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 - 인간 사회의 운명을 바꾼 힘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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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red Diamond의 유명한 책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는 비록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두번은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정도로 유명한 책이다. 1998년에 출판되고 이제 고작 20년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고전의 반열에 언급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책이다. 결국 이 책은 그동안 그 누구도 납득할만한 답변을 하지 못했던 질문인, "왜 흑인들은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라는 얄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주는 책으로서 인류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왜 흑인들은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뉴기니인


그는 다시금 그 번뜩이는 눈빛으로 나를 찌를 듯이 바라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 프롤로그 中

프롤로그 - 현대 세계의 불평등에 대한 의문을 푼다

대체 어떤 차이가 이른바 '백인'과 '흑인'의 차이를 불러왔을까? 인종의 차이? 한랭한 기후의 차이?글쓴이는 단호하게 "환경적 차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①가축화 및 작물화의 재료인 야생 동식물의 대륙 간 차이, ②확산과 이동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차이 (예컨대, 유라시아는 주요 축이 동서 방향인데 비하여, 아메리카는 주요 축이 남북 방향)③각 대륙 '사이'의 확산에 영향을 미치는 용인들의 차이 ④각 대륙의 면적과 전체 인구 규모의 차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고전(Old school)과 구식(Outdated)와의 차이



총, 균, 쇠

고전 (Old school)과 구식 (Outdated)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전은 원시적이지만 다시 하더라도 재미있는 것이고, 구식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AVGN. 타이거 일렉트로닉스 게임기 리뷰 中

https://www.youtube.com/watch?v=ScmdDuvnkos&t=538s

상기 리뷰는 비록 게임 (Game)에 대한 것이지만, 이는 책 (Book)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책이 쓰여진지가 1997년으로 벌써 25년이 지난 책이다. 그럼에도 구식이 아니라 고전(古典)이라 전해지는 이유는 바로 그 누구도 대답 할 수 없었던 "왜 흑인들은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에 대한 답을 했다는 것에 있다. 비록, ①지질학 결정론, 지질학 만능주의라는 비판이 있고, ② 유럽은 분열되어 중국보다 더 발전했다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글과 달리 EU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④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진화생물학자임은 인정하지만, 언어와 고고학에 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 ⑤유목민인 몽골 제국이 전세계 (농경민)를 말발굽 하에 놓았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였다는 비판이 있지만 새로운 통찰력을 부여해준다는 점에서 20세기의 고전(古典)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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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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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대한 부모님의 기억

어머니께서는 가끔 옛날 이야기를 하실 때가 있다. 특히, 과거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후 몇 년 지나지 아니하였을 때, 회사에서 아버지를 광주에 발령 내었는데 그 당시 어머니께서는 젖도 못 땐 갓난아이를 데리고 광주에 가기 싫다고 펑펑 울었으며 아버지 역시 회사 측에 '나보고 사표 내라는 것이냐'는 식으로 따졌다고 가끔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내가 태어나기 전 이야기라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뿐이었다.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1926년 2월 13일, 동아일보 

이는 반민족행위자 이완용 사망에 대한 동아일보의 기사 내용 중 일부이다. 


이를 "그 사람"으로 치환한다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해서는 아니될 일 하여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2021 11월 23일

"해서는 아니될 일"을 한 자, "그 사람"이라고 불리우는 자...마치 해리포터의 볼트모트가 생각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영화에서 "You-Know-Who"는 결국엔 온몸이 분해되고 재처럼 흩날리면서 사망하는데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았고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대통령이 차례로 사망하는 와중에도 천수를 누리고 사망하였으니 기사 제목처럼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흰 페인트"의 의미

소설 58페이지에는 아래와 같은 묘사가 있다.

목이 잘려나간 것이 아니란 걸, "흰 페인트칠"로 얼굴이 지워졌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어른어른 뒤로 물러났어.

처음엔 흰 페인트가 뭔지 모르고 단순히 소설상 은유적 표현(행방불명된 사람을 뜻하는 것)인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실제 신군부에서 희생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없도록 흰 페인트를 얼굴에 끼얹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직까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체에서 눈을 돌리고 스스로의 얼굴에 "흰 페인트"를 끼얹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지독한 시취에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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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미학 산책 - 한시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탐구한 우리 시대의 명저, 완결개정판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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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썼던 서평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다.
 

 오래 전 읽었던 책을 다시 기억하노라면 희미한 인상만 남는다. 마치 눈을 감고 친구와 아무 걱정 없이 놀았던 초등학교 시절이나 그 이전의 즐거웠던 추억을 기억해보려 하면 친구의 이름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얼굴 윤곽도 흐릿해지고 희미한 인상만 남는 것과 같다.

 이 책의 글쓴이인 정민 선생의 책 중 과거에 읽었던 <미쳐야 미친다>에 대한 나의 기억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베스트셀러라 아무런 생각없이 의무감에 읽었다는 것과 뭔가 실망스러웠다는 점 뿐이었다. 그나마 과거(2006년 가을)에 썼던 서평이 남아 있었는데 마치 과거 즐거웠던 기억과 추억이 사진으로 남아 있는 것과 같아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권하건대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꾸준히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면 훗날 이와 같은 즐거움을 얻을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과거 내 서평을 읽어 보니 젊어 쓴 글이라 과욕과 치기가 더러 보인다. 그 시간 만큼 나 역시 세월 따라 생각이 바뀌고 안목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어찌되었건 그 당시 이 책에 대한 나의 평가는 '제목은 멋있는 책'이었다. 베스트셀러라 하여 굉장히 기대하고 읽었으나 기대에 못 미쳐 이와 같은 평가를 한 것 같다.

 그런데 공교롭게 이 책의 글쓴이 역시 <미쳐야 미친다>의 글쓴이 정민 교수다. 이번엔 과연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인지 궁금해 하며 이 책의 첫장을 펼쳤다.

 

'한시'의 현대적 의미는? 

'한시'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일단 읽기 어려운 꼬부랑 글씨로 써져있어 해석하기 어렵고 공자님 말씀처럼 현학적인 내용이 담겨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나 역시 나름 정규 교육을 잘 받아 왔다고 생각하지만 옆 그림과 같은 꼬부랑 글씨(초서체) 같은 것은 전혀 해석할 깜냥이 없다. 그저 흰 것은 종이요 검정 것은 글씨일 뿐이다. 

 이와 같을진대 '한시'가 오늘날 외멸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더 이상 한시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젊은이가 줄어들고 한시 전문 시인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한시는 골동적 가치만을 지닌 퇴영적 문화유산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정민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선인들의 한시 이야기를 먼지 털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이 책을 통해 과연 먼지 쌓인 역사의 뒤편에 방치된 채 날로 그 빛이 바래가고 있는 한시에다 신선한 숨결을 불어놓고, 막힌 길을 새로 뚫어 현대적 의미를 밝힐 수 있을지 곰곰히 살펴보도록 하자. 

 
 

사기의 불사기사(師其意 不師其辭) - 정신을 배울 뿐 표현은 본받지 않는다.

 아마 이 글귀가 글쓴이 정민 선생이 이 책을 통해 독자 및 시인에게 던지고자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오늘날 한시에 대한 관심이 한갓 골동품 완상 같은 호사 취미에 불과하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나오고 시론과 비평론은 꼭 '현대'라는 수식어를 달고 서구의 문예이론을 전달하는 상황에서 한유가 말한 '정신을 배울 뿐 표현은 본받지 않는다'라는 원리를 환기한다면 우리가 한시를 통해 퍼 올릴 수 있는 샘물은 무궁무진하다(p.667~668)고 정민 선생은 말한다. 또한 연구자들이 문화의 차이나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최신의 서구 이론을 무작정 대입하는 연구를 내는 것도 문제지만 미셸 푸코,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의 영향으로 cm가 아닌 자척으로 한시를 설명하겠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알아 듣는 사람이 없다고 글쓴이는 지적한다.(p.669)

 하지만 이와 같은 글쓴이의 주장엔 의문만 더 커진다. 한시 해석에 있어 이것도 잘못, 저것도 잘못이라면 대체 어떻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문학성과 미의식을 기준으로 한 한시 연구를 강조하는데 이런 한시 연구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그저 원론적인 말을 되풀이 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이 책에 나온 연암 박지원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마치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을 하나 주워놓고 무슨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이 "숟가락 주웠다!"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게 없다(p.290)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정신을 배울 뿐 표현은 본받지 않는다.'라는 원리는 한시의 현대적 의미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한시를 현대적 양식과 표현에 맞게 변화시키자는 것인지 아니면 한시에 담긴 정신 중 현대적 의미와 맞는 것만 찾아 보자는 건지 그 의미가 모호하다.

 

'한시 미학 산책'의 현대적 의미는?

 그래도 지금까지 우리가 잃어 버렸던 혹은 잊고 있었던 한시에 대해 글쓴이의 의도대로 어느 정도는 신선한 숨결을 불어놓고, 막힌 길을 새로 뚫어 현대적 의미를 밝혔다는 점에서는 높게 평가하고 싶다. 한시에 대한 좋은 책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 '한시'에 대해 한 권 추천해달라고 할 때 자신있게 추천해 줄 수 있는 책을 만나게 되서 매우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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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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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책의 '의도'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리영희 선생께서 돌아가신 것이 작년 12월 5일이고 이 책이 출판된 것이 작년 12월 10일이니 일주일도 채 안된 상태에서 <평전>이 나온 것이 아닌가? 고인의 명성에 기대어 질 낮은 책이 출판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 작년에 법정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행복]이라는 수준 이하 책이 바로 출판되어 심기를 어지럽혔던 것을 감안했을 때 이 책 역시 그런 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안타까운 점은 이 책이 출판 후 한동안 잘 팔렸다는 것이다. 특히 글쓴이 약력을 보면 법정 스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우리 나라 독자들은 책을 보는 눈이 없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걱정은 기우임을 알 수 있었다. 일단 고 리영희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평전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글쓴이 역시 독립기념관장 및 [친일인명사전] 편찬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20년 전부터 신문 등에서 고 리영희 선생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왔으며 고 리영희 선생님과의 마지막 인터뷰까지 실려 있는 등 앞서 소개한 책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혹여 나와 같은 걱정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평전>을 읽고 서평 혹은 리뷰를 쓰는 것은 고역이다. 특히 이 책의 경우 내가 고 리영희 선생에 대해 잘 알면 모르겠거니와 읽어 본 책이라고는 고작 [대화] 밖에 없고 이른바 민주화 투쟁의 열매를 먹고 자란 세대인 나는 고 리영희 선생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이 책에 대해 고민하고 비판적으로 읽기 보다는 책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긍정적 독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를 전제로 하고 이 책에서 나타난 고 이영희 선생의 삶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고 이영희 선생님의 삶을 몇 문장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굉장히 힘든 일이겠지만 거칠게 표현하면 곡학아세 하지 않고 진실과 민주, 평등을 추구하며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해있던 반공주의의 이면을 낱낱히 밝혀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라고 추앙받는 반면에 다른 한 편으로는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전자인 진실과 민주화를 추구했다는 점보다는 반공주의의 진실을 밝혔다는 점을 좀 더 높게 평가하고 싶다. 

  반독재 민주화를 추구했던 사람은 많았던 반면에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정면에서 분석하고 이를 비판했던 사람은 드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른바 '막걸리 보안법' 때문에 말 한 번 잘못하면 콩밥을 먹어야 했던 일이 비일비재했고 좌빨 혹은 빨갱이라는 낙인은 주홍글씨처럼 평생을 따라다녔으며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 이영희 선생께서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빠져 진실을 보지 못하는 대다수 사람에게 '진실'을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계속된 반공 교육의 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를 읽기 시작하면서 였다. 그 당시 이 책을 읽고 한국전쟁의 진실에 눈을 뜨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전후 남한 사회에 작용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고 리영희 선생에게 바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고 리영희 선생의 제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셈이 된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고 리영희 선생에게 한 가닥 빚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들처럼 투쟁 전면에 나설 용기가 없는 나로서는 고 리영희 선생에 대한 빚을 갚는 방법은 '표'를 행사하는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나마 대한민국이 다시 잃어버린 5년을 되찾아 가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시게 된다면 고 리영희 선생께서도 웃음을 지으시리라. 

  마지막으로 좀 더 첨언하자면 이 책은 글쓴이 김상웅 교수가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연재했던 것을 모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각 챕터의 이음새가 허술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승전결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챕터가 독립적이라 챕터가 바뀔 때마다 뭔가 허전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좀 더 많은 사진을 넣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그 당시 시대 상황을 독자에게 잘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사진이 많았을텐데….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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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2-15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실 오마이뉴스 연재글이었군요.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사진자료가 더 풍부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적지 않은 분량의 활자만 읽는 것도 사실 고역이었구요,,^^;;
부동님이 언급하신 김동춘 교수의 책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암향부동 2011-02-15 22:47   좋아요 0 | URL
김삼웅 선생님의 블로그 주소는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입니다. 가보시면 이영희 선생뿐만 아니라 조봉암 선생, 장준하 선생님 등에 대한 평전도 올라와 있더군요.

그리고 사진 자료는 편집 과정에서 좀 더 신경을 써줬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진 자료 같은 경우는 저작권 문제가 생길까 염려되긴 하지만 아시는 분이 출판계에서 일하시는 분이 많으신데 들은 이야기로는 이런 사진 자료 같은 경우는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사진을 찾아서 보내면 전문적으로 라이센스를 받아주는 곳도 있다고 하더군요.어쨌든 아쉬운 점입니다.

그리고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는 네이버 오늘의 책에 선정되었는데 아래 주소입니다. 한 번 소개글 읽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http://book.naver.com/bookdb/today_book.nhn?bid=2613208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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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솔직히 고백컨대 나는 아직 노암 촘스키와 미셸 푸코의 책을 읽어보지 못하였다. 책 읽는데 있어서도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는 나는 어떤 사람을 읽기로 결심하면 그 사람이 쓴 책을 시간 순서대로 차례대로 읽어 나가는 버릇이 있다. 이렇게 읽는 이유는 어떤 사람의 대표작만 읽기 보다는 과거부터 읽어 나가 그 사람의 생각의 변화를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새 책 읽을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 노암 촘스키의 책은 아직 사지도 못했고 푸코의 책 중 구입한 <성의 역사 1~3권>은 구입해 놓고 먼지만 쌓여 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던 중에 두 철학자의 대담과 경연, 성명서를 실어 놓은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생각보다 책 두께가 얇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도서관에서 정독하였지만 나의 지적 능력의 한계만 절실히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 소개에서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발언한 것을 그대로 옮겨 적은 글이기 때문에 쉽고 간결하다.'라고 하였으나 사실 좀 의문이다. 그리고 1장의 대담, 2장의 촘스키의 정치에 대한 글 이후에는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의 신념과 생각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두 분 철학자의 대담에 감히 끼어들고자 한다.


 일단 대담에서 가장 큰 화두는 "경험이나 외부의 영향과는 무관한 '타고난'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언어 학자 답게 어린이의 불가사의한 언어 습득 능력을 전제로 이를 긍정하고 있는데 반해 푸코는 인간성이라는 개념은 주로 인식론의 지표에 지나지 않았고 시대별 틀의 소산이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는 진화론자이자 생명과학자 입장에서 촘스키의 입장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즉, 진화를 통해 자연 선택된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DNA에 새겨져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유전과 DNA를 강조하다 보면 나쁜 과학인 '우생학'에 경도될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푸코가 이렇게 타고난 인간 본성을 부정하는 것 역시 이에 대한 위험성을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이나 그렇다고 사실을 애써 무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생학의 문제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지 우생학을 정치 권력을 어떻게 이용했다는 것은 부차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연 정의란 무엇이며 우리는 정의를 이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담이 이어진다. 나는 여기서는 반대로 푸코의 편이다. '어느 경우든 정의라는 개념은 계급사회에서 억압받는 계급이 자기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 혹은 그 주장을 정당화하는 개념', '만약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한다면 과연 사람들이 정의라는 말을 사용할지 확신이 안 섭니다.'(p.80) 라는 푸코의 주장이 타고난 인간 본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정의도 그 중에 하나 라는 촘스키의 의견보다 더 타당해 보인다. 특히 만약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하면 사람들이 정의라는 말을 사용할지 궁금하다는 푸코의 생각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지적이라고 여긴다.

 마지막으로 2장에서 촘스키는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국 사회가 좌익, 마르크스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저는 만약 합리적인 파시즘 독재정권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미국 체제를 선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 복잡하고 더 분산된 체계로 이데올로기 통제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마당에, 국가 차원의 검열은 필요치 않고 심지어 효율적이지도 않습니다."(p.119)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베트남전 반전 운동을 하면서 앞으로 미국은 이렇게 '정의'를 외치며 침략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지적한 촘스키 교수의 말은 역사를 통해 반성하지 않으면 다시 한 번 역사는 반복됨을 느끼게 된다.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의 입을 빌어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조롱하는데 익숙해져 있어'라고 지적하였다. 나 역시 때로 이렇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만났을 때 글쓴이나 번역자가 읽는이와의 소통을 소홀히 생각했다고 비판을 많이 하였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나의 지적 능력의 한계를 겸허히 깨닫고 언제가 다시 촘스키와 푸코를 제대로 만날 날을 기약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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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2-02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는데 애먹었어요. 저의 무지함을 자책하면서요.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구입해서 마음 먹고 읽으려고 해요.
가격이 좀 만만치 않지만요.^^;;
설 연휴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