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의 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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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덕분에 다시 읽다. 19세기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낭만적 열정에 불타는 주인공들. 현대적 감각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순진한 열정에 사로잡힌 자들. 이사야 벌린이 말하는 '낭만주의 혁명' 이후의 인간, 합리적 이성을 거슬러 영원한 현재를 사는 근대인.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이거나 스탕달 소설의 주인공과 유사한 기질의 소유자들. 얘네들은 왜들 그리 눈물을 자주 흘리고, 절망하고, 감격하고, 신열에 들뜨는지? 개체발생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계통발생의 ‘감정적 유년기’, 사춘기적 열정이 근대 낭만주의자들의 멘털리티인가? 

 푸가초프는 귀족적 아우라를 벗어 제낀 모험심 가득한 반항아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푸시킨의 시선은 그에게 듬뿍 애정을 담고 있다. 내부의 존재이면서 외부자에 대해 보이는 이해와 은근한 동류의식. 말하자면, 푸시킨의 반봉건적 정치의식의 우회적 표현이자 이 소설의 정치소설적 독해를 가능하게 하는 대목. 유시민이 주목하는 것도 역시 이 대목. 짜르 시대 러시아의 폭압성과 모순, 근대혁명의 당위성을 숨기고 있는 정치적 텍스트로서 기능. 러시아의 주변인이자 외부자인 까자끄들의 재현방식, 반문명적이고 제정러시아 체제에 도전하는 불온한 존재들. 러시아 소설에서 이들은 늘 그렇게 그려지지 않았던가.

 

구원으로 등장하는 에카테리나 여제, 마조흐의 소설과는 정반대로 그려지는 인자한 군주이자 할머니. 아마도 검열을 피하기 위한 장치이겠으나 어색하게 보이는 것은 근대소설의 ‘내적 필연성’을 거스른 우연성이기 때문. 구원은 밑바닥 민중으로부터가 아니라, 저 높은 곳의 위대한 군주로부터 하강한다? 표층의 체제내적, 심층의 반체제적임을 가르는 경계선이겠지.

 

다시 읽어보니 서사는 새롭되 분위기는 어렴풋하게 기억, 안방 벽에 걸려 있던 ‘이발소 그림’과 그 속의 시구 역시 푸시킨이 아니었던가.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의 바로 그 ‘삶’이라는 단어가 내게 풍기던 묘한 공포와 추상의 질감, 그건 내가 알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저편에 존재하는, 깊은 우물속의 그 무엇과도 같았던 것. 그걸 알지 못하는 한 내 유년은 영원할 것 같다는 불안에 시달렸던 것. 그러나, 푸시킨 시구가 거기 걸려있게 된 내력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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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
정명환 외 지음 / 민음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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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한반도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랑스에서는 총성없는 전쟁이 치러지고 있었다. 세기의 철학자들인 장 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 퐁티, 그리고 레몽 아롱·알베르 카뮈 등 거장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무엇이 이 거장들을 이역만리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 심각한 논쟁의 소용돌이로 밀어넣었을까.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 이래 지식인의 현실 참여가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한국전쟁 논쟁은 이런 전통의 연장선에서 벌어졌다.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은 이 논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국내 서적으로는 첫번째 책이다. 한국의 불문학자들과 프랑스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해 펴낸 것으로, 책의 주요 내용은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 등 철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이 책은 전쟁이라는 폭력에 대해 지식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진보적 폭력’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상황은 한국의 해방 이후 사정과 비슷했다. 냉전체제가 시작되면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진영’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고, 또 기꺼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2차대전 중에 ‘사회주의와 자유’라는 레지스탕스 단체에서 함께 활동하고, 전후에는 그 유명한 ‘현대’(les temps modernes)지를 창간한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서서히 결별하게 된다. 옛 소련과 공산주의에 경도돼 있던 사르트르는 초기 남한의 북침설을 전폭 수용하더니 급기야는 북한이 남한과 미국의 의도에 휘말려 남한을 공격하게 됐다는 ‘해석’을 내세웠다. 사르트르는 ‘혁명적 유토피아주의’였고,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메를로 퐁티는 소련에서 벌어진 정치적 탄압과 폭력을 보면서 마르크스주의자에서 탈피하게 된다. 또 다른 거장 아롱은 한국전쟁을 지켜보면서 미국쪽에 경도됐고 결국 공산주의 비판자·우파 철학자로서 확고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방인’의 작가 카뮈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켜선 안된다”는 논리를 펴며 공산권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에 대한 반대 견해를 폈다. 이념과 논리의 차이는 한때 동지이자 절친한 벗이었던 이들을 갈기갈기 쪼개놨다. 저자들은 여기서 아롱과 메를로 퐁티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진보적 폭력’에 대해서도 은근히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논쟁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물론 그것은 지금 점점 악화되고 있는 이라크 상황 때문이다. 당초 미국이 전쟁 개시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대량살상무기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확대라는 논리도 설득력 없음이 밝혀지고 있다.

미국적 가치를 심기 위해 전쟁을 벌인 네오콘의 논리와 이념적 가치를 위해 폭력을 정당화했던 사르트르의 입장은 묘하게도 유사하다. 그럼 한국의 지식인들은? 한국전쟁을 두고 치열한 논리 대결을 벌였던 프랑스 지식인들과 달리 한국은 너무 조용하다. 상황이 너무 명백해서일까, 지식인들의 지적태만 탓일까. 이래저래 이 책은 음미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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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 - 10년마다 자신의 삶을 결산하는 자아경영 프로젝트
구본형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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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누구나 40대가 된다. 젊음은 이미 우수수 빠져나가 버렸고, 늙음은 아직 오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엄습하기도 하지만 아직 마지막 남은 젊음을 불태울 여력은 충분하다. 변화경영전문가 구본형씨는 “마흔살은 당나귀의 삶이다”라고 말한다. 자유를 포기한 채 가족과 자신의 사회적 지위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홀로 사는 짐승이다. 하지만 자기 변화를 포기할 수는 없다. 노년의 그림자가 찾아오는 50대가 되기 이전인 40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감행하는 나이다.

구본형씨는 잘 나가던 직장이었던 한국IBM에서 20년을 근무한 뒤 그곳을 나와 변화경영전문가로 변신했다. 그의 ‘전공’이 돼버린 ‘변화경영’을 자신에게 적용시킨 셈이었다. 그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시작으로 잇따라 베스트셀러가 된 ‘자기경영서’를 펴낸 바 있다. 40대 들어 그는 10년마다 한권씩 ‘나의 이야기’(Me-story)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자신의 일상이 “사라진 문명이 되지 않는 것, 나아가 남은 시간을 찬란한 문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위해 그는 자서전을 썼다. 그 자아경영 프로젝트로 쓰인 것이 바로 이 책 ‘나-구본형의 변화이야기’다.

이 책은 40대의 한 사내가 기록한 자기성찰의 역사다. 저자는 자신의 삶에 대해 적절한 성찰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일종의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이 어떤 위대성을 간직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오정’(45세가 정년)·‘삼팔선’(직장인의 퇴출 시기가 38세로 낮아졌다)이라는 유행어가 등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40대 남자일 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변화를 갈망하면서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변화하는 자신의 삶을 기록하면서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독자들에게 ‘자아경영’의 필요성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그 때문에 이 책은 천박한 지혜와 공허한 충고로 가득찬 처세술 서적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변화’다. 그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책의 어느 갈피에서 그는 “개혁은 마음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마흔살의 문제는 결국 가슴과 영혼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가 처한 현실과 조건의 문제가 아니고 자기 내면의 강렬한 열망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40대는 사회적 폐기물이 된 자신을 구해내어 빛나는 삶으로 창조하는 시간이다. 전환과 변곡, 이 두단어야말로 40대를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언어다.”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 불고 있는 ‘10억 벌기’ 열풍이거나 ‘아침형 인간’ 열풍은 저자의 시각에서 보면 허망한 것일 수 있다. 저자가 끈질기게 말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자기 발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주식투자성공법’·‘부자되기 프로젝트’쯤이 아니라 자기 변화를 위한 ‘자서전’인 까닭도 그 때문이리라. 그러니 40대의 성공을 바라는 자들이여, 어느 소설 제목처럼, 어서 ‘자서전들 쓰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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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망명지
유종호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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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고은은 문학평론가 유종호에 대해 이런 시를 남겨 두고 있다. “그런데 그의 공부는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착실했다/젊은 날/토마스 만을 다 익혀/조심스레/루카치를 익혀/… (중략)…/시 음악 그리고 산에 깊이 귀의해/책에 귀의해/여기 조선의 중도(中道) 지식인 있다/나이 들수록 자신만만과 허망이 번갈아가며.” 유종호는 어린시절인 일제 말기부터 일흔을 바라보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쉼없이 책을 읽어온 독서가이자 지금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현역’ 비평가다. 그의 산문집 ‘내 마음의 망명지’는 한국 인문주의가 다다른 어떤 지극한 경지를 보여준다.

그에게 ‘책’은 즐기고 감화를 받기 위한 매체이면서 세상에 대한 균형감각을 길러주는 지혜가 담긴 우물이다. 그는 책을 통해 얻은 지식과 통찰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믿는다. 정치인의 무분별한 당적(黨籍) 이동을 두고 ‘정치철새’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자 그는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의 ‘지빠귀를 보는 열세 가지 방식’이라는 시를 꺼내든다.

거기에 “높이 북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에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는 두보의 시 ‘귀안’(歸雁)과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는다”는 정지용의 ‘고향’이 슬쩍 기어든다. 그는 철새 정치인이라는 말속에서 언어의 오염과 정치적 타락을 본다. “(철새는) 매임없는 자유의 이미지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날개였다.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의 하나가 정치적 비행과 연루됨으로써 오염되고 훼손되었음을 필자 역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생각은 ‘교양’을 통해 사회적 무질서를 넘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영국의 문명비평가 매튜 아널드에 가깝다. 문학과 책을 통해 현실을 비춰보면서 반성하는 것, 그게 바로 저자가 생각하는 인문주의의 힘이다. 그래서 그는 유난히 고전에 천착한다. 이 책에는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사르트르와 레비 스트로스의 저작들, 한국 작가로는 시인 정지용과 평론가 김동석이 자주 등장한다. 그가 생각하는 ‘고전’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뎌낸 작품들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고도 살아 남은 것들이야말로 읽고 음미할 만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산문집에는 수많은 인용문이 등장한다. 그 인용들은 꽤나 정확하고 적절하다. 민주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는 “거리의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베토벤의 어깨를 치며 ‘노형, 안녕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다”라는 토마스 만의 말이 등장한다. 사랑에 대해서는 “아들아, 여인의 사랑을 조심하려무나. 저 황홀과 완만한 독약을”이라는 소설 ‘첫사랑’의 한 대목을 끌어온다. “새로 얻은 권력은 언제나 가혹하다”는 에우리피데스의 경구도 “제자리에 놓인 적절한 말”이다. 여기 등장하는 인용문과 예화들은 저자가 허투루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문학평론가로서 저자는 현실의 부침(浮沈)에 따라 성쇠를 거듭해온 이른바 순수문학에도, 참여문학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인문주의 비평의 길을 걸어 왔다. 그는 인문주의자답게 언어, 특히 한국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무미건조한 대개의 평문들과 달리 저자의 문장은 꼼꼼히 되씹을수록 맛이 살아난다. 그는 83세에 시집을 낸 미국의 한 여성시인과 80대에 그리스어를 익혀 소크라테스 연구서를 낸 저널리스트 I. F 스톤에 대해 ‘장엄한 노인들’이라는 헌사를 보내고 있지만, 정작 찬사에 어울리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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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의 탄생
이강숙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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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성장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불린다. 한 예술가가 외부적인 모험과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정신적 성장을 이루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예술가의 정신적 성숙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가 쓴 소설 ‘피아니스트의 탄생’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피아니스트인 이교수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음악 학자이면서 음악 교육가이기도 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지내며 이 학교를 최고의 독립 예술교육기관으로 만든 인물이 바로 이교수다. 그는 “평생 음악선생으로 살아오면서 ‘피아노 교육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며 이 소설은 음악 교육에 관한 것이라 자평했다.

‘피아니스트의 탄생’은 한국 소설 가운데 가장 희귀한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저자가 우선 문학과 음악이라는 이질적인 장르를 넘나들며 르네상스적인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줬다는 게 그렇다. 게다가 이 책은 전례없는 음악 교육에 관한 소설이다. 한국의 극성스런 부모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아이들을 피아노 학원으로 내몬다. 부유층 일부에서는 일찌감치 아이들을 외국의 유명 음악 교육기관에 조기 유학을 보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교육 현장에서 40여년의 세월 동안 음악을 가르쳐온 이교수의 소설은 그런 풍조에 따끔한 충고가 될 듯하다. 작가는 진정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차근차근 풀어놓는다.

소설의 첫머리는 한 지방도시 소시민층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 민영이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스승들을 찾아 나서는 장면이다. 주인공의 배후에는 ‘재야 피아니스트’인 한 노인이 있고, 그를 피아니스트로 훈련시킨 사람들은 네명의 스승들이다. 첫 스승은 피아노를 사랑하게 하고 피아노와 친숙하게 만들어준 사람이고, 두번째 스승은 피아니스트로 훈련시켜 콩쿠르에 나가도록 하는 인물이다.

세번째 스승을 만나 혹독한 훈련을 받지만, 국내의 ‘음악권력’ 때문에 콩쿠르에서 입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네번째 스승은 이제까지의 스승들이 가진 장점을 고루 갖춘 사람. 그를 만나 비로소 주인공은 음악가로 성공을 거둔다.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 재야 피아니스트는 그에게 “세계무대에서 팔리는 상품이 되지 말고 자기의 예술혼을 찾아 그 혼과 평생을 같이할 것”을 당부한다.

다른 성장소설처럼 이 소설 역시 ‘스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최종적인 것은 자신 내부의 예술혼과 주체의식이다. 이는 고희를 눈앞에 둔 음악계의 거장이 오늘의 한국 음악계에 던지는 화두이기도 하다. ‘교육소설’이라고 해서 재미가 없을 거라 예단하지 말라. 저자는 문필력을 인정받아 이미 몇해 전 정식으로 등단했다. 현대소설가들의 버릇처럼 구성을 복잡하게 하거나 알듯말듯한 문장들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음악가로 살아온 그의 평생처럼 이 소설은 담백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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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8-0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재 태그'에서 '피아니스트'가 있길래 저는 혹시 로만 폴란스키 영화 리뷴가 했네요..^^ 암튼 이분이(잘 모르지만) 이런 보기드문 소설까지 쓴 걸 알았군요.. "예술가의 정신적 성숙 과정"을 보여주는 교양소설은 유럽엔 괴테나 토마스 만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선 참 희유한 것 같습니다. 이문열의 몇몇 소설이 판에 박으나마 구색을 좀 갖추려 한 것 같고, 그뒤엔 뭐 있었나요? 음악 쪽은 더욱이나 기대하기 어려운듯 합니다. 클래식에 취미붙인답시고 한창 폼잡을 땐 남좋다는 피아니스트라면 무조건 다 귀동냥하기 바빴는데도 여전히 귀는 잘 트이질 않는군요..^^ 영화 <피아니스트>에 나온 쇼팽곡은 루빈스타인 것으로 어쩌다 듣는데, 그나마 익숙한 경우지요.. 또, 무려 74세의 고령으로, 영화 <샤인>에 나왔던 라흐마니놉의 '악마의 곡'을 기막히게 쳐낸 호로비츠도 어쩌다 '전율'이 필요할 땐 듣습니다..^^

모든사이 2011-08-03 08:34   좋아요 0 | URL
이강숙 선생의 소설은 그 뒤로 민음사에서 나온 <빈병교향곡> 정도를 더 읽었는데, 아주 완미한 단편들이더군요. 오랜 세월 숙성을 거친 문장이랄까요.. 서사가 그리 재밌다거나 스펙터클하진 않지만, 품위있게 나이든 분의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쪽에서의 고급은 저쪽에서의 고급이 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