 그녀를 만나고 싶다. 사라, 로라, 라라... 다음의 그녀는 어떤 이름일까.



08-100.『발랄한 라라』 2008/10/05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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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사전 - 브리태니커와 구글에도 안 나오는 인류 지식의 최신 보고서
카트린 파지크.알렉스 숄츠 지음, 태경섭 옮김 / 살림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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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사람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리라. 이런 내게 아주 매력적인 제목의 책이 나타났다. 『무지의 사전』이란다. 그것도 정보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브리태니커나 구글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란다. 거의 모든 분야를 정복했다고 말하는 인간들이 아직까지 규명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아직까지 밝히지 못한 목록을 훑어보면 모두 한번쯤은 들어본 것들이다. 또 냄새나 잠, 물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것도 있고  더이상 밝혀내야 할 것이 있을까, 싶은 것들도 있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한 미스테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러나 미스테리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과학적으로 어느 부분까지는 밝혀냈으나 그 이상은 밝혀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현재는 무지의 사전 목록에 있지만, 조만간 혹은 언젠가는 지식의 사전에 등재될 수도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도 많은데, 굳이 밝혀지지 않은 것들도 알 필요가 있을까? 시간 낭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연구하고 밝혀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알기 쉽게 쓰여진 책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모르는지에 대해서도 알기가 어렵다. 나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전문용어도 많고, 낯선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만큼 길게 다루지도 않는다. 물론 낯선 이야기를 길게 다룬다면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뜬구름을 잡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다. 『무지의 사전』이라는 제목처럼 어쩌면 독자들이 정말로 몰라주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거의 모든 분야를 정복했다고 말하는 인간들이지만, 사실 우리는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기회가 된다면 이 책에서 소개된 지식의 빈틈들을 더 깊이있게 파고 들고 싶다. 

08-099.『무지의 사전』  2008/10/03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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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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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다른 이들의 독서기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자신의 독서기를 소개한 많은 사람들의 책을 읽었지만, 김열규 교수만큼 연로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석학의 독서기를 엿본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석학의 내공을 따라가지 못할까봐 걱정도 뒤따랐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당혹스러움이었다.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나의 어린시절과 너무나도 닮은 그의 어린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석학이니 그의 독서기는 남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와 내가 살았던 시대적인 배경만 달랐을 뿐 책을 읽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역시 독서는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행위인가 보다.
   이 책을 단순히 김열규 교수의 독서기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그는 자신의 독서기를 이야기하고 있고 책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지만,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에게 책은 인생의 일부가 될 수도 있지만, 인생의 전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읽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그를 둘러싼 자연을 함께 느끼고자 했으며,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과 소통했으며, 나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을 잡았다.
   또한, 그는 지금의 자신을 만든 여섯권의 책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라 그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아쉽게도 여섯권의 책들 중 한권도 읽은 책이 없어 책에 대한 공감은 크지 않았다. 다만, 그가 소개한 책들처럼 내게도 그런 역할을 했던 책들이 있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독서와 관련된 그의 일화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산책하듯이 책을 읽는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책을 읽다보면 점점 책에 빠지게 되고 가속도가 붙어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읽게 된다. 게다가 일상이 바빠지면 더더욱 전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그는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산책처럼 읽어도 그만, 읽다 말아도 그만인 것처럼 책을 읽는단다. 비슷했던 그와 나의 어린시절처럼 내가 그의 나이가 됐을 때도, 부디 지금의 그처럼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길 바래본다.

우리 모두 책 읽는 쾌락주의자가 되었으면 한다. (p.216)
재미가 먼저다. 신명이 앞서야 한다. 교양이니 지식이니 하는 그 고상한 소득은 나중 문제이다. 흥청거리는 게 독서의 제일보이다. (P.231)

08-098.『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2008/10/03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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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 탈근대의 서사와 담론 청동거울 문화점검 43
박진 지음 / 청동거울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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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책을 읽다보면 가끔씩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 이런 이야기는 어떤 장르라 하는걸까? 흔히 장르라 하면 문예사조를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그 문예사조라는 것이 어찌나 오래되고 방대한지 도대체 언제적부터 들춰봐야할지 막막하기만 해요. 특히 저처럼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초보자들은 이내 포기해 버리곤 하죠. 또 마음 먹고 들춰보기 시작해도 오래전 문학들은 접해보지 않은 것들이 많아 그저 보기만 할 뿐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죠.
   처음부터 너무 욕심내지 말자구요. 우리에게 친숙한 지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구요.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이라는 제목만 보고 눈치채신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일단 경계의 모호성이 떠오릅니다.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장르 간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게다가 현재도 활발하게 진행중이지요.
   이 책은 현재의 서사물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서사물이라고 하면 비단 문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문학, 영화, 애니메이션 등에서 장르 간의 혼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현재를 이야기하자만 문학만 따로 떼어낼 수는 없겠죠.
   이 책은 현재의 서사물들 중 특히 두드러지는 세 가지 서사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바람이 불고 있는 팩션과 역사 서사물, 점점 기법이 다양해지고 있는 SF 서사물, 그리고 SF와는 또다른 타자를 만날 수 있는 공포 서사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서사물들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것들이고, 우리에게 친숙한 텍스트와 영상들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고 재밌습니다. 그동안 생경하고 낯선 텍스트 때문에 담론이라면 쉽게 손이 가지 않았던 분들도 이 책만큼은 용기를 한번 내 보세요.

내용 맛보기
역사와 허구의 강렬한 접속 : 팩션과 역사 서사물
  최근 출판계나 영화계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 바로 "팩션(Faction)"이라는 장르다. 팩션은 우리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서사 양식으로, 흔히 역사추리소설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러나 팩션과 역사추리소설은 구별되어져야 한다. 실재와 허구를 과감하게 뒤섞어 결과적으로 리얼러티를 혼란에 빠뜨리는 다양한 종류의 서사물이 팩션이라면, 역사추리소설은 역사적ㆍ추리적 요소가 필수인 팩션의 특수하고도 대표적인 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역사추리소설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기점으로 국내에서도 꾸준히 창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출간되고 있는 한국의 역사추리소설들은 한국적인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팩션-역사추리소설은 비판과 회의의 대상으로 진실(fact)을 등장시키는 반면에 우리의 역사추리소설은 여전히 근대의 이념 논쟁 틀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처럼 팩션-역사추리소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이유는 역사관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란 과거의 사실들(fact)을 역사가가 "상상력"을 발휘해 재구성한 것이다. 근대 역사학에서는 허구적 상상력을 거부하며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도 했지만 오늘날 다시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역사가만 그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법이 있겠는가. 상상력을 발휘해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문학가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낯선 논리적 질서 속으로 : SF 서사물
  대체 역사(alternative)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과거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실제와는 다른 결말을 낳았다고 가정하고, 그 이후에 펼쳐질 가상의 역사를 구성해보는 일종의 역사 시뮬레이션이다. 장르적으로 볼 때 대체 역사는 역사물과 SF의 중간 지대에 놓여 있으며, SF 장르의 하위 갈래로도 볼 수도 있다. 
  SF(Science Fiction)는 시간의 이동이나 공간의 확장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1990년대 이후 스팀펑크, 리보펑크, 슬립스트림 등의 하위 장르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스팀펑크(Steampunk)는 근대적인 과학 기술의 시발점인 '증기기관의 시대'를 무대로 삼는 일종의 대체 역사 SF로, 과학 기술과 기계 문명으로 인해 가시화된 문제들의 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반성하고자 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가 바로 이것이다.
  슬립스트림(Slipstream)은 주류소설(Mainstream Fiction, MF) 작가들이 SF 장르의 프로토콜을 차용해서 쓴 경계 지대의 작품들로 최근 우리 소설에서 두드러지고 있는 장르다. 박민규의 『카스테라』, 서준환의 『파란 비닐인형 외계인』, 조하형의 『키메라의 아침』, 백민석의 『러셔』 등이 있다.
  리보펑크(Ribopunk)는 첨단 유전공학과 생체공학의 문제에 집중하여 인간복제나 유전자 조작에 의한 신계급주의 사회의 모순을 그려내고 있는 것으로, 그 어떤 쟁점들보다도 '현실적'이다. 구체적인 현실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SF물보다도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와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이처럼 SF는 하위 장르로 분화되고 있지만, 《카우보이 비밥》처럼 온갖 장르의 코드들이 혼합된 혼종 서사물들도 등장하고 있다.

타자성의 서사화 : 공포 서사물
  독특한 시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SF를 통해 우리는 미지의 타자를 만나곤 한다. 미지의 타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비단 SF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공포 서사물에서 괴물 혹은 귀신이라는 타자를 만나게 된다. 또한 우리는 공포영화에서 누가 빈번히 괴물 또는 귀신이 되는가를 살펴보면서 "그 사회가 억압하고 있는 본원적인 무의식"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책 속의 책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검은꽃』, 김영하, 문학동네, 2003
─ 미시사의 접근 방식을 좀더 구체적으로 환기시키는 역사소설이다. (p.67)

『꾿빠이, 이상』, 김연수, 문학동네, 2001
─ 이상의 유실된 데드마스크와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를 둘러싼 역사적 자료들을 토대로 창작됐으며, 포스트모던한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다. (p.71)

『비명을 찾아서』, 복거일, 문학과지성사, 1998
─ 삶의 실존적 조건으로서의 역사의 의미, 역사와 개인의 관계 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엿볼 수 있으며 대체 역사를 다루고 있는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p.85)

『카스테라』, 박민규, 문학동네, 2005
─ 박민규는 우주적 상상력과 외계인이라는 소재를 즐겨 활용하는 MF 작가로 그의 단편에서 SF의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p.143)

『해저2만리』, 쥘 베른, 열림원, 2007
─ 1866년을 배경으로 한 SF 소설로, 스팀펑크의 전형을 보여주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원작이다.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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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지음, 이재형 옮김 / 부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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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메르의 그림과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레이스 뜨는 여인』, 문득 얇은 책 속에서 이 가을에 어울리는 로맨틱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 여인을 꼭 닮은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뽐므. 그녀에게는 "손님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OK"라는 어머니가 있고, 열여덟살이 된 그녀는 어머니를 떠나 파리에서 미용사를 하고 있다. 뽐므는 같은 미용실 언니인 마릴렌과 친하게 지낸다. 마릴렌의 친구도 함께 만나고 바닷가로 여행도 떠난다. 그러나 마릴렌은 뽐므를 바닷가에 홀로 남겨둔채 떠난다. 
  혼자 남은 뽐므는 에므리라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는 박물관장을 꿈꾸는 학생으로 방학을 이용해 부모님의 성이 있는 곳으로 잠시 내려왔다고 한다. 서로에게 첫눈에 반한 그들은 함께 지내며 사랑을 키워 나가려 한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마릴렌이 그녀 곁을 떠난 것처럼 에므리도 이별 선언을 한다. 뽐므는 말없이 그 이별을 받아 들인다.
   이쯤되면 뽐므의 사랑이 그다지 깊지 않았을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므리와 헤어진 뽐므는 거식증을 앓으며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보다못한 뽐므의 어머니가 에므리에게 편지를 쓰게 되고, 그 편지를 받은 에므리가 뽐므를 만나러 온다. 뽐므를 만나러 온 에므리는 뽐므에게서 한가지 대답만을 듣길 원했다. 에므리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뽐므는 그가 듣길 원하는 대답을 해줬다. 그녀에겐 에므리가 아닌 다른 남자가 있었다고.

   그럼 여기서 잠깐! 앞으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왜 어머니 곁을 떠났을까? 그녀는 "뭐든지 OK"라는 어머니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매사에 수동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하고 있는 일에서조차 지나치게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 
   다음으로, 마릴렌은 왜 뽐므 곁을 떠났을까? 마릴렌이 생각하기에 뽐므는 마릴렌보다 어려서 예쁘다 뿐이지 자신보다 나은 구석이 아무것도 없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에게 단지 어린 외모 때문에 남자들에게 밀린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므리는 왜 뽐므에게 이별 선언을 했을까? 이것은 가장 쉽다. 비록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을지 모르나 그에게 그녀는 평범한 여자였다. 그 평범함은 예비 박물관장을 꿈꾸는 학생과 세상 물정 모르는 미용사의 벽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이별은 어찌보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뽐므와 사람들 간에는 벽이 존재했지만 상대방만 느꼈을 뿐 뽐므는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녀의 거식증은 무의식적인 발로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에므리가 찾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그 벽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에므리에게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을지도 모른다. 비로소 사람들과의 소통 방법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기대했던 것처럼 로맨틱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서 인상적인 작품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로맨틱한 일을 만나게 되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안타깝지만 뽐므와 마릴렌처럼, 혹은 뽐므와 에므리처럼 만나서 헤어지는 일이 훨씬 더 많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정리하고 싶지 않다. 굳이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사람 간의 관계와 소통을 되짚어 보게 만드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08-095.『레이스 뜨는 여자』 2008/09/24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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