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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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Second Edition]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다시 읽었다. 작년에 출간된 이 책을 다시 집어든 이유에는 내 나름의 고민과 답답함이 뒤석여 있다. 지난 두 달여간 수도 서울에서 펼쳐지고 있는 촛불집회를 보면서, 출범한 지 불과 세 달밖에 되지 않은 정부가 허우적되는 것을 보면서, 유가·원자재와 물가의 상승, 성장 둔화로 이어지는 스테그플레이션에 직면한 한국 및 세계 경제의 침체를 보면서 작금의 세계 시장을 움직이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오류와 모순을 곱씹고자 했던 것이리라.

  자본주의는 진화를 거듭해왔다. 사회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자본주의의 포효는 전세계 모든 국가들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재성에서 그 역사적 인과성을 의심할 수 없다. 지난 백여년 동안 자본주의의 발전은 매우 빠른 속도로 급변했다. 상업 자본주의, 산업 자본주의, 독점 자본주의, 수정 자본주의를 거쳐 현재의 신자유주의로 변천하여 왔다.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들에 의해 더욱 강도높게 학습받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헤게모니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에 과연 어느 누가 반기를 들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신자유주의는 절대성을 부여받은 체제인가.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미국 정부와 석학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한다. 소위 '시카고 보이스'로 불리우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지식 전도사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시장에서의 경쟁 제일주의를 웅변한다. 그들은 시장에서 투명한 경쟁의 극대화야말로 효율성과 합리성을 보증하는 최고의 가치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해 전도되는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물결은 세계 주류경제학으로 굳어지며 다수의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신자유주의가 절대선일까.

  이에 대해 장하준 교수는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장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들의 경제 개발 내면 속에 신자유주의와 배치되는 정책이 태반이었음을 언급한다. '자유 무역', '외국인 투자', '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체제의 분자들은 선진국에게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증거한다. 또한 '지적 재산권', '재정 건전성', '부정부패', '민족성' 등의 관점에서 경제논리를 천착하고 있어 자못 흥미롭다. 요컨대 신자유주의는 경제 개발의 결과였지 과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장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선진국들의 과거 경제 개발 역사의 구체적인 사례와 통계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입증된다. 이미 선진국들은 강력한 보호무역과 외국인 투자 규제, 그리고 국영기업의 활발한 운영을 통하여 선진국에 진입했다. 그리고 이후에 사다리를 걷어찼으며,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개발도상국들에게 개방의 압력을 가하고 있다. WTO, 세계은행, IMF는 이러한 선진국들의 경제 제국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는 세계화의 삼총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아이러니한 행태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통찰력있는 목소리는 명료하고, 신랄하며, 풍성하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세계 경제는 유가 폭등과 물가 상승, 성장 침체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부자가 많아지는 이상으로 극빈층은 더욱 많아지고, 이로 인한 경제적·사회적 양극화의 심각성은 결코 녹록지 않은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양극화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OECD 30개국 중에서 멕시코와 한국은 양극화 부문에서 최고 수준을 뽐내고 있다. 현재 한국의 '소득 5분위 배분율'을 보라. 매년 증가하는 부자와 극빈자간의 심각한 괴리현상의 실재적 수치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하다. 자살율은 OECD 국가 중 단연 1위다. 미칠 노릇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GDP 2만불 내외에 있는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의 사정 또한 답답하기 매한가지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철저한 시장주의와 개방으로 탄력을 받아 먹고살기가 더 좋아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2만불에서 3만불로 가는 중진국들의 성장속도는 더디기만 하는가. 그리고 극빈국들의 경제사정은 더욱 힘들어져만 가는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교수의 신랄하면서도 명료한 통찰은 이에 대한 명징한 답을 제시한다. 신자유주의는 선진국이 된 이후에 비로소 먹히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말이다. 선진국이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메타포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계속해서 불거지고 있는 쇠고기 사태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에 궤를 같이 한다. 국가간 자유무역협정(FTA)은 신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GDP 14조 달러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국 시장에 대한 통상국가 한국의 군침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외교협정이라는 것은 엄연히 '주고 받음'을 전제한다. 자동차 관세 2.5%를 내려받기 위해 한국은 너무나 많은 무리수를 두었다. 문제는 농업과 축산업이 아니다. 한미FTA의 핵심 키워드는 서비스, 투자, 지적재산권이다. 비단 관세만 내리는 게 아니라 미국의 구미에 맞게끔 국내의 법과 제도를 손질하는 데 있는 것이다. 더욱이 투자와 지적재산권 부문의 손실액은 과히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이에 대한 이해없이 무조건적으로 무역량 증대를 위해 한미FTA에 찬성하는 이들을 보면 무식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한미FTA의 위험성을 제대로 응시해야 한다. GDP 1조 달러를 넘지 못하는 인구 5천만의 대한민국이 세계 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패권국가 3억의 미국과 맞장을 뜨자는 용기는 가상하지만, 실재적 경제 현실에 있어 매우 불합리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개방 자체는 나쁜 것이 결코 아니지만, 잘못 개방할 경우 나라가 망할 수 있음을 우리는 세계사에서 수없이 봐왔다. 실례로 1996년 김영삼 정부의 꼴불견같은 금융시장 개방으로 인해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국가를 부도사태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무서움을 잘 알 법도 한 한국의 위정자들이 또 다시 맹목적으로 성장지상주의와 시장주의에 목숨을 거는 것이 코미디가 아니라 무엇이랴.

  작금의 이명박 정부는 철저한 신자유주의 신봉 정부다. 그들에게 신자유주의는 종교에 가깝다. 대단한 신앙이다. 더욱이 미국의 진돗개를 자처하며 끌려다니는 형국은 개콘 수준이다. 그들이 공약으로 내건 정책들을 보면 오금이 저린다. '의료보험 민영화', '수도사업 민영화', '인터넷 종량제' 등 얘기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정책들이다. 오히려 대운하가 낫다. 그냥 땅 파는 게 낫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만큼 한국의 경제와 경쟁력은 대단한 수준이 못 된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외연의 확대가 아닌 보다 장기적이고 실재적인 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꾀하는 게 올바른 위정자의 모습이 아닐까.

  횡설수설하며 글로 발설한 나의 이러한 요동은 비단 나만의 번민과 답답함은 아닐 것이다.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통해 명료하게 갈파한다. 신자유주의는 개발도상국과는 맞지 않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이미 선진국이 된, 그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체제라는 것을.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한국정부의 신자유주의 맹신 정책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선포한다. 미국은 결코 우습게 볼 나라가 아니며, 한국은 그리 대단한 나라가 아니다. 자신감은 제대로 된 현실인식의 전제 하에 발동될 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 청와대에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책여행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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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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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 폴 사르트르는 "다른 사람들이 해방되지 않으면 지식인도 해방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그는 지식인은 시대의 모든 갈등과 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칼 마르크스도 "지식인의 의무는 세계에 대한 해석을 넘어 '변혁'에 있다"고 피력했다. 만약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사르트르와 마르크스가 역설한 지식인의 의무에 제대로 복무했다면 우리 사회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는 한국의 현대사를 구도적인 측면에서 이등분하는 기준으로 '4·19의거'와 '87년 6월항쟁'을 꼽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국 민주주의사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두 사건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피플파워'의 승리였다. 1987년 이후 완성된 형식적 민주주의는 20년을 지나오면서 그 안정성과 발전성이 더욱 공고해졌다. 나는 이제 더이상 한국정치가 과거 독재정치로 회귀하지 못할 것임을 확신한다. 성숙한 민주주의 대중으로 거듭난 우리 국민이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87년 체제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안착되면서 우리 사회는 수많은 변화의 물결을 맞이했다. 87년 이전에는 '군사정권'이라는 누구에게나 분명하던 악이 존재했지만, 민주화가 달성된 이후에는 선과 악의 선명한 이분법적 전선이 사라졌다. 이전에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했던 지식인들의 실재적인 공공의 적이 사라지면서 다양한 담론들이 형성되었다. 과거 저항적 지식인의 아우라는 희미해졌고, 보다 진보하고 고차원적인 지식인상이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지식인의 흔들리는 위상과 번민은 시작된다.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획득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실현 이후 20년간의 지식인들의 냉정한 현실을 담고 있는 책이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은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의 헤게모니가 얼마나 모순되고 오류로 점철되어 있는지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의무'보다는 '권리'에 익숙한 한국 지식인의 과거와 현재, 더 나아가 급변하고 있는 지식인의 정의와 역할을 폭넓은 각도에서 신랄하게 조명한다.

  세계적으로 한국만큼 지식인에게 명예와 돈과 권력이 동시에 몰리는 경우는 드물다. 지식인이라는 자체로 존경과 선망이 되는 게 바로 한국 사회다. 그렇다면 한국의 지식인들은 사회로부터 받는 과분한 명예와 권리에 대해 응당 행사해야 할 기여와 의무는 제대로 실행하고 있는지 자문자답해야 한다. 이 책의 근본적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의 강점은 넓은 관점에서 지식인의 현재성을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87년 체제 이후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이 어떻게 변하였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지식인 패권주의의 현실은 어떠하며, 정치·경제를 위시한 각 분야와 지식인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현실 지식인의 위기적 본질은 무엇이며, 앞으로 지식과 지식인의 정의가 어떻게 진화해갈 것인지를 분석한다. 더욱이 현실 지식인들의 대담과 인터뷰를 실어 무게감을 더했고, 현실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조망까지 내다보고 있어 균형이 잘 잡혀있다.

  사실 교수사회로 위시되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돈과 권력에 너무 많은 부분 밀착되어 있다. 군사·민간 정부 할 것 없이 교수의 정·관계 진출은 당연시되어 왔으며 최근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붐을 이루고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폴리페서(polifessor)'라는 부정적 맥락의 신조어가 탄생했겠는가. 전문 관료를 의미하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와는 달리 폴리페서는 '정치 지향의 교수'를 지칭하는 용어로 한국 지식사회의 망령적 징후로 표현되곤 한다.

  교수의 정계 진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다.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시민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 교수들은 진출해 있다. 한국사회의 보수적 구도도 문제거니와 교수들의 소신과 일관성에 맥이 없음은 더욱 큰 문제이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흐름에 온전히 편입된 한국의 경제체제에 대해 정·재계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의 소신없는 행태는 씁쓸하기만 하다. 성장지상주의, 시장주의, 미국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알리바이 삼아 오직 신자유주의가 '절대선'인 것처럼 목소리를 내는 그들의 외침은 정작 본심일까.

  한국의 지식이 미국에 너무 종속되어 있는 것 또한 문제다. 미국이 한국 지식인을 생산하는 최대 공장으로 여겨질 정도다. 1948년부터 2007년 6월까지 학술진흥재단에 해외 박사 학위 논문을 신고한 이는 2만4,691명이고, 이 가운데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은 1만3,782명(55.8%)라고 한다. 또한 2007년 6월 서울 소재 9개 대학(경희대·고려대·서강대·서울대·성균관대·연세대·이화여대·중앙대·한양대)의 정치외교·경제·사회학과 교수 365명의 국가별 박사 학위를 조사한 결과, 미국 박사는 306명(83.8%)이고, 한국박사는 24명(6.6%)라 한다. 이러한 수치는 미국 박사가 아니면 아예 인정을 하지 않는 미국 박사 맹신주의의 저속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서 미국 박사 출신 교수들의 헤게모니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코미디를 하나 소개한다. 정태인 교수가 <경향신문>에 칼럼을 써 지식사회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2007년 『나쁜 사마리아인』을 출간하여 신자유주의 구호에 가려진 선진국들의 경제발전 역사의 내밀한 속성을 파헤친 케임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는 세계적으로 매우 저명한 경제학자다. 전문 학계에서 노벨상보다 권위를 더 인정받는 뮈르달상과 레온티에프상을 최연소로 수상했고, 사회과학논문인용지수(SSCI) 3위의 『케임브리지 경제학 논집』의 편집자이기도 한 유능한 경제 전문가다. 그런 장교수가 서울대학교에 교수 신청을 세 번 지원했지만 계속 떨어졌는데, 이를 두고 서울대의 어떤 교수가 "삼류 잡지 에디터가 무슨....."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카고 보이스'로 대변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학파의 철옹성이 얼마나 코미디처럼 굳건한지를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도처에서 확인되는 지식계의 오류와 모순은 무수히 많다. 이전부터 있어왔던 이러한 한국 지식사회의 그늘진 단면은 87년 이후부터 공유했던 보편적 목적과 이상을 상실하면서 그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지식인은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객관적으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용기가 있어야 함은 자명할 것이다. 

  근자에 '대중지성(mass intellect)'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 지식인의 의미는 이미 구시대적 지식인으로 낙인되고 있다. 지식의 소비자인 대중이 생산자로서의 기능을 함께 병행하는 대중지성의 세상이 도래했다.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처음 사용한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의 의미에서 한발짝 더 나간 대중지성은 그 유전자적 의미를 확대하여 '다중지성(swarm intellect)'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인터넷의 급속한 발전과 온라인 컨덴츠·커뮤니티의 질적 향상에 탄력을 받아 이미 지식은 대중의 품 안으로 들어가 다양하고 신속하게 생산·소비되고 있다. 실례로 <노사모>, <오마이뉴스>, <네이버 지식in> 등은 대중지성의 상징적 아이콘이다. 이러한 지식·지식인의 의미와 형태의 변화 속에서 기존 지식인의 구분된 역할과 기능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가. 과연 그들은 죽은 것인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말했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만을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인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된 것이나 진배없다. 이제 한국의 지식인은 변해야 한다. 뛰어난 자기반성 능력으로 새로운 차원의 삶을 역동적으로 지휘할 의무가 있다. 그들이 지식인 본연의 책무를 상기하며 인간의 삶을 물질에서 정신으로, 결과에서 과정으로, 감각에서 의미로 전환시키는 선구자적 실천에 흔들림없이 복무한다면 마르크스가 주창했던 세계를 '변혁'하는 자로서의 지식인의 존재성은 찬란하게 빛을 발하지 않을까. 

  다시 책에 대한 평으로 회귀하자. 탐구 대상을 대학교수로 접사화하여 작가, 언론인, 논객, 법조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다루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 달성 이후 둥개기만 하는 한국사회의 본질적 민주주의 실현의 요원한 단면을 '지식인 코드'로 풀이한 점은 매우 유의미한 작업이라 감히 평한다. 의식있는 저널리즘의 좋은 본보기로 상찬한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지식인 헤게모니의 현실 단면을 세세하게 잘 파헤친 이 책은 민족·탈민족이나 좌파·우파의 이데올로기를 떠나 순수한 애국의 마음으로 한국 사회의 변화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읽혀져야 할 소중한 보배이다.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가교적 이해와 통찰을 위해서 이 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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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세계의 신화 아비투어 교양 시리즈 2
크리스타 푀펠만 지음, 권소영 옮김 / 비씨스쿨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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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인의 사유나 표상이 반영된 신성한 이야기. 우주의 기원, 신이나 영웅의 사적(事績), 민족의 태고 때의 역사나 설화 따위가 주된 내용이다. 내용에 따라 자연 신화와 인문(人文) 신화로 나눈다.

  대한민국 최대 인터넷포털이 제시하는 '신화'에 대한 정의다. 신화 속에는 인류의 근원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과 열정이 반영되어 있다. 세계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누구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인류의 태동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인간의 갈증이 수많은 신화들의 명멸을 이끌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위시하여 각 나라별, 각 민족별로 태동된 다양한 신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함 그 자체이다.

  세계의 근원을 탐구하고자 했던 신화의 정체성은 수천년이 지난 작금의 시대에서도 매우 흥미있는 고전이 되어 있다. 부활절 토끼, 아더왕과 용맹한 그의 부하들, 세계를 구원한 노아의 방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헬레나 등의 이야기는 '상상력'이라는 의미 부여만으로 그 흥미의 본질을 구속하기에는 너무나 재미있고 충분히 스펙타클하다. 신화가 선사하는 페이소스는 인간의 본성 속에 내밀하고 오묘하게 존재하는 자아정체성과 종교성에서 그 색깔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권으로 읽는 세계의 신화』는 세계의 많은 신화들을 소개하는 인문서다. 이 책은 인문, 사회, 과학 등 청소년이 꼭 읽어야 하는 교양서를 보급한다는 취지로 기획된 '아비투어 교양시리즈' 두 번째 책으로서 부담없는 적은 분량으로 세계의 신화들을 정리했다. 독자에게 알맹이 정보만을 주기 위해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전달하려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불필요한 부언과 장황한 설명은 배제한 채, 물리적으로 가름된 카테고리 내에서 신화와 영웅의 이야기를 설명한다.

  책 속에는 많은 신화들이 소개되고 있다. 창조신화, 제물신화, 태양신화, 문명신화 등 다양한 신화들의 원류와 흐름을 설명한다. 기독교와 힌두교를 위시한 주류 종교들의 뿌리와 근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중후반부터 이어지는 신들의 이야기와 소설과 영화에서 자주 접했던 익숙한 영웅들의 활약이 소개되기도 한다. 도판의 적절한 삽입을 통해 해당 신화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뒷받침한 부분은 이 책의 장점이다.

  하지만 적은 지면에 많은 내용을 담으려다 보니 전체적으로 설명의 통일성이 미흡하다. '신화'라는 거대한 테마를 쉽게 이해하는 데에는 부족하다. 독자 중심이 아닌 철저하게 필자 중심의 서술이 그러하고, 소제목별로 끊어지는 설명의 흐름은 몹시 아쉽다. 전체적 내용을 요약하기보다 각 신화의 지엽적 부분을 발췌해 설명하는 정도여서 깊이가 덜하다. 또한 '아는 척 하기'를 비롯한 기본 설명 바깥에 있는 참고박스가 너무 많아 다소 난잡한 구성을 이루기도 한다. 

  책의 설명 구도는 더욱 산만하다. 크게 네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신화를 설명하고 있는데, 설명 방식이 한 편의 신화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신화의 성격을 구분하는 테마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통일성이 떨어지고 읽는 이의 집중도를 희석시킨다. 암기를 위한 중고생 위주의 정리집으로서는 적절하지만 세계의 신화를 흥미있게 일독한다는 차원에서는 무언가 부족하다.

  고대사회를 기준으로 조망하는 신화가 현세대에서도 읽혀야 하는 이유는 현대까지를 아우르는 원형성에 있다. 우주의 태고, 인류의 탄생과 죽음, 자연환경 등 삶과 관련된 극도의 상상력이 빚어낸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세계를 보는 넓이와 각도를 확장한다. 요컨대 신화가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원형성에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이러한 신화의 보편적 속성을 발산시키지 못한 점은 '한 권으로 읽는 세계의 신화'라는 기대섞인 제목을 감안한다면 매우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충분히 흥미있고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는 신화를 참고서화하여 건조하게 풀이한 점은 아쉽지만 읽을 대상을 명확히 한정한다면 나름 괜찮은 책이다. 신화에 다소 조예가 있는 자의 정리된 참고서로, 학생들의 교양 정리나 암기를 위한 포켓집으로, 다양한 신화들을 부분적으로 소개하며 기본적 맥락을 읽는 얇은 인문서로는 무난하다. 집에 한 권 있어서 굳이 나쁠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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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 + 작별 세트 - 전2권 - 정이현 산문집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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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소설가를 문학적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근원적 존재성의 시각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작품 속의 필력과 세계관만으로는 한 명의 소설가를 실재적이고 입체적으로 아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드리블과 패스만으로 펠레의 인간성을 알 수 없고, 가창력만으로 이승철의 삶의 소신을 알 수 없듯이 말이다. 소설은 소설가의 필력과 사유와 의지로 창조된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에 대한 다양한 '객관'을 얻어낸다는 것은 제법 힘든 일이다.

  가장 좋은 것은 작가를 직접 대면하는 것이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나마 간접적으로 작가에 대한 탐구를 객관화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픽션'이 아닌 '논픽션'의 글로 작가를 읽는 것이다. 소설이 아닌 산문이나 수필로 만나게 되면 소설가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소설가를 탐구하는 데 보다 객관적이 된다. 소설의 서사는 작가적 상상력이 기반하지만, 수필과 산문은 작가의 진실된 고백으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내가 매번 소설가가 쓴 수필집을 만날 때마다 흥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1C가 낳은 한국문학의 특별한 아이콘 정이현의 첫 산문집 『작별』은 소설가 정이현을 보다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데 매우 효율적인 텍스트다. 작년에 출간된 정이현의 산문은 '작별'과 '풍선'의 제목으로 가름되어 두 권으로 구성되었다. 두 권 중에서 내가 『작별』을 먼저 손에 든 이유는 책의 부제 때문이다. 외로운 너를 위해 쓴다, 는 인상적인 부제는 즉각 내 마음속에 꽂혀 책의 선택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바로 그렇게 정이현의 산문 『작별』은 내 손에 들어왔다.

  어떤 책은 덮고 난 후에 더 가까이 사귀게 된다. 작별하고 나서야 한 사람을 더욱 깊게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책의 서두 <작가의 말>에서 정이현은 위의 문장으로 산문을 시작한다. 책 제목 '작별'이 갖는 실질적 의미와 작가의 책에 대한 사색, 그리고 이 책의 골격까지 정갈하게 메타포한 문장이다. 책 속에는 작가의 일상적 고백과 주관, 다양한 책을 읽은 후의 느낌과 단상, 소설가로서의 고독과 번민이 매우 잘 담겨 있다. 수많은 '당신'을 만난 것도 책이었고 수많은 '당신'을 떠나보낸 것도 책이었다, 라고 말하는 작가 정이현. 과거 읽었던 다양한 책들을 소개하며 자신의 독서 세계와 주관적 단상을 늘어놓는 진솔한 그녀의 고백은 독자로 하여금 보다 '객관적'으로 작가 정이현을 만날 수 있게 한다.

  책 속의 「가득하게」 카테고리에 있는 다섯 편의 산문이 자못 인상적이다. 작가는 다섯 편의 산문 속에서 소설가로서의 책읽기에 대한 열정과 자존감, 문자문화의 본질적 가치와 위대함, 문학적 위기에 직면한 한국 문단의 아픈 현실 등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서술했다. 대형서점에서 점점 그 차가 벌어지고 있는 한국문학과 외국문학의 지리적 점령비율의 현실 앞에서 독자에게 '응원'을 주문하는 소설가 정이현의 목소리가 처연하다. 그리고 그 처연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나 또한 가슴이 일렁인다.

  잘 다듬어지지 않는 산문집은 '산만집'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이현은 산만한 글의 구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앞부분의 일기와 같은 몇몇 글을 제외하고는 전부 책을 읽은 후의 리뷰의 형식으로 글을 쓰고 있어 산문집의 전체적 통일성을 보증한다. 문학을 위시하여 다양한 방면의 책을 두루 읽고, 그 읽음 속에서 자신과 사회를 뒤틀고 해석하는 작가의 글담이 흥미있다. 비단 문학과 사랑뿐만 아니라 소외된 여성성과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신랄한 작가의 논지가 담겨있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균형적이다.

  매번 확인하지만 정이현은 글을 참 잘쓰는 작가다. 문학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고민에 대한, 사회적 오류와 모순에 대한 정이현의 솔직하고 담백한 목소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산문집의 존재성은 충분하다. 글 잘쓰는 한 인기 여류작가의 타자 문학으로 관통한 사랑과 문학과 사회에 대한 '논설'을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한 권의 산문집을 살포시 권한다. 그리고 한 세트로 함께 구성된 다른 산문 『풍선』으로 손을 옮긴다.



『풍선』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영상문화가 문자문화의 결락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오래전에 조각났다. 영양가 없는 고만고만한 이야기로 매주 반복되는 연속극이나 시청자의 말초적 신경을 건드리기 분주한 쇼·오락프로그램의 부박한 수준은 심히 넌덜머리가 날 정도다. 그럼에도 즐겨보는 TV프로가 없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금년에 신설된 M본부의 <명랑 히어로>를 매우 즐겨본다. 소위 '막말'로 대변되는 리얼리티 쇼프로의 골격을 답습하곤 있지만, 방송의 구성과 취지가 마음에 들어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편이다. 점차 희망과 행복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명랑'한 사회를 꿈꾸며 수다를 떠는 그들네의 '막말'이 내게는 그닥 밉게 다가오지 않는다.

  정이현의 산문을 연이어 만나고 있다. 『작별』과 함께 한 세트로 구성된 산문집 『풍선』의 부제 또한 인상적이다.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 라는 부제는 '명랑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책의 첫장을 넘기게 한다. 하지만 부제를 통해 예견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외로운 너를 위해 쓴다, 라는 부제의 『작별』보다는 한결 '명랑한'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는 것을.

  『작별』이 타인의 문학을 통해 정이현이 관조한 삶과 사랑과 문학의 네러티브를 얘기한 산문이라면, 『풍선』은 영화와 음악, 드라마 등의 문화 미디어를 통해 사유하고 또 사유한 정이현의 외침이다. 정이현표 아포리즘은 영화와 드라마 속 주제와 인물을 통해 '사랑'을 분석하고 해석한다. 그리고 책의 뒷부분에선 동시대 코드를 상징하는 다양한 소재들로 우리사회의 모순된 문화와 습속을 꼬집는다. 역시나 톡톡 튀는 새콤발랄한 그녀의 활자는 가벼움이 아닌 '가벼움'으로 독자의 부담을 희석시킨다.

  같은 리뷰라도, 동일한 주제의 칼럼이라도, 소설가가 쓰면 다르다. 단언컨대, 분명히 다르다. 필력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소설이 아닌 글에서 빛나는 소설가의 특별함은 바로 '관찰력'이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특별한 관찰력을 갖고 있다. 정이현이 리뷰한 영화의 대부분은 특출날 것 없는 평범한 대중영화들이다. 별 것 없이 보였던 영화 속 인물과 대사로부터 본질적이고 내면적인 것들을 콕 찝어서 활자화의 재료로 삼는 세심한 관찰력은 그녀가 왜 소설가로 존재하는지를 은근하게 표상한다. <섹스 & 더 시티>에서 뉴요커의 멋진 삶이라는 피상성보다 '관계'라는 핵심 키워드를, 영화시상식에서 배우가 아닌 한 인간의 맨 얼굴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원작'과 '각색'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일 수밖에 없음을 관찰해내는 그녀는, 역시나 '소설가'다.

  정이현의 글은 소위 '공감'이라는 코드로 독자와 쉽게 호흡한다. 책 속에서 가장 공감이 된 부분은 「별, 별, 별」이라는 제목의 텍스트다. 그녀는 밤하늘에 반짝이던 별은 언제부터인가 지상에 내려와 '점수'가 되었다며 한탄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글로써 세상의 수많은 프로·아마추어 비평가들을 일침한다.

제발 쉽게 가치판단하지 마시라. 당신의 판단 기준은 당신 눈에만 옳을지도 모른다. 계몽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났으니, 부디 남을 함부로 가르칠 수 있다고 믿지 마시라. 텍스트 생산자는 당신의 '권위 있는' 한마디에 제 모자람을 깨닫고 회개하는 어린 양이 아니다. 문화 텍스트에는 정답과 중심이 없다. 그러니 무언가를 '읽는다'는 행위는 어차피 오독을 한다는 뜻이다. 자기 취향을 이념화시키고 절대화시키는 비평이 아니라 '내 오독의 가능성'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비평, 텍스트의 쉼표와 말줄임표, 숨결을 섬세하게 읽어주는 비평을 기다린다.   <p. 203>

  이런 글을 쓰는 소설가를 내 어찌 멀리할 수 있단 말인가. '싫다'와 '나쁘다'의 정의를 정확하게 가름하고 다양성 침범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우리사회의 건전한 비평문화를 기대하는 소설가 정이현의 목소리에 나는 오롯이 동의할 수밖에 없다. 쉼표와 말줄임표, 숨결조차도 하나의 문장으로 읽어내고 음미하면서 타자의 창조된 텍스트에 대한 겸손한 의무를 전제할 줄 아는 독자. 바로 이러한 책읽기와 비평의 고차원적 기준을 소설가 정이현을 통해 새삼 학습한다.

  정이현의 첫 산문집 『작별』과 『풍선』은 소설가 이전의 인간 정이현의 맨얼굴이 많이 배어 있다. 무겁지 않고,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무엇보다 부담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다. 소설 쓰기가 고통이었을 때, 산문 쓰기는 고통을 다독여주는 사랑스러운 알약이었다, 라고 고백하는 소설가 정이현. 그녀의 '외로움'과 '명랑'은 산문의 활자 속에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잘 드러나 있다.

  그녀의 문장을 조금 수정하면 두 권의 산문집을 읽은 내 느낌이 잘 정리된다. 소설 읽기가 고통이었을 때, 산문 읽기는 고통을 다독여주는 사랑스러운 알약이었다. 진심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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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 -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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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영상문화가 문자문화의 결락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오래전에 조각났다. 영양가 없는 고만고만한 이야기로 매주 반복되는 연속극이나 시청자의 말초적 신경을 건드리기 분주한 쇼·오락프로그램의 부박한 수준은 심히 넌덜머리가 날 정도다. 그럼에도 즐겨보는 TV프로가 없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금년에 신설된 M본부의 <명랑 히어로>를 매우 즐겨본다. 소위 '막말'로 대변되는 리얼리티 쇼프로의 골격을 답습하곤 있지만, 방송의 구성과 취지가 마음에 들어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편이다. 점차 희망과 행복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명랑'한 사회를 꿈꾸며 수다를 떠는 그들네의 '막말'이 내게는 그닥 밉게 다가오지 않는다.

  정이현의 산문을 연이어 만나고 있다. 『작별』과 함께 한 세트로 구성된 산문집 『풍선』의 부제 또한 인상적이다.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 라는 부제는 '명랑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책의 첫장을 넘기게 한다. 하지만 부제를 통해 예견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외로운 너를 위해 쓴다, 라는 부제의 『작별』보다는 한결 '명랑한'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는 것을.

  『작별』이 타인의 문학을 통해 정이현이 관조한 삶과 사랑과 문학의 네러티브를 얘기한 산문이라면, 『풍선』은 영화와 음악, 드라마 등의 문화 미디어를 통해 사유하고 또 사유한 정이현의 외침이다. 정이현표 아포리즘은 영화와 드라마 속 주제와 인물을 통해 '사랑'을 분석하고 해석한다. 그리고 책의 뒷부분에선 동시대 코드를 상징하는 다양한 소재들로 우리사회의 모순된 문화와 습속을 꼬집는다. 역시나 톡톡 튀는 새콤발랄한 그녀의 활자는 가벼움이 아닌 '가벼움'으로 독자의 부담을 희석시킨다.

  같은 리뷰라도, 동일한 주제의 칼럼이라도, 소설가가 쓰면 다르다. 단언컨대, 분명히 다르다. 필력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소설이 아닌 글에서 빛나는 소설가의 특별함은 바로 '관찰력'이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특별한 관찰력을 갖고 있다. 정이현이 리뷰한 영화의 대부분은 특출날 것 없는 평범한 대중영화들이다. 별 것 없이 보였던 영화 속 인물과 대사로부터 본질적이고 내면적인 것들을 콕 찝어서 활자화의 재료로 삼는 세심한 관찰력은 그녀가 왜 소설가로 존재하는지를 은근하게 표상한다. <섹스 & 더 시티>에서 뉴요커의 멋진 삶이라는 피상성보다 '관계'라는 핵심 키워드를, 영화시상식에서 배우가 아닌 한 인간의 맨 얼굴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원작'과 '각색'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일 수밖에 없음을 관찰해내는 그녀는, 역시나 '소설가'다.

  정이현의 글은 소위 '공감'이라는 코드로 독자와 쉽게 호흡한다. 책 속에서 가장 공감이 된 부분은 「별, 별, 별」이라는 제목의 텍스트다. 그녀는 밤하늘에 반짝이던 별은 언제부터인가 지상에 내려와 '점수'가 되었다며 한탄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글로써 세상의 수많은 프로·아마추어 비평가들을 일침한다.

제발 쉽게 가치판단하지 마시라. 당신의 판단 기준은 당신 눈에만 옳을지도 모른다. 계몽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났으니, 부디 남을 함부로 가르칠 수 있다고 믿지 마시라. 텍스트 생산자는 당신의 '권위 있는' 한마디에 제 모자람을 깨닫고 회개하는 어린 양이 아니다. 문화 텍스트에는 정답과 중심이 없다. 그러니 무언가를 '읽는다'는 행위는 어차피 오독을 한다는 뜻이다. 자기 취향을 이념화시키고 절대화시키는 비평이 아니라 '내 오독의 가능성'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비평, 텍스트의 쉼표와 말줄임표, 숨결을 섬세하게 읽어주는 비평을 기다린다.   <p. 203>

  이런 글을 쓰는 소설가를 내 어찌 멀리할 수 있단 말인가. '싫다'와 '나쁘다'의 정의를 정확하게 가름하고 다양성 침범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우리사회의 건전한 비평문화를 기대하는 소설가 정이현의 목소리에 나는 오롯이 동의할 수밖에 없다. 쉼표와 말줄임표, 숨결조차도 하나의 문장으로 읽어내고 음미하면서 타자의 창조된 텍스트에 대한 겸손한 의무를 전제할 줄 아는 독자. 바로 이러한 책읽기와 비평의 고차원적 기준을 소설가 정이현을 통해 새삼 학습한다.

  정이현의 첫 산문집 『작별』과 『풍선』은 소설가 이전의 인간 정이현의 맨얼굴이 많이 배어 있다. 무겁지 않고,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무엇보다 부담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다. 소설 쓰기가 고통이었을 때, 산문 쓰기는 고통을 다독여주는 사랑스러운 알약이었다, 라고 고백하는 소설가 정이현. 그녀의 '외로움'과 '명랑'은 산문의 활자 속에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잘 드러나 있다.

  그녀의 문장을 조금 수정하면 두 권의 산문집을 읽은 내 느낌이 잘 정리된다. 소설 읽기가 고통이었을 때, 산문 읽기는 고통을 다독여주는 사랑스러운 알약이었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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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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