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말한다 - 당비생각 02
우에노 치즈코.조한혜정 지음, 사사키 노리코.김찬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품절


누구든지 노년을 맞이하게 되는 초고령화 사회는 돈과 권력이 결국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없는, 약자가 계속 살아가기 위한 사회를 설계하는 기회(chance)이기도 합니다. 사회를 변혁하는 힘은 언제나 젊은이들로부터 온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령이라는 미지의 경험에 접어들어 그곳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 그리고 고령자가 스스로 열어가는 변혁의 실천에 나는 언제라도 가슴이 뜁니다. - 우에노 치즈코의 다섯 번째 편지-199쪽쪽

장애인 자립운동과의 만남만큼 나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결정권을 뺏길 이유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사자 주권이라는 것은, "내 일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일은 내가 결정한다"라는 권리를 말합니다. ‘자립’의 개념을 180도 바꾼 그들의 주장에, 저의 여성운동의 ‘자립’ 개념이 흔들렸습니다.
고령화 사회는 많든 적든 나이를 먹어감과 함께 장애를 경험하는 사회를 말합니다. 그때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것’을 ‘자립’이라고 여겨 온 사람들은 후에 뼈아픈 보복을 맛볼 것입니다. - 우에노 치즈코의 여섯 번째 편지-245쪽쪽

‘양육’ 유대, ‘보살핌’ 유대는 혈연이 아니어도 좋고 가족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좋다. 친밀한 관계는 가족이건 아니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친밀한 관계와 의존을 분리시키면 좋다. - 우에노 치즈코의 여섯 번째 편지 -247쪽쪽

보살핌의 유대는 쇠퇴해 가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늙어가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상호의존이 창피한 일이 아니고 위안과 즐거움이 되는 사람과 사람의 네트워크가 있습니다.
당신은 압축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와 자본이 결탁해서 일으키는 변화의 속도에 뒤처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한국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고 썼었습니다. 그 속에서 ‘반자본주의 운동’이 일어나길 기대한다면 뜬금없는 몽상일까요? 고령화 사회 이야기를 (남자) 경영자 단체에서 할 때마다, 똑같은 패턴의 반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 참, 무섭군요"라고 그들은 두려운 기색을 보이며 그리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은, 결국 돈이네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참, 남자라는 병은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아 하고 저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돈만 지불한다고 반드시 질이 높은 서비스를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개호인 것입니다."
실버산업 사반세기의 교훈은 가격과 서비스 상품의 질이 연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서비스는 자신이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시민의 손으로 사업체를 만들어 온 사람들의 신념이고 실천이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어차피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 철저한 자본의 흐름에 농락당하는 것이지요. 그 속에서 보는 것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의 가치입니다.
아무튼, 청소년들이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듯, 우리들도 포스트모던한 노후라는 모험을 향해 출항하기로 할까요? - 우에노 치즈코의 여섯 번째 편지-250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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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말한다 - 당비생각 02
우에노 치즈코.조한혜정 지음, 사사키 노리코.김찬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품절


때때로 "지금의 한국은 일본의 1980년대와 비슷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1980년대의 일본에서도 종종 미국의 여성학 연구자가 "지금의 일본은 꼭 1960년대의 미국과 비슷하군요"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편지에서 구미나 일본의 학생운동의 세대적 경험은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대응한다고 쓰고 있지만, 실은 나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어느 사회든 글로벌한 동시대성 속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사회가 ‘개발도상’으로 보이는 것은 언젠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진국이 선진국이기 위해서 ‘저개발’의 상태에 멈추게 한 결과에 다름 아닙니다. 양자는 동시대의 양면을 살고 있습니다. 전자가 언젠가 후자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전자는 후자와 동시에 생겨나 그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 우에노 치즈코의 네 번째 편지-157~158쪽쪽

내가 그간의 편지에서 ‘시차’를 강조한 것은 실은 문화적 상대주의적 시각을 무시해서라기보다 진화론적 시각을 강조해서입니다. 물론 이때의 진화는 ‘진보’를 말하지 않으며, 또한 ‘단선 진화’를 뜻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강조한 것은 복합적인 사회 진화의 양상, 특히 물적 조건에 기반을 둔 사회 분석의 차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수가 대학에 가는 것이 가능해진 경제적 조건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집안에 한 대의 텔레비전만 있는 경제 수준에서는 온 가족 성원들이 한데 모여서 드라마를 보게 되고, 그때 그들은 스토리를 중시하는 영상읽기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각자 텔레비전을 갖게 된 상황에서 개별화된 관객은 스토리나 계몽주의적 메시지가 아니라 패션과 풍경과 음악 등 디테일을 ‘소비’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시차’라는 개념으로 강조하려고 한 것은 바로 경제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한 이러한 경제, 정치, 문화 간의 상동성을 중시하자는 뜻이었지요.
(중략)
내가 ‘시차’라는 개념 아래 부각시키려 한 것은 ‘동시대성’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입니다. 이제는 ‘동시성’과 함께 ‘비동시성’이 강조되어야 할 때인데, 그때 우리는 국가 간의 비동시성만이 아니라 국가 내에 존재하는 비동시성을 주목해야 할 것이고, 세계화된 세상에 일고 있는 다종다기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 조한혜정의 네 번째 편지-171~173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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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3-06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에노 치즈코의 네 번째 편지 좋군요.
저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 좋아하지 않습니다.^^

숨은아이 2006-03-0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에노 치즈코가 말한 "동시대의 양면"이란 말에서 새삼 깨달았어요. 그러나 조한혜정 선생이 말한 "다수가 대학에 가는 것이 가능해진 경제적 조건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에도 공감합니다. 우에노 치즈코의 말은, 후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소득 수준이 전혀 높아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른바 선진국과 다른 나라들 사이의 소득 격차는 계속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겠지요.
 
경계에서 말한다 - 당비생각 02
우에노 치즈코.조한혜정 지음, 사사키 노리코.김찬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품절


작년에 내가 「시민권과 젠더」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국가는 포괄귀속을 요청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부분귀속을 전제로 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라고 발표하자 보수논객으로 알려진 젊은 남성이 "그런 국가를 위해서는 죽을 수 없다"라고 논평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나, 잘 알고 계시는군요"라는 게 나의 감상입니다. 우익적인 멘탈리티를 가진 사람이 이런 논의의 핵심을 역설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요?

‘몸을 바칠 정도의 조국’을 갈망하는 것보다 본래 "국가라는 것은 목숨을 바칠 정도의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 우에노 치즈코의 마지막 편지-38~39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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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 브라운 신부 전집 1
G. K. 체스터튼 지음, 홍희정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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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가을, 애거서 크리스티보다 앞선 추리소설의 고전이라는 말에 5권짜리 브라운 신부 전집을 냉큼 사놓고는 이제야 첫 권 [결백]을 읽었다. [결백]에는 단편소설 12편이 들어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애거서 크리스티만 한 추리소설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바꿨다. 포와로와 미스 마플의 통찰력은 사실 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가 만들어낸 세계에서만 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는 ‘실제 세계’를 꿰뚫어보는 것 같다.(보르헤스가 “에드거 앨런 포보다 더 훌륭한 추리소설”이라 했다고 광고하는데, 사실 에드거 앨런 포의 추리소설은, 내가 그의 소설을 미처 이해하지 못할 나이―10대 후반―에 읽은 탓인지 몰라도, ‘추리’만 있지 ‘소설’은 없다는 인상이 강하다.)

세 번째 단편인 <이상한 발걸음 소리>에서 다음 구절을 읽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옛날 정통 귀족 계급의 사람들은 하인들에게 빈 병에서부터 돈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집어던졌었다. 또 정통 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건 종업원들에게 마치 동료처럼 쾌활하게 말을 건네곤 했었다. 하지만, 소위 현대 재벌이라 칭하는 금권 정치가들은 그게 하인이건 친구이건 간에 가난한 자들이 곁에 있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일이었고, 종업원들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고 귀찮아했다. 그들은 잔인해지기를 원치 않았지만,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야 할까봐 심기가 상했다. (117쪽)

스스로 ‘나쁜 사람’ ‘잔인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으면서, 나쁘고 잔인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뭔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은 피하려고 하는 것, 나만의 못된 심성일까? (재벌도 아닌 주제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까봐 두려워, 성가신 일은 눈에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브라운 신부가 범죄자를 대하는 방식이다. 브라운 신부는 범죄자를 단죄하지 않고 설득한다. “인간은 선한 일에 있어서는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네만, 나쁜 일에는 그 수준을 유지할 수가 없다네.”(164쪽)라면서, “범죄에서 진정한 문제가 되는 것은 점점 더 거칠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비열해진다는 것일세.”(436쪽)라고 말한다.

브라운 신부 전집 4 [비밀]에서 <브라운 신부의 비밀> 편에는 이러한 글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사악한 인간인지, 혹은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지 알 때 비로소 선한 사람이 됩니다. 범죄자들을 마치 외딴 숲속에서 지내는 유인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롱하고 비웃으며 그들을 이야깃거리로 삼을 권리가 얼마나 있는지 깨닫게 될 때까지는, 그들이 불완전한 두개골을 가진 하등 동물이라고 떠들어대는 자기기만을 그치게 될 때까지는, 아직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 보면 아직 범죄를 저지를 만한 기회와 상황을 만나지 않은 덕분에 범법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범죄자들을 마음 놓고 경멸하는 게 아닐까.

여덟 번째 단편인 <사라딘 공작의 죄악>은 묘하게도 그 도입부와 배경 설정이, 케네스 그레이엄의 동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서 물쥐와 두더지가 수달의 어린 아들을 찾아 새벽 강을 따라가는 장면과 비슷하다. 다만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서는 물쥐와 두더지가 아름다운 요정을 만나게 되지만, <사라딘 공작의 죄악>에서 브라운 신부와 플랑보는 비열한 악한을 만나게 되는 점이 다르다. 같은 이야기의 천사판과 악마판이랄까. ㅎㅎ

다만 동양과 인도에 대한 편견은 역시나 강하게 느껴진다. 독자들(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영국인)의 편견을 이용해 이야기의 함정으로 삼은 경우가 많긴 하지만, 100년 전 서구 지식인들의 오만은 어쩔 수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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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2-26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가 다 나와줘서 얼마나 고마운지요. 다른 작품 좀 냈음 하는 마음입니다.

숨은아이 2006-02-2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야금야금 읽을 거여요. ^^

야클 2006-02-27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진짜 대단한 추리소설들 많더라구요. 특히, 일본추리소설들. 역시 많이 두루두루 읽을 필요가 있더군요. ^^

숨은아이 2006-02-27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일본 추리소설에도 멋진 작품이 많은가요. 사실 애거서 크리스티랑 브라운 신부는 개개 작품보다 작가 나름의 고유한 세계랄까, 아우라랄까 하는 걸 좋아한답니다. 이 책은 문장도 아름다워요.
 
숲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난 책읽기가 좋아
윌리엄 재스퍼슨 글, 척 에카르트 그림, 이은주 옮김 / 비룡소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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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다 버려진 땅, 그 허허벌판이

잡풀이 무성한 들판이 되었다가,

수목이 우거진 숲으로 자라나기까지,
숲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펜 그림으로 차분히 보여줍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숲의 성장 과정을 알려주는
이 책을 읽고, 아, 우리 곁의 숲이 어떻게 자라났는지
보여주는 책은 왜 없단 말인가,
탄식했어요. 숲이 자라는 과정은 대개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한국 땅의 숲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 동물들은 분명
매사추세츠 숲의 생명들과는 다를 테니까요.
그림책을 읽고 나서 근처 숲으로 가
확인해 볼 수가 없잖아요.
부러운 만큼 아쉬웠습니다.

(원제 : How The Forest Grew, 1980)
윌리엄 재스퍼슨 William G. Jaspersohn (글)
척 에카르트 Chuck Eckart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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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2-02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진 책일것 같아요.

숨은아이 2006-02-02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명에 나오는 동식물 이름이 낯선 것만 빼면요. ^^

산사춘 2006-02-1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도 숲이지만 숲과 한 몸인 동물들 모습이 느무 정겨워요. 경계태세인 듯 하지만서도요.

숨은아이 2006-02-1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요? ^^

반딧불,, 2006-02-14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는 다 맘에 들엉요..@.@

숨은아이 2006-02-14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읽기가 좋아 시리즈 말씀이지요? 호오... 다른 것도 봐야겠네요.