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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고양이가 있었다 왜 이제야 찾은 거야 이 고양이는 말이 없다 앞으로도 영영 종이에 담았으니 평생 간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려 두지 말 걸 거기 둘 걸 잊은 것도 잃어버린 것도 나였다

고양이를 찾으며 넘긴 페이지들에는 죽은 신해철, 헤어진 연인,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 꿈속의 폐허, 내가 만들다 만 괴물과 인형, 끊어진 이야기들이 무섭도록 살아 있었다

상을 받아 액자까지 했던 그림도 어머니가 버렸지 삶의 중요도는 누구에게나 일정하지 않다 늘 지키지 못하면서 늘 아파한다 그런 거지 어리석어서 아파서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무는 게 죄는 아니잖아
내 종이 고양이 기억 속 고양이

슈뢰딩거 고양이보다 내겐 이 고양이가 더 중요해 이게 인간이지 부정할 수 없이
그러나 이 고양이 때문에 나는 다른 고양이를 또 사랑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ㅡAgalma





여름이 남기고 간 선물


그 해 여름 우린 어딘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오누이 같았다

섬은 목책 없이 이어진 산책길, 새벽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생령들은 소근대며 피어올랐다 이파리가 물속에 잠겨 있는 버드나무 밑동을 파헤치고 늙은 개가 새끼를 낳고 있었다 다가가면 백합조개 깨진 껍질들만 가득했다

무너진 집 돌담 밑에서 이름이 지워진 수첩을 발견했다 엑스표는 많았지만 동그라미는 없었다 십 년 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가묘를 파헤치고 육탈이 끝난 아이들의 뼈를 옮겼던 날에는 섬사람들을 따라 해안가를 걸었다 제를 올리고 우리는 기름이 적은 육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씹을수록 너의 옷섶으로 뿌옇게 배어 나왔던 젖물

바람이 불고 배를 띄우고 물속에 뛰어든 네가 다시 돌아와 웃고 있었다 우린 손을 잡고 간수가 빠져나가길 기다리며 세워둔 소금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촛불은 흔들리고 꽃등은 밤마다 위를 둥실둥실 떠가고

깨진 거울을 주워 모았고 수은을 벗겨내 서로의 얼굴에 고운 가루를 발라주었던 날, 마호병에서 온수를 따라 세 번 나누어 마셨다 폭풍 치는 마지막 밤에도 서로의 귓속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사랑하는 일만 남아 있다고 믿기엔 우린 어딘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詩 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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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4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14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5-06-15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간 신경숙작가의 글 속에서 요란하지도 않고 조용하니 괜찮겠다 싶어 들인 고양이가 구석만을 찾아 다니는 문제점이 있다는 걸 간과했었다는 그래서 이사를 하려는데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던 그 녀석,상자며 서랍이며를 다 뒤져도 찾을 길 없어 포기..나~아중에야..서류 봉투 속에 들어가 납작해진 채 말라버린 고양이를 발견하곤 그 부피 없음에 놀랐던 얘기가..문득 떠올라서..목 뒤에 털이 오소소 돋는 시간...종이에 그려진 고양이 그림과 같을 순 없겠지만..그리움이나 안타까움이나 시간을 헤 칠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라..하염없는 생각을 떨구고 갑니다.. 저 푸른 계단을 보면 영화 블루˝ 속 수영장이 그 물이 자꾸 넘치는 환상이 보이는 듯 ..그럽니다...

AgalmA 2015-06-15 01:16   좋아요 0 | URL
신경숙 작가 이야기는 포 <검은 고양이> 처럼 서늘하네요. 저는 살아있는 동물은 키울 수 없을 것 같아요. 트라우마가 깊어서. 무슨 트라우마가 이토록 많은지...하아...
영화 <그랑블루>, <디 아워스>도 그랬죠... 그 차오름...
저 사진 찍을 때, 내가 떠오르는 건지 가라앉는 건지 분간이 안 됐는데, 지금 봐도 역시 헷갈려요.

[그장소] 2015-06-18 05:20   좋아요 1 | URL
아, 그 역시도 이제 누군가의 글을 뺏은게 아닐까..싶어져..와~ 만 하루 사이에 저 위에 어제의세계 라고
쓰신 제목은 정말 선견지명...에..그래드 부다페스트호텔 -은 좋아하는 영화라 몇번씩 반복해 봤는데, 그럼에도
Agalma님은 따라 갈 수없는 이야기 꾼, 아니 엮자.
랄프 파인즈 좋아해요. ㅎㅎㅎ, 저도 살아 있는건 못 키워요. 안쓰러워서.. 잘 되지도 않고말이죠. 저 사진 필터
쓴거죠? 어디서 찍은 거예요? 아니야..당신 정체가 뭐예요? 척척박사..? (이건 어디서 나오더라? 영화,애니,책?)
아,,이제 여러권을 한꺼번에 읽는건 그만둬야겠어요. 손으로 쓰며 정리를 하는 건 기억이 오래 가는데.놓치는 부분은 기억을 더듬어야한다는..

AgalmA 2015-06-18 05:36   좋아요 0 | URL
우리가 신경숙 얘기한 지 하루만에 신경숙 난파 얘기가 전달되니 정말 이상하죠...참 사람 일이라는 게....
예, 저 이제부터 엮자주의자 할랍니다ㅎㅎ 한 권씩 차례로 읽으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돼요^^;; 그래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랑 어제의 세계 비교분석 시기를 놓쳐 버렸죠ㅎㅎ; <공평한가> 정리하느라고ㅋ
사진은 아이패드로 찍은 건데 콘트라스트를 조금 강하게 준 거 외에 크게 변화를 준 거 없어요~ 원본에서 너무 다른 것도 사기니까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