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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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글쓴이는 작년에 나와서 큰 반향을 일으킨 [88만원 세대]의 저자이기도 하다. 당시에 [88만원 세대]는 20대가 졸업 후 받을 수 있는 월급이 약 88만원이라고 주장하여 많은 충격을 일으킨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본인은 [88만원 세대]보다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원래 글쓴이 우석훈은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로 총 4권을 쓸 예정이었다. 이 시리즈는 글쓴이가 밝히는 대로 레모니 스니켓의 [불행 시리즈]와 동일한 메타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의 불행이 끝나면 더 큰 불행이 온다고 주장하여 '공포 경제학'이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 책은 그 시리즈 중 3번째에 해당하는 책인데 국제경제학과 동북아 경제통합에 관한 내용을 평화경제학의 시각으로 정리한 책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한국의 경제는 필연적으로 '촌놈들의 제국주의'로 향할 수 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한/중/일의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 책의 제목이면서 중요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촌놈들의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다. 글쓴이는 한국 경제를 분석하여 한국은 이미 외부에서 식민지를 얻지 못하면 경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질 수 밖에 없으나 한국은 아직까지 식민지를 경영한 경험이 없으며 그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결국 어설픈 제국주의인 '촌놈들의 제국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어설픈 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일본, 그리고 강대국이 되길 원하는 중국과의 전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글쓴이의 주장의 요체다.

 그러면서 한국의 건설자본, 극우파, 파시즘 교육 등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면서 결국 30년 내에 발발할 전쟁을 막는 방법은 지금의 10대가 한국의 주류를 형성했을때 6:4, 혹은 7:3 비율로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야 전쟁을 막을 수 있으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유럽의 통합 과정이나 공동 안보를 위한 NATO를 본 받아 한/중/일의 점진적인 통합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금 비판적으로 바라보자면 일단 글쓴이가 분석한 건설자본의 위험성과 현재 똑똑하기 보다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군인을 만들어 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교육제도, 그리고 우리가 모르고 사용 있는 단어 속에 포함된 제국주의적인 면을 지적한 점은 굉장히 흥미로우면 글쓴이의 주장에 동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글쓴이가 위험성을 [침소봉대]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누구나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한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하면 전쟁이 일어날꺼야'하고 협박하는 것은 우리에게 진지하게 다가오게 된다. 결국 이와 비슷하게 글쓴이도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소개하고 있지 않고 있다. 사실 약 10년 만에 정통 극우파 2MB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이른바 '진보'진형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이런 책을 내놓은 것이 아닌가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좀 더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함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글쓴이가 진정으로 자신의 논리를 독자에게 전달하려면 반대 의견을 어느 정도는 소개하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금 비판적으로 이 책을 바라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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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첨론 - 당신이 사랑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사람 모두에게 써먹고 싶을 128가지 아첨의 아포리즘
윌리스 고스 리기어 외 지음 / 이마고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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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아첨(Flattery)라고 하면 부정적인 느낌을 받는다. 특히 권력자들에게 아첨하여 그들을 패망시킨 중국 역사상의 환관이나 권력을 전횡하던 우리나라의 세도정치 등 여러가지 예를 통해 역사서에서는 아첨(Flattery)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본인의 머리 속에서도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아첨(Flattery)은 배제되어야만 할 것이고 오직 진실된 말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대해 이 책의 글쓴이는 [아첨론(In Praise of Flattery)]라는 책을 통해 아첨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머릿 속에 굳건히 심어진 선입관과 달리 글쓴이는

"최고의 아첨은 잘 차려입은 진실이며, 이때의 옷감은 안이 비치는 최고급 소재다.

정직한 아첨은 연인을 애무하고 과실을 덮어주며 공격성을 감싸준다."

라고 아첨이야 말로 사람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와 같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책은 총 128개의 아첨의 법칙을 소개하면서 단순히 허황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넘어서 실생활에서 능숙하게 아첨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글쓴이가 독자에게도 아첨하는 문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글쓴이 특유의 유머와 위트가 곳곳에 숨어 있어서 책을 읽으면서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물게 된다. 이를 보면 역시 아첨은 단순히 말로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종이를 통해서도 가능하고 아첨을 좋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심리같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첨의 법칙 중에서는 상대방이 아첨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가장 말을 많이 하는 것이라는 법칙이 기억에 남는다. 실제로 본인의 경우 이 책에 수록된 아첨의 법칙을 활용해 보았는데 대화 도중에 상대편이 가장 많이 말을 하는 주제에 대해 아첨하자 상대편이 기뻐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책에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많은 회고록과 문학 작품의 예를 들어서 아첨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주와 참고문헌이 50쪽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그리고 아첨이 기존에 너무 부정적으로만 다뤄진 나머지 주로 긍정적인 면에 촛점을 맞추고 있지만 6장에서 아첨의 위험에 대해서도 충분히 독자에게 경고하고 있다.

 
  결국 이 책에서는 역사 속에서 아첨이 어떻게 사용되어 왔으며 기존까지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던 것과 달리 아첨이 잘 사용할 경우 긍정적인 면이 많다는 점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첨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아첨의 기술을 총 128개의 법칙으로 설명하여 아첨을 실생활에서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본인의 경우 실제로 이 책의 법칙을 이용하여 나름 아첨을 해 본 경우 대화가 잘 이어지고 상대편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혹시 대화 중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모르겠거나 상대편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 지 걱정이라면 이 책과 함께 아첨에 대해 공부해 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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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의 망상 - 만들어진 신이 외면한 진리
알리스터 맥그라스 외 지음, 전성민 옮김 / 살림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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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국내에 번역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킨 [만들어진 신]을 기억하는가? 국내에 번역될 때는 <만들어진 신>이라고 제목을 번역했지만 원래 제목은 [The God Delusion]이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 등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런 그가 [만들어진 신]으로 종교에 대해서까지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이에 대한 신학 과학자의 답변이 바로 이 책이다. 책 제목부터 [도킨스의 망상], 즉 [Dawkins Delusion?]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나왔다. 결국 [만들어진 신][도킨스의 망상]은 종교에 대한 과학의 도전과 이에 대한 반격이다. 그런 만큼 어느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2권의 책을 같이 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대학교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하였으며 원래 무신론자였다가 군대 다녀와서 기독교를 쭉~ 믿어오다가 [만들어진 신]을 읽고나서 많은 시험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미리 밝히도록 하겠다. 그런만큼 이 책에 대한 견해도 많이 편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미리 고백한다.

 

 일단 이 책의 추천사를 살펴보면 포항공대 김경태 교수의 추천사가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지성인은 오히려 '하나님은 계시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라고 하는데 자신을 비롯한 이른바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은 계시다'라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오히려 자신의 '지성'을 과신하는 듯한 오만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역자 서문에서 이 책은 도킨스가 전개해 온 그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모두 다루지는 않는다는 점, 그리고 기독교의 신은 어째서 믿을 만한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p.8~9)는 점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서 왠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또한 비종교인에게 신의 존재와 신을 믿는 믿음의 정당함을 보여주는 증거는 다름 아닌 종교인들의 삶일 수 밖에 없다(p.11)는 것도 오히려 현재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절대 다수의 미국인들이 그리고 그렇게 높은 비율의 사람들이 신을 믿었던 적은 역사상 결코 없었다."(p.16)라고 주장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신을 믿어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고 부시를 대통령으로 뽑았는가는 제쳐놓더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신을 믿든, 아니면 무신론자인 글쓴이가 다시 신을 믿게 되었든 그것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신]에서 단 한가지 배울 점을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선택할 "열린 마음"을 글쓴이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p.17) 또한 도킨스가 무신론적 근본주의에 빠져있다는 지적(p.20)과 이런 무신론적 근본주의가 종교적 근본주의와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는 지적(p.23)도 일견 의미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은 유아적이다"라는 도킨스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인생 후반기에 신을 발견하게 되는지 설명해야만 한다'(p.33)라고 주장하는데 글쓴이가 정말 이에 대한 답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을까? 나이를 먹으면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신을 믿는다고 하면 이에 대한 대답이 될련지 모르겠다. 그러나 도킨스가 이른바 "모태신앙"같이 어린이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지적한 것과 같이 글쓴이가 "무신론"을 어린이에게 강요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p.34)고 지적한 점은 일리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도킨스가 종교에 대해 잘 모른다(p.35)는 점 또한 약간은 위험한 생각이지만 지적할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도킨스가 자료를 잘 찾아보지 않고 인터넷 검색에 의지했다는 지적(p.37) 또한 훌륭한 지적이며 비개연성이 비존재를 수반하지 않으며 쟁점은 신이 있을 개연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신이 실재하느냐 안하느냐에 있다는 지적(p.45) 또한 일리 있다. 그러나 비록 도킨스가 무신론을 권하기 위해 "경험적으로 더 잘 맞는다"라는 논증 방법을 사용했다(p.41)고 지적하는 것은 옳지만 이것이 반대로 경험적으로 더 잘 맞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는 논증 방법 또한 문제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2장에서는 [과학은 신이 없음을 증명했는가?]라는 소제목으로 시작된다. 일단 2장 초반부에서 과학적 탁월함이 무신론적 믿음과 같은 것은 아니다는 글쓴이의 날카로운 지적(p.55)이 있다. 그리고 자연과학들은 귀납적 추론들에 의지(p.57)한다는 지적을 통해 어떤 일련의 관찰들이라도 다수의 이론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글쓴이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도킨스의 견해를 '순진'하다고 비판하는데 그러나 나는 아직 과학이 설명 못하는 것이라도 언젠가는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과학의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래와 같은 질문을 과학이 답할 수 없기 때문에 성립된다고 하는데(p.63) "모든 것들은 어떻게 시작했는가", "우리 모두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충분히 과학, 특히 진화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NOMA에 대한 도킨스의 비판에 대해 POMA를 주장하며 특히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지휘한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신앙의 원리들은 과학의 원리들과 보충적이다"라고 말하는데(p.66) 의문이다. 사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대해  종교계에서 많은 비판과 우려를 받았으며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콜린스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종교계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많은 과학자들이 신을 믿는다(p.67)고 하는데 이는 도킨스의 '진짜' 과학자들은 무신론자들이어야 한다(p.70)는 주장한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많은 과학자가 믿는다고 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다시 한번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종교를 배척하고 파괴한 스탈린과 히틀러가 무신론자라고 지적(p.70)하는데 실제 히틀러는 기독교인이었다는 학설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또한 도킨스가 세계는 합리주의와 미신 이렇게 두 진영으로 나뉘어 진다는 것에 대해 흑백논리라고 비판한 점(p.75)은 일견 수긍이 가지만 신이 있다 없다는 문제에서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라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카톨릭 교황이 생물학전 진화의 일반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지지를 표명했지만 아직도 개신교에서는 진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p.78)는 점은 과학과 종교가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 증거 아닐까? 하지만 2장 마지막에서 도킨스가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나 종교적 극단주의자들만 강조했다는 지적(p.80) 도킨스가 명심해야될 것이다.

 

 이제 3장에서는 [종교의 기원은 무엇인가?]라는 소제목으로 시작된다. 일단 글쓴이는 종교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도킨스의 주장은 고도로 이론화된 추측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p.91) 하지만 종교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이론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가운데 '고도로 이론화된' 추측이라 함은 그 자체가 이미 보편적 타당성을 가졌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종교가 '보편적 특징'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지적하는데(p.97) 이건 전형적인 '물타기', '논점 흐리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신에 대한 어떠한 믿음을 수반하지 않고도 '종교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며 그 예로 불교를 드는데(p.101) 일단 이 주장 자체가 사실인지는 둘째치고라도 주장 자체에서 옹색함이 느껴진다. 이런 점은 이어서 p.102~103사이에서 '일부러'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여 독자를 헷갈리게 만든다는 느낌마저 가지게 한다. 또한 과학에서 다수의 원인들이 나타나는 것은 정상이라는 점(p.105)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종교도 다수의 원인들로 만들어진 것이란 말인가?' 절대적 신 뿐만 아니라 이른바 '기득권층'의 의도가 개입했다는 뜻으로 이해되는 발언이다. 아니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외 '다수의 원인'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종교적 믿음의 타당성은 과학적 추론에 의해 실증될 수도 없고 논박될 수도 없다"라는 베르고트의 주장(p.106)은 종교라는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런 자세가 중세 시대에 이른바 예술과 과학의 암흑시대를 불러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도킨스의 주장 자체가 '신이 없다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된 순환론적 논증이란 지적(p.92)은 타당하며 정신바이러스와 meme에 대한 비판(p.107~113)은 전공자 입장에서 속이 시원할 정도로 날카로운 지적이다. 분명 위 2가지 개념은 정통 생물학에서 전혀 인정받고 있지 않는 개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제 4장은 [종교는 악인가?]라는 제목으로 종교의 선/악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일단 종교가 폭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가운데 '종교만 폭력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p.128)와 스탈린을 예로 들면서 '무신론도 폭력과 관계있다'(p.129)고 지적하면서 현대의 종교의 잘못된 점에 대한 도덕적인 비판은 무신론에 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p.130)은 100% 옳은 주장이다. 그리고 일부 미국 언론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테러의 원인은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이라는 지적(p.132) 또한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이 글쓴이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인간 자체가 초월적인 것을 찾는다는 것과 타자화는 인간 본성이라는 주장(p.133)과 함께 '종교'가 타자호를 위한 한가지 기준으로 단순히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 자체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장이다. 그리고 도킨스의 성경에 대한 비판 중에서 특히 구약에 대한 비판에 대한 글쓴이의 반론(p.139)은 정통 개신교계에서 좋아할만한 100점짜리 답안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 말고 도킨스가 주장했던 '성 마리아는 처녀가 아니었으며 단지 오기였을 뿐이다'라는 주장 같이 증거에 근거한 도킨스의 지적에 대한 반론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궁금한 점은 글쓴이는 정통 기독교가 '예수가 전적으로 인간이었으며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지는 않았다고 이해한다'(p.140)고 주장하는데 이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인데 다수의 기독교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종교 형식은 임시적이고 인간적인 제도라고 지적(p.144)하는데 카톨릭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도 의문점이다. 결국 글쓴이 자신도 '성경무오류설'을 믿지는 않는 것(p.146)으로 보이며 신의 말씀이 나타난 성경 자체에 오류가 있다면 성경에서 증거하는 '신'이라는 것의 존재도 의문시될 수 밖에 없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만들어진 신]에 대한 일부 타당한 비판도 있지만 여전히 그 또한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신은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논지를 펴고 있다. [만들어진 신][도킨스의 망상]을 통해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중 1개의 책만 읽고 자신의 생각을 정하지 말기를 바란다. 또한 위 2권의 책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진리'에 대한 '열린 마음가짐'은 다른 점은 다 우이독경이 되더라도 반드시 명심해야 될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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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동노 외 옮김 / 창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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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 근현대사 관련 책을 읽다 보면 언제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를 만날 수 있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김동노 교수가 고백하듯이 ‘현대 우리 학계에서는 그의 입장에 기대거나 혹은 빗대어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 현대사 연구의 관례였을 정도였다.’(p.726)로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 근현대사학계에 미친 영향을 지대하다. 하지만 브루스 커밍스 자신도 고백하듯이 ‘나는 미국에서 연구를 하고 있고 나 자신을 순미국인으로 생각하고 있다’(p.21)는데 직접 한국 근현대사를 겪은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의 연구가 얼마나 객관적이고 과학적일 수 있는지 언제나 의심을 품었으며 또한 외국인의 저작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척박한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외국인이 이런 저작물을 내 놓을 동안 별다른 연구 성과물도 내놓지 못한 이른바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들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수많은 연구비를 받으면서도 고작 하는 일이라고는 <김일성 조작론>같은 완벽한 어용학자의 연구만 하고 있을 뿐이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조금도 없는 그냥 ‘돈 먹는 기계’, ‘생각 없는 권력의 파수꾼’에 다름이 아니었다. 물론 근래에는 젊은 학자들 중심으로 특히 정병준씨의 [한국전쟁]이나 [우남 이승만 연구], 그리고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등 드디어 <연구 성과물>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나오고 있는 점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결국 브루스 커밍스의 노작인 [한국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은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하지만 일단 700여 쪽에 이르는 책의 두께부터 독자를 압도한다. 마치 ‘과연 나를 넘을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 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설혹 브루스 커밍스가 이런 의도로 책을 썼다 하더라도 그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판해주마’라는 마음가짐으로 이 책에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일단 이 책의 1, 2장은 본격적인 한국현대사를 서술하기에 앞서서 미국 독자를 위해 간략히 한국의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는데 할애하였다. 커밍스도 밝히고 있듯이 1, 2장은 대부분 다른 이의 탁월한 연구 성과에 의존(p.20)하고 있는데 먼저 <유교>에 대한 커밍스의 생각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p.27~28) 이에 대해 커밍스는 정적이고, 권위적이고, 반민주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외국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이런 커밍스의 지적은 날카롭지만 “그러면 유교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에는 모호한 답변으로 회피하고 있다. ‘유교라는 시냇물 옆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격언과 믿음의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다’(p.28)라고 하는데 골수부터 한국인인 나조차 알지 못하는 [거대한 강]을 커밍스는 어떻게 발견했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커밍스는 <민족>의 개념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p.33) 특히 ‘세계 여러 민족 중에, 종족상, 인종상, 언어상의 심각한 차이 없이 한 국가에 살고 있는 민족은 별로 없으며 한국은 실로 종족과 국가가 일치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동질적인 민족 중의 하나인 것이다’라는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학적으로 <민족>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민족>이란 생물학적 의미보다는 ‘정신적’인 면을 강조해야 하는 단어로 여러 민족의 피가 섞인 우리도 최소한 정신적으로는 <韓民族>이라는 민족성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민족>이란 정신적 실체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어서 그는 양반 제도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p.75~78) 물론 본인의 집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집안이 <족보>를 애지중지하며 스스로를 양반 집안이라고 우기지만 사실상 ‘임진왜란’ 이후 양반 제도는 붕괴한 것이 옳으며 이를 알고 난 후 비록 집안 어른들 앞에서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족보를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또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양반들이 조선 후기에 나라를 속된 말로 ‘말아 드셨는데’ 이런 양반의 후예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벼슬이라고 사람 만날 때마다 “누구의 몇 대손입니다.“라고 자랑하고 다니는지 젊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커밍스의 지적에는 100%를 넘어 200% 동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여성의 지위에 대해 이야기가 계속된다.(p.86~88)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분명 문제 있는 것이고 점점 고쳐져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른바 “깨어 있는” 여성의 투쟁으로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고 유산 상속에 있어 남녀 자식 간에 평등하게 받으며 미망인의 경우 남편의 재산을 자식과 비교하여 50%를 가산해서 받는 법이 통과되었고 2005년 경에 이른바 <딸들의 반란>이라고 불리는 획기적인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마지막 보루였던 ‘종중 재산’의 경우에도 여성의 권리가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오랜 관습(과연 ‘관습’이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이지만)속에 남성 우월주의는 남아 있으며 사회의 발전과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이런 편견들은 최대한 빠르게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제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커밍스는 임진왜란으로 사실상 조선의 모든 법률, 세제 체계가 무너지고 말았으며 이로서 조선을 멸망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p.106~107) 과거 본인이 고등학교에서 국사 수업을 들을 때 선생님께서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탄생했어야 되었다”라는 말씀을 들을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제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지켜오던 탁월함, 덕(virtue)는 사라지고 말았는데 차라리 이 때 조선이 멸망하고 한 번 깨끗이 개혁을 한 후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았다면 20세기 초반에 이렇게 우리의 조상들이 고생하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설사 새 왕조가 들어서기 위해 반란이 일어났더라도 지배 계층을 이루는 ‘지주, 양반 계층’의 비협조로 성과를 달성하기는 힘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본격적으로 <치욕의 역사>를 배우게 되는데 먼저 우리나라에서 계급제, 노예제도가 폐지된 것이 고작 10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p.170)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그런 만큼 아직도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에는 계급제와 노예제도에 대한 기억이 있으며 결국 오늘날의 <양반>이 되기 위한 소과인 “수능”, 대과인 “고시”에 많은 학생이 지원하며 이에 떨어지면 실패자 취급을 받고 이렇게 교육이 과열되는 것도 이렇게 계급제, 노예제도가 폐지된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이른바 <친일파>, <부역자>들의 이름이 하나 둘 등장하는데 그중 특히 언급하고 싶은 사람은 “윤치호”다. 윤치호를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과거 좋은 책을 찾아 다니 던 중에 <윤치호 일기>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윤치호 일기는 일종의 <판도라의 상자>이다. 기독교계의 친일 행동을 이끌었던 그의 일기를 통해 당시 이른바 “지식인”이 왜 친일을 하게 되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물지도 못할 거라면 짖지도 마라”는 그의 주장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란 존재가 <친일파>가 되는 의식을 단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이제 3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제 3장의 시작은 <잃어버린 역사>부터 시작된다.(p.199) 한일 양국에서 1935~45년 사이의 역사가 “지워진” 것은 아직 한국에서는 친일파 청산이 끝나지 않았으며 일본은 아직 제국주의의 충동이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커밍스의 지적에 깜짝 놀라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의 지적은 옳은 것 같다. 아직도 <역사 바로 세우기>는 갈 길이 먼 것 같고 얼마 전 친일파 재산 환수 소송을 보면서 언제쯤 친일 잔재 청산이 이루어질까하는 안타까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커밍스는 남한에서 논쟁이 많은 식민시대의 <근대화>에 대해 설명한다. 아직도 잊을 만하면 일본 고위 관료나 한국의 교수들이 “한국은 일본 덕분에 근대화, 산업화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국민의 감정은 매우 폭발적이다. 물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커밍스가 주장하는 수송 및 통신시설의 확충(p.236), 한국내 산업혁명(p.241)에 대해서는 솔직히 인정하기가 싫다. 그리고 “성장의 이익은 전부 일본으로 갔으며 한국은 일본의 도움 없이도 어차피 급속하게 발전했을 것이라고 항상 생각한다”(p.211)고 지적하면서 타이완과 비교하는데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편협하지만 “그건 너희 미국인이 필리핀 착취하면서 내세우는 논리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 이런 너의 논리는 미국이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냐”라고 반박하고 싶다. 결국 이런 일본의 강요된 산업화 모델은 관료제-권위주의 발전 모델로 한국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며 특히 당시 지배 계층인 양반 계급은 일본에 협조적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알 수 있었다.(p.215) 또한 한국 기독교의 경우 오직 출세의 수단인 <영어>를 위한 수단(p.223)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뭐 이건 지금도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은 요새 기독교는 “표”를 위한 수단이란 점만 다를까? 나는 아직도 김영삼이 주말에는 꼬박 꼬박 교회 다니면서 임기 막판에 사형을 집행한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이어서 커밍스는 과거에 대한 급진적 부정이 한국 사회를 분열로 이끌었다(p.224)고 주장한다. 이런 지적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왜?” 한국에서 과거에 대한 급진적 부정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 같다. 뭐 커밍스의 모국인 미국이야 역사도 짧고 침략하는 역사와 승리하는 역사로 이루어져 있어서 과거에 대한 급진적 부정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한국의 역사는 미국과 정반대이다. 백날 유구한 역사 자랑해보았자 결국 나에게 돌아온 것은 가혹한 식민지배뿐 아닌가? 게다가 유구한 문화와 전통을 이끌어 오던 양반 지주 계층은 오히려 일본에 빌붙어 가혹하게 수탈하고 있으니 누구든 과거에 대한 부정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리고 일제시대를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커밍스가 언급하는 것(p.252~253)는 그저 “그랬군…. 그래서 그런 것이었군…”이라는 한탄 밖에 나의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인가…. 마치 나라도 당시 살았다면 앞에서 커밍스가 언급한 과거에 대한 급진적 부정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이런 일제시대를 통해 얻게 되는 교훈은 명확하다. “지 한 몸 지가 간수하라” 이것이다. 홉스가 지적하듯이 “개인의 생명과 재산권”을 지켜 주지 못하는 국가는 이미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백날 충성하고 지배계층의 말을 잘 들어도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다수를 배반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있다. 누가 나를 배신할 것이 뻔하다면 내가 먼저 배신하는 것이 나은 방법 아닐까? 괜히 요새 젊은이들이 전쟁 일어나면 외국으로 도망간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전부 그들이 과거의 <역사>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인 것이다.



이어서 4장이다. 특히 4장의 초반에는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커밍스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게 만드는 이른바 <미국 책임론>이 등장한다.(p.263) 이런 한국 분단에 대한 미국 책임론은 이 책에서 수많은 근거로 뒷받침되고 있다. 가장 먼저 미 군정의 하지 장군은 공산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수 백명의 보수주의자들을 지원하게 되었으며(p.273) p.281에서 커밍스는 “미국과 러시아가 한국을 떠났더라면 좌익정권이 재빨리 권력을 접수했을 것이며, 그 정권은 혁명적인 민족주의 정부가 되었을 것이고, 중국이 그랬고, 베트남이 오늘날 그러는 것처럼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온건해져 국제 사회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라는 과거라면 금기시될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김구에 대해 묘사한 부분(p.278)에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너무도 다른 김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그에 대한 묘사는 오늘 테러리스트에 대한 묘사와 다른 점을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이어서 군대와 경찰이 일본에 부역했던 자들이 그대로 고위층에 존재했으며(p.284) 오늘날 한나라당의 전신인 한민당이 친일파들의 집단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p.285) 특히 오늘날 시사할 만한 점이 있는 것은 <서북청년단>에 대한 설명(p.293)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치 깡패, 깡패 정치”로 대표되는 어용 단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잔존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촛불집회를 방해하는 단체 특히 HID는 서북청년단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얼마 전에 오랜만에 시골에 내려갈 때 나이 드신 분이 술 취해서 괜히 고속버스 운전기사에게 시비 걸면서 “자유당 시절이면 너희들 다 죽었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었다. 이것을 봐도 아직도 그 잔재는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언급이 이어지는데 이는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를 참고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5장은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단 “내전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온다”라는 언급이 참으로 내전의 진실을 알려주고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역시 정병준의 역저 <한국전쟁>이 더 많은 진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지만 인상 깊은 점만 언급해보면 한국전쟁 낙동강 방어선의 격전지를 이루었던 포항(p.375)이 바로 나의 군부대가 있던 곳이었다. 가끔 육본에서 유해 발굴단이 와서 근처 야산을 뒤엎고 다니다가 유해를 발견하곤 했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하여 함흠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의 협공을 받고 무적을 자랑하던 미 해병이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 흥남부두에서 철수했다는 점 또한 교묘하게 넘어가고 있다.(p.402) 글쓴이도 미국인이니 아무래도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는 점은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글쓴이는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에서 평등화를 강제하였다(p.423)고 주장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이 평등화를 강제한 점은 있지만 이에 대한 참고문헌을 실었더라면 좀 더 인상 깊지 않았을까? 그 외 한국 전쟁의 <학살>과 그에 대한 <미군의 방조>(p.379)에 대해서는 역시 김동춘의 역저 <전쟁과 사회>를 참고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이 부분은 아마도 다른 많은 분들의 의견이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언급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결국 <한국전쟁>은 커밍스가 말하는 대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이었다. 수많은 피를 흘렸지만 조국은 통일되지 않았으며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으며 산업화의 기반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다. 게다가 남북한의 균열과 반목은 더욱더 심해지게 되었다. 결국 상처뿐인 전쟁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6장은 전부 브루스 커밍스의 아내인 우정숙(메러더스 우 커밍스)의 의견이다. 그러니 특별히 언급한 것은 없지만 단지 “기적은 없었다”(p.483)라는 의견으로 만족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주된 목적은 <경제>적인 면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살펴보기 보다는 다른 면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데 있지 않은가?



7장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커밍스는 “민주주의는 쟁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당시 국회의원에 대한 신랄한 비판(p.504~505)은 참으로 인상 깊었다. 괜히 국회의원이 구캐우원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았다는 점(p.538)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직 미국은 한국의 정치적 안정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으며 사실상 군부 독재를 방치하였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광주 사태에서 더욱 더 잘 드러난다.(p.540, 551) 아직 많은 문서가 기밀로 묶여 있어서 진실을 알기는 힘들지만 분명 미국의 개입 혹은 최소한 방조가 있었다는 점은 옳은 것 같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약소국의 애환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보면 현재 주 호주 대사로 임명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우상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한국에서는 친미파가 아니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이어서 8장은 북한에 대한 언급인데 다른 것은 다 버리더라도 “공산주의 병 속에 담긴 성리학”, “마오쩌뚱의 옷을 입은 주희”라는 것은 알고 넘어가야 갈 것 같다. 즉 커밍스는 북한의 정신 속에는 가족주의로 대표되는 유교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9장은 잘라서 버려도 될 부분이다. 10장은 “북한은 수십년 간 미국으로부터 주기적으로 핵위협을 받았으며, 폭넓은 핵억제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북한 자신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p.694)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1994년 전쟁 위기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1954년에 이승만이 한국에서 수소폭탄 사용을 요구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고작 이 정도 생각 밖에 못했다는 점은 우리나라의 불행이다. 또한 북한 전력의 70%가 전진 배치된 것은 전쟁 초기 남한의 군대나 민간인과 뒤섞여 핵무기 사용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는 지적(p.702)도 흥미롭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북한이 전진배치를 한 것은 남침의 의도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런 숨겨진 사실도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정치외교학과 수업을 통해 이른바 핵무기는 <상호간의 완벽한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쟁 억지력으로 작용하고 <핵 확산 금지조약>을 통해 다른 나라의 핵 개발을 막는 대신 “핵을 가지지 않는 나라와 전쟁을 할 때에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약속을 했다고 하던데 이 책을 보면 역시 국제관계에서 약속은 언제나 어길 수 있는 공수표에 불과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p.707에서 커밍스가 2008년을 예상한 것과 현재를 비교해 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커밍스는 “미국과 북한이 마침내 완전한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이며 북한의 핵에너지 프로그램은 핵확산금지체제를 완전히 따르게 될 것이며 우리는 북한이 원자폭탄 생산에 충분한 양의 플루토늄을 재처리했는지 여부를 마침내 알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런 커밍스의 예상은 2008년 현재 어떻게 생각되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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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탄생] 서평단 알림
철학의 탄생 -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 인간과 자연에 던지는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현장
콘스탄틴 J. 밤바카스 지음, 이재영 옮김 / 알마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독서클럽] 활동을 하면서 이른바 '철학' 서적들을 읽기 시작하였었다. 나의 '철학' 독서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되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순서로 진행되었다. 처음 고대 철학은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으나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 독서가 진행됨에 따라 나의 지적능력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할 정도로 그 난해함은 나로 하여금 질리게 하였다. 이에 따라 과연 '철학'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마치 '철학'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인 [철학의 탄생]이란 것을 보면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 달리 철학은 '소크라테스'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며 이 책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머리속에는 소크라테스가 남긴 인상이 너무 큰 나머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거나 무시하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는 나의 부족함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의 철학은 충분히 오늘날에도 그 존재가치를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현대 과학과의 비교는 나를 충격에 몰아넣게 되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현대 물리]라고 함은 '상대성 이론''양자역학'을 이야기한다. 나에게 있어서 수많은 절망을 안겨주었던 '상대성 이론''양자역학'이 바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의해 이미 그 존재가 예견되고 있었었다. 특히 헤라클레이토스가 오늘날 모든 물리학자의 꿈인 '대통합이론'의 기초가 되는 서로 모순되는 개념의 통합을 제시하였던 것(p.271)과 엠페도클레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오늘날과 거의 비슷한 '원자론''우주론'을 제시하였다는 것은 정말 놀라울 뿐이었다. 그리고 흔히 양자역학을 이야기 하면서 '불연속성'을 이야기 하지만 이런 것 조차 과거 데모크리토스의 직관(p.475)에 의해 그 존재가 주장되었다는 점도 당시 철학자들에 대해 경의감을 가지게 만든다.

 

 이어서 간단히 각 철학자의 견해를 살펴보자면 탈레스의 경우 틀린 의견도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며 올바른 관찰에서도 잘못된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으며 아낙시만드로스를 통해 '무한자'의 개념(p.104)이 철학사에 소개되었으며 그의 견해는 현대 물리학과 유사점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낙시메네스를 통해서는 질적변화가 양적변화로부터 발생한다(p.113)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피타고라스는 단순히 '피타고라스의 정리' 뿐만 아니라 과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의 통합을 시도(p.181)했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크세노파네스를 통해 신이 인간사에 개입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을 자유롭게 책임성 있는 인격으로 독립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p.194) 또한 '변화', 그리고 대립물의 투쟁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만날 수 있었으며 임페토클레스를 통해 절대적 지성주의와 감성주의를 비판(p.362)한 것과 현대와 비슷한 원자와 우주론(p.373, 383)을 주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정점을 이루는 데모크리토스를 통해 그가 주장하는 '불연속성''원자론'이 현대 물리와 얼마나 비슷한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이 책에서는 탈레스를 비롯하여 총 10명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른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기록은 원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 다른 사람의 책 속에도 인용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글쓴이는 엄청난 노력 끝에 다른 책들에 인용된 철학자들의 말들을 끌어모아서 완전한 하나의 '철학'체계로 모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다른 점도 뛰어나지만 이런 글쓴이의 노력이야말로 높게 평가받아야할 것이라고 특히 생각한다.  그리고 단순히 철학을 제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은 현대 과학과 일일이 비교한 점도 놀랍다. 솔직히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초끈이론' 같은 것은 공대 출신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그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나 이 책의 글쓴이는 자연과학 학부에서 공부한 경험을 토대로 철학과 자연과학과의 만남과 비교를 원숙한 솜씨로 독자에게 소개하고 있다. 

 

 옮긴이가 말하듯이 자연과학 없는 철학은 지적 유희와 공염부로 전락하기 쉽고 철학 없는 자연과학은 과도한 일반화와 편협하고 섣부른 독단론으로 치닫기 쉽다는 것은 나와 같이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나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조심해야 될 충고일 것이다.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이 책을 통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에 대해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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